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설교자'가 확실한 설교만 올릴 수 있습니다. |
성경본문 : | 고전15:20-22 |
---|---|
설교자 : | 김부겸 목사 |
참고 : | 2010.04.10 http://blog.naver.com/malsoom/103575756 |
2010년 4월 11일 주일설교
성경말씀 : 고린도전서 15장 20절~22절
설교제목 : 잠자는 자들 중 두 번째 열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는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셔서, 잠든 사람들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죽음이 들어왔으니, 또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죽은 사람의 부활도 옵니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는 것과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을 것입니다.(고전 15:20~22)】
<부활절 이야기>
부활절 이후 첫 번째 주일을 맞이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우리 기독교의 교회력에 대해서 크게 의미를 부여하는 입장은 아닙니다만, 이번 주에 읽은 성경이 우연치 않게 사도바울의 예수부활사건 논증(고린도전서 15장 일부)이라서 불가피하게 교회력과 관련된 설교를 준비하게 됐습니다.
사도바울은 초대교회 당시 많은 제자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예수 부활사건에 대해서 절대 긍정의 논증자였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이렇게 선포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은 사람 가운데서 살아나셨다고 우리가 전파하는데, 어찌하여 여러분 가운데 어떤 이들은 죽은 사람들의 부활이 없다고 말합니까?(고전 15:12)” 그리고 초대교회 이후 무수히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사도바울의 논증을 표준삼아서 예수부활사건에 대한 이의(異意 다른 이해)를 묵살해 왔습니다. 그러나 분명하게 말씀드려서 이는 잘못된 태도입니다. 왜냐하면 성서는 완전하지 못한 인간이 기록한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성서 자체는 성스럽고 신비로우며 거룩한 책입니다만, 그것의 내용은 한계(限界)가 분명하고 오점(汚點)이 있으며, 실수투성이인 인간이 기록한 책이기 때문입니다. 그 점에 대한 성찰이 필요한 것입니다.
예수부활사건에 대한 사도바울의 오점(汚點)은 무엇이고, 예수부활사건이 함축하고 있는 신비로운 하느님의 메시지는 무엇일까요? 오늘 그 이야기를 잔잔하게 풀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사도바울의 오점>
예수 부활사건을 포함한 기독교 전체 역사에 있어서 사도바울의 오점이라면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사도바울은 예수님의 복음을 서방세계에 전파한 공로가 있는 사람입니다만, 또 한편으로는 그에 버금가는 무게로서 준엄한 비판을 받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 비판이란, 곧 사도바울이 “예수의 혁명적 복음을 부드럽게 왜곡시켰다”는 점입니다. 즉 사도바울은 예수의 복음을 서방세계에 전파시켜야 한다는 사명감이 지나친 나머지, 너무 과도하게 체제지향적인 입장을 취했고, 그 와중에 날카로운 칼날 같은 예수의 메시지를 아무 것도 베지 못하는 돌망치로 변모시켰다는 비판을 들어왔던 것입니다. 즉 예수는 반체제의 혁명적 메시지를 던져주었는데, 사도바울은 그 혁명적 메시지를 뭉뚱거려서 ‘등 다습고 배부른 자들’의 한가한 노래로 만들어 버렸다는 비판입니다. 예수부활사건에 대한 사도바울의 ‘무리 없는’ 입장 견지는 체제 지향적이어야 하는 그의 입장을 잘 드러내는 사례라고 볼 수 있습니다. 즉 초대교회 당시 다수의 그리스도인들이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인 육체부활의 사건을 ‘무리를 하지 않는’ 사도바울은 전혀 손을 댈 수 없었고, 그 와중에 예수부활사건은 누구도 손 댈 수 없는 엄청난 터부의 영역으로 남아있게 된 것입니다.
<사도바울에 대한 변론>
그러나 저는 사도바울을 일방적으로 비판하는 편에 서 있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사도바울에 대한 옹호의 마음이 큽니다. “어쩔 수 없었을 것”이란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사도바울이 살던 초대교회의 시대는 그 자신의 생각이나 입장을 마음대로 솔직하게 전할 수 있었던 ‘민주적’ 시대는 아니었습니다. 사도바울의 시대는 이런 저런 것들에 대해서 끝없이 눈치를 보아야 했던 야만의 시대였습니다. 로마의 군부, 황제의 막강한 권력, 그리고 그리스 철학의 오만함, 또한 예수 제자들의 단호한 입장 …… 등등을 고려해서 ‘지혜롭게’ 이야기해야 했습니다. 그래야만 야만의 서방세계에 예수의 씨앗을 뿌릴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불가피했습니다.
그러니까 사도바울은 예수의 칼날 같은 메시지를 돌망치로 바꿔버린 것이 아니라, 돌망치 속에 예수의 칼날을 숨겨서 전할 수밖에 없는 ‘간접 선교’의 길을 갈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사도바울의 입장을 이해하고, 그를 변호할 수 있습니다.
<다시 부활 이야기>
이제 다시 예수부활사건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예수 부활 사건과 관련해서 사도바울이 ‘돌망치 속에 감춘 예수의 칼날 같은 메시지’는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곧 오늘 성경본문의 이야기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는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셔서, 잠든 사람들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죽음이 들어왔으니, 또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죽은 사람의 부활도 옵니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는 것과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을 것입니다.(고전 15:20~22)】
사도바울이 보았을 때, 예수부활 사건의 영성적 의미는 예수께서 잠자는 자들의 ‘첫 번째 열매가 되신 것’이었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의 고난에 참여하셔서 죽임을 당하신 후에, 그를 사랑하던 이웃들에 의해서 다시금 살아난, 즉 부활한 사건은 잠자는 사람들 중의 첫 열매인 것입니다. 영성적으로 잠들어 있는 인류 가운데서 깨어난 첫 번째 사건이었습니다.
즉 예수 부활 사건이 갖고 있는 본질적 메시지는 단순히 예수께서 그 몸으로 다시 살아나셨다는 대목이 아니라, 그가 스스로 죽음의 길로 나아갔다가 억울하게 죽임을 당했으나 끝내 그 이웃들에 의해서 부활하는 사건, 즉 하느님의 뜻대로 사는 자가 갖는 ‘영원히 죽지 않는’ 진리의 도도한 흐름, 그것이 본질적인 것입니다. 그렇게 하느님의 뜻대로 사는 자의 죽지 않는 영원함, 그 철학적 의미, 그 영성적 의미, 그 혁명적 의미, 그 신비롭고 아름다운 이야기가 예수부활사건의 본질적 메시지였던 것입니다. 그렇게 잠자는 자들 중에서 첫 번째로 깨어난 자가 곧 예수였던 것입니다.
이제 이 대목에 우리의 질문이 치솟습니다. “그렇다면 영성적으로 잠들어 있는 인류 중에서 두 번째로 혹은 세 번째로, 백 번 째 만 번째로 깨어날 인물은 누굴까요?” ……… 바로 ‘당신’입니다. 즉 바로 ‘나’입니다. ‘우리’입니다. 그게 돌망치에 감춘 사도바울의 참 메시지입니다.
<잠들어 있는 인류>
예나 지금이나 인류는 잠든 채로 살고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정치적 야욕에 잠들어 있고, 어떤 이들은 황금의 유혹에 잠들어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사회적인 출세에 잠들어 있고, 어떤 이들은 육체적 쾌락에 잠들어 있습니다. …… 예나 지금이나 인류는 비본질적인 세계를 인생의 본질적인 것인양 착각한 채로 살고 있습니다. 즉 살고 있지만 잠든 것이나 마찬가지인 인생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때에, 잠 자는 자들의 첫 번째로 깨어난 이가 바로 예수님이셨습니다. 첫 번째 열매입니다. 그게 예수 부활사건의 영성적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두 번째로 깨어나야 할 이는 누구일까요? 바로 ‘당신’입니다. ‘나’입니다. ‘우리’입니다.
<설교를 마치면서>
이제 설교말씀을 정리하면서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저는 오늘 설교말씀의 제목을 ‘잠자는 자들 중 두 번째 열매’라고 잡아보았습니다. 오늘 이 설교말씀의 제목을 깊이 묵상하시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잠깐 기도하겠습니다.
* 축도
이제는 진리의 길을 직접 보여주신 예수님의 놀라운 은혜와, 우리의 생명과 영혼을 언제나 치유해 주시는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지금도 살아계셔서 우리를 인도해 주시는 성령님의 아름다운 동행이 사랑하는 수도교회 교우들 머리 위에 언제나 충만하시기를 간절히 축원하옵나이다. 아멘.
설교를 올릴 때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 주세요. 이단 자료는 통보없이 즉시 삭제합니다. |
최신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