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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을 기쁘게 하는 삶

누가복음 이한규 목사............... 조회 수 830 추천 수 0 2015.05.10 09:2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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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눅19:41-48 
설교자 : 이한규 목사 
참고 : 실시간 온라인 새벽기도(1584) 2015.3.30 

주님을 기쁘게 하는 삶 (누가복음 19장 41-48절)


< 기독교의 반전의 매력 >

 1941년 6월 22일, 20세기 최대 신학자인 칼 발트의 스무 살 된 아들 로베르트 발트가 알프스 산맥 등반 중 추락사했습니다. 아들을 묻고 돌아와 발트는 회중들과 고린도전서 13장 12절 말씀을 봤습니다.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그 본문으로 발트는 “성도는 ‘지금의 삶’과 ‘그때의 삶’을 동시에 사는 존재인데 제 아들은 변화된 채로 예수님 안에서 지금 ‘그때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라고 설교했습니다.

 기독교의 가장 위대한 점은 죽음의 두려움을 이용해 영혼을 미신의 노예로 삼지 않고 죽음을 극복하게 해서 대 자유를 준 것입니다. 미신적인 사람은 죽음과 관련된 얘기만 나와도 재수 없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숫자 4자도 ‘죽을 사(死)’자를 연상시키는 재수 없는 숫자라고 피합니다. 죽음을 꿈과 희망의 멸절로 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죽음을 재수 없게 보지 않고 꿈과 희망의 멸절이 아닌 희망의 서곡으로 봅니다.

 죽음에 대해 어떤 개념을 가졌느냐가 중요합니다. 원망과 불평과 한을 품은 채 “죽겠어요.”라고 하면 그때 죽음은 가장 재수 없는 말로서 진짜 죽습니다. 그러나 믿음과 희망을 가지고 “죽으면 죽으리라!”고 하면 그때 죽음은 가장 복된 말로서 더 잘 살게 됩니다. 그래서 믿음 안에서는 숫자 4자가 재수 없는 숫자란 미신은 더 이상 통하지 않고 오히려 가장 복된 숫자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것이 기독교의 반전의 매력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로마의 반역자 처형 도구였던 십자가는 가장 재수 없는 도구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이상한 사람들이 나타났습니다. 그들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분이 메시야라고 말하고 다녔습니다. 그들을 보니까 얼굴에 기쁨이 넘쳤고 이웃에게 사랑의 손길을 넘치게 베풀었고 늘 긍정적인 말을 했습니다. 그들과 같이 있으면 자신들도 기쁨과 평화가 넘쳤습니다. 그때부터 십자가는 가장 재수 없는 도구에서 가장 능력 있는 도구란 인식이 점점 사람들 사이에 생겼습니다. 그것도 기독교의 반전의 매력입니다.

 기독교가 죽음 자체를 칭송하지는 않습니다. 바른 믿음과 개념이 없는 죽음은 가장 불행한 것이라는 점은 기독교도 동의합니다. 그러나 바른 믿음과 개념을 가진 죽음은 결코 불행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더 나아가 십자가를 지고 죽는 것은 가장 복된 길로 여깁니다. 예수님은 나를 따르려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했습니다(마 16:24).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처럼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십자가를 귀신 퇴치 도구로 압니다. 그래서 십자가 목걸이를 목에 걸고 자동차 백미러에도 작은 나무 십자가를 겁니다. 그러나 자동차 사고를 막아주는 것은 십자가가 아니라 교통 법규를 잘 지키고 과속하지 않는 태도입니다. 십자가는 부적이나 영광의 장식이 아니라 자기 등에 져야 하는 것입니다.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하는 것은 십자가를 지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를 지는 것은 자기중심적인 삶에서 벗어나 하나님과 이웃을 위해 사는 것입니다. 결국 십자가는 남도 살리지만 자신도 살립니다.

 세상은 십자가를 지는 것을 어리석게 보지만 그 어리석음이 세상을 변화시키고 치유합니다. 사실 십자가 설교를 하면 저도 부끄러울 때가 많습니다. 십자가는 설교하는 것이 아니라 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안 할 수 없기에 이 시간에 도전의 말씀을 드립니다. 먼저 십자가를 지는 마음으로 용서해주고 이해해주고 높여주고 손해도 감수하십시오. 그러면 눈물을 흘리셨던 예수님이 그 십자가의 눈물을 반드시 기억해주실 것입니다.

< 주님을 기쁘게 하는 삶 >

 본문은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기 며칠 전의 얘기를 담고 있기에 분위기가 어둡습니다. 본문에는 예수님이 우시는 장면도 나오고 분노하며 성전을 청소하는 장면도 나옵니다. 당시 유대인들이 주님 마음을 그만큼 아프게 했다는 뜻입니다. 그들의 모습을 반면교사로 삼아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에 나서야 합니다. 주님을 기쁘시게 하려면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1. 의로운 눈물을 흘리십시오

 본문 41절 말씀을 보십시오.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에 가까이 오셔서 성을 보시고 우셨다는 말씀은 복음서에서 누가복음에만 있습니다. 성경에는 모두 예수님이 3번 우셨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요한복음 11장 35절에는 나사로의 죽음으로 예수님이 우셨다는 말씀이 나오고 히브리서 5장 7절에는 예수님이 심한 통곡과 눈물로 기도했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의 인성을 잘 나타내는 말씀입니다.

 특히 군중들이 열광적인 환호와 찬양 후에 그 여운이 가시기도 전에 예수님이 우신 것은 의미심장한 교훈을 줍니다. 예수님은 그때 이미 예루살렘의 미래와 유대인들의 미래를 보고 안타까운 눈물을 흘리신 것입니다. 그 눈물은 사랑의 눈물입니다. 성도는 눈물을 부끄러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눈물을 품을 줄 알아야 희망도 품을 수 있습니다.

 1980년대 중반에 제가 회사에 다닐 때 상관 부장은 외국 업체와의 회의 자료를 만들 때마다 낮에 사우나 가서 푹 쉬고 온 후 퇴근 시간부터 밤새워 아침까지 회의 자료를 만들었습니다. 그러면 사우나를 갈 수 없는 젊은 직원들은 낮에도 일하고 밤에는 더 일해야 했습니다. 그렇게 밤을 새우면 전 날까지는 힘들게 보였던 상당한 수준의 영문 회의 자료를 깔끔하게 만들어냈습니다. 밤에 건물 전체가 조용하니까 작업이 아주 잘 되었습니다.

 밤을 잘 활용하면 창조적인 작품과 역사를 만들 수 있습니다. 인생의 밤도 잘 활용하면 작품 인생을 만들 수 있습니다. 저도 혼자 있는 조용한 밤에 설교가 잘 준비됩니다. 그처럼 사람에게는 고난의 밤도 있어야 더 사람답게 되고 더 성도답게 됩니다. 만사형통은 시야를 어둡게 만들고 영적 감각도 무디게 만들고 교만하게 만들지만 고난은 시야를 밝게 하고 영적 감각을 예리하게 만들고 겸손하게 만듭니다. 그 사실을 깨닫고 고난 중에도 웃을 줄 아는 복된 성도가 되면 조만간 진짜 복이 찾아옵니다.

 웃음도 좋은 것이지만 눈물도 좋은 것입니다. 웃음도 치유의 능력을 주지만 눈물도 치유의 능력을 줍니다. 눈물은 영혼의 메마름도 막아주고 노화도 막아줍니다. 어릴수록 눈물이 많습니다. 그 말은 눈물을 많이 흘릴수록 젊어진다는 뜻도 됩니다. 사람만이 뚜렷한 언어를 하기에 언어는 인간 최대의 능력이고 하나님의 최대 선물입니다. 그처럼 사람만이 뚜렷한 눈물을 흘리기에 눈물도 인간 최대의 능력이고 하나님의 최대 선물입니다. 눈물을 부끄럽게 여기지 마십시오. 눈물은 약자의 표시가 아니라 오히려 맑은 영성의 표시입니다.

 요셉은 오랜만에 친동생 베냐민을 만나고 격한 감정으로 크게 울면서 지난 세월의 아픔과 상처를 씻었습니다. 그때 비로소 자기를 노예로 판 형제들을 온전히 용서할 수 있었습니다. 눈물이 그의 깊은 상처를 치유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의로운 눈물을 눈물 병에 담아 기억하고 계십니다. 의로운 눈물은 은혜의 빗물로 변합니다. 눈물을 흘리면 마음의 평안도 얻습니다. 그처럼 눈물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눈물을 흘린 후에 눈물을 닦고 찬란한 비전을 향해 나가면 눈물을 흘리셨던 주님이 웃으시며 기뻐하실 것입니다.

2. 평화의 초석이 되십시오

 왜 예수님이 우셨습니까? 본문 42절 말씀을 보십시오. “이르시되 너도 오늘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겨졌도다.” 이 구절에서 ‘너’는 예루살렘 성을 의인화한 표현이지만 크게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을 뜻하고 더 크게 보면 인류 전체를 뜻합니다. 예수님은 우시면서 불쌍한 인생들이 평화에 관한 일을 알기를 원했습니다. 그 말은 예수님이 이 땅에 이뤄지기를 가장 원하신 것이 평화였다는 뜻입니다.

 그 평화의 길을 사람들이 눈이 가려져서 잘 찾지 못하다가 결국 심판의 날이 이르면 어떻게 됩니까? 본문 43절 말씀을 보십시오. “날이 이를지라 네 원수들이 토둔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이 구절에서 “날이 이른다.”는 말은 종말의 날이 이른다는 말도 되지만 주후 70년에 로마 군대에 의해 예루살렘이 폐허가 된다는 뜻도 있습니다. 실제로 주후 70년에 로마 군인들은 예루살렘 성을 점령하려고 공격용 토둔을 쌓고 성을 포위했습니다.

 계속해서 본문 44절 말씀을 보십시오.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네가 보살핌 받는 날을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 하시니라.” 이 구절에서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않는다.”는 말은 예루살렘 성과 성전이 완전히 파괴된다는 말입니다. 왜 그렇게 파괴됩니까? 보살핌 받는 날을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즉 평화의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를 외면했기 때문이란 뜻입니다.

 음악에서 높이가 다른 두 음표를 부드럽게 이어주는 표시인 레가토처럼 성도는 나뉜 마음들을 부드럽게 잘 이어주는 복된 레가토들이 되어야 합니다. 지금 사람들 마음이 많이 나뉘어 있습니다. 지식이 많아져도 차별과 편견과 증오는 여전합니다. 중요한 것은 평화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을 닮아 평화를 누리고 어디에 가든지 평화의 초석이 되는 것입니다.

 다만 평화를 오해하지는 말아야 합니다. 평화는 일도 없고 경쟁도 없는 유토피아에서 살려는 것이 아닙니다. 어느 날, 한 목사님에게 어떤 청년이 말했습니다. “목사님! 제게 편하게 잘사는 길을 알려주세요.” 그 목사님이 말했습니다. “편하게 잘 살려면 무덤에 가면 되네. 이 세상에는 다 경쟁이 있기에 힘을 쏟지 않고 잘사는 길은 없네.”

 다윗은 양을 칠 때 돌팔매로 곰과 맹수를 물리치면서 상당한 돌팔매 실력을 갖췄습니다. 결국 그 실력으로 거인 골리앗과 싸워 이겼습니다. 다윗이 골리앗을 물리친 것은 우연한 기적의 산물이 아닌 평소 실력의 산물이었습니다. 나중에 다윗은 왕이 된 후에도 많은 대적들과 싸웠고 아들 압살롬의 반역도 겪었습니다. 다윗이 복된 존재였지만 평생 분투하며 살았습니다. 그처럼 하나님의 은혜 속에 살아도 유토피아는 없고 싸움과 경쟁은 계속됩니다.

 또한 자기 안에서의 내적인 싸움도 끊임없이 계속됩니다. 그처럼 삶 자체가 생존 경쟁이고 생존 경주입니다(히 12:1). 그런 경쟁에서 밀리고 패배하는 것을 평화를 추구하는 삶으로 여기지 마십시오. 또한 거대한 경제 전쟁에서 물질을 다 빼앗기고 빈털터리가 되어 음지에서 조용히 눈물을 흘리는 것도 평화를 추구하는 삶으로 오해하지 마십시오.

 1등에 목을 매지는 말되 1등을 정죄하거나 냉소하지는 마십시오. 경쟁에서 이기려고 목을 매지는 말되 열심히 땀을 흘려서 앞선 삶은 존중해주십시오. 자존심과 열등감과 질투와 집착 때문에 1등을 추구하는 것은 나쁘지만 정당한 땀과 지혜와 창조성으로 평안 가운데 최선을 다하다가 1등이 되는 것은 나쁜 것이 아닙니다. 소극적인 평화가 아닌 적극적인 평화를 추구하십시오. 고난의 풍파 중에도 흔들리지 않는 평화를 추구하고 인생 경쟁에서 바르게 승리한 후 잘 나누는 평화를 추구하십시오. 주님은 그런 적극적인 평화를 더욱 기뻐하실 것입니다.

3. 교회를 교회답게 만드십시오

 예수님은 심판에 관한 말씀을 하신 후 성전에 들어가 장사하는 자들을 내쫓았습니다(45절). 당시 성전 이방인의 뜰에서는 상인들이 제사에 필요한 제물들을 팔았습니다. 또한 당시 유대인 남자는 1년에 반 세겔의 성전세를 유월절에 납부했는데 헬라, 로마, 애굽 등지에서 온 순례자들이 성전세를 내려면 그들의 돈을 유대 돈으로 바꿔야 했기에 환전상도 많았습니다. 그들의 성전 내 영업을 허락해주면서 종교 리더들은 뒷돈을 챙겼습니다. 결국 성전은 장사꾼들의 장터가 되고 뇌물 수수의 본산이 되었습니다.

 그런 현실에 분노해서 예수님은 장사꾼들을 성전에서 내쫓고 이사야 56장 7절 말씀을 인용해 말했습니다. “기록된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 되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46절).” 예수님을 우시게 하고 분노하시게 한 근본 원인은 성전을 강도의 소굴로 만든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성전이 성전답게 되기를 원하고 교회가 교회답게 되기를 원하십니다. 특히 교회를 장사꾼들의 장터로 만들지 말아야 합니다.

 가장 복된 모습은 복과 상관없이 무조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결국 복을 더 받습니다. 반면에 가장 복이 없는 모습은 하나님을 이용해 돈을 벌려는 것입니다. 그러면 결국 복을 더 받지 못합니다. 부당하게 돈 버는 것이 다 나쁘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나쁜 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이용하고 교회를 이용해 돈을 벌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교회 앞에 있는 식당이 교인들을 많이 식당으로 오게 해서 돈을 벌려는 목적으로 진실한 믿음도 없이 그 교회에 등록하는 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습니다. 또한 같은 교회 교우들에게 물건을 강매하거나 돈을 꾸거나 담보 제공을 요청하거나 부정한 인사 청탁을 해도 안 되고, 특히 다단계 피라미드 조직에서 자기 하위에 두려고 교인들을 포섭하고 처음 등록한 교인들에게 친절하게 대해주는 척 하면서 다단계의 검은 마수를 뻗치는 것은 신쩐지 이단만큼 나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과 교회를 이용해 돈을 벌려고 하지 말고 정당한 땀을 흘리면서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십시오. 직업전선과 사업전선과 기술전선에서 뒤떨어지지 않는 재능과 지혜를 구하고 온유한 성격과 자기 관리능력과 인복과 일복도 구하십시오.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나누려는 소명의식을 가진 성도의 정당한 물질추구를 외면하지 않고 정당하게 물질을 얻을 수 있는 재능과 재주와 창조성과 인맥을 주실 것입니다. 그런 복된 성도들이 많아질 때 교회는 더욱 교회답게 될 것입니다.

4. 십자가를 힘써 지십시오

 성전을 강도의 소굴이라고 선언한 예수님의 선언은 당시 기득권을 가진 종교 리더들의 권위에 대한 정면 도전이었습니다. 또한 예수님이 성전 청소 후에도 날마다 성전에서 개혁적인 말씀을 전하자 당시 종교 리더들은 예수님을 눈엣가시처럼 여겨 죽이려고 했습니다(47절). 그러나 쉽게 죽일 수 없었습니다. 백성들이 다 예수님께 귀를 기울여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서 어찌할 방도를 찾지 못했기 때문입니다(48절).

 예수님은 그런 과정이 이미 죽는 길임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죽는 길이 결국에는 모두를 살리고 새롭게 하는 길임도 아셨습니다. 그처럼 누군가 십자가를 지고 죽지 않으면 새로운 개혁과 변화는 이뤄지지 않습니다. 한국 교회도 다시 살려면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죽는 사람이 곳곳에서 많아 일어나야 합니다. 십자가는 마를 퇴치하는 부적이나 귀신을 쫓아내는 도구가 아니라 용서와 화해와 평화를 위해 자기가 등에 져야 할 도구입니다. 그렇게 내가 먼저 죽어야 남도 살고 나도 살고 교회도 삽니다.

 남 때문에 힘들다고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남이 아닌 나의 변화에 관심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가시 같은 사람을 우리 곁에 두신 것은 우리를 깨뜨리신 후 온전히 세우시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남을 정죄하기 전에 나를 내려놓고 내 옥합을 깨뜨리십시오. 죽는 길이 사는 길이고 깨지는 길이 세우는 길이고 주는 길이 얻는 길입니다. 기다리기 힘들고 포기하기 힘들고 용서하기 힘든 것은 결국 못난 자아 때문입니다. 죽지는 않고 죽은 척만 하면 자기 변화도 없고 환경 변화도 없게 됩니다. 자기가 잘 죽어야 변화도 일어납니다.

 교회도 잘 죽어야 합니다. 탐심이 많은 교회는 '기복신앙'을 가르쳐서 비전이 큰 사람을 배출하기보다 욕망이 큰 사람들을 배출합니다. 그러면 진짜 큰 인물은 나오지 않습니다. 기복신앙을 가지면 의식수준과 신앙수준이 낮아집니다. 그리고 사랑의 범위도 좁아져서 기껏해야 자기 가족이나 자기 교회만 생각하고 남들은 안중에도 없고 전체를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잘못 믿으면 더 이기적인 성도가 될 때도 많습니다.

 참된 믿음의 삶은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의 뜻대로 살면서 미래의 천국 이전에 현세의 천국을 체험하는 삶입니다. 현세의 천국은 십자가를 질 때 체험할 수 있습니다. 천국은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마음껏 하고 자기가 가지고 싶은 대로 가지는 세계가 아닙니다. 그처럼 자기 맘대로 하려는 세계는 사실상 지옥입니다. 천국은 이상적인 유토피아가 아닙니다. 천국은 뿌린 대로 거두는 곳이지 뿌리지 않고 거두려는 곳이 아닙니다.

 교회는 잘 나눌 줄 아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또한 작은 숫자로도 큰일을 하는 강소교회들이 더욱 많이 일어나야 합니다. 우리도 월새기(월간 새벽기도)를 발행하며 큰일을 하고 있지만 거기서 그치면 안 됩니다. 앞으로 더 멋진 역사를 꿈꾸며 나가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 믿고 인물이 되는 꿈과 비전을 끊임없이 격려하고 도전해야 합니다. 그런 인물이 되려면 십자가를 기쁘게 질 줄 아는 믿음의 헌신도 있어야 합니다.

 십자가 얘기는 늘 짐이 되는 얘기입니다. 그러나 십자가가 없으면 부활의 영광도 없습니다. 고난에도 동참할 때 축복에도 동참할 수 있습니다. 결국 십자가는 죽음과 고난과 패배와 굴욕의 상징이 아니라 부활과 기쁨과 승리와 영광의 상징입니다. 십자가는 혼자 맘대로 살지 않고 함께 어울려 녹아지며 살겠다는 표시입니다. 그처럼 십자가를 잘 짐으로 주님을 기쁘시게 하고 내일의 축복을 예비하는 복된 심령들이 되십시오.

ⓒ 이한규목사  http://www.john316.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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