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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단5:1-3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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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구하라 목사 |
참고 : |
다니엘5장1절-31절
찬송가 90장 '주 예수 내가 알기 전'
다니엘서 5장은 세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첫 부분은 1절부터 3절까지로, 하나님을 무시하는 바벨론의 이야기입니다. 두 번째 부분은 4절부터 12절까지로, 그들이 글자를 해석하지 못하고 해결하지 못하는 문제가 발생하는 것입니다. 셋째 부분은 13절부터 31절까지로, 다니엘의 등장과 그의 해석으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을 이야기로 풀어보면 이렇습니다. ‘하나님을 무시하는 벨사살왕으로 상징되는 이 세상을 하나님은 심판하시기로 작정하신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심판하시기 전에 여러 가지 신호를 주신다.’, ‘그런데 그것의 바른 의미를 해석해 낼 수 있는 사람이 바벨론 제국에서는 없다. 그것을 해석해 낼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다니엘이고 다니엘의 해석대로 그 신호는 그대로 이루어진다.’ 이것이 다니엘서 5장을 압축한 이야기입니다.
다니엘이 벨사살왕이 본 글자를 해석해주자 그는 다니엘을 약속대로 바벨론 제국의 세 번째 통치자로 삼았습니다. 그것은 다니엘의 해석이 그의 마음에 깊이 인식이 되고 공감이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다니엘이 해석한 내용을 보면 결국 ‘너의 나라는 망할 것이고 심판받을 것이다’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런 해석을 내놓은 다니엘을 약속대로 상을 준 것을 보면 벨사살왕은 다니엘의 말을 무시한 것이 아닙니다. 벨사살 왕은 다니엘의 말을 존중했고, 자기 약속을 지킨 사람입니다. 앞서 신성모독 하던 모습과는 사뭇 다른 모습입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는 하나님을 모독하는 사람이라면 다니엘의 그런 해석에 기분이 상해 당장 목이라도 칠 것 같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고 약속대로 다니엘에게 상을 줍니다. 그럼에도 벨사살 왕이 회개했다는 이야기가 없고 그날 밤에 암살을 당하고 맙니다. 즉, 성경에서 벨사살이라는 인물을 등장시켜 그의 행적에 대해 설명한 것은 벨사살이라는 인물이 얼마나 악한 인물이고, 혹은 얼마나 자기 약속을 신실하게 지키는 인물인가를 이야기하고자 함이 아닙니다. 그는 오직 다니엘을 부각하기 위한 조연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에서는 다니엘의 모습을 집중해서 보는 것이 오늘 본문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바르게 이해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벨사살 왕은 바벨론 제국의 아이콘과 같습니다. 바벨론 제국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이 세상을 상징합니다. 그런 그들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가져온 성물에다 술을 부어서 마셨다는 것은 다니엘의 해석대로 그들은 하나님을 무시하고 모욕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거기서 더 나아가 금, 은, 구리, 쇠, 나무, 돌로 만든 신들을 찬양했다는 것은 보이는 것을 우상화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세상은 그런 존재입니다. 이 세상의 힘은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을 무시하는 방향으로 흘러가지 하나님을 찬미하는 방향으로 가지 않습니다. 이 세상을 사랑하고 이 세상에서 더 많이 가지려 하고 더 큰 힘을 소망하는 자들은 결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습니다. 결국 그들은 하나님을 무시하고 하나님을 모욕하는 방향으로 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보이는 것들을 신격화하게 됩니다. 보이는 것을 신격화했다고 해서 단순히 돈이나 감투만을 생각하면 큰 오산입니다. 돈이나 감투에 관심이 전혀 없어도 자기 명예를 위해서 살인을 하는 집단도 있습니다. 욕심이 없는 듯해도 자기 자존심을 건들면 하나님도 그냥 두지 않는 것이 인간입니다. 이것이 전부 바벨론에 속한 것들이고 우상숭배입니다.
그런 벨사살 왕으로 대표되는 이 세상에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글씨로 신호를 보내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계획과 뜻을 가지고 계시는지 사인을 보내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 글자를 읽거나 해석할 자가 없다고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글자가 특별히 어려운 문자이거나 암호화되어 있거나 다니엘만이 아는 특수한 언어로 되어 있어서가 아닙니다. 벨사살 왕이 본 글자는 아람어입니다. 고대 근동지방에서 널리 사용된 언어입니다. 더구나 술객과 갈대아 술사와 지혜자들을 다 불렀습니다. 그들이 그 언어를 알지 못했을 리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그것을 읽지도 못하고 해석하지도 못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그들이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내용을 담고 있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들의 지성과 지혜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단어와 뜻이 담겨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 생각에 아무리 조합해서 읽어도 말이 안 되었기 때문에 읽지 못했던 것입니다. 읽지도 못하는 것을 어떻게 해석해내겠습니까? 그렇다면 그들이 왜 도저히 그 단어를 상상도 할 수 없었습니까? 그것은 그 내용이 엄청난 내용이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그들이 상상할 수 없는 다른 세계의 이야기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벨사살 왕이 본 글자는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입니다. 이 글자의 문자적인 뜻은 이렇습니다. 메네는 ‘숫자를 셈하다’는 뜻입니다. 그것을 반복한다는 것은 셈하고 셈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데겔은 ‘무게를 재다’입니다. 그리고 우바르신은 ‘그래서 나눈다’는 뜻입니다. 이 말만 가지고 한번 말을 만들어 보십시오. 셈하고 셈하였고 무게를 잰다. 그래서 나눈다. 도저히 말이 되지 않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하니까 바벨론의 지혜자들은 이런 말이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쓰신 글씨가 다니엘에게만 보이고 바벨론의 지혜자들에게는 안보인 것이 아닙니다. 벨사살 왕도 보았고 수많은 사람이 하나님께서 쓰신 글씨를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읽고 해석해 낸 사람이 다니엘일 뿐입니다. 다니엘은 왜 그것을 해석해 낼 수 있었습니까? 물론 하나님께서 지혜를 주시고 총명을 주셔서 그렇습니다. 그러나, 단순히 그렇게 이해할 문제만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다니엘이 그 글자를 해석해 낸 내용이 다니엘이 본 그 글자보다 훨씬 더 많기 때문입니다.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 겨우 이 몇 단어를 해석해 내는데 성경은 오늘 본문 18절부터 28절까지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벨사살 왕의 아버지인 느부갓네살의 이야기로부터 시작해서 벨사살에게까지 이야기를 합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느부갓네살과 벨사살이 주인공인 역사 이야기를 한 것이 아닙니다.
다니엘이 그 글자를 해석한 18절부터 살펴보겠습니다. 그 주체가 전부 하나님으로 되어 있습니다. 18절부터 21절까지를 보면 ‘하나님이 느부갓네살에게 주셨고 또 빼앗으셨다’라고 합니다. 그리고 22절부터는 벨사살의 하나님에 대한 태도를 이야기하고 결론적으로 하나님께서 벨사살과 그 나라를 어떻게 하실 것인지를 설명합니다.
벽에 쓰인 글자를 해석하기 전에 느부갓네살과 벨사살의 하나님에 대한 생각과 행동을 폭로했다는 것은 다니엘은 철저히 하나님의 관점에서 역사와 이 세상을 보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느부갓네살의 통치가 어떻고, 벨사살의 성품이 어떻고 이런 이야기를 한 것이 아니라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생각과 뜻을 선포합니다. 그것은 다니엘이 역사와 사람에 대한 관점이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되고 마무리되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진리임을 역사는 증명하고 있고 오늘 본문 또한 그 사실을 증명해 가고 있습니다.
이 세상의 지혜는 죽었다 깨어나도 이런 관점을 가질 수 없습니다. 바벨론의 술사들과 지혜자들은 그들이 가진 모든 것을 동원한다 할지라도 우주와 역사의 진정한 주인공인자 연출자이신 하나님의 관점에서 볼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하나님이 그들 역사 가운데 사인을 주셨을 때 그것을 읽을 수도 없고 해석할 능력도 없는 것입니다. 그것을 해석할 수 있는 사람은 다니엘과 같이 하나님의 관점에서 이 세상과 역사를 볼 수 있는 사람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한 측면에서 많은 기독교 지도자가 정치에 관해 논평할 때 자신이 가진 정치적인 관점으로 한국 정치에 대해 말한다는 것은 정말 안타까운 일입니다. 목사들은 정치전문가가 아닙니다. 사회과학 전문가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한국 정치 현상에 대한 섣부른 판단과 비판은 자기 개인의 의견을 벗어나기 힘듭니다. 그것은 진리도 아니고 목회자가 감당해야 할 부분도 아닙니다. 그러나, 기독교 지도자라면 이 세상 어떤 학자들도 보지 못하는 하나님의 관점에서 한국 정치를 볼 수 있습니다. 세례 요한의 관점에서 현세대에 대해 질타할 수 있고, 사도 바울의 관점에서 한국 민족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오직 하나님의 관점에서 볼 수 있는 사람만이 가능한 것이고, 그것이 이 시대의 편향된 정치의식이나 집단이익을 뛰어넘는 바른 기독교 역사의식입니다.
이것은 비단 다니엘과 같은 특별한 사람에게만 주어진 사명이나 능력이 아닙니다. 아울러 기독교 지도자들에게만 주어진 말씀 또한 아닙니다. 성도들이라면 누구나 다 이런 능력과 의무를 지고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는 하나님의 관점에서 세상과 사람을 보는 능력을 갖추는 훈련을 해야만 합니다. 결혼을 위해서 남자와 여자에게 집중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집중해야 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자신의 결혼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취업을 위해서 직장에 집중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집중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으로부터 자신의 미래가 설계될 수 있습니다. 사업이나 자녀 양육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에 집중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집중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디자인에 맞는 그림을 그려나갈 수 있습니다.
우리 인생의 궤적을 하나님과 함께 그려나가야만 바른 인생의 그래프를 그려나갈 수 있습니다. 성도들이 인생의 그림을 그려나갈 때 하나님과 무관하게 그 그림을 그려간다면 그것은 검정 도화지에 검정 크레파스로 그림을 그리는 것과 같습니다. 도무지 어떤 그림을 그려야 할지 어떤 색깔로 채색해야 할지를 짐작할 수 없습니다.
다니엘은 자신의 인생의 궤적을 철저히 하나님의 동선과 함께 그려나갔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움직이시는 방향을 따라 같이 움직여 갔습니다. 그러하기에 느부갓네살을 향해서, 벨사살을 향해서, 바벨론을 향해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림을 그리셨는지를 발견할 수 있었고 그것을 담대하게 외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자신 또한 그러한 시대 속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바르게 자리매김을 할 수 있었습니다.
죄 많은 오늘날의 시대는 다니엘이 살았던 시대와 다르지 않습니다. 동일하게 하나님을 거스르고 대적하며 우상을 섬기는 시대입니다. 이 시대에 하나님께서는 다양한 것으로 하나님의 사인을 주십니다. 하나님을 거스르는 이 시대에는 상상할 수 없는 범죄와 기근, 전쟁, 지진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돈이 없어지고 소망이 끊어지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들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세상은 절대 그러한 사인을 읽을 수도 없고 해석할 능력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인을 읽고 해석해야만 그들의 문제가 해결됨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것을 해결할 능력이 없습니다. 오직 성도만이 그 사인을 해석할 능력이 있습니다. 우리 성도들은 그러한 존재입니다. 그래서 성도들이 이 세상의 빛이요, 소금입니다. 그러므로 오늘을 살아가는 성도들은 그 인생의 궤적을 철저하게 하나님의 말씀과 함께 그려나가야 할 것입니다. 그리한다면 이 시대와 역사 속에 보이는 하나님의 다양한 신호를 하나님의 관점에서 담대하게 우리는 외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속에 우리가 어떠한 삶으로 자리매김해야 할지 자연스럽게 알게 될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관점에서 역사를 보게 하시고, 세상을 보게 하시고, 나를 보게 하옵소서. 나의 인생의 궤적을 하나님의 동선과 함께 그릴 수 있는 신앙의 능력을 가지게 도와 주십시오. 그것을 위해 어떤 훈련이라도 감당할 수 있는 우리들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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