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설교자'가 확실한 설교만 올릴 수 있습니다. |
| 성경본문 : | 마6:10 |
|---|---|
| 설교자 : | 이선근 형제 |
| 참고 : | http://www.saegilchurch.or.kr/136234 |
평화로움
(마태복음 6장 10절)
2013년 6월 9일 주일예배
이선근 형제
(새길기독사회문화원 간사)
오늘 소개하고자 하는 평화는 아주 단순한 것입니다. 너무 단순해서, 다 듣고 보면 시시해 보일지도 모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단순한 이야기가 우주의 생명에 관한 것이고, 단순하긴 해도 결코 쉽지 않은 이야기 입니다. 이제부터 온 우주의 부분들, 곧 작은 생명들이 아름아름 엮어지는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과 믿음 그리고 사랑에 관한 이야기를 시작 하겠습니다.
평화라는 말은 혼란과 고통에 대조되는 상태를 표현하려 할 때 사용합니다. 아무래도 혼란과 고통을 상징하는 사건이라면 대표적으로 ‘전쟁’을 들 수 있을 것입니다.
전쟁 중에 평화를 요청하는 것은, 궁극적으로는 집단의 평화를 요청하는 것이지만 다른 한편 개인의 평화를 요청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예컨대 군인 한 사람은 군대라고 하는 집단의 한 부분으로서 집총한 폭력입니다. 그런가 하면 이 한 사람은 민족과 국가와 가족이라는 집단의 한 부분으로 유기적 관계를 포괄하는 하나의 생명단위입니다. 그는 한 사람 개인일 뿐이지만, 그가 사용하는 폭력은 집단의 폭력이고, 그가 당하는 고통 또한 집단의 고통이 될 것입니다. 집단과 개인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쟁 상황에서 사람들은 이것을 망각한 채 무한한 고통을 반복적으로 내 뱉거나 들이 마시게 됩니다. 그래서 집단의 혼란과 고통에 대해 상대적으로 평화를 말할 때에는 반드시 개인의 평화도 함께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세계의 평화와 분리되었다면 어떠한 생명단위라도 그 스스로 홀로 평화로울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반대로 세계가 평화롭기 위해서는 모든 부분들의 아주 사사로운 것들이라 할지라도 각기 모두 평화로워야 할 것입니다.
좀 더 작고 현실적인 이야기는 어떨까요? 작년 여름 지하철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만원 지하철에서 40대 초반으로 보이는 건장한 남성이 지하철의 닫히는 문을 잡고 들어 왔습니다. 그가 전철 안의 사람들을 등으로 밀치며 들어 왔기 때문에 상당히 불쾌했습니다. 그렇게 무리하게 들어와서는 지하철 문이 닫혔는데도 계속 밀쳐 들어오는 것이 아닙니까. 그래서 저는 그에게 밀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그는 온갖 욕을 퍼부어대더군요. 순간 ‘나도 같이 욕을 할까?’, ‘끌고 내려서 줘 패줘야하나?’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아마 내 안에 분노가 작용한 모양입니다. 그런데 이때 ‘이 양반 나랑 싸움이라도 할 기세인데 내가 대응하면 안 되지’하며 내 분노를 위로하는 또 다른 소리가 있었습니다. 속상하고 분한 건 사실이지만 싸워서 뭣하겠습니까? 실컷 때려준다고 해서 뭐가 좋고, 실컷 맞으면 이건 또 얼마나 속상한 일입니까? 그도 소중한 생명이고 나도 소중한 생명인데, 그가 내 뱉은 숨이 온갖 악한 기운들로 가득하다고 해서 나 또한 그 숨을 머금고 똑같이 내뱉으면 그러면 싸움이 됩니다. 우리 둘 다 몸에 큰 상처가 날 게 뻔하지 않겠습니까. 어디 몸뿐인가요. 마음에 더 독한 독이 번질 것이고 동료들과 친구들 그리고 가족들에게까지 그 독이 번질 것입니다. 어쨌든 내가 만원 지하철의 불편한 한 사람인 만큼 그도 만원 지하철의 불편한 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렇게 저는 딱 달라붙은 상태로 내내 욕을 듣다가 다음 정거장에서 내렸습니다.
밖으로부터 보면, 세상과 사람들과 나는 연결되어 있습니다. 안으로부터 보면, 몸과 마음과 영혼도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내가 겪고 있는 고통이 다른 사람들의 고통에 연결되어있다고 생각하니, 내 고통 또한 하나님께서도 똑같이 고통으로 느끼고 계셨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여전히 욕하고 있는 그분이 내 뿜는 독한 분노를 그대로 마시면서 기도하게 됩니다. 그가 스스로 정화하지 못하고 뿜어내는 독한 기운을 내가 마시고 있으니 잘 견뎌내게 해달라고 말입니다. 그렇지만 내가 다시 내쉴 때는 그도 그의 독기를 스스로 정화할 수 있도록 선한 하나님의 기운이 날숨을 타고 전해질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때 정말 단순히 숨을 쉬는 것 이외에 어떠한 말도, 행동도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저 독한 숨을 마시고 선한 숨을 내쉬려는 행위가 전부였습니다.
때때로 다른 사람의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알고 보면 다른 이들의 고통을 흡입할 용기가 없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혼란과 고통은 마치 숨과 같아서 내뱉어져 나오고 그 고약한 것을 누군가는 반드시 마시게 됩니다. 이걸 마시게 되면 또 얼마나 괴로운지 모릅니다. 그러니 사람들은 억지로 숨을 참고 있는 것입니다. 나만 괜찮으면 된다는 이기적인 생각이 그런 것입니다. 보통은 ‘복잡하다.’, ‘귀찮다.’, ‘나랑 상관없다’고 말하며 관계를 맺으려 하지 않습니다. 그들의 고통을 들이 마시려하지 않습니다.
살아 있는 것들은 숨 쉬지 않으면 죽은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고통을 숨 쉬지 않는 용기 없는 사람들의 하나님 역시 죽어있습니다.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하나님은 슬픔도 위로도 희망도 없는 하나님이 되어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죽어있을 수밖에요. 세상의 고통은 들이마셔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이 살아납니다. 그리고 이렇게 들이마신 고통은 그대로 다시 뿜어낼 것이 아니라 견뎌내야만 합니다. 물론 고통을 견디는 것은 힘든 일입니다. 그래서 기도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마음이 근심에 싸여 죽을 지경”(막 14:34)에 처했을 때 겟세마네 동산에 올라 기도하셨습니다. 그리고 견뎌내셨지요. 들이마신 고통을 잘 견디셨을 뿐만 아니라 선하게 정화하여 날숨으로 내 쉬었습니다. 예수님이 선하게 내쉬는 날숨이 십자가의 사랑입니다.
이와 같이 평화는 고통이 없는 상태가 아닙니다. 평화는 세상의 고통을 들이마시고 견디고 정화하여 대신 사랑을 내뿜은 상태입니다. 이렇게 내 뿜은 사랑을 세상이 들이마시고 다시 사랑을 내뱉게 하는 것, 이 모든 순간들을 평화로움이라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모든 과정은 하나님의 생명 활동과 함께 합니다. 그렇기에 평화로움은 하나님의 숨(호흡)입니다. 숨 쉬는 하나님께서 역사하는 시공간을 일컬어 하나님 나라라고 하는데 그 나라는 마치 여인의 누룩과 같다 했습니다(눅 13:20-21). 바리새인들과 헤롯의 누룩(막 8:14-21)이 아닌 여인의 누룩입니다. 여인은 거친 밀을 부드럽게 반죽한 후 누룩을 넣고 숙성시켜 부풀리고 빵으로 구워내기 때문입니다. 여인의 수고가 고통을 변화시켜 부드러운 사랑을 굽는 행위와 같으니, 하나님 나라일 수밖에요. 예수님 따르겠다는 우리의 삶은 여인의 누룩과 같아야 합니다. 쉽지 않지만 숨 쉬는 모든 순간, 평화로움을 이루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예수따르미라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평화는 누군가 다른 사람이 대신 주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이루어야 하는 삶입니다. 예수님은 평화를 주기위해 온 것이 아니라 칼을 주려고 왔다고 합니다(마 10:34). 칼을 가슴에 품는 행위는 자기 십자가를 지는 행위와 같습니다(마 10:38). 그러니까 평화는 예수님이 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스스로 들숨으로 세상의 고통을 들이마시고 날숨으로 사랑을 내뿜어 이루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생명을 잃는 사람은 오히려 생명을 얻는다(마 10:39) 하지 않습니까. 이기적인 평화를 움켜쥐었다면 자신의 생명을 구할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과 분리된 평화요, 죽어버린 하나님입니다. 고통을 견디고 정화하는 힘으로 칼을 삼킨 자는 세상을 평화롭게 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생명을 구할 것입니다. 이것이 평화로움입니다. 평화로움은 하나님 나라의 생명력입니다.
평화로움은 이 순간 이루어졌다 하여 다음 순간으로 이어지지 않습니다. 매 순간마다 이루어야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 단 한 번도 이루어 보지 못한 평화로움일지라도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그 모든 순간들과 모든 존재들이 서로 이어짐으로 커다란 평화로움의 길을 이루게 됩니다. 이것 또한 평화로움입니다. 작은 평화로움들이 이어지고 커다란 평화로움의 길을 만들 때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할 것입니다.
하늘에 있다는 하나님의 나라는 신앙의 공간입니다. 우리가 소망할 때에만 존재합니다. 그러나 소망하기만 하면 단지 상상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반드시 이루어진다고 믿어야 합니다. 믿으면 상상이 현실이 됩니다. 그래도 아직은 허상이지요. 행위가 없지 않습니까. 그 행위가 바로 사랑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끊임없이 소망하고 반드시 믿으며 사랑으로 실천하는 것, 그것이 마태복음 6장 10절에 있는 예수님의 기도입니다.
“그 나라를 오게 하여 주시며, 그 뜻을 하늘에서 이루심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 주십시오.”
하나님의 나라가 땅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순간들을 각각 평화로움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기도는 하나님 나라를 구체화 하는 방법입니다. 그러면 이쯤에서 예수님께서 어떻게 하늘에 있던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구체화 했는지 살펴보기 위해 예수님 시대의 평화 이야기를 이어가도록 하겠습니다. 그래야 예수님의 평화로움이 이해되기 때문입니다.
우선 평화라는 말은 그리스 문명에서 사용했던 에이레네(ἡ εἰρήνη)라는 말에서 오래된 단어를 찾을 수 있습니다. 도시국가 형태로 지중해에 널리 분포해 있던 그리스의 나라들은 각기 비등한 국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각자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협약을 맺습니다. 교역권을 유지하는 조항들이 첨부되어 있었는데 항구와 도로의 이용, 상수도를 포함한 각종 설비의 보호 등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이들의 평화 에이레네는 행여 전쟁 중에라도 예외 일 수 없습니다. 최소한의 폭력을 약속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그리스의 합의된 계약의 평화, 에이레네는 트로이 전쟁 직후 완전히 붕괴됩니다. 현상적으로 이미 스파르타의 연합군과 트로이는 서로 힘의 균형이 맞지 않았고, 게다가 이 전쟁의 원인 또한 헬레네와 파리스의 사랑이 아닌 교역권 그 자체를 둔 정치적 쟁탈전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이후 그리스에는 몇몇 강대국이 있었지만 결국 패권을 잡은 나라는 마케도니아였습니다. 마케도니아의 정복전쟁은 후에 로마로 이어지고 새로운 평화(Pax Romana)의 시대가 열리게 됩니다.
신으로부터 부여 받아 태생적으로 가진 것이라 생각했던 하늘과 바다와 땅을 잃은 그리스의 나라들은 결국 강한 나라가 약한 나라들을 침략하여 그보다 더 강한 나라가 되어 ‘계약의 평화’를 ‘힘의 평화’로 발전시킵니다. 약한 나라는 강한 나라에 항복하고 강한 나라는 약한 나라를 흡수합니다. 두 집단은 좀 더 큰 나라가 되어 군대를 양성하고 땅과 바다와 하늘을 정복합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이 역사는 악티움 해전 이후 옥타비아누스가 황제에 오르면서 그의 이름을 딴 ‘아우구스투스의 평화(Pax Augusta)’를 이루며 새 시대를 맞이합니다. 이제 지중해 연안과 유럽을 점령한 강력한 제국은 그 평화의 근원인 ‘힘’을 가지고 제국의 지배 안에 있는 여러 지역을 외세의 침략으로부터 보호하며 평화를 이루어냅니다. 1-2세기에 가장 강력했던 이 평화를 우리는 팍스 로마나(Pax Romana), 곧 로마의 평화라고 부릅니다.
이제 여기서 우리는 구약의 평화, 샬롬(shalom)을 짚고 넘어가야 합니다. 사전적 의미로 샬롬은 구원, 전체, 통전성, 공동체, 의로움, 정의와 평화, 그리고 복지의 의미를 모두 포괄합니다. 그래서 신학적으로 샬롬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창조 세계 사이의 바른 관계를 말합니다. 샬롬은 역사적 맥락에서 운행하는 하나님의 섭리와 매우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데, 이는 하나님의 약속과 함께 합니다. 히브리 민족에 있어서 피조 세계의 평화는 오로지 신의 명령과 그 명령을 온전히 따르는 선택된 백성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성취될 약속으로 완성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 샬롬의 평화는 유대와 이스라엘의 멸망 후 오랜 포로기를 통해 그 희망의 속성을 모두 잃어버리고 맙니다. 예수는 바로 이 때 이 땅에 태어났던 것입니다. 에이레네의 파괴와 샬롬의 낙망 이후 팍스 로마나의 하늘, 팍스 로마나의 바다, 팍스 로마나의 땅에서 예수가 태어난 것입니다.
예수님 시대의 사람들에게 ‘평화’는 곧 ‘힘’이었습니다. 로마의 평화가 그랬듯이 어느 누구라도 자신을 괴롭히지 못할 만큼 강력한 힘을 가지고서 스스로를 지켜내는 평화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께 물어 봅니다. 예수님이 믿는 하나님 나라의 평화는 언제쯤이나 올수 있냐고 하지요. 그러니까 바리새파 사람의 이 질문은 “도대체 돈은 어떻게 마련할 거며, 군대는 언제 훈련시킬 거냐”고 하는 말이겠지요. 그걸 약속하면 나름 도와볼 요량인가 봅니다. 혹은 무안을 주려는 거겠지요. 물론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를 전적으로 믿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는 예루살렘에 있다거나 로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 가운데 있다고 합니다(눅 17:20-21). 그가 소망한 하나님의 나라는 여기 있다 하여 우르르 몰려갈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법으로 짜 맞추거나, 힘으로 끼워 맞출 수 있는 나라가 아니라는 겁니다. 대신 우리들 스스로 칼을 삼켜 고난을 겪고 이 세대에 버림받아야만(눅 17:25) 이루어 낼 수 있는 나라입니다. 질문을 했던 바리새파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이해 할 수 없는 평화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말씀하신 나라가 참 평화를 이루는 나라입니다. 세상의 고통을 마시니 어찌 칼을 삼킨 것과 다르겠습니까. 그것을 견디며 정화하여 다시 사랑으로 내뿜으라니 어찌 사람들이 좋아하겠습니까. 가족들과 나라와 민족으로부터 버림받을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십자가입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살면 밀알 하나이겠지만, 죽어 썩어지면 열매를 많이 맺는다(요 12:24) 하지 않습니까. 우리의 십자가는 우리를 죽이고 썩어지게 하겠지만 하나님을 살리고 세상을 평화롭게 할 것입니다. 다만 여기서 오해 하시면 안 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예수의 평화로움은 수 백 개의 밀알 열매에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바로 한 알의 밀알이 썩어지는 그 순간에 있습니다. 그래서 다행히 수 백 개의 밀알 열매가 생겼다면 이들도 또한 썩어져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살리려고 그래서 온 생명을 숨 쉬게 하려고 세상의 고통을 크게 들이 마시고 십자가에 오르셨습니다. 그가 죽기 전에 한 마지막 말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마 27:46, 막 15:34), 그리고 “다 이루었다”(요 19:30)입니다. 예수님의 들숨의 고통과 날숨의 사랑이 바로 여기 증언자들의 기록 속에 낫낫이 새겨져있음을 우리는 보게 됩니다.
예수님의 평화는 매 순간 온 우주의 마당을 만들고 온 생명과 더불어 친구하는 평화로움입니다. 이해관계를 넘고 인과의 법칙을 넘어 온전한 참 생명으로의 성숙과 완성, 바로 이것이 우리들 안에서 일어나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살았던 평화의 순간을 따라 사는 사람에게 세상은 평화로움으로 숨 쉴 것입니다. 비록 들숨의 고통을 견디고 정화해내야 하지만 평화의 숨은 어머니의 숨처럼 부드럽고 따뜻하게 세대와 함께 번질 것입니다.
담을 비집고 나온 노란 민들레꽃을 가만히 보세요. 평화가 숨을 쉽니다. 단단한 벽을 뚫고 솟아 오른 노란 꽃이 얼마나 아름다운지요. 그리고 지금 내가 이 꽃의 고통과 인내와 정화의 역사를 아름다움으로 만나고 있지 않습니까. 이 어찌 평화로움의 순간이 아닐 수 있겠습니까. 식탁에 놓인 몽글몽글한 밥 한 공기를 맛보세요. 평화의 맛이 스며듭니다. 여름 내 뜨거운 태양과 거친 비바람을 견디고 정화한 희고 통통한 밥알이 수북하니 평화로움의 맛이 아닐 수 없습니다. 나의 것이든 남의 것이든 지금 이 순간 일어나고 있는 생각과 감정들을 들숨 그대로 온 몸과 맘과 영혼으로 품어주세요. 그러면 날숨을 타고 온 세상에 평화가 번질 것입니다.
나에게 못 된 짓 하는 사람이 있나요? 속상하지요. 그렇다면 가만히 숨을 쉬어 보세요. 숨 쉬는 가운데 우리들의 이 모든 순간들이 평화로움이기를 바랍니다. 용기 내어 세상의 못된 것들을 들숨에 들이마셔야 합니다. 곧바로 날숨으로 내뱉지 말고, 잘 견뎌서 정화한 후에 내 쉬세요. 숨을 쉴 때마다 이렇게 하세요. 마음에 미움을 비워내면 바탕 가득 텅 빈 공간이 생깁니다. 하나님은 이곳에서 숨을 쉽니다. 나와 함께 하나님이 숨 쉬면, 불어져 나간 하나님의 숨이 생명의 공간을 아름아름 평화로움으로 번져낼 것입니다. 예수님이 소망하고 믿고 사랑했던 숨 쉬는 하나님의 나라, 살아 있는 하나님의 나라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가 여태 함께 나누었던 말로 하면 ‘평화로움’이라 합니다.
주님, 주님의 나라가 오게 하여 주십시오.
뜻을 하늘에서 이루심 같이
이 땅에서도 이루어 주십시오.
우리가, 용기 내어 세상의 고통을 들숨으로 마시고
성숙함으로 견뎌 선하게 정화시키며
날숨으로 사랑을 내쉬게 하소서.
평화로움을 매 순간마다 이루는 숨 쉬는 예수따르미 되게 하소서.
그리스도 되시는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평신도 열린공동체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사단법인 새길기독사회문화원, 도서출판 새길
|
설교를 올릴 때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 주세요. 이단 자료는 통보없이 즉시 삭제합니다. |








최신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