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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욕망

사무엘하 새길교회............... 조회 수 448 추천 수 0 2015.05.23 23:5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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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삼하11:25-27 
설교자 : 백소영 교수 
참고 : http://www.saegilchurch.or.kr/136807 

예수의 욕망

(사무엘하 11:25-27, 마태복음 5:10-12)

 2013년 6월 23일 주일예배

백소영 교수

(이화여자대학교 인문과학연구원 HK연구교수)


우리는 뭐든 둘로 나누기를 즐겨합니다. 어려서는 동네 골목대장 놀이를 하며 ‘내 편 네 편’을 나누어서 놉니다. 스포츠를 해도 보통은 두 팀으로 나누어 경기를 진행하죠. 어른이 되어 직장에 취직을 하면 ‘갑과 을’로 나누고요. 정치적 입장에서는 ‘진보’와 ‘보수’, 엄마들 사이에서는 전업주부와 직장맘... 사실 이 둘 사이에 얼마나 많은, 다양하고 미묘한 입장이나 위치가 있는지 모르는데, 우리는 그냥 다 생략하고 대부분은 둘로 나눕니다. 그리고 이 둘은 서로 친하지 않죠. 상대방은 언제나 이기고 정복하고 굴복시키고 평가절하 해야 하는 대상입니다.

 

21세기 대한민국에서 가장 첨예하게 드러나는 이분법은 단연코 ‘갑과 을’이죠. 승자요 지배하는 자요 평가하고 빼앗는 자는 ‘갑’이고, 지배당하고 평가당하고 빼앗기는 자는 ‘을’이라고요.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자신과 자신의 아이들이 기왕이면 ‘갑’이길 원합니다. 또한 사회생활을 하며 자신이 갑이라 생각하면 ‘갑질’을 서슴지 않습니다. ‘갑질’! 네티즌들의 용어입니다. 바느질, 도둑질 등의 어휘가 말하듯 ‘갑’이하는 ‘행동’을 의미하는 신조어입니다. 비행기에서 라면 가지고 ‘갑질’을 한 어느 기업의 임원도 있고, 국가차원의 공식적인 해외출장을 가서 인턴사원을 향해 ‘갑질’을 한 고위공무원 이야기도 들립니다. 여기에 정의나 신념 혹은 원칙은 없습니다. ‘내가 갑이다’ 이게 다입니다. 갑이 말한 것이 곧 정의요 법이죠. ‘다른 을’로 대체되지 않기 위해서, 혹은 조금 여건이 나은 ‘을’로 승진하기 위해서는 평가와 해고의 권력을 갖는 갑에게 무조건 ‘복종’하는 길만이 살길이라는 걸 우리는 압니다. 갑의 명령이 부당하고 정의롭지 못해보여도 ‘어쩌겠어? 난 을인데’ 하며 내가 정의와 신념, 원칙을 묻지 않는 탓을 갑에게 돌립니다. 이것이 우리가 사는 세상의 모습이고 이제는 어느 결에 당연히 여겨버린 ‘사는 방식’입니다.

 

하지만, 오늘 함께 묵상할 사무엘하 11장 본문은 우리에게 ‘다른 방식으로 보고’ ‘다른 방식으로 사는 법’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다들 잘 아시는 다윗과 밧세바 이야기죠? 성서를 통틀어 손에 꼽을 희대의 스캔들이었습니다. 왕조의 입장에서 역사서술을 한 역대기 기자는 생략한 에피소드입니다. 그러나 구전전승과 민담, 그리고 더 오래된 문서자료들을 참조하고 적극 반영한 사무엘서 편집자는 다윗 왕권의 정당화라는 측면에서 보면 참으로 불리한 이 엄청난 사건을 상세히 보도합니다. 우리는 그동안 다윗과 밧세바에만 초점을 맞춰왔지만 사실 이 사건에는 너무나 많은, 다른 사회적 위치에 있었고, 이 사건에 의해 운명이(생명까지) 달라진 많은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하지만 시간 관계상 저는 오늘, 세 사람에 집중하여 그들의 위치와 욕망에 초점을 맞추려 합니다.

 

1. 다윗의 욕망-수퍼갑의 권력 혹은 자기 의(義)

 

우선 다윗, 요즘 말로 하자면 ‘수퍼갑’입니다. 더 이상 용병부대 대장이 아닙니다. 이미 이스라엘 족속들 사이에서 인정받는 왕이 되었고 이제는 웬만한 싸움은 꼭 자기가 직접 나가서 하지 않아도 되는 사회적 위치에 있습니다. 하여 암몬 자손을 멸하려 랍바 성을 공격하려 요압을 보내놓고 자기는 예루살렘에 쉬고 있던 중입니다. 심심하여 저녁에 왕궁 옥상에서 거닐다가 목욕하는 여인을 보죠. 어느 목사님들은 밧세바가 의도적이었다고 하지만, 우리는 초점은 거기에 있지 않습니다. 성적 욕망으로 인해 다윗은 사람을 시켜 그녀가 누구인지 알아보았습니다. 심부름꾼은 그녀의 정체를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라고 했습니다. 분명히 십계명에는 ‘네 이웃의 아내를 탐하지 말라.’고 했는데, 다윗이 그 계명을 몰랐을까요? 물론 율법서의 완성이야 다윗보다 훨씬 후대라지만 원계명이 되는 자료들은 이미 모세 시절에 받았을 거라고들 합니다. 다윗이 몰랐을 리가 없지 않겠습니까? <왕궁 옥상>이라는 위치는 저의 상상력에 날개를 달아줍니다. 누구든 꼭대기에 오르고 나면 권력을 휘둘러보고 싶어집니다. 다윗이 수퍼갑이 되고 나니 소위 ‘갑질’을 할 욕망이 생겼는지도 모를 일이죠. 하여 성적 욕망에 갑질의 욕망까지 더하여 다윗은 ‘남의 아내’임에도 그녀를 불러다가 동침하였습니다.

 

아마도 다윗은 그 정도의 권력 남용만 하려했던 것 같습니다. 아내를 삼을 만큼의 욕망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하여 밧세바를 집으로 돌려보냈죠. 그런데 덜컥 밧세바가 임신을 했다는 겁니다. 얼른 정신이 들었을 터이고, 필시 부끄러웠을 다윗은 수습을 하려 묘책을 쓰지요. 얼른 요압에게 기별하여 우리아를 불러들인 것을 보면, 대놓고 뻔뻔하게 모세의 법을 어기고 남의 아내를 자신의 권력으로 차지할 생각은 안 했던 것 같습니다.

 

우리아에게 형식적인 보고를 들은 뒤(군사의 안부와 싸움상황 묻고) 다윗은 본론으로 들어갑니다. 전쟁터에서 고생했는데 “네 집으로 내려가서 발을 씻으라”고요. 그러고는 <왕의 음식물>까지 하사했습니다. 예쁜 아내를 볼 욕망과 왕이 상급으로 주는 기름진 음식, 거기다 왕이 직접 집에 가서 쉬라고 한 마당인데... 아마 보통 사람이라면 곧 바로 집으로 향했겠죠. 그런데 우리아는 왕궁 문에서 다른 부하들과 취침을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마도 하사한 <왕의 음식물>은 부하들과 나누어 먹었을 것입니다.

 

1차시도 실패에 몸이 단 다윗은 우리아를 불러 왜 집에 안 갔냐고 물어보는 찌질함까지 보입니다. 뒤에 보겠지만 우리아는 다른 ‘욕망’을 가진 사람입니다. 우리아의 답을 들은 다윗은 맨 정신에는 안 되겠다 싶어 급기야 2차 시도에는 술을 먹입니다. 저자거리의 술판이 아닙니다. <왕의 술자리>입니다. 사실 ‘술김에 일차적 욕망을 따르게 하자’라는 차원도 있겠지만, 예나 지금이나 <수퍼갑이 베풀어주는 술자리>는 일종의 정치적 암시입니다. 너 중요해. 앞으로 내가 너를 총애할 거야. 그런 메시지를 전달하는 자리입니다. 그런 암시를 받으면서 왕과 더불어 먹고 마시다보면 충분히 흐트러질 수 있는 상황입니다. 그래도 우리아는 집에 돌아가지 않았고 다시 부하들과 취침하였습니다.

 

우리아를 죽일 음모는 결국 1, 2차 시도를 실패한 다윗의 최종 모략이었습니다. 우리가 아는 바대로 요압에게 편지를 썼죠. 맹렬한 싸움에서 우리아만 앞세워 두고 뒤로 물러나 암몬 병사들의 손에 죽게 하라고. 만약 다윗의 욕망이 밧세바를 소유하는 것이었다면 그는 처음부터 요압을 불러 곧바로 우리아를 죽일 계획을 진행했을 일입니다. 우리가 아는 ‘신앙의 사람’ 다윗은 잠시 <왕궁 옥상>에서 교만모드에 빠져 있다가 성적인 욕망을 주체하지 못하고 실수를 하였는지도 모릅니다. 그것이 막 갖게 된 권력을 부려보고 싶었던 욕망이었든, 아니면 단순히 성적 욕망이었든 다윗은 곧 정신을 차렸음에 틀림없습니다. 아, 내가 주의 계명을 어겼구나. 제대로 정신을 차렸다면 그런 생각에 미쳤을 텐데... 다윗은 다른 방면으로 정신을 차린 것 같습니다. 다윗의 다음 욕망은 자신의 과오를 은폐하고자 하는 것이었으니까요. 성욕과 권력남용의 욕망이 1차적 욕망이었다면 그의 2차적 욕망은 소위 ‘의로운 왕’ 이미지를 유지하고 싶은 욕망이었습니다. 사사시대가 끝난 지 얼마되지 않는 그런 상황입니다. 이제 막 왕국이 시작되었습니다. 정치적 지도자는 ‘하나님의 영에 사로잡힌 자’라는 믿음이 지배적이던 당시입니다. 때문에 왕은 여호와의 계명을 준행하는 의로운 사람이라고들 믿었습니다. 그런 그가 여호와의 계명을 어긴 것이 들키게 생겼습니다. 심부름꾼을 비롯하여 주변의 사람들도 밧세바가 왕궁에 들락거린 것을 아는 마당이고, 작은 공동체에서 소문은 막을 길이 없었을 겁니다. 결국 어이없게도 다윗은 ‘의로운 왕’이고 싶은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또 다른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고 맙니다. 살인하지 말라. 그리고 이러한 다윗의 행동을 사무엘서 기자는 “여호와보시기에 악하였다.”(사무엘하 11: 27)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2. 우리아의 욕망, 하나님의 계명 지키기

 

전쟁터에서 졸지에 왕궁으로 불려온 우리아는 의아했을 일입니다. 평소에 있던 일이 아니었을 테니까요. 어쩌면 왕궁에 도착해서 부하들과 주변 사람들을 통해 소문을 들었을 수도 있습니다. 왕궁이란 이런 저런 뒷소문이 많은 곳이니까요. 첫날 왕궁 문 앞에서 부하들과 잠을 잤던 그였으니 충분히 가능했을 일입니다. 그가 순종적인 ‘을’이었다면 ‘어쩌겠어. 왕인데...’ 하며 왕이 싸준 산해진미를 들고 예쁜 아내가 있는 집으로 갔을 일입니다. 현실주의자였거나 기회주의자였다면 이 일을 빌미로 오히려 한몫 잡으려 했겠지요. 다윗에게 이런저런 정치적 제안을 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아는 끝까지 자신의 원칙을 지키다가 죽었습니다. 우리아가 단순히 눈치가 없어 죽은 것은 아닐 거라 생각합니다. 다윗이 불러 ‘왜 집에 가지 않았느냐’고 물었을 때 우리아는 이렇게 답했습니다.

 

“언약궤와 이스라엘과 유다가 야영 중에 있고 내 주 요압과 내 왕의 부하들이 바깥 들에 진 치고 있거늘 내가 어찌 내 집으로 가서 먹고 마시고 내 처와 같이 자리이까.”(사무엘하11: 11)

 

‘야훼전쟁’ 중입니다. ‘성전(聖戰)’입니다. ‘성전’에 대한 그들의 믿음이 정당했는지에 대한 판단과는 별개로, 사사시대 이래로 이스라엘은 야훼 전쟁을 거룩하게 수행했습니다. 비록 헷 사람이었으나 우리아는 여호와 신앙을 가지고 있었고 그 신앙에 부끄럽지 않으려는 욕망을 가졌다고 생각합니다. 적어도 다윗의 2차시도 때 즈음엔 왕궁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상황을 눈치를 챘을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아의 욕망은 하나님의 의로움을 따르고자 함이었습니다. 그것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더라도 자신의 신앙 양심이 시키는 것을 지키고자 욕망했습니다. 우리아가 만약 사실을 알고도 그리했다면, 그는 죽을 줄 알고 랍바 성 전투로 돌아갔을 지도 모릅니다. 우리아는 경건하고 의로운 대가로 죽음을 당했습니다.

 

3. 요압의 욕망, 높은 자리

 

그러나 정작 제가 초점을 맞추고 싶은 인물은 요압입니다. 요압은 다윗에게는 ‘을’이지만, 그 부하들에게는 ‘갑’인 사회적 위치를 지니죠. 실은 우리 대부분의 자리입니다. 제2인자라는 의미가 아니고, 누군가에게는 을이지만 다른 누군가에게는 갑인 존재라는 의미에서 말입니다.

 

요압이 편지를 읽은 뒤 다윗의 편지를 고이 접어들고 온 우리아를 보고 마음이 어땠을까요?

 

‘가신(家臣)’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우리아를 알고 지낸 세월이 한두 해가 아닐 것입니다. 자식 같고, 동생 같은 우리아였을 것입니다. 다윗의 용병이었던 이들이었던지라 필시 우리아는 요압의 목숨을 여러 번 구해주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러나 성서는 요압이 ‘심히 괴로워하니라’ 혹은 ‘갈등하니라’라는 말이 없습니다. 곧 바로 실행에 옮겼을 뿐만 아니라. 일을 그럴듯하게 꾸미느라 애꿎은 사람들을 더 죽음으로 몰고 갔습니다. 우리아를 혼자만 적진에 남겨두는 것은 의심을 살 수 있으니까요. 덩달아 죽은 사람들은 열심히 싸우다가 이유도 모르고 죽은 것이죠. 덩달아 죽은 사람들이 꽤 많았거나 다윗이 사랑하는 이들이거나 했던 것 같습니다. 전력을 많이 상실했음을 고하는 전령을 보내면서, 요압은 왕이 화내거든 “왕의 종 헷 사람 우리아도 죽었나이다” 하라고 전하라고 합니다. 진정한 전략가입니다.

 

무슨 소리인 줄 알면서 하는 다윗의 말이 더 기가 막힙니다. “너는 요압에게 이같이 말하기를 이 일로 걱정하지 말라. 칼은 이 사람이나 저 사람이나 삼키느니라.”(사무엘하 11:25) 이게 우연히 삼킨 것입니까? 정당한 싸움을 싸우다 칼이 우리아를 삼킨 것입니까? 애당초 이 불의한 전략을 요압에게 시킨 장본인이 다윗이었습니다. 다윗이 의도한 칼이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의 불의는 철저히 못 본 척 눈감고 자애로운 군주의 모습으로 위로의 말을 건넨 겁니다.

 

요압은 애당초 정당한 싸움을 싸우는 인물이 아닌 듯합니다. 본문 밖이지만 후에 압살롬의 난을 진압하는 과정이나 정적을 제거하는 과정에서 보면 요압은 교활한 기회주의에 비겁하기까지 한 모습을 보입니다. 한때 압살롬의 군대장관이었던 아마사가 자신의 자리를 차지하게 되자, 그를 제거하는 장면이 사무엘 하 20장 8~10장에 나옵니다.

 

“아마사가 맞으러 오니 그 때에 요압이 군복을 입고 띠를 띠고 칼집에 꽂은 칼을 허리에 맸는데 그가 나아갈 때에 칼이 빠져 떨어졌더라. 요압이 아마사에게 이르되 내 형은 평안하냐 하며 오른손으로 아마사의 수염을 잡고 입을 맞추려는 체하매 아마사가 요압의 손에 있는 칼은 주의하지 아니한지라. 요압이 칼로 그의 배를 찌르매...”

 

둘 다 군대장관쯤이면 무림의 고수들일 텐데 치사하게 인사하는 척하면서 찌르다니요. 정의로운 싸움이 아니었습니다.

요압의 욕망은 ‘자리’였던 것 같습니다. 그는 수퍼갑 ‘다윗’의 눈에 들려고 애썼습니다. 그래서 다윗의 명령이 여호와 보시기에 의로운 것인지는 판단하지 않았습니다. ‘다윗의 말’이니 절대복종한... 다윗의 ‘종’이었죠. 요압은 결코 여호와의 종이 아니었던 겁니다. 그가 반란을 도모했던 압살롬의 편에 서지 않았던 것은 분명히 다윗이 여전히 실세임을 판단한 정치적 계산에서 그리했을 일입니다. 그러나 다윗이 늙자 새로운 줄타기를 할 요량으로 솔로몬이 아닌 아도니야 쪽으로 붙은 요압입니다. 슬프게도 그가 그리도 지키고 싶었던 자리는 결국 영속하지 못했습니다. 다윗은 죽으면서 솔로몬에게 요압 처리를 명령합니다. “그가 태평의 시대에 전쟁의 피를 흘리고 전쟁의 피를 자기의 허리에 띤 띠와 발에 신은 신에 묻혔으니, 네 지혜대로 행하여 그의 백발이 평안히 스올에 내려가지 못하게 하라.”(열왕기상 2: 5-6) 요압은 결국 여호와의 장막까지 도망갔었지만 죽음을 당하고 맙니다.

 

4. 예수의 욕망, 하나님 나라의 도래

 

우리의 욕망은 이 세 사람 중 누구의 것을 닮았을까요? 비록 왕의 자리까지 높은 위치는 아니지만 우리는 종종 다윗처럼 허물을 덮으려 더 큰 죄악을 저지르고자 하는 ‘자기 의의 욕망’에 사로잡힐 수도 있을 것입니다. 요압처럼 최고권력자의 말을 하나님의 계명보다 더 우선으로 여기며 사회적으로 높은 자리, 안정된 지위를 욕망할 지도 모릅니다. 분명한 것은 우리아의 욕망을 가지고 그 욕망대로 실천하기는 참으로 힘든 일이라는 것이죠. 오늘 본문에 나오는 다윗이나 요압 같은 사람들로 가득 찬 이 세상에서는 더욱 더...

 

우리아가 눈치가 없어 그저 ‘성전(聖戰)’에 임하는 신자의 정결하고 금욕적인 자세만을 따르다 그랬는지, 아니면 심지어 그 모든 일들을 눈치 채고도, 죽을 줄 알고도 하나님의 계명을 준수했는지는 모릅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우선적이고 가장 중요하며 최후까지 그가 따르고 지키고자 했던 원칙은 왕의 명령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義)였다는 사실입니다.

 

저는 우리아를 묵상하다가 산상수훈의 팔복 말씀에서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6절)라는 표현이 떠올랐습니다. ‘주리고 목마른’이라는 이 표현은 ‘지극히 열망하는’이라고도 해석합니다. 의로움을 지극히 열망하는 자. 욕망하는 자. 사실 ‘욕망(慾望)’이란 욕심을 낼 정도로 간절히 가지거나 이루기를 원하는 마음이죠. 종종 신앙과는 함께 갈 수 없는 마음처럼 그려집니다. 하지만 우리가 어떤 것을 간절히 이루고 가지려 하는가가 문제이지 욕망 자체는 불신앙이 아닙니다. 욕심을 낼 정도로 간절히 가지고 이루고 싶은 그것이 하나님의 의요 하나님 나라라면 그 욕망은 오히려 신앙의 사람이 품어야할 마음입니다.

 

예수께서는 분명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다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마태복음 5장 10절~12절)

 

이전에도 그래왔고, 예수 시절에도 그러하며, 실은 지금도 그렇습니다. 오래지는 않지만 공적인 영역에서 이런 저런 사람들을 만나다보니 더더욱 절감하는 일이 많습니다. 때론 질끈 눈감아야 제게 유리할 것 같은 일도, 윗사람이 시킨 일이니 그냥 하는 것이 맞나 싶은 일도 있습니다. 잘잘못을 따지고 바른 소리를 하면 어떤 불이익이 닥칠지 충분히 예상이 되는 상황들을 살면서 많이 겪으실 겁니다. 직장에 다니시는 분들은 더 하시겠죠. 정치를 하신다면 그건 더욱 심할 터이구요. 그러나 예수께서는 말씀으로 삶으로 우리에게 분명한 하나님의 뜻을 보여주셨습니다. 12세에 이미 예루살렘 성전의 내노라하는 율법학자들과 율법의 정신에 대해 맞장 뜰만한 지식과 지혜를 가지셨던 예수께서, 최연소 율법학자가 되셨나요? 아니면 고위관직에 오르셨나요? 33세 그 꽃 같은 나이에 예수께서 십자가를 향해 가신 까닭은 예수의 시대에도 여전히 다윗과 같은, 요압과 같은 욕망을 지닌 사람들이 많았던 까닭이겠죠. 우리아는 모르고 갔는지 모르지만 예수께서는 알고도 가신 길입니다. 다윗과 요압의 욕망에 사로잡힌 사람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하나님의 계명을 따르며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위해 사는 사람의 길은 자명하니까요. 예루살렘의 종교적, 정치적 권력자들의 불의를 보고 침묵하지도 못 본 척 하지도 않으셨던 예수라면 이는 더욱 분명한 일입니다. 때문에 예수께서는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자’를 복되다 하신 겁니다.

 

우리가 욕망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세상 탐욕? 권세 있는 자리? 자기 의(義)? 만약 이런 것들이라면 우리는 이를 얻기 위해 많은 경우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고 살 수밖에 없을 겁니다. 이런 것들을 욕망하는 한 우리는 뻔히 보이는 것을 못 본 척, 안본 척 해야 합니다. 왜곡해서 봐야 합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도 다윗 시대, 예수 시대처럼 여전히 그러하니까요. 하지만 적어도 예수를 따른다는 우리는 예수의 욕망을 마음에 품고 살아야 하지 않을까요? 행여 우리아의 운명이, 예수의 십자가가 예상된다 해도 우리의 욕망이 <평등한 섬김과 나눔의 하나님 나라>이기를 소망합니다. 하여, 사는 동안 우리가 하나님의 의를 욕망하다 불리해지고, 억울해지고, 해를 입는다면 ‘기뻐하고 즐거워’ 하십시오. 하나님 나라가 우리들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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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29 로마서 새로운 피조물 롬5:12-18  조용기 목사  2015-05-18 402
12128 디모데후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딤후3:14  조용기 목사  2015-05-18 433
12127 디모데전 결혼과 행복한 가정 딤전3:12  한태완 목사  2015-05-18 6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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