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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복음으로(1) "복음이라 불리는 이유"

고린도전 김영봉 목사............... 조회 수 1287 추천 수 0 2015.07.12 23:54:18
.........
성경본문 : 고전15:1-5 
설교자 : 김영봉 목사 
참고 : 와싱톤한인교회 http://www.kumcgw.org 

2014 년 3 월 9 일 주일 설교
와싱톤한인교회 김영봉 목사
'다시 복음으로'(1) "복음이라 불리는 이유"
(Why It Is Called the Gospel)
고린도전서(1 Corinthians) 15:1-5


1.
이미 말씀 드린 것처럼, 오늘부터 부활절까지 저는 '다시 복음으로!'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려 합니다.
여러분 중에는 이미 복음을 알고 있고 믿고 있으며 살고 있는 분이 많이 계십니다. 그런 분들은 이번 연속 설교를 통해
복음 안으로 더 깊이 들어 가시기 바랍니다. 사순절 기간 동안 우리 교회의 추천도서로 선정한 <복음본색>에서 그리어(J.D.Greear)목사는 "믿음이 깊어진다는 말은 복음을 넘어선다는 뜻이 아니라 복음 안으로 더 깊이 들어가는 것이다"라고말합니다. 진실로 그렇습니다. 복음을 듣고 복음의 감격에 젖었던 기억이 희미해진 분들은 이번 기회에 그 감격을 회복하시고복음 안에 더 깊이 들어가시기 바랍니다.


그런가 하면, 교회는 다니지만 복음이 무엇인지, 왜 복음이라고 하는지, 복음을 믿을 때 어떤 변화가 생기는지, 잘 알지못하는 분들도 계십니다. 종교 생활을 하는 것으로 만족하는 분, 어렸을 때부터의 습관으로 교회 다니는 분, 혹은 문화 생활혹은 취미생활처럼 다니는 분도 계실 것입니다. 예배를 드리지 않으면 하나님께 벌을 받는 것은 아닌가 하는 막연한 두려움때문에 다니는 분도 계실 것이고, 하나님은 무섭지 않은데 아내가 무서워 다니는 분도 계실 것입니다. 이번 연속 설교가 그런분들에게 도움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종교인에서 신앙인으로, 회의하던 사람이 믿는 사람으로, 질문하던 사람이 고백하는사람으로, 두려워서 믿던 사람이 좋아서 믿는 사람으로 변화되기를 바랍니다.


2.


'복음'이라는 말은 헬라어 '유앙겔리온'(euaggelion)을 번역한 말입니다. '유앙겔리온'은 '좋다'는 뜻의 '유'와
'소식'이라는 뜻의 '앙겔리온'이 합쳐져서 만들어진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한자어 '복음'(福音)은 헬라어 '유앙겔리온'이라는단어와 정확히 일치합니다. 영어로는 the Gospel 이라고 하는데, 이것도 역시 '좋다'는 뜻의 good 과 '소식'이라는 뜻의spel 이 합쳐져서 만들어진 단어입니다. '가스펠'이라는 단어가 고어가 되어 버렸기 때문에 요즈음에는 the GoodNews 라는 단어를 더 많이 사용합니다.


그러므로 복음이 무엇인지를 이해하려면 두 가지 질문을 해결해야 합니다.


첫째, "복음은 어떤 소식을 말하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우리는 일상 생활에서도 복음이라는 단어를 비유적으로
사용하곤 합니다. 몸에 이상이 있는 것 같아서 여러 가지 검사를 하고는 그 결과를 기다릴 때면 마음이 불안합니다.
그러던 중에 전화를 통해 "아무 이상 없습니다"라는 의사의 음성을 들으면, "아, 이건 복음이야!"라고 말합니다. 듣는
사람에게 반가운 소식은 모두 복음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에서 말하는 복음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성경이 말하는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소식이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일어난 소식을 가리킵니다. 오늘 읽은 말씀에서 바울 사도는 복음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내가 여러분에게 전한 복음을 일깨워 드립니다. 여러분은 그 복음을 전해 받았으며, 또한 그 안에
서 있습니다. 내가 여러분에게 복음으로 전해드린 말씀을 헛되이 믿지 않고, 그것을 굳게 잡고 있으면, 그 복음을
통하여 여러분도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 (고전 12:1-2)


2
사도는 자신이 고린도교인들에게 전한 것을 '복음'이라고 부릅니다. 그 복음은 믿는 사람을 구원하는 능력입니다.
그래서 그 복음을 다시 일깨워 주려는 것이라고 쓰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복음의 핵심 내용을 이렇게 요약합니다.
나도 전해 받은 중요한 것을 여러분에게 전해 드렸습니다. 그것은 곧, 그리스도께서 성경대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셨다는 것과, 무덤에 묻히셨다는 것과, 성경대로 사흩날에 살아나셨다는 것과, 게바에게 나타나시고 다음에
열두 제자에게 나타나셨다고 하는 것입니다. (고전 15:3-5)


여기서 바울 사도는 할 수 있는 한 간단하게 복음의 내용을 요약합니다. 더 줄여서 말한다면,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일어난 일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일어나는 일에 대한 소식입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두 번째 질문이 나옵니다. 즉, "왜 그것이 복된 소식인가?" 하는 질문입니다. 어떤 소식이 "좋다",
"기쁘다" 혹은 "복되다"고 말하는 이유는 어떤 중요한 문제가 해결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소식이 복된 소식 혹은 기쁜 소식이 되는 이유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아주 중요하고 심각한 문제를 해결해 주기
때문입니다.


3.


그렇다면, 우리에게 무슨 문제가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고는 치료될 수 없는 문제가 무엇입니까?
우리가 자주 부르는 찬송가 중에 "예수님은 누구신가"라는 제목의 찬송이 있습니다(96 장). 1892 년부터 우리
나라에서 선교사로 활동했던 민로아(F.S. Miller) 선교사가 지은 찬송인데, 네 절로 되어 있는 그 찬송의 1 절 가사가
이렇습니다.


예수님은 누구신가
우는 자의 위로와
없는 자의 풍성이며
천한 자의 높음과
잡힌 자의 놓임 되고
우리 기쁨 되시네


1 절만 보아도 알 수 있듯, 이 찬송은 인생 살이를 하면서 우리가 겪게 되는 모든 문제에 대한 해답이 예수 안에
있다는 고백을 담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떤 환경에 처한 사람에게든 해답이고 또한 구원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믿는 사람들은 어떤 문제든지 예수님 앞에 가지고 나가 맡기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소식이 복음이라고 말하는 데에는 보다 근본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그분은 우리가인생길에서 만나게 되는 이런 저런 문제들을 해결해 주시는 분이기도 하지만, 그 모든 문제의 뿌리가 되는 근원적인질병을 고쳐 주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산다는 것은 끊임없이 문제를 풀어가는 과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불교에서 말하듯, 인생은 '고해'(troubled sea) 즉
파도치는 바다와 같습니다. 하나의 파도를 넘으면 또 다른 파도가 밀려옵니다. 건강에 문제가 생기기도 하고, 관계에
실패하기도 하며, 재정적인 위기를 겪을 때도 있습니다. 때로는 자신의 실수 혹은 잘못된 선택으로 인해 문제를 겪기도하고, 때로는 이웃이나 환경으로 인해 고통을 겪기도 합니다.


3


이 문제들 가운데 많은 것들은 우리 자신의 노력으로 예방할 수도 있고 또한 해결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손이 닿지 않는 영역이 있습니다. 그런 한계를 거듭 경험하다 보면, 자신이 통제할 수 있는 영역 너머에서
무엇인가가 심각하게 잘 못 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영혼 깊은 곳에 스스로는 해결할 수 없는 심각한 질병에
걸려 있지 않는가 의심하게 됩니다. 자신이 겪는 모든 문제가 그 뿌리에서 나오는 것을 느낍니다.


개인적인 차원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사는 사회를 관찰해 보아도 그렇고, 국제 관계를 살펴 보아도
그렇습니다. 한 때, 인간의 이성만 가지고도 이 땅에 유토피아를 건설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던 때가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경제적으로 가장 부유하고 이성적으로 가장 깨어 있으며 과학 문명이 가장 발달한 나라 중 하나에 살고 있습니다.


이 정도로 모든 면에서 발전했다면, 우리의 인간성은 과거보다 훨씬 더 진보해 있어야 하고, 우리 사회는 유토피아에 더가까이 가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보고 듣는 것은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인간성은 더욱 비루해지고 있고, 사회는더욱 꼬이고 있습니다.


결국, 한 개인의 문제든, 사회의 문제든 혹은 국제적인 문제든, 그 문제의 뿌리는 개인 개인의 내면에 있음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작년, 클리블랜드에서 10 년 가까이 세 여성을 지하실에 감금하고 성 노예(sex slave)로 삼은 아리엘


카스트로(Ariel Castro)가 검거되어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습니다. 그가 작년 9 월에 감옥에서 스스로 목을 매어
자살했는데, 그 전에 그가 재판정에서 뭐라 했는지 아십니까? 뻔뻔하게도 "나도 희생자다"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그
뉴스를 읽으면서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것은 어쩌다 볼 수 있는 특별한 현상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오히려 그 사람이 우리 모두의 타락한 본성 안에 어떤
괴물이 숨어 있는지를 보여주는 거울이라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우리 모두의 영혼은 깊은 곳에서 심각한 병에 걸려
있습니다. 그 병든 영혼이 근본적인 차원에서 치료되지 않는 한, 인생의 문제는 해결될 수 없습니다. 또한 한 두 사람이아니라 세상 모든 사람들의 병든 영혼이 치료 되어야만 이 땅에는 진정한 유토피아가 이루어질 것입니다.


자신의 내면을 진지하게 성찰하면서 영혼의 질병을 발견한 사람들은 하늘을 쳐다 보며 묻습니다. "거기 누구
없습니까? 나의 이 질병을 치료해 줄 사람, 어디 없습니까?" 그렇게 자신의 내면에서 질병을 발견한 사람들은 같은
눈으로 세상을 봅니다. 모든 인간이 동일한 영혼의 질병에 감염되어 있음을 발견하고는 하늘을 향해 묻습니다. "거기
누구 없습니까? 갈수록 깨어지고 오염되고 잔인해지는 이 세상을 치료할 사람, 어디 없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그 '누구'라는 것이 복음입니다. 사람이면 누구나 감염되어 있는 근원적인 영혼의 질병을
치료해 주실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며, 한 사람의 영혼을 치유하여 결국 세상을 온전하게 하고 회복하시는 분이 바로그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분은 새 하늘과 새 땅을 이루어 우리 모두가 염원하는 유토피아를 이루어주실것입니다.


4.


앞에서 말한 대로, 우리 자신을 정직하게 성찰하다 보면, 우리 자신으로서는 어찌 할 수 없는 영혼의 질병을
발견하기도 하지만, 그 반대 현상을 보기도 합니다. 어디서 나오는지 그 출처를 알 수 없는 거룩하고 고상한 열망을 우리내면에서 발견합니다. 그 거룩하고 고상한 열망을 항상 온전히 따라 살지는 못하지만, 그렇게 살고 싶은 열망이 자주꿈틀대고 또 때로는 그렇게 행동하기도 합니다. 그럴 때면 자신이 꽤 괜찮은 사람이라는 느낌이 들어서 행복합니다.
그뿐 아닙니다. 하루 하루의 삶을 돌아보고 성찰하다 보면, 나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자주 느낍니다. 깊은 밤중에
홀로 앉아 지나온 나날들을 돌아 보시기 바랍니다. 정신없이 살아갈 동안에는 혼자인 것 같았는데, 지나 온 발자취를
돌아보면 혼자가 아니었음을 깨닫습니다. 어둡고 험한 골짜기를 지날 때는 마치 홀로 내버려진 것 같아서 원망도 하고
좌절도 했지만, 지나고 보니 혼자서는 그 골짜기를 지나 온 것이 아님이 분명해 보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문화는 눈 질끈 감고 앞을 향해서 질주하게 만듭니다. 그것이 우리 시대의 불신의 경향을 더
심각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살아가면서 잠시라도 자주 멈추어 자신을 들여다 보고 뒤를 돌아보고 또한 주변을 살펴 보면,부드러운 손길로 나를 인도하시고 지켜 주시며 이끌어 주시는 손길을 느낍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잠자고 있는 정신을깨우시고, 서두르는 손길을 잡아 주시며, 만나는 사람들을 통해 갈 길을 알려 주시고, 번개같은 깨우침으로 실수를 막아주십니다. 그 손길을 보려면 차분히 그리고 찬찬히 내면을 보고 주변을 돌아 보아야 합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것은 우리가 늘 사용하는 문명의 이기들이 자기 자산을 돌아보고 성찰하는 것을 더욱 어렵게
만들어 놓았습니다. 전화도, TV 도, 컴퓨터도, 자동차도 모두 스마트해진 까닭에 모두 다 모니터에 얼굴을 파뭍고
살아갑니다.


지난 주, 누구와의 약속 때문에 어느 공공 장소에 갔습니다. 현관 문을 열고 들어서자 20 여명의 사람들이 이곳
저곳에 앉아 있습니다. 그 중에 곁눈으로라도 저를 쳐다 본 사람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하나같이 스마트 폰이나 태블릿혹은 컴퓨터를 보고 있었습니다. 그 모습이 얼마나 이상해 보이던지요! 저도 무료한 시간에는 자주 스마트 폰을 들여다보는데, 그 날은 그럴 수 없었습니다. 모니터에서는 우리를 인도하는 보이지 않는 손길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것이 우리시대의 문제입니다.


개인적인 차원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우리 주변에서 혹은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영혼이 병든
사람들이 서로 얽히고 설켜 만들어 가는 것이 우리가 사는 세상의 현실입니다. 때로는 악순환이 반복되는 역사를 보고
실망하기도 합니다. 요즈음 우리는 이미 역사의 한 페이지가 되었다고 믿었던 냉전 체제가 다시 복구되는 것 같은 불길한느낌을 받고 있습니다. 종군 위안부의 이야기는 인간성에 환멸을 느끼게 만듭니다만, 정작 일본 정부는 그 사실을
집요하게 부정하고 있습니다. 그런 뉴스를 접할 때마다 저는 하나님께 묻습니다. "주님, 제가 저들까지 사랑해야 하는 것맞지요? 그런데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그 추악한 범죄 행위를 부정하는 오만무도한 표정 앞에서 저는 좌절감을
느낍니다.


그런 모습을 볼 때면 인간의 역사는 탐욕의 역사인 것 같아 보입니다. 인류 역사의 방향은 실수와 사고와 우연으로
정해지는 것 같습니다. 그 어떤 방향도 없어 보입니다. 하지만 또 때로는 그것만이 전부가 아님을 깨닫습니다. 우리 눈에보이지 않는 거대한 손이 역사의 흐름을 이끌어 가고 있음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권력을 가진 사람들은 다 제 각기
자신의 이익과 욕망을 위해서 판단하고 선택하고, 그들의 선택에 의해서 역사의 방향이 정해지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모든 것을 허용하면서도 인간의 모든 선행과 악행을 엮어 역사의 방향을 정해가는 손이 있음을 느낍니다.


지난 목회자 학교 기간 동안에 하루는 오후 시간을 할애하여 아리조나의 사막을 보러 나갔습니다. 이번에 멘토로
참여하신 김중언 목사님께서 성능 좋은 카메라를 가지고 오셔서 일행들의 사진을 찍어 주셨습니다. 같이 찍자고 하면
사양하시면서 다른 사람들의 사진만 찍어 주십니다. 그러면서 말씀하십니다. "저는 사진 찍히는 것은 싫어하고 찍는 것만좋아합니다. 그래서 제 사진기에는 제 사진이 하나도 없어요."


그 말씀을 듣고 저는 "목사님, 방금 대단한 신학적 발언을 하셨습니다"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왜 그것이 신학적
발언입니까? 작품 속에는 작가의 모습이 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작품 자체가 작가의 존재를 증명합니다. 우리가 밟았던아리조나의 사막에는 창조주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창조주는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것은마치 아리조나 사막에서 찍은 목회자 학교 일행들의 사진들을 보면서 "김중언 목사님은 그곳에 가지 않았다"고 말하는것과 같은 일입니다.


이렇듯, 개인적인 차원에서 혹은 역사적인 차원에서, 보이지 않는 큰 손의 흔적을 발견한 사람들은 질문하게
됩니다. 그 손은 누구의 것일까? 만일 매일의 삶을 인도하시고 역사의 방향을 이끌어가는 존재가 있다면, 그것은 어떤
존재일까? 그런 초월자가 있다면, 그 존재에 대해 더 자세히 알 수는 없을까? 그 초월자에게 더 가까이 갈 수는 없을까?


지금 경험하는 것보다 더 자주, 더 친밀하게 그 존재의 손길에 붙들릴 수는 없을까?
이런 질문을 가진 사람에게 예수 그리스도는 복음이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그 보이지 않는 손이
누구의 손인지 알게 되며, 그 초월자에게 더 가까이 가는 길이 그분 안에 있고, 그 손에 온전하게 붙들려 사는 길이 그분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5.


나 혼자 사는 것이 아니라 초월자가 존재하고 그분의 보이지 않는 손길의 인도를 받아 내가 사는 것이며, 인간의
역사가 인간들의 실수와 사고와 우연만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모든 것을 다스리며 이끌어가시는 초월자의
손길이 있다면, 해결해야 할 또 다른 질문이 생깁니다. "나는 도대체 누구이며, 내 삶의 의미는 무엇이고, 죽은 다음에는어떻게 되며, 인류의 역사는 마침내 어떻게 되는가?"라는 질문입니다.


초월자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이 질문은 그리 심각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렇게 믿는 사람들은, 인생은 그저
의미없이 순환되는 생명 현상일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근원을 물을 이유도 없고, 또한 죽음 이후를 물을 것도없습니다. 풀이 나고 죽듯, 인생도 그런 것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자기 믿음대로 행복하게 한 평생 살다 가면
그만입니다. 죽고 난 다음에 무엇이 올까를 물을 이유도 없습니다. 우리 육신이 땅 속에서 썩어 결국은 사라져 없어지듯우리의 존재도 그렇게 소멸된다고 믿습니다.


하지만 초월자의 존재를 인정하는 사람은 이 질문이 중요해집니다. '나'라는 존재가 하루 아침에 피었다가
사라지는 존재가 아니라 어떤 초월자에 의해서 창조된 존재라면, 그리고 그 초월자가 매일의 일상에 함께 하시고 또한
인류의 역사를 인도하고 계시다면, 우리는 이 질문들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내가 누구이며 내 인생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풀어갈 수 있는 실마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초월자와의 관계 안에서 자신이 누구인지 발견하고 또한
자신의 인생의 의미와 사명을 발견하는 사람은 목숨이 다하는 순간까지 불태울 수 있는 연료를 얻는 셈입니다.


모든 인간이 마주하게 되는 가장 큰 문제는 죽음입니다. 죽음은 모든 이들에게 두려운 존재입니다. 물론, 두려움
없이 죽음을 맞은 사람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그렇게 죽음을 맞이할 수 있는 이유는 어떻게든 죽음이 주는 공포를극복했기 때문입니다. 죽음이 두려운 이유는 그것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또한 죽음 이후에 어떤 것이 올지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죽음이 무엇인지 나름대로 이해하고 죽음 이후에 대해서도 어떻게든 해결한 사람들은
두려움 없이 죽음을 맞이합니다.


문제는 죽음과 그 이후에 대해 안심하고 믿을만한 근거가 없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그냥 내게 편한대로 믿어서 될
일이 아닙니다. 지금까지 살펴 본 것처럼, 분명히 초월자가 존재한다면 그리고 나의 삶이 어떻게든 그 초월자와 관계가있다면, 죽음과 죽음 이후의 문제도 그 초월자와 관계하여 풀어야 옳습니다. 죽음에 대해서는 결국 두 가지 옵션밖에없습니다. 초월자가 없다면 죽음은 그냥 소멸되는 과정입니다. 반면, 초월자가 있다면, 죽음은 단순히 소멸되는 과정이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죽음이란 무엇일까? 초월자는 죽음 이후에 무엇을 마련해 두었을까? 질문하지 않을 수없습니다.


죽음 이후에 대한 물음을 두려움에서 생긴 반응으로 치부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영생에 대한 믿음을 지나치
욕심의 산물로 비판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영원히 살고 싶은 욕망이 종교를 만들어 낸 것이라고 말합니다.하지만 적어도 기독교의 믿음에 관한 한 그렇지 않습니다. 죽음 이후에 대한 두려움이나 궁금증 때문에 기독교가
만들어진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초월자를 믿는 사람이면 누구나 가지게 되는 질문입니다.


이런 질문을 가진 사람이라면, 예수 그리스도가 복음이 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소식은 인간의 가장 큰
문제인 죽음에 대해 그리고 죽음 이후에 대한 명쾌한 대답을 제시하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에게도
죽음은 여전히 고통스러운 과정입니다. 하지만 더 이상 두렵지는 않습니다. 죽음이 무엇인지 알기 때문이며, 죽음 이후에준비되어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알기 때문입니다.


6.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에게는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소식이 어떻게 들립니까? 그것이 아무 의미 없어
보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심지어, 복음은 거대한 사기극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노력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장담하며, 초월자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고, 인생은 어차피
자기 자신이 만들어 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믿는 사람들은 죽음의 문턱 앞에서 그 모든 자신감이 무너지고
초라하게 두려워 떨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될 것입니다. 혹은 애써 죽음의 공포를 외면하고 담담하게 받아들이려고애를 씁니다.


여러분들은 그렇게 믿지 않으니 이 자리에 나오셨다고 믿습니다. 감사하고 다행한 일입니다.
그렇다면, 다시 한 번 확인해 보십시다.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소식이 여러분에게는 진실로 복음입니까? 여러분의
가장 중요한 고민에 대한 대답이며, 여러분의 가장 깊은 문제에 대한 해결입니까? 복음을 생명보다 귀하게 여겼던
사람들이 이해가 되십니까?


여러분은 자신에게 문제가 있음을 인정하십니까? 여러분 개인의 삶도 그렇고, 세상사도 그렇고, 뭔가 근본적인
차원에서 잘못되어 있음을 인정하십니까? 그 무엇으로도, 아무리 발버둥쳐도, 인간의 손에 닿지 않는 영역에 심각한
문제가 있음을 인정하십니까? 그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는 여러분의 인생은 제 자리에서 맴돌 수 밖에 없고, 인간 현실도개선될 수 없음을 인정하십니까?


여러분은 또한 여러분의 마음 안에서 혹은 삶 속에서 다른 누군가의 보이지 않는 손길을 경험하십니까? 뿐만
아니라, 역사의 흐름 가운데서 움직이시는 보이지 않는 손길을 보십니까? 그렇다면 그 손의 주인은 과연 누구인지 알고싶지 않습니까? 그 손의 주인을 더 친밀히 알고 그 손길에 더 깊이 사로잡히고 싶지 않습니까?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이 누구인지, 왜 살아야 하는지, 알고 계십니까? 여러분은 어디에서 왔으며 어디로 가는지
아십니까? 내가 '나'라고 알고 있던 모든 것이 해체되는 죽음의 문턱에서 여러분은 자신의 운명이 어찌될지 해답을
가지고 계십니까? 언제라도 죽음을 대면할 믿음의 담력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이 이미 들어 오셨던 복음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번 연속 설교를 준비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바울 사도가 말한 대로, "복음을 일깨워" 드리기 위함입니다. 부디, 저와 여러분,
우리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소식을 다시 듣고, 그분이 진정으로 복음이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기 바랍니다.
바울 사도가 말한 대로, 복음은 어느 누구든지 모든 믿는 사람을 구원하는 능력이 되기 때문입니다. 아멘!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의 복음이 되신 주님,
저희로 하여금
복음을 듣게 하시고
믿게 하시며
또한 그 안에 거하게 하소서.
복음의 능력으로
이 땅에서
또한 죽음 너머에서
구원을 누리게 하소서.
아멘.


<속회자료> 2014 년 3 월 9 일 주일 설교 '다시 복음으로'(1)
"복음이라 불리는 이유"(Why It Is Called the Gospel)
1. 찬송을 부르며 시작합니다. 96 장(통 94)
2. 한 사람이 대표로 기도합니다.
3. 고린도전서 15 장 1-11 절을 읽습니다. 복음의 내용은 무엇이며, 복음의 능력은 무엇인지 생각해
봅니다. (10 분)
4. 말씀의 요약 (웹싸이트에 있는 말씀 요약을 읽습니다. 10 분)
5. 말씀의 나눔 (한 질문에 대해 15 분 정도를 할애하십시오. 전체 나눔 시간이 90 분을 넘지 않게
하십시오.)
1) 오늘의 말씀을 통해 새롭게 깨달은 것이 있으면 한 가지만 나누어 주십시오.
2) 예수 그리스도가 당신에게는 어떤 의미에서 복음입니까? 예수께서 당신에게 주신 가장 큰 선물 혹은
변화는 무엇입니까?
3) 복음이 당신에게는 얼마나 중요합니까? 복음을 생명보다 귀하게 여겼던 믿음의 선조들과 비교할 때
당신에게는 무엇이 부족합니까?
4) 복음 안에 더 깊이 들어가기 위해 당신에게는 무엇이 필요할까요?
6. 기도
1) 복음을 제대로 알고 믿고 살도록 기도하십시오.
2) 체험으로써 복음을 전할 수 있도록 기도하십시오.
7. 중보기도
돌아가면서 기도 제목을 나누십시오. 각자 다른 사람의 기도 제목을 적어 두고 매일 한 번씩 그 사람을
위해 기도하십시오.
8. 찬송을 부르며 헌금을 드립니다. 542 장(통 340)
9. 주기도문으로 예배를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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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36 에배소서 충만함에 으르게 하시는 하나님 엡3:14-21  강승호 목사  2015-07-24 579
12335 에배소서 삶의 반석되신 그리스도 엡2:11-22  강승호 목사  2015-07-22 642
12334 요한일서 행복을 만드는 말 요일3:4-24  최장환 목사  2015-07-22 804
12333 에스겔 최선을 다하는 삶 겔24:1-24  최장환 목사  2015-07-22 1241
12332 마가복음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 막2:22-28  김경형 목사  2015-07-21 512
12331 마가복음 생베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막2:19-21  김경형 목사  2015-07-21 688
12330 고린도후 은혜를 받으려면 고후6:2  강종수 목사  2015-07-19 731
12329 시편 우리 위해 일하시는 주님 시121:3-6  강승호 목사  2015-07-18 704
12328 누가복음 탐심을 물리 치라 눅12:13-21  이승남 목사  2015-07-18 702
12327 마태복음 예수님의 손은 기적의 손입니다! 마8:1-4, 14-17  이승남 목사  2015-07-18 726
12326 여호수아 믿음으로 축복의 그림을 그려라 수18:1-10  이승남 목사  2015-07-18 806
12325 고린도후 은혜의 자족성 고후12:2-10  정용섭 목사  2015-07-16 688
12324 마가복음 달리다굼 말씀하시다 막5:21-24  정용섭 목사  2015-07-16 801
12323 사무엘상 다윗과 골리앗 이야기 삼상17:32-49  정용섭 목사  2015-07-16 1573
12322 마가복음 씨 비유 막4:26-34  정용섭 목사  2015-07-16 532
12321 고린도후 하늘의 영원한 집 고후4:13-5:1  정용섭 목사  2015-07-16 613
12320 이사야 상투스 상투스 상투스 사6:1-8  정용섭 목사  2015-07-16 797
12319 로마서 성령의 도우심 롬8:22-27  정용섭 목사  2015-07-16 820
12318 사도행전 사도의 직무 행1:15-17  정용섭 목사  2015-07-16 617
12317 사무엘하 여호와가 지으시는 집 삼하7:1-14a  강승호 목사  2015-07-15 515
12316 사무엘상 마음을 얻는 길 삼상25:1-22  최장환 목사  2015-07-15 727
12315 에스더 낮아지면 높이신다 에6:1-14  최장환 목사  2015-07-15 738
12314 역대상 여러 가지 방법으로 대상1:1-4  박성철 목사  2015-07-15 356
12313 역대상 그리스도인의 가문 대상1:1-42  박우택 목사  2015-07-15 754
12312 마가복음 나는 무엇을 내 신랑으로 삼고 있는가? 막2:16-20  김경형 목사  2015-07-13 344
12311 마가복음 신랑과 함께 있을 때는 금식할 수 없나니. 막2:16-20  김경형 목사  2015-07-13 531
12310 요한복음 어머니를 찾습니다(Mothers In Danger of Extintion) 요10:11-15  김영봉 목사  2015-07-12 596
12309 베드로전 거듭난 나그네(A Born-Again Foreigner) 벧전1:17-23  김영봉 목사  2015-07-12 898
12308 고린도전 다시 복음으로'(7)"복음을 살다"(Live the Gospel) 고전15:12-19  김영봉 목사  2015-07-12 800
12307 요한계시 다시 복음으로'(6)"복음 앞에 무릎 꿇다" 계3:20  김영봉 목사  2015-07-12 869
12306 로마서 다시 복음으로!' (5)"복음 앞에서 웃다" 롬5:1-11  김영봉 목사  2015-07-12 779
12305 시편 다시 복음으로'(4)"복음 앞에서 울다" 시51:1-12  김영봉 목사  2015-07-12 877
12304 시편 다시 복음으로(2)- "복음 앞에서 떨다" 시29:1-11  김영봉 목사  2015-07-12 962
» 고린도전 다시 복음으로(1) "복음이라 불리는 이유" 고전15:1-5  김영봉 목사  2015-07-12 12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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