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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마13: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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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최현섭 형제 |
참고 : | http://www.saegilchurch.or.kr/138272 |
보는 것과 보이는 것(마태복음 13:13)
2013년 8월 4일 주일예배
최현섭 형제
(새길기독사회문화원 이사장, 전 강원대학교 총장)
내가 그들에게 비유로 말하는 이유는, 그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기 때문이다. (마태복음 13:13)
평생 동안 새벽기도를 빠지지 않고 다녔고, 이웃 사랑에도 몸을 바쳤던 어느 권사님이 하늘나라에 갔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환대하고 극진히 대해주셨답니다. 그런데 목사님 한두분씩 하늘나라에 오기 시작한 후부터는 하나님께서 자꾸 그분들과 따로 만나서 많은 시간을 보내더랍니다. 이에 권사님은 하나님께 불평 겸 이러한 질문을 하였답니다. “하나님께서도 평신도 보다 목사님들을 더 귀히 여기시는가요?” 하고.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그윽하게 바라보면서 이렇게 대답하였답니다. “그게 아니란다. 저 들은 세상에서 나에 대한 설교를 가장 많이 한 목사들이란다. 그런데 그들의 설교를 들어 보니, 저 들이 나보다도 나를 더 잘 아는 것 같더구나. 그래서 저들을 좀 빨리 불러들여서, 내가 누구인지 좀 알아보고 있는 중이란다.”
참 그럴법한 농담이지요? 좀 씁쓸하기도 하고요. 그런데 말씀 증거라는 이름으로 몇 번 강단에 섰던 제게는 하나님께 송구한 마음과 함께 걱정 하나를 안겨주었습니다. 말씀 증거 잘못하다가는, 예정보다 빨리 하늘나라로 불려갈 수 있겠다 하는 걱정 말입니다.
그런데 오늘 이렇게 강단에 서게 되었으니, 제 심정이 어떻겠습니까? 피치 못할 사정이 생겼으니 좀 맡아주면 안되겠느냐는 말에, 다들 휴가 갈지도 모르니 그 틈에 하면 좋겠다 싶어 수락을 했지만, 지난 열흘 동안은 후회와 고심의 연속이었습니다. 성경 말씀을 살펴보자니, 실력도 딸리지만 하늘나라에 일찍 불려 갈까 두렵고, 간증을 하자니 딱히 떠오르는 게 없어 정말 힘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생각다 못해, 저는 제게 큰 깨달음을 준 내용, 한 가지를 나누는 방법으로 후회와 고심을 해결하기로 하였습니다. 나중에 아시겠지만, 이 내용은 대학 교수와 총장, 그리고 부모와 어른으로서 살아온 저의 지난날의 모자람과 자만을 콕콕 짚어주고 마음을 팍팍 흔들어 놓았습니다. 그래서 잘 하면 여러분께도 은혜가 될지도 모르겠다 싶어 그리하였으니, 넓은 마음으로 함께 해주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보이지 않는 고릴라” 라는 주제의 짤막한 비디오와 관련 서적입니다. 그 내용에 대한 감각을 좀 더 높이기 위해서 비디오를 잠깐 보여드리겠습니다. 혹, 이 비디오를 한 번이라도 보았거나 그에 대해 들어 보신 분, 계신가요? 계셔도 잠깐 참아 주시기 바랍니다.
이 비디오에는 흰 옷을 입은 여학생 세 명과 검은 옷을 입은 여학생 세 명이 같은 색 옷을 입은 학생에게 농구공을 주고받는 장면이 나옵니다. 비디오 첫머리에는 흰 옷을 입은 학생이 몇 개의 공을 주고받았는지를 세어 보라는 영어 멘트가 나옵니다. 여러분도 이 멘트에 따라서 흰 옷을 입은 여학생들이 몇 개의 공을 주고받는지 세어보시면 되겠습니다. 흰 옷을 입은 여학생끼리 몇 개의 공을 주고받았는지 세어보는 것, 아시겠지요?
시작할까요?
일단 여기까지만 보겠습니다. 흰옷 입은 여학생들끼리 주고받은 공은 총 몇 개이던가요? 누가 맞는지 나중에 확인해보겠습니다. 그럼, 비디오에서 혹 고릴라가 지나가는 것을 보신 분, 계신가요? 그것도 다시 확인해보겠습니다. 그럼, 나중에 배경 커튼의 색깔이 바뀌고 검정 옷을 입은 여학생 한명이 뒤로 빠져 나간 것을 알아차린 분, 계신가요?
이제 이 모든 것을 확인할 겸 처음부터 다시 보겠습니다. 보시면서 흰 옷을 입은 여학생끼리 패스한 공의 숫자는 계속 세어 보면서 다른 것들도 한번 확인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 비디오는 당시 하버드 대학 교수였던, 크리스토퍼 차브리스, 대니얼 사이먼스 두 분이 인간의 직관적 믿음이나 인지 능력에 한계가 있음을 밝히기 위한 실험용 비디오 중의 하나입니다. 이 실험 결과는 1999년 “Perception”이라는 학술지에 발표가 되었고, 각종 방송에 보도되면서, 사람들이 이 교수님들에게까지 비디오를 보았느냐고 물을 정도로 유명해졌다고 합니다. 우리나라에는 “보이지 않는 고릴라”라는 제목으로 번역서가 출간되었습니다.
비디오에도 나오지만 이러한 예외적 상황에 대한 간과 또는 주어진 내용의 인식 오류 현상을 가리켜, 원숭이식 착각(monkey business illusion)이라고 했습니다. 원숭이가 들으면 화를 낼 수도 있겠지요? 또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아서 보이지 않게 된다는 뜻으로 무주의 맹시(inattentional blindness)라 하기도 하고, 무엇인가에 주의를 기울이는 과정에서 착각이 나타날 수 있다는 의미로 주의력 착각(illusion attention)이라고 부르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는 이러한 오류와 착각 현상이 얼마나 보편적인가를 밝히기 위하여 후속 실험과 사례 수집을 계속하였습니다.
혹 대상과 색깔 때문에 그런가 하여, 농구공을 패스하는 사람 대신에 검은 글자와 하얀 글자로 바꾸고, 하얀 글자가 컴퓨터 화면의 측면에 닿는 숫자를 세도록 하는 실험도 해보았습니다. 그리고 검정색의 고릴라 대신에 빨간 십자가가 지나가도록 만들었습니다. 그랬더니 대략 30%가 십자가를 보지 못했다고 응답하더랍니다.
숫자를 세는 등 무엇인가에 집중하는 것 때문에 오류와 착각이 커지는가를 알아보려고, 공중에서 넘기는 패스와 바닥에 튕겨서 하는 패스를 구분지어 세도록 하는 실험도 했습니다. 그랬더니 고릴라를 못 본 사람의 수가 20% 정도 증가하였다고 합니다. 어느 것인가에 집중하는 정도가 클수록 다른 것들을 간과할 가능성이 높을 수 있음을 보여준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워싱턴 포스트의 진 웨이가튼이라는 기자가 했던 실험을 세밀하게 분석하기도 했습니다. 그 실험은 죠수아라는 아주 유명한 바이올리니스트가 예고 없이 워싱턴 지하철역에서 연주를 하고 돈을 모아보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실험 결과는 예상을 훨씬 빗나가, 300만 달러짜리 바이올린을 들고 43분 동안 연주해서 모은 돈이 32달러 17센트였다고 합니다. 그것도 일부 승객이 그를 알아보고 기부한 20달러를 포함한 금액이었다고 합니다. 이를 두고 사람들이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아무리 좋은 음악도 들리지 않을 수 있다는 의미로 무주의 난청(inattentional deafness) 현상이라고 불렀습니다.
이러한 실험과 분석을 한 후 이들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자신 앞에 있는 것과 다른 사람이 한 말을 정확하게 보고 들을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사실은 대부분의 사람들은 당장 관심을 쏟는 부분을 제외한 나머지 세상에 대해서는 알아차리거나 기억을 하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심지어 남의 경험을 듣고도 자신이 직접 경험한 것처럼 착각하는 경우도 있다.’고 말입니다.
이것은 결국, 사람들은 ‘무엇인가를 본다고 해서 모든 것을 알아차리는 것도 아니고, 듣는다고 해도 흘려들을 수도 있으며 모든 것을 기억하지도 못한다.’ ‘아무리 생생하게 보았다고 말하고, 분명하게 말해주었다 해도, 오류와 착각은 존재한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어쩌면 이것은 예수님께서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고 깨닫지도 못한다.’ 하신 말씀을 실험을 통해 증명해 보인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실제로 그러한 오류와 착각을 경험한 적이 없으신가요? 어렸을 때는 그렇게 넓어 보였던 길이, 커서 가보면 너무나 좁아보여서 의아해 한 적이 있으시지요? 버스를 타고 가다가 문득, 내가 그토록 좋아하던 음악이 라디오에서 막 끝날 때쯤에야 귀에 들어와 아쉬웠던 적은 없으셨나요? 생각해보면 오류와 착각은 그렇게 우리의 일상에 깊이 들어와 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러한 오류와 착각은 다 남의 일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제가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저는 그동안 제가 매우 분석적이고 치밀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여러분에게도 그렇게 비쳤나요? 착각은 자유지요? 어쨌든 저는 늘 제가 관찰하고 청취한 것은 모두 정확하고 옳다고 여겨 왔습니다. 따라서 오류와 착각이라는 것은 모두 모자라는 사람의 일이거나 남의 이야기라고 치부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학자들의 계속된 실험과 수집된 사례들은, 오류와 착각은, 베테랑 형사, 잠수함 선장, 공항의 관제사, 병원의 의사, 대학의 교수 등 거의 모든 전문가들에게도 예외 없이 나타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에 따르면 전문가들의 머리에는, 무엇이든지 잘 되었던 경험과 기억이 남아 있고, 자신들의 지식과 능력에 대한 확신과 자신감으로 가득 차 있다고 합니다. 바로 그러한 경험과 기억 그리고 확신과 자신감이 자주 오류와 착각의 원인이 되기도 하며, ‘실력이 없는데도 깨닫지 못하는’(unskilled and unaware of it) 현상을 낳는다고 합니다. 이를 가리켜 이들은 “자신감 착각(illusion of confidence)”이라고 불렀습니다.
저에게는 이 대목이 가장 마음에 걸렸고 심한 아픔까지 가져다주었습니다. 자신감 착각에 빠져 있었고, 실력이 없는데도 깨닫지 못하였다는 지적을 받은 것이니 어찌 안 그러겠습니까? 그리고, 그 때문에 제자, 교직원, 자식 그리고 젊은이들에게 적지 않은 괴로움과 실망감을 안겨주었을 것이라니 쥐구멍이라도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습니다.
저의 믿음과 신앙생활에서도 그랬을 것이라는 생각에 이르니 부끄러움은 더욱 커졌습니다. 비디오 하나 가지고 너무 멀리 나가는 것인가요? 그러나 생각해보니, 저는 성경 말씀을 읽을 때나 설교 말씀을 들을 때, 저 자신의 오류나 착각의 가능성은 거의 배제하고 있었습니다. 착한 사마리아 사람 말씀을 읽을 때도, 내가 바로 그 제사장이요, 레위인일 수 있다는 것은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한두가지 설렁설렁한 봉사를 하고도 대단한 착한 사마리아 사람이 된 것처럼 착각하기도 했습니다.
오늘의 본문인, “그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기 때문이다.”는 말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 말씀 중에 있는 “그들”이라는 단어만 귀에 들어 왔고, “나 또한”이라는 생각이 끼어들 틈은 주지 않았던 것입니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모든 사람의 꼴찌가 되어 그들을 섬겨야 한다.(막 9:35)”는 말씀도 자주 인용은 하였지만, “나부터”는 없고 “너부터”만 생각했던 것입니다.
게다가 저는 평소에 기독교의 수많은 문제는 뼈아픈 회개와 자기 고백이 없는 말씀 증거나 설교 때문이라고 말해 왔습니다. 성경 주석이나 훈계 중심의 설교 그리고 묻지는 말고 믿기만 하라는 맹신 강요 설교는, 감동도 주지 못할 뿐 아니라, 마음과 삶에 녹아들지 못하기 때문에, 말로만의 신앙, 깨달음이 없는 믿음, 헌신과 실천이 없는 믿음 생활을 양산하는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래 놓고도 정작 저자신은 뼈아픈 회개와 자기 고백은 모르세 했던 것입니다. 남의 눈의 티끌은 보아도 나의 눈의 들보는 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내 들보를 보지 못하는 것을 넘어 누군가를 비난하고 폄하하는 우까지 범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저는 인생살이나 신앙생활 모두에서 무주의 맹시, 자신감 착각을 넘어 오만의 맹시에 까지 빠져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때문에 교육자, 부모, 어른으로서 뿐만 아니라, 믿음과 신앙생활에서도 바탕이 부실했고 본이 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때문에 수많은 이들에게 괴로움과 실망감을 안겨주었을 것이라는 회개와 고백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이렇게 부족한 저는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요? 정말 쥐구멍이라도 들어가야 할까요? 속죄하는 의미에서 삼베옷이라도 입어야 하는 것일까요? 그럴 수도 없으니 어찌해야만 한단 말입니까?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지금이라도 그것을 조금이라도 줄이고 억제하기 위한 노력만이라도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얼마나 성과가 있을지는 모르지만, 이제부터라도 행여 있을지 모르는 오류와 착각을 조금이라도 줄이기 위해, 무슨 일이든 하는 것이 속죄하는 한 방법일 수 있겠다 싶어서 말입니다.
이에 대해 차브리스와 사이먼스 교수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오류와 착각을 완전히 극복할 수는 없다. 그러나 최대한 줄일 수는 있다,’고 말입니다. 그리고 그 최선의 방법은 우리 모두가 오류와 착각을 범할 수 있다고 인정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보이지 않는 고릴라’를 찾기 위해 분투노력을 하는 길보다 더 좋은 방법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 예로 ‘보이지 않는 고릴라’ 비디오에 대해 사전에 알았거나 한번 본 사람은 모든 것을 잘 간파하였다는 점을 예로 들었습니다. 여러분도 두번째 보니 대체로 잘 보였지요? 그런데 혹 고릴라가 자기 가슴을 양손으로 치고 들어 간 것은 기억나시는가요? 사전에 강조를 안했으니 두 번 보았는데도 포착하지 못했거나 기억이 잘 안날 것입니다. 이렇게 “마음의 준비 상태(readiness of mind)”는 무엇을 인식하고 기억하는데 매우 중요하게 작용을 하는 것입니다. 무엇인가를 하겠다고 결심하고 필요한 것들을 미리미리 생각해두고 대비하는 마음을 굳게 갖는 “마음의 준비 상태(readiness of mind)” 말입니다.
그 분투노력을 하는 방법으로 두 교수는 “바깥에서 살펴보기(outside view)”를 추천했습니다. 제 삼자의 입장에서, 바라보고 들어보라는 것입니다. 우리식으로 말하면 역지사지(易地思之)를 하라는 뜻이 되겠습니다.
그런데 저는 여기에서 한걸음 더 나갈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은 “오류와 착각의 퍼즐 게임”입니다. 즉 누구에게나 오류와 착각이 있다는 것을 전제로 받아들이고 그것들을 퍼즐게임을 즐기듯이 하나하나 맞추어보는 방법 말입니다.
그렇게 하면 오류와 착각 때문에 실망하거나 화를 낼 필요도 없게 되고 서로의 오류와 착각도 최소화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나에게는 보이지 않지만 그에게는 보일 수도 있고, 나에게는 들리지 않지만 그에게는 들릴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 이것저것 모으다보면 오류와 착각이 눈과 귀에 들어오지 않겠습니까? 나는 부분을 보고 흘려들을 수 있지만, 그는 본질에 더 가깝게 보고 더 깊이 깨달을지 모르기 때문에, 즐거운 마음으로 비교하면서 모아가면, 어느덧 본질과 본뜻에 가까워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오류와 착각 퍼즐 게임”은, 오류가 좀 있고 다소 오해가 생겨도 금방 풀릴 수 있게 할 것입니다. 착각이 좀 심하고 그의 오류 때문에 화가 머리끝까지 나더라도, 용서와 화해가 쉬워질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믿음과 신앙생활에서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자기에게는 오류나 착각이 전혀 없다는 오만에 빠지고, 제 뜻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고집을 부린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다른 사람의 믿음과 신앙이 우습게 보일 것이고, 주께서 그토록 바라시는 화평과 사랑은 물거품이 될 것입니다. 또한 자신의 성경 지식이나 신학적 이해만이 최고라고 생각하고 그에 집착을 하게 되면, 넓은 신학, 깊은 신앙을 이루기도 어렵지만, 누군가를 사이비 기독교인이라거나 적그리스도로 규정하고 단죄하는 죄를 범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더구나 그러한 믿음과 신앙생활이 세상적 이해관계나 파당적 경쟁과 결속하게 되면, 종교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에 패거리주의와 갈등을 증폭시키고, 심지어는 인간의 인격과 생명 경시는 물론이고 무자비한 공격과 폭력도 정당화하는 구렁텅이로 빠뜨릴 수가 있습니다. 게다가 현대판 서기장과 바리새파들이 그것을 교묘하게 이용하고 백성의 눈과 귀를 가로막는다면, 평강과 사랑의 예수를 또 십자가에 못을 박게 되지 않겠습니까? 실제로 우리는 여기저기에서 그것을 이미 목격하고 경험하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 새길 공동체는, 이것을 그냥 두고 볼 수가 없는 나머지, 외롭지만 힘차게, 괴롭지만 기쁘게, 예수그리스도의 몸 된 공동체를 가꾸어 나가기로 결단을 하고 창립을 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들은 그것을 아멘으로 받아들이고 이렇게 동참하고 있는 것이고 말입니다. 따라서 새길공동체는 더 강해지고 성공을 해야합니다. 그리하여 세상을 깨우치고 바로 세우는 데 앞장서는 예수따르미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주님 보시기에 참 좋은 공동체가 아니겠습니까? 그만큼 “오류와 착각의 퍼즐 게임”과 합심해서 기도하고 뜻을 모으는 일은 필수적일 것입니다.
제게 있어, ‘보이지 않는 고릴라’가 준 깨달음은 그 어느 것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크고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요즈음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보이지 않는 고릴라’를 보여주고, “바깥에서 살펴보기”, “오류와 착각 퍼즐 게임”을 강조하고 다닙니다. 또한 주께서 그토록 원하시는 사랑과 평강이 넘치는, 나, 가족, 학교, 종교, 그리고 나라를 실현하는 작은 디딤돌이라도 놓으려고, 비록 헌신적이고 열성적인 것은 아니지만, 시간과 땀을 보태고 있습니다.
그런데 부끄럽고 속상하게도, 제가 그렇게 믿었던 분석력과 치밀함이 자꾸 줄어들고 있음을 느낍니다. 말씀 증거 원고 글자를 13 포인트 까지 높여야 잘 보이는가 하면, 생각도 좁아지고 작은 일로 쉽게 서운해지는 것도 느껴집니다. 오류와 착각이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만, 그게 현실이니 두렵기만 합니다. 더 나이가 들기 전에, 더 생각이 좁아들고 자기 집착이 커지기 전에, 그래도 자기의 생각과 행동을 돌이켜 볼 수 있는 여지가 남아 있을 때, 무슨 일일인가를 해두어야 한다는 생각에 마음이 자꾸 바빠집니다. 멋지고 값진 제 2 인생을 살겠다면서 명예퇴직까지 했는데, 뭐하나 제대로 이룬 것 없이 4년이나 보냈으니 어찌 안그러겠습니까? 그러니 어찌 원숭이식 착각, 오만의 맹시, 이해관계 착시, 파당 맹시, 바리새파 오류의 종이 되어, 그 귀한 시간을 사람 미워하고 세상 어지럽히는 쓸데없는 일에 허비할 수가 있겠습니까? 기쁘고 즐겁게 살고, 서로 돕고 사랑하기에도 시간이 부족한데 말입니다.
저의 이 깨달음이, 여러분께도 귀한 보약이 되고, 동참의 동기로 작용하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평신도 열린공동체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사단법인 새길기독사회문화원, 도서출판 새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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