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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눅24:44-5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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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이한규 목사 |
참고 : | 실시간 온라인 새벽기도(1589) 2015.4.6 |
부활의 증인이 되십시오 (눅24:44-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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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으면 죽으리라는 믿음 >
세상에서 제일 겁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죽으면 죽으리라! 잃으면 잃으리라!”는 믿음을 가지고
사는 성도입니다. “죽으면 죽으리라!”고 나가면 오히려 더 죽지 않습니다. “잃으면 잃으리라!”고 나가면 오히려 더 잃지 않습니다. 앞으로
죽을병에 걸리더라도 용하다는 산이나 기도원이나 체육관 집회나 사람을 찾아 허둥대지 마십시오. 그러다가 이단을 만나 이용만 당하고 이단의 배만
불리다가 결국 진짜 죽습니다.
하나님이 그 허둥대는 모습을 보면 씁쓸하실 것입니다. “아무개야! 네가 정말 나를 믿느냐? 나를
두고 어디를 찾아 헤매느냐? 네 믿음의 실체가 고작 그것뿐이냐? 왜 사람을 의지하느냐?” 신약 성도들은 위대하신 힐러(Healer)인 예수님께
직접 나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왜 힐링 매개인을 찾습니까? 예수님께 직접 나아가 붙들고 “죽으면 죽으리라!”는 믿음을 가지고 성도의 존엄성과
성도다움을 잃지 않으면 하나님이 그 믿음을 반드시 기억해주실 것입니다.
사탄은 사람의 두려움을 느끼면 더 찾아와 위협하고
괴롭힙니다. 마음에 두려움을 지니면 아무리 “사탄아! 물러가라!”라고 외쳐도 사탄은 물러가지 않고 오히려 더 신나서 찾아옵니다. 반면에 두려움이
없이 담대한 믿음으로 굳게 서면 사탄은 감히 범접하지 못합니다. 그런 믿음을 보면 오히려 사탄이 겁나서 소리칠 것입니다. “성도야! 물러가라!
가까이 오지 마! 네가 믿음으로 사는 모습만 보면 내가 정말로 죽을 지경이다.”
한국 기복주의 성도가 오해하는 것이 있습니다.
“예수 이름으로 명하노니 사탄아 물러가라!”라고 자주 외치면 믿음도 좋고 능력이 있는 성도인 줄 오해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외침을 자주
하는 것은 믿음의 표식이 아닌 두려움의 표식으로 사탄에게 읽혀져서 그때 사탄이 물러가기는커녕 더 신나서 찾아옵니다.
어떤 사람은
말합니다. “목사님! 예수님도 광야에서 시험 받으실 때 ‘사탄아! 물러가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또한 성경에는 예수님이 귀신을 쫓아냈다는
말씀도 여러 번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예수님처럼 그렇게 외치는데 뭐가 잘못입니까?” 물론 그렇게 외치는 것 자체가 잘못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진실한 믿음으로 그렇게 외쳤으면 사탄과 귀신을 실제로 물리치고 쫓아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탄아 물러가라!”는 말을 같은 대상에게 결코 반복하지 않았습니다. 한번 “사탄아 물러가라!”고 하면 사탄이 물러가서 즉시 게임이 끝났습니다.
귀신을 쫓아낼 때도 한번 쫓아내면 그것으로 귀신이 완전히 내쫓겼습니다. 성도도 진실한 믿음으로 선포했으면 게임이 끝난 줄 알고 사탄 마귀를
극복한 존재로서 담대하고 평안하게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계속 두려워하면서 수시로 “예수 이름으로 명하노니 사탄아 물러가라!”라고
외치니까 사탄은 물러가지 않고 그 믿음 없는 모습을 우습게보고 조롱하는 것입니다. “저 친구는 입으로는 나보고 물러가라고 하면서 겁에 잔뜩 질려
있네. 웃기는 친구네.” 얼마나 부끄러운 모습입니까? 하나님도 그 모습을 보면 정말 안타까우실 것입니다. “아무개야! 그 동안 도대체 어떻게
믿었기에 내 이름을 내세우고도 그렇게 귀신 하나 쫓아내지 못해 계속 귀신 얘기냐?”
어떤 성도는 매일 새벽기도 때마다 선포합니다.
“예수 이름으로 명하노니 사탄아 물러가라!” 그렇게 선포했으면 예수님의 능력과 이름을 힘입어 사탄이 물러간 줄 알고 게임을 끝내야 하는데 다음
날 새벽에도 또 “예수 이름으로 명하노니 사탄아 물러가라!”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전날의 선포는 사탄이 물러가는데 전혀 효과가 없이 공기만 파동
시켰다는 뜻입니다. 아니면 사탄이 잠깐 외출했다가 또 들어왔다는 뜻입니다.
결국 그런 습관적인 선포는 믿음의 선포가 아닌 줄
영물인 사탄도 알고 조롱합니다. “저 친구가 두려우니까 괜히 예수 이름을 내세워 저렇게 큰소리만 뻥뻥 치네. 저 두려움을 이용하자.” 결국
사탄이 더 찾아와서 그 영혼을 가지고 노는 것입니다. 그래서 습관적으로 “사탄아! 물러가라!”고 하는 것은 겉으로는 믿음의 능력이 있게 보이지만
실제로는 가장 믿음의 능력이 없는 태도입니다. 성도는 사탄의 권세를 얼마든지 무너뜨릴 수 있습니다. 그런 믿음을 가지고 평안과 용기를 얻어
누리며 살아야 합니다.
이제 죽으면 죽으리라는 믿음을 가지고 담대히 사십시오. 구원받은 성도는 이미 부활과 승리의 DNA가 심겨진
상태입니다. 그처럼 부활신앙을 가지고 죽으면 죽으리라는 담대한 믿음을 가지고 나가면 더 사는 역사가 나타나고 더 승리하는 역사가 나타납니다.
또한 잃으면 잃으리라는 믿음을 가지고 나가니까 선교마인드를 통해 통 큰 나눔도 실천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부활 신앙처럼 복된
신앙은 없습니다.
< 부활의 증인이 되려면 >
하나님은 성도가 부활신앙을 가지고 부활의 증인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부활의 증인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1. 마음을 부활시키십시오
부활하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자신의
고난과 죽음과 부활이 구약성경의 기록대로 이뤄지는 과정이었다고 말씀하시면서 제자들의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셨습니다(44-45절). 사실
당시에 로마의 잔혹한 처형 도구였던 십자가에 메시야가 돌아가신 사실이나 예수님이 다시 부활하신 사실은 도저히 인간적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제자들의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신 것입니다. 지금은 누가 그런 깨달음을 주십니까? 바로 성령님입니다.
성령님이 깨닫게 하시면 마음과 생각에도 반전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살다 보면 각종 응어리가 생깁니다. 제대로 평가받지 못해 생긴
응어리도 있고 억울하게 당해서 생긴 응어리도 있습니다. 그 응어리가 풀리지 않으면 몸의 어딘가에 덩어리가 생기기도 합니다. 그때 세포 시스템이
통제를 잃으면 암덩어리가 생기고, 몸이 음식물을 제대로 분해하지 못하면 쓸개에 돌덩어리가 생겨 담석증에 걸리고, 몸이 염분을 제대로 분해하지
못하면 요로에 돌덩어리가 생겨 결석증에 걸립니다.
그런 몸의 덩어리들을 녹이려면 마음의 응어리부터 풀어야 합니다. 어떻게 풉니까?
대화도 약간은 도움이 됩니다. 눈물이나 웃음도 약간은 도움이 됩니다. 그러나 깊은 응어리는 하나님만이 풀어주실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갚아주심에 대한 넘치는 기대를 가지고 십자가를 지면 반드시 부활의 영광이 있다고 믿어야 합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의 은혜에 더욱 감사하고
헌신해야 합니다. 그러면 마음의 깊은 응어리도 풀릴 것입니다.
사람의 사랑과 인정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사랑과
인정입니다. 억울하게 당한 것에 대해 너무 속상해하지 마십시오. 그 억울함을 다 아시는 하나님이 가장 정의롭게 넘치는 보상으로 갚아주실
것입니다. 또한 땀의 대가가 잘 나타나지 않아도 너무 속상해하지 마십시오.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원대하신 더 큰 계획이 반드시 있을
것입니다.
2. 사명을 부활시키십시오
그때 예수님은 제자들의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신 후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3일 만에 부활하실 것과 회개의 복음이 예루살렘에서 시작되어 전 세계로 전파될 것이 이미 구약성경에 기록되었고 제자들이 그 모든 일의
증인이란 말씀을 하셨습니다(46-48절). 결국 이 말씀은 복음의 증인이 되라는 성도의 기본 사명을 도전하는 말씀입니다. 성도는 때로 힘든 일이
있어도 그 복음전파의 기본 사명을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어느 날, 미국 애리조나의 한 농가에 밤새 비와 우박을 동반한 엄청난
폭풍이 불었습니다. 다음 날 새벽 농장주가 집밖으로 나가 피해를 살펴보았습니다. 큰 우박으로 밭은 무참히 파헤쳐져 있었고 트럭은 헝겊조각처럼
찢겨져 바닥에 나뒹굴고 있었고 집의 지붕은 반쯤 날아가 버렸고 처참하게 무너진 닭장 주변에는 죽은 닭들이 널브러져
있었습니다.
바로 그때 무너진 닭장 속에서 어떤 소리가 들리더니 몸이 흠뻑 젖고 깃털이 거의 빠진 수탉 한 마리가 쑥 고개를
내밀었습니다. 그리고 무너진 닭장 맨 위로 비틀거리며 올라섰습니다. 그때 마침 해가 떠오르자 그 수탉은 뼈만 남은 날개로 힘찬 날갯짓을 하더니
의기양양하게 “꼬끼오!” 하고 울었습니다. 밤새 큰 고통을 겪었지만 아침 햇살이 바치자 자기에게 내재된 사명을 따라 아침을 알린 것입니다. 그
모습을 보면서 농장주는 희망을 찾았다고 합니다.
성도에게는 잃어버린 영혼을 구원하는 사명과 이웃의 눈물을 닦아주는 기본 사명이
내재되어 있습니다. 아무리 큰 시련이 있어도 그 사명을 잃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부활 승리를 약속하셨습니다. 현재의 고통과 시련은 다만 성숙한
변화를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통과 시련 중에도 흔들리지 말고 희망을 외치고 사명감을 새롭게 한 후에 찬란한 내일을 향해 다시 준비하고
나아가십시오. 그처럼 고통 중에서도 희망을 찾아내고 단절 속에서도 희망을 끈을 이어가면 위기는 기회가 되고 그런 사람이 결국 내일의 주역으로
우뚝 서게 될 것입니다.
3. 능력을 부활시키십시오
예수님은 증인의 사명을 주시면서 그냥 사명만 주시지 않고 능력을
주실 것도 약속했습니다. 본문 49절 말씀을 보십시오.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으로
입혀질 때까지 이 성에 머물라 하시니라.”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이 무엇입니까? 사도행전을 보면 바로 성령님입니다. 즉 하늘로부터 성령의 능력을
입을 때까지 예루살렘 성에 머물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 장면을 보면 준비하면서 잘 기다리는 것도 아주 중요한 가치임을 깨닫게
됩니다.
사실상 하나님의 때를 잘 기다리는 것도 능력입니다. 능력을 마술적인 신비한 능력으로만 오해하지 마십시오. 그런 오해를
하니까 사이비 이단의 거짓 술수에 속는 것입니다. 사실상 좋은 인격과 좋은 성품도 능력입니다. 또한 실력과 재력도 능력입니다. 그런 능력을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이루는데 사용한다면 그것이 바로 하늘로부터 입은 능력이 됩니다. 그러므로 신비한 능력을 얻겠다고 사람을 찾아다니지 말고
오히려 현재 자기가 가진 능력을 하늘의 능력으로 승화시킬 수 있는 성령 충만한 믿음을 구하십시오.
성도에게는 신비한 마술적인
능력보다 참된 성령의 능력이 필요합니다. 구원의 확신을 주는 복음의 능력이 실제 삶에서 현실을 극복하는 능력으로 나타나는 것도 성령의 역사
때문입니다. 사람의 능력은 유한합니다. 아무리 지혜와 지식이 탁월해도 사람의 지혜와 지식은 얼마든지 잘못되고 오도될 수 있습니다. 반면에 성령의
능력은 어떤 현실도 극복하게 하고 실타래처럼 뒤엉킨 문제도 풀게 하고 결국 찬란한 내일의 주역으로 준비되게 합니다.
너무 조급하게
뭔가를 성취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많은 일을 성취하기보다 성령 충만한 믿음을 가지는 것이 우선입니다. 내적인 힘도 없이 밀어붙이면 결국
탈진합니다. 반면에 성령의 능력을 힘입고 나가면 그를 통해 하늘나라가 점차 확장되고 가정과 사회도 점차 밝아집니다. 또한 좋은 일도 많이 생기고
좋은 소문도 나면서 하나님의 영광이 많이 나타납니다. 그처럼 성령 충만해서 세상을 변화시키는 참된 능력의 소유자가 되십시오.
4.
기쁨을 부활시키십시오
예수님은 하늘의 능력을 입을 때까지 기다리라고 말씀한 후 제자들을 데리고 베다니 앞까지 나가 손을 들어
제자들을 축복하셨습니다(50절). 왜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을 벗어나 감람산 동쪽 기슭에 있는 베다니로 제자들을 데리고 나가셨을까요? 베다니
인근의 감람산은 예수님의 승천 장소로서(행 1:12) 거기서 제자들과 이별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때 제자들을 축복하시면서 제자들을
떠나 하늘로 오르셨습니다(51절). 그러자 제자들은 승천하시는 예수님께 경배하고 크게 기뻐하면서 예루살렘에 돌아가 늘 성전에서 하나님을
찬송했습니다(52-53절). 그때 그들의 기쁨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부활 승천하신 예수님을 목격한 그들에게는 더 이상 실망과 좌절과 두려움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본격적인 부활의 증인이 되기 전에 이미 부활의 증인으로서 살고 있었습니다. 그처럼 성도는 넘치는 기쁨을 가지고 부활의
증인으로 살면서 부활의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사람은 나이가 들면서 기쁨을 잃을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다짐해야 합니다.
“하나님! 노년의 삶을 우울하고 답답하게 살지 않게 하소서! 그래서 고집스럽고 막혔다는 소리를 듣지 않고 어디에 가든지 기쁨과 쾌활함과 명랑함을
주게 하소서!” 그처럼 나이가 들어도 기쁨을 잃지 않고 즐겁게 사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모릅니다.
사람은 먼저 행복해서
기뻐지기보다는 먼저 기뻐해서 행복해집니다. 기뻐하면 기분도 좋아지고 분위기도 좋아지면서 결국 놀라운 기적도 일어나고 놀라운 인생변화도 생깁니다.
특히 성도에게는 더욱 넘치는 기쁨이 있어야 합니다. 성도는 어떤 상황에서도 최종 승리가 약속된 존재이고 현재의 고난은 장차 큰 영광과 비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 주님의 부활이 주는 기쁨 >
가톨릭교회에서는 예수님의 부활 전 40일 동안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기간인 사순절을 매우 중시합니다. 사순절 동안 육식을 금하고 고난에 동참해야 하니까 사순절 전날까지 약 5일 동안 육식을 하며
질펀하게 놀이판을 벌입니다. 그것이 바로 리오 축제와 같은 각종 카니발입니다. 그리고 사순절에 들어서면 고기도 금하고 웃음과 말 수도 줄이고
얼굴도 심각하게 합니다. 그러다가 고난 주간에 들어서면 슬픔의 표식이 강해지다가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신 성 금요일이 되면 그 슬픔의 표식이
절정에 달합니다.
그처럼 성 금요일은 가장 애통해야 하는 날인데 저는 매년 성 금요일마다 잘 슬퍼지지 않는 아이러니를 체험합니다.
왜냐하면 저는 대개 금요일부터 본격적으로 주일 말씀 준비를 하는데 성 금요일부터 부활주일 말씀을 준비하다 보면 부활의 기쁨이 너무 크게
느껴지면서 잘 슬퍼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처럼 예수님의 부활은 최상의 기쁨을 주는 원천입니다.
성도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붙잡고
항상 기뻐하며 살아야 합니다. 성도가 기쁘게 사는 것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불행하게 살지 말고 행복하게 살고, 눌려 살지 말고 누리며 사십시오.
자연과 건강과 음식과 가정 등을 통해 일반은총을 누리며 사는 것에 대해 죄책감을 가지지 마십시오. 구원과 나눔의 사명을 잊지 않고 힘써
헌신하면서 누리면 됩니다.
성경은 “항상 기뻐하라!”고 말씀했습니다(살전 5:16). 기쁨은 하나님의 명령이란 뜻입니다. 그러나
실없이 기뻐하고 웃으면 “저 사람 미쳤네!”라는 소리를 들을 수 있기에 항상 내실 있는 기쁨의 실체를 만들려고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래서
저도 예수 믿고 인물이 되는 꿈과 비전을 구호로만 그치게 하지 않고 실체화시키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모든 성도는 그런 기쁨의 실제적인 열매를
맺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지금은 세계가 자기 방에서 연결되는 인터넷 시대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꿈과 비전도 한국에서만
머물지 말고 세계를 지향해야 합니다. 저희 문서선교 비전도 단순히 국내용이 아닙니다. 지금까지 묵묵히 방대한 성경강해를 완성했기에 작년에
온새기(온라인 새벽기도) 사역이 월새기(월간 새벽기도) 발행 사역으로 발전했습니다. 이제 곧 단행본 팀이 책 출판에 나섭니다. 그리고 조만간
영어 온새기, 영어 월새기, 영어단행본 팀들도 발족될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중국어 사역으로 비전이 확대될 것입니다.
더 나아가
계속해서 선교사 후원팀, 국내외 교회 개척팀, 네트영어 팀, 교육기관 팀, 은퇴 사역자 관리 팀 등도 생길 것입니다. 그 비전들을 잘
지속시키도록 여러 분야에서 자급역량도 키울 것입니다. 그렇게 찬란한 비전을 향해 나가는 모습을 보면 지켜보는 성도들도 비전이 커지면서 “나도
인물이 될 수 있구나.”란 확신이 커질 것입니다. 그러면 서로 인물의 꿈을 도전하고 격려하며 시너지 효과를 일으키면 더욱 큰일을 하게 될
것입니다.
앞으로 몇 십 년 후에 우리와 우리 후대들은 수많은 비전의 열매들을 보고 흐뭇해하면서 과거를 회상하며 중얼거릴
것입니다. “그때는 교회가 많이 연약했지. 그래도 담임목사님은 계속 인물의 꿈을 도전하면서 묵묵히 미래를 준비해 나갔지, 그때는 정말 그렇게
될까 하는 회의도 있었지만 지금 보니까 정말 그렇게 되었구나! 믿음이란 놀라운 것이구나! 특히 예수님을 붙잡고 산다는 것은 너무나 복된
일이구나! 하나님은 정말 살아계시는구나!”
하나님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는 성도에게 꿈과 비전이 부활되고 회복되는 역사를 허락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부활은 생각만 해도 가슴이 벅차게 되고 기쁨이 넘치게 됩니다. 그 넘치는 기쁨이 죽은 후에도 하늘까지 연결됩니다.
그때는 세계를 넘어 우주를 누리며 하나님의 품 안에서 영원히 살 것입니다. 그런 찬란한 미래를 생각하니까 “죽으면 죽으리라!”는 믿음과 용기와
능력과 기쁨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처럼 늘 부활의 믿음을 가지고 살면서 하나님의 기쁨이 되고 많은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는 복된 심령들이
되십시오.
ⓒ 이한규목사 http://www.john316.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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