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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마19: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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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부겸 목사 |
참고 : | 2010.03.14.http://blog.naver.com/malsoom/101904283 |
2010년 3월 14일 주일설교
성경말씀 : 마태복음 19장 24절, 빌립소서 4장 11절~12절
설교제목 : 가난에의 용기
<내가 다시 너희에게 말한다.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지나가는 것이 더 쉽다" 하시니(마태 19:24). / 내가 궁핍해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어떤 처지에서도, 스스로 만족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나는 비천하게 살 줄도 알고, 풍족하게 살 줄도 압니다. 배부르거나 굶주리거나, 풍족하거나 궁핍하거나, 그 어떤 경우에도 적응할 수 있는 비결을 배웠습니다. (빌립 4:11~12).>
<법정스님 이야기>
『무소유』라는 책의 저자로 유명한 법정스님이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법정스님의 인품이나 사상에 대해서 저는 잘 모르는 입장입니다만, 젊은 시절 그의 책 『무소유』를 줄을 쳐 가면서 읽은 기억이 있습니다. 그리고 아주 오랫동안, 지금 이 순간까지도 ‘무소유’는 잘 소화되지 않는 가시처럼 제 마음 가운데 남아 있는 화두입니다.
인류의 스승이라 할만한 이들이 공통적으로 권면한 인생의 지혜는 ‘가난한 삶이 곧 행복의 길’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일단 법정스님께서 ‘무소유’를 말씀하셨고, 러시아의 사상가 톨스토이도 『사람에겐 얼마만큼의 땅이 필요한가』라는 제목의 글을 통해서 인간의 어리석은 탐욕을 지적했습니다. 참고적으로 말씀드리면, 『사람에겐 얼마만큼의 땅이 필요한가』라는 단편의 이야기는 이런 내용이었습니다.
***
한 농부가 있었다.
그는 착하고 부지런했지만
유난히 땅에 대한 욕심이 많았다.
그는 가난한 소작농으로 시작하여
열심히 일하고 일하여
자기 땅을 조금씩 마련하게 된다.
땅을 얻기 위해서는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이사를 하고 어떤 어려움도 극복하고
그 땅을 자기 것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
그렇게 계속 땅을 넓혀가던 그는
어느 날 한 마을의 촌장으로부터
놀라운 제안을 받는다.
다른 데서 밭 한두 마지기 살 수 있는
아주 적은 양의 돈만 내면,
하루 동안 걸어서 표시할 수 있는 모든 땅을
자신에게 주겠다는 것이다.
다만, 반드시 해가 떨어지기 전에
자신이 출발했던 원래 위치로 돌아와야
한다는 단서가 붙는다.
농부는 촌장의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이고
아침 해가 뜨는 것을 기다려서 출발한다.
농부는 되도록 많은 땅을 가지기 위해
중간에 쉬지도 않고 물도 먹지도 않고 달린다.
그늘에 앉아 잠시도 쉬고 싶다는 생각도
그를 유혹하지 못한다.
이제 해가 뉘엿 뉘엿 넘어가기 시작한다.
돌아 서려고 하면 눈앞엔 더 비옥하고
아름다운 땅이 그의 시야에 가득 들어온다.
많은 땅을 확보하고 해가 뉘엿 뉘엿 할즈음
그는 출발했던 그곳으로 되돌아 온다.
저멀리 언덕위에 사람들이 보인다.
어서 빨리 오라고,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고
외치는 소리가 들린다.
그리고 촌장으로부터
'농부는 이제 많은 땅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하는 말을 듣는다.
그 순간 농부는 그 자리에서
피를 토하고 쓰러져 죽어 버린다.
그리하여 그는 자기 키보다 조금 넓은
채 2미터도 안되는 땅을 차지할 수
있었다.
***
톨스토이는 말했습니다. “가난의 고통을 없애는 방법은 두 가지다. 자기의 재산을 늘리는 것과 자기의 욕망을 줄이는 것이다. 전자는 우리의 힘으로 해결되지 않지만 후자는 언제나 우리의 마음가짐으로 가능하다.”
또한 우리 기독교의 자랑할만한 성인(聖人), 성프란치스코는 가난한 삶을 강력하게 권면했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그는 복음서의 말씀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마태 19:21)에 감명을 받고, 그대로 실천하였습니다. 즉 그가 갖고 있던 모든 재산을 팔아서 가난한 이웃들에게 주고, 자신은 가난한 수도자로서 그 인생을 새롭게 살아갔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난한 삶’은 우리에게 잘 소화되지 않는 가시 같은 존재입니다. 왜 일까요? 가난한 삶은 우리에게 불편한 것이고, 귀찮은 것이고, 더러운 것이고, 무서운 것이고, 비참한 것이고, 짜증나는 것이고, 고통스러운 것이기 때문입니다. 가난해서 밥을 굶는다는 것, 가난해서 잠 잘 곳이 없다는 것, 가난해서 대학을 가지 못한다는 것, 가난해서 몸을 팔아야 한다는 것 … 그것은 정말 비참한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 칩니다. 그게 과연 나쁜 것일까요?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누구라도 그렇게 할 것이고, 그런 악착같은 삶이 없다면 인생의 진보는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일까요? 제가 보았을 때, 그것은 ‘통제 혹은 조절이 되지 않는다는 점’일 것입니다. ‘가난한 삶’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쳐서 이제 어느 정도 살만큼 됐는데, 여전히 우리는 계속해서 발버둥치는 현실, 바로 그것이 문제일 것입니다. 이제 그만 인생의 브레이크를 밟아야 하는데, 그 속도억제장치(브레이크)를 밟으면 큰 일 날 것으로 생각해서 계속해서 속도가속장치(악세레이터)를 밟는 인간의 어리석음, 그것의 위험성을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성경 이야기>
이제 성경말씀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내가 다시 너희에게 말한다.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지나가는 것이 더 쉽다" 하시니(마태 19:24). / 내가 궁핍해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어떤 처지에서도, 스스로 만족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나는 비천하게 살 줄도 알고, 풍족하게 살 줄도 압니다. 배부르거나 굶주리거나, 풍족하거나 궁핍하거나, 그 어떤 경우에도 적응할 수 있는 비결을 배웠습니다. (빌립 4:11~12).】
앞의 것은 예수님의 말씀이고, 뒤에 것은 바울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목구멍에서부터 턱 막히는 말씀이 되고 있고, 바울의 말씀은 그래도 조금은 소화될 수 있을 것 같은 부드러운 음식같이 느껴집니다. 바울은 예수님의 말씀을 나름대로 소화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현실적으로 가능한’ 가난의 길을 제시해 주었던 것입니다. 정말 훌륭하고 지혜로운 태도입니다.
<우리들의 가난한 삶은 어떻게>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는 이 가난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요? 저라고 해서 뾰족한 수는 없습니다. 다만 상식적인 차원에서 몇 가지로 정리할 수는 있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생각을 좀 정리해 보았습니다.
첫째로, 우리는 가급적 최대한 가난하게 살아야 합니다. 우리 기독교 일각에서 깨끗한 부자, 즉 청부론(淸富論)을 이야기하는 분들이 있는데, 이는 궤변에 불과한 이야기입니다. 부유한 삶을 살려는 탐욕적 인간들에게 면죄부를 주는 잘못된 메시지입니다. 일단 우리는 가난해야 합니다. 그러나 가난한 삶의 기준은 각자 다를 수 있겠지요. 어떤 분에게는 한 달 생활비가 5백만원일 수도 있고, 어떤 분들에게는 1백만원일 수도 있는 그런 기준들, 그런 차이는 있겠지요. 그러나 어찌됐건 우리는 ‘최대한’ 가난하게 살아야 합니다. 그건 아주 분명한 원칙입니다.
둘째로, 우리는 비참한 삶을 각오할 수 있어야 합니다. 불가(佛家)의 수행자들이 자주 하던 말씀 중에, “논두렁을 베고 죽을 각오 없이는 진리의 수행자가 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진리의 수행자가 되려면 길을 걷다가 논두렁에서 죽을 수도 있을 만큼의 무서운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섬칫하지요. 무섭습니다. 그러나 그래야 합니다.
예수의 길을 따른다는 것, 그것은 엄청난 것입니다. 어마어마한 길입니다. 그 길은 등따습고 배부른 길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씨름하는 장쾌한 길입니다. 모험이 있고, 스릴이 넘치는 길입니다. 온실 속에서의 편안한 길이 아닙니다. 활기찬 야생(野生)의 길입니다. 그 광활한 야생에서 장렬한 최후를 비참하게 마칠 수도 있는 각오, 그게 없으면 우리는 하느님의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셋째로, 우리는 언제나 어디서나 멈출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인생의 속도가 과하다 싶으면 언제나 어디서나 멈출 수 있어야 합니다. 현대문명의 비극은 어디에서 올까요? 한마디로 말해서 ‘멈추지 않는 탐욕’에서 옵니다. 인간에게는 생래(生來)적으로 욕망들이 있습니다. 식욕(食慾), 성욕(性慾), 수면욕(睡眠慾), 명예욕(名譽慾), 권력욕(勸力慾) … 사실 이런 욕망들 자체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어찌보면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런 욕망들이 조절이 안된다는 데 있습니다. “말을 타면 마부를 부리고 싶다”는 속담에서 볼 수 있듯이, 인간의 욕망은 끝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섬기는 예수의 벗들, 즉 그리스도인들은 달라야 합니다. 탐욕의 속도를 과감하게 줄일 수 있는 결단의 용자(勇者)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설교를 마치면서>
이제 설교말씀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저는 오늘 설교말씀의 제목을 ‘가난에의 용기’라고 잡아보았습니다. 오늘 이 시간, 이 설교말씀의 제목을 깊이 묵상하시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잠깐 기도하겠습니다.
* 축도
이제는 진리의 길을 직접 보여주신 예수님의 놀라운 은혜와, 우리의 생명과 영혼을 언제나 치유해 주시는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지금도 살아계셔서 우리를 인도해 주시는 성령님의 아름다운 동행이 사랑하는 수도교회 교우들 머리 위에 언제나 충만하시기를 간절히 축원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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