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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막2:16-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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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경형 목사 |
참고 : | 궁극교회 주일예배 |
2장 16절-20절: 바리새인의 서기관들이 예수께서 죄인과 세리들과 함께 잡수시는 것을 보고 그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는가 예수께서 들으시고 저희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들이 금식하고 있는지라 혹이 예수께 와서 말하되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의 제자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금식할 수 있느냐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는 금식할 수 없나니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날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성경 66권은 영적 미모성적인 면, 또는 영적 면의 건강성 능력성, 영적 면에서의 병을 말하고 있고, 그 면의 죄를 말하고 있는 건데 예수님 당신의 바리새교인들은 이것을 전혀 알지도 못하고 있고, 영적인 면의 병을 고쳐주지도 못하고 있었다.
세상의 일반병원은 사람의 몸 신체, 눈에 보이는 병 이런 면을 치료를 한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은 영적 면에 관해 치료를 하는 것이다.
인간 자기는 영과 육으로 결합된 인간이라. 영과 육으로 만들어진 인간이라. 그런데 일반 세상 사람들은 선악과 따먹은 이후로 육신이 제일 중요성으로 들어가 있다. 눈으로 보이는 거, 일하는 거, 자기의 신체의 건강성, 또는 신체의 미모성 면에 무척 신경을 쓰고 있고, 그 면에 돈을 들이고 투자를 많이 한다.
그러나 인간은 영적인 면이 자기의 주격이니, 집이 있으면 기둥이 있어서 이 기둥이 그 집의 모든 걸 지탱하고 있는 것처럼 예수 믿는 자는 예수 믿는 신앙사상, 그 정신, 그 소원 목적이, 영인성장 면이 기둥처럼 서 있어야 되겠는데 믿는 자가 자기의 기둥이 뭔지를 모르기 때문에 예수를 믿으면서도 자꾸 세상의 눈에 보이는 것을 이뤄달라고 그러는 거다. 예수 믿는 사람이 그러고 있다. 예수 믿는 목사가 그러고 있다.
눈에 보이는 것을 갖고 와서 성경구절을 가지고 이루라고 하는 것은 마귀가 성경구절을 가지고 예수님에게 시험을 거는 거와 똑같다.(마4:) 마귀도 성경구절을 잘 쓴다. ‘돌로 떡을 만들어 먹어라. 뛰어 내려라.’ 세상을 구경시켜 주면서 ‘절만 하면 다 줄게’ 한다. 이 원리가 에덴동산에서 보암직한 거다. 떡을 보면 먹음직 보암직하다. 또 눈에 보이는 예배당의 십자가가 높이 서 있으면 보암직하다. 그 다음에 세상의 많은 영광을 보여주니 그게 탐이 난다. 선악과과 그렇게 보였다.
그러니까 선악과 먹는 정신이 뭐냐? 세상의 정신 사상 소원 목적을 먹는 것이 선악과를 먹는 거다. 예수 믿는 사람이 선악과를 먹으면, 예수 믿는 사람이 세상의 것을 소원 목적하며 그것을 예수이름으로 이뤄달라고 하면 이거는 생명과를 먹는 게 아니라 선악과를 먹는 거다.
선악과를 먹으면 신앙 믿음이 자라는 면에서 자라지를 못한다. 마치 죽은 시체가 자라지 못하는 것처럼 자라지 못한다. 다른 말로 하면 신앙이 죽었다 그 말이다. 그거 먹으면 너는 하나님 앞에 사는 사람이 아니고 죽는다 그 말이다. 이런 자는 사람들이 볼 때는 ‘와’하고 굉장히 보일지 모르지만 사람을 판단하고 심판하고 은혜를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라.
예수 믿는 것을 그런 소원 목적을 가지고 믿으면 너는 죽었다. 영인성장 면에 너는 죽었다. 네 머리통이 맨날 세상 염려 걱정을 하니 네 머릿속에서는 하나님의 생각으로 살아나는 게 없다. 너는 죽었다. 죽은 인간이다. 예수 믿으니 산 것처럼 보여지나 실상은 죽은 자로다.
‘실상은 죽은 자로다’ 하는 이 말이 공동묘지의 죽은 시체를 놓고 하는 말이냐, 믿는 사람의 믿음을 놓고 하는 말이냐? 믿음이다. 믿음의 실상이다.
오늘날 이 마지막 시대에 예수를 믿어도 믿음에 파선되고 죽은 자들이 참 많다. ‘교회 다닌다’ 이게 문제가 아니라 믿음이 없느니라. 네가 예수 믿는다고 하는 그 믿는 믿음이 믿음이 아니다 왜? 세상을 구하기 때문에. 이방세상이 구하는 것과 똑같이 구하고 있으니 믿음이 아니다. 맨날 금식기도 하고, 백 날 천 날 예수를 불러도 그거는 믿음이 아니다.
영원히 없어지지 않는 주님의 그 인격 그 성품이 실상이요, 하늘나라가 실상계다. 하나님은 실상적 존재다. 우리는 허상적 현상계에 사는 거다. 우리는 200년만 지나면 여기 있을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니 이 현상세계는 허상이다. 하나님은 원형이요 우리는 모형이다.
그런데 오늘날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이 자기가 하나님을 만들고 있다. 어떻게 자기가 하나님을 만드느냐? 성경대로 순종하며 만들어지면서 믿으려고 하지를 않고 예수 믿는 자기가 성경 밖의 것을 자꾸 달라고 하고 있다. 얼마나 잘못 알아듣고 있는 건지? 성경에서 ‘구하라’ 하니까 ‘이것 저것 예수이름으로 구하면 다 준다더라’ 여기다 붙이고 있다. 그 앞뒤를 보면 그게 아니다. 네 욕심대로 구하라는 그 뜻이 아니다.
우리가 생각을 해야 한다. 예수님을 믿으면서 예수님이라고 하는 그 분만 달랑 알지 말고 예수님 속에 들어있는 그 속성을 갖는 게 예수 닮는 거다. 그게 아니란다면 예수님 모양을 닮는 거냐? 그렇다면 예수님 모양이 어떻게 생긴 거냐? 자기처럼 생겼느냐, 서양 사람처럼 생겼느냐?
이방종교의 우상을 섬기는 사람들은 부처나 돌이나 나무 앞에서 자기 소원을 이뤄달라는 그것밖에 없지만 그러나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 예수님의 마음도 알아야 하고, 정신도 알아야 하고, 예수님이 나에게 주시려고 하는 게 뭔지도 알아야 한다. 주시려고 하는 거지 빼앗아 가려고 하는 거냐? 하나님께서 인간 나를 당신의 모양과 형상대로 이 땅에 만들어 놓은 것은 하나님 당신 것을 주시려고 하는 거지 노력 충성봉사 시키면서 피 말리려고 하는 건 아니다.
자기의 성격이나 성질이 얼마나 고쳐졌는지? 예수 믿은 지 수십 년이 된다면, 집사 장로 목사가 된다면 자기의 성격이나 성질이나 지식을 바로 고쳐놨는지? 영의 생각이 있고 육의 생각이 있다. 땅의 생각도 있고 하늘의 생각도 있다. 그런데 그 생각 목적도 다 하늘의 것으로 고쳐놓았는지? 자기의 가치판단 평가성이나 이해타산도 자기 것이 아니고 하나님 것으로 다 돌려놓았는지? 이런 걸 생각을 하고 살아야 한다. 이런 걸 생각도 못하고 예수를 믿는다면 이게 미친 게 아니냐?
예수 수십 년을 믿으면서 고치지 못한 자기를 쳐다보며 한탄하고 고쳐달라고 이래야 옳지 하나님도 싫어하고 사람도 싫어하는 성격 성질을 가지고 있으면서 고치지도 않고, 제 마음에 안 맞는다고 남 잡고 싸우기나 하고, 그러면서 교회가 마음에 안 든다고 해싸면 그런 사람은 어디를 가야 자기 마음에 딱 맞을까?
예수 믿는 사람이 최소한 양심이나 있어야 한다. 남이 잘하는 것을 보고 ‘왜 나는 그렇게 안 될까’ 하고 자기를 쳐다보고 하나님 앞에 미안해하는 마음도 갖고 있어야 되지 않겠느냐? 그런데 마지막 시대가 불바다가 되려고 그래서 그런지는 몰라도 오늘날 교회 교인들이 껍데기 외모 모양만 자꾸 커지려고 그러고, 외모 모양 껍데기만 자꾸 투자를 하고. 이게 어떻게 되려고 그러는 건가?
요즘 추수 때가 돼서 곡식들이 많이 나온다. 쌀도 등급이 있다. a급 b급, 쌀도 등급이 있다. 제일 좋은 쌀은 요새 얼마나 가느냐? 제일 싼 거는? 신앙 믿음에 있어서도 거기서 이치가 발견이 되는 거다. 그런데 예수 믿는 사람들이 사시사철의 만물을 보면서도, 계절을 보면서도 그걸 잘 못 느낀다. 깨달으라고 만물을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주는 건데 못 깨닫는다.
그 산천초목의 모든 만물의 곡식들이 나보고 하는 말이냐, 다른 사람보고 하는 말이냐? 현재 예수 믿는 사람보고 말하는 거냐, 안 믿는 사람보고 말하는 거냐? 깨달아야 한다. 그래야 자기가 알곡이 될 수가 있다.
그런데 사람의 마음이 양심에 화인을 맞아서 그런지 모르겠으나 옳은 진리이치를 주고 가치판단 평가를 해서 구별하게 만들어 주려고 하는데도 귀는 열려서 소리를 듣는데 도무지 깨닫지를 못하고 있다. 그런 것에 별로 감각이 없다.
눈으로 보이는 사건이 막 어떻게 되면 그 때는 자기 몸에 불이 붙은 사람모양으로 이리 뛰고 저리 뛰고 야단을 하는데 왜 그 전에 신호를 주고 깨닫게 할 때에는 깨닫지를 못할까? 우리 모두 그런 사람이 아닌가?
인류의 시조 아담과 하와가 저주받은 인류의 시조로서 대표성인데, 이 대표성을 왜 두었느냐?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대표성을 알게 하기 위해서 두었다.
대표설이 좋으냐, 나쁘냐? 즉 하나님께서 자기를 에덴동산에 만들어 놨다면 자기는 선악과를 따먹었겠느냐, 안 따먹었겠느냐? 한 번만 따먹었겠느냐, 여러 번 따먹었겠느냐?
그러니까 한 번을 따먹으나 열 번을 따먹으나 먹은 것은 같다. 하나를 따먹어도 죽는 건 죽는 거다. 그러니까 ‘하나를 따먹어도 따먹었다는 소리 들을 것이니 이왕이면 다 따먹자’ 그거냐? 사람의 마음이 그렇다.
인류 역사적으로 보면 아담 하와가 대표인데, 왜 이 대표를 역사에 심어놓고 나로 그걸 보게 하느냐 하면 ‘바로 그 선악과를 따먹는 성질이 너한테 있어서 지금 너도 따먹고 있다’ 하는 이걸 가르쳐 주고 있다. 그걸 가르쳐 주고 있다는 면에서 대표다.
우리가 예수 믿기 전에는 다 선악과를 따먹었다. 심지어 예수 믿으면서도 따먹고 있으니 말할 게 없다. 그런데 선악과를 따먹고 일단 죽어놓으면 스스로는 못 산다. 천국으로부터 하늘나라로부터 살리는 역사가 와야 살아날 수가 있다. 내 스스로는 못 산다. 불가능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오셔야 만이 되는 거다. 하늘로부터 와야 한다. 땅에서 솟으면 안 된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를 믿고 따르는 거다.
우리의 구원의 대표인 예수님의 말씀은 하늘의 만나다. 하늘의 양식이다. 자기의 영이 이 말씀을 먹고 육신은 의의 병기로 그 말씀에 순종으로 들어가면 그 자기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잘 만들어져 들어가는 것인데 오늘날 교회 안에 이게 별로 없다. ‘어떻게 하던 키우자. 많이 모이게 해서 재미있게 하자’ 이런 곳에서는 속성이 주님의 사람으로 닮는 게 없다. 그 분위기에 날뛰고 그 분위기에 잡혀서 돌아다니고. 참 문제가 심각하다.
그래서 어느 성경에 보면 ‘모든 인간은 죄와 사망 아래 놓여져 있다’고 하는데 이게 기본구원 면에서도 그렇지만 이룰구원 면에서도 보면 정말 옳은 선생을 만나서 옳게 공부하는 게 아니고 마치 깡패 대장을 만나서 맨 못된 짓만 하고 돌아다니는 것처럼 보여지니 사람이 안 된다. 참 사람이 안 된다. 세상 욕심만 가득 들어있지 주님 닮은 참 사람이 안 되는구나. 그래서 또 보면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그런 말도 할만도 하겠구나.
또 성경에 보면 ‘노아는 당대의 의인이었도다’ 했다. 인류 1차적 종말의 그 때에 노아는 세상 사람들, 그리고 지금으로 말하면 예수 믿으면서도 세상 소원 목적을 가르치고 소원하는 그런 무리들에게 섞이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보고자 했다. 그런 그에게 하나님으로부터 방주 짓는 설계가 내려왔다. 설계를 가르쳐 줬다.
예수 바로 믿으려면 자기를 구원할 수 있는 믿음의 설계,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설계, 하나님의 기준 척도를 가져야 한다. ‘예수님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요’ 하는 것은 우리 구원에 있어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기준이요 설계요 척도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내가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들어지는 설계다. 그래서 목사님들의 말씀도 그 이치에 맞아야 한다. ‘예수 믿으면 부자 되고 병 낫고, 어쩌고 저쩌고, 사업 잘 되고’ 그게 아니다.
요즘 신문에 많이 나온다. 절의 중들도 자녀들 대학이나 무슨 신수 그런 면에 목탁을 두들기면서 부처 앞에 빌어준다는 것이다. 그런데 신문에 보면 이름 있다고 하는 목사님들이 나라를 위해서 기도하라고 한다. 이건 세상이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향해서 세상 것을 구하라고 한 적은 한 번도 없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했다. 그의 나라는 하나님의 나라요, 그의 의는 하나님의 의, 즉 옳음이다. 모든 면에서 옳음이다. 지식의 옳음, 지혜의 옳음, 선의 옳음, 사랑의 옳음, 하나님의 사랑의 옳음, 거룩의 옳음.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 하나님의 옳음을 구하라. 그게 이제 능력 있는 사람이다.
인류는 믿고 안 믿고 간에 모두 선악과를 따먹고 있다. 세상적으로 예수 믿는 사람도 선악과를 먹고 있는 것이다. 분명히 알아라. 예수 믿으니까 자기가 예수 생명과 먹는 줄 아는 모양인데 아니다. 예수 믿으면 예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하나님의 본질의 말씀을 자기 인격화 성품화 시키는 거다. 그런데 ‘예수 믿으면 부자 된다’ 하는 게 그게 어떻게 예수님의 인격이고 예수님의 성품이냐? 이건 선악과다. 그래도 판단이 안 되느냐? 판단이 안 되면 하나님이 사건을 갖고 와서 자기에게 보여줄 것이다. 사건을 갖고 와서 ‘이래도 모르겠느냐’ 할 것이다.
에덴동산에서 되어진 그 일을 보면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따먹은 그들에게 짐승을 잡아서 옷을 해 입혔다는 것이 믿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입혀졌다는 것의 예표이니, 여기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천국에서 오셔서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살아갈 살 길을 열어주셨구나’ 이게 나오는 거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천국에서 오셔서 천국을 가르치셨고, ‘하나님의 나라를 말씀하셨다’ 하는 것은 ‘세상에서 돈 많이 벌고 부자 되는 방법을 말했다는 게 아니다. 성경을 뒤엎지 말아라. 거짓된 목사들과 이단자들이 성경을 뒤엎어 버린다. 우리는 천국의 사람으로, 하나님의 온전한 성품으로 자라야 한다.
그러면 천국의 사람이라는 게 뭐냐? 하나님의 온전한 성품이 입혀지는 것을 천국의 사람이라고 하는 거다. 하나님의 속성적으로 만들어지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런데 세상을 소원 목적하는 신앙이란다면 그 중심사상은 세상이지 천국은 아닌 것이다.
그런 식으로 해서 교인숫자가 아무리 많아도 그것은 천국의 성질이 아니고, 따라서 예수님을 따르는 게 아니라 세상을 따르는 거와 같다. 세상을 따르게 되면 세상 소원 목적이 들어가 있다. 세상 소원 목적이 들어가 있으면 세상을 따르는 사람이다. 세상을 따르는 사람은 세상을 우상으로 받들고 따르는 거다. 그게 우상을 섬기는 사람이다. 성경에 있다.
18절-20절: 신랑을 빼앗겼을 때에 금식을 하라. 신랑하고 같이 있으면 인격적 애정적 수수관계가 된다. 이게 지금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느냐? 지금 이게 예수님을 말하기 위해 하는 말이다. 예수님과 같이 있으면 예수님의 그 천국의 마음 정신 소원 목적과 인격적으로 애정적으로 주거니 받거니 수수관계가 된다.
도둑놈들도 남의 집에 도둑질하러 가려면 어떻게 하고 갈까? ‘담을 넘어 갈까? 어쩌고 저쩌고, 먼저 담을 넘어 들어가서 문을 따라’ 하며 자기들끼리 얘기할 때 그게 재미가 있겠느냐? 그 말을 듣고 ‘야, 그렇게 하면 성공률이 90% 이상이다’ 해서 이제 확신을 갖고 도둑들이 손을 들고 ‘짝’ 하고 손을 맞추면 그게 인격적인 관계냐?
‘무슨 일을 하자’ 그러면 그 말 자체가 인격적인 관계냐? 아니다. 그러면 ‘사랑한다’ 그러면 그 말 자체가 인격적인 관계냐? 말 자체는 인격적인 관계다. 그런데 그 말을 구별해 들어가면 그 이유가 있는 거다. 내 머리카락만 보고 사랑한다는 그 말인지? 물들인 손톱을 보고 사랑한다 그 말인지? 그렇다면 이건 인격적인 게 아니다.
신랑을 빼앗겼을 때 금식하라. 신랑과 같이 있으면 인격적 애정적 결합적 수수관계가 되는 거다. 그러니까 인격적 애정적 수수관계로 신랑과 같이 있으면 괜히 즐겁고 괜히 기쁘고 괜히 행복하고, 세상의 크고 작은 사건 환경이 오더라도 다 헤쳐 나갈 수가 있다. 그런데 아무리 부요의 환경에 있다 할지라도 신랑 신부가 의사단일이 된 사랑의 결합이 아니라면 이는 지옥이 되는 거다. 만날수록 지옥이 된다.
신랑을 빼앗겼다면 고독하고 쓸쓸하고 불행하고 모든 사건 상황을 이겨나갈 수 없다. 말하자면 삶을 포기하고 죽음으로 가나게 된다. 예수 믿는 성도에게는 예수 그리스도가 너의 신랑이다. 교회의 신랑은 예수님이다. 교회의 머리는 예수님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성도에게 빛과 같은 존재란 말이다. 인간이 해를 떠나서는 살 수 없는 것처럼 성도는 이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모든 것을 받고 이기고 능력화 되고 누린다. 진정한 의미에서 성도의 존재는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모든 신령한 것을 받고 세상을 살 의욕과 희망과 소망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왜 신랑을 빼앗겼을까? 성도가 예수 그리스도를 빼앗겼다면 어떤 마음상태가 되겠느냐? 성도의 마음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를 신랑으로 모셨다면 하늘의 기쁨 하늘의 행복 하늘의 만족이 있을 터인데 신랑을 빼앗기니 하늘의 기쁨과 즐거움과 행복이 없어진다. 이렇게 되니 세상을 살아갈 맛이 없어진다.
세상을 이길 수 있는 그 힘이 그 행복이 그 기쁨이 예수님으로부터 오는 건데 왜 예수님을 빼앗겼을까? 그리고 신랑을 빼앗기면 신부의 마음이 어떤 상태가 되겠느냐? 세상에 있는 것을 신앙적으로 갖고 와서 생각을 해 보면 답은 금방 금방 나온다. (계속)
김경형목사님이 교역자 신학생을 대상으로 매 주 정례적으로 진행하는 신학 및 성경연구 모임을 통해 영원 전에 하나님의 의지세계에서 인간구원을 설정하게 된 원인과 동기와 목적을 깨닫고 하나님의 본질의 신앙으로 나가는 주의 종들이 누룩처럼 퍼져나가고 있습니다.
참석하실 분은 031-207-5159, 또는 010-8886-5159로 문의해 주세요.(평신도도 참석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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