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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막2:16-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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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경형 목사 |
참고 : | 궁극교회 주일예배 |
2장 16절-20절: 바리새인의 서기관들이 예수께서 죄인과 세리들과 함께 잡수시는 것을 보고 그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는가 예수께서 들으시고 저희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들이 금식하고 있는지라 혹이 예수께 와서 말하되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의 제자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금식할 수 있느냐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는 금식할 수 없나니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날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신랑이라는 게 뭘 말을 하는 거냐? 일반 사람들은 ‘신랑 신부’ 하면 사람을 말을 하는 거다. 그런데 ‘신랑 신부’라 할 때 그 속에서 작용하는 거는 사람 눈에는 안 보인다. 그렇지만 실질적으로는 작용을 하는 거다. 그러니까 ‘신랑 신부’ 그럴 때 그 안에서 작용하는 그걸 생각하면 어떤 표현이 좋으냐? 일반적인 사랑이 아니고 사랑의 극치, 행복의 극치라야 신랑 신부라는 표현이 딱 맞는 거다. 신랑 신부이면서도 사랑의 극치, 행복의 극치가 없는 신랑 신부란다면 문제가 놓여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안 믿는 사람들처럼 눈에 보이는 면을 가지고 생각을 하면 안 된다. 눈에 보이지 아니하는 그걸 세워야 한다. 성경은 사람의 눈에 안 보이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 눈에 보이는 것을 비유적으로 갖고 와서 말을 한다. 눈에 보이는 것은 전부 비유요 비사다. 눈에 보이는 것 전부는 현상세계이지 실상적인 존재가 아니다. 실상적인 것은 자기 속에 따로 있다. 성경은 눈에 보이지 아니하는 그 면을 찾게 하기 위해서 눈에 보이는 것을 비유적으로 갖고 오는 거다.
신랑 신부 속에는 사랑의 극치, 행복의 극치다. 그러면 사랑의 극치, 행복의 극치가 되려면 무엇이 선행이 되어야 하겠느냐? 지혜지식적 수준, 도덕성적 수준, 그 다음에 능력성적 수준이 단일이 되어야 한다.
이것은 인간의 세계에는 없다. 그런데 신앙의 세계로 들어가서 보면 신적인 것 즉, 하나님의 지혜지식성, 그 다음에 하나님의 도덕성 즉, 선 사랑 거룩 진실, 그 다음에 하나님의 능력성 즉, 의와 주권이 있는데, 이 신적인 것 즉, 하나님의 것으로 되어 있으면 그 인격의 수준성이 엄청나게 고상한 거다. 이거는 땅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것이다.
인간은 인격의 수준이 올라가야 한다. 낮을수록 저질이다. 특히 교회의 교육은 신앙의 교육이 지식성 도덕성 능력성이 신적인 것으로 들어가기 때문에 그 수준이 높은 거다. 하늘로 끌어 올리는 거다.
높이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그 수준이 다른 사람과 같지를 않다. 모든 수준이 그렇다. 그런데 일반세상은 먹고 마시는 것을 놓고, 생활의 편리성을 놓고, 소유성을 놓고 그 수준을 따진다. 그러나 이런 건 아무리 가지고 있어도 하루아침에 불타버릴 수도 있고, 거지가 될 수도 있고, 정치세계가 바뀌면 문제가 되기도 하고 그런다. 이 세상은 현상적인 곳이기 때문에 수시로 바뀌고 변질되고 한다.
수준이 같아지려면 아까도 말했지만 서로가 지혜지식적 수준이 같아야 한다. 올라가야 한다. 차이가 생기면 그만큼 불행과 고통이 뒤따르게 된다. 스스로가 그렇게 돼버린다.
교회에서는 말씀의 이치로 그 수준을 올리는 거다. 일반 도덕성적 사회 윤리적 수준을 가르치는 건 설교가 아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성경을 안 읽고도 이런 말은 얼마든지 할 수 있다. 하지만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그 속에 들어있는 눈에 보이지 않는 은밀한 뜻을 끄집어내서, 그 다음에 하나님의 지혜지식성적 도덕성적 능력성적인 수준으로 올려야만 하나님과 의사단일이 된다. 이 의사단일은 하나님의 본질이다. 하나님의 질적 본질로 같아지는 거다. 이렇게 되면 그 사람은 하나님과의 속삭임이 말로 다 할 수가 없다. 이것은 오늘날 예언 방언하는 그런 수준이 아니다.
성경을 못 깨달으면 자기가 무당이 돼서 이상한 짓을 많이 하게 된다. 기독교는 본질이 그런 게 아니다. 엄청나게 수준이 높은 거다. 그러니까 수준이 높은 신랑 신부라면 행복의 극치, 사랑의 극치가 들어가는 거다. 의사단일로 들어가는 거니까 무엇을 해도 기쁨과 행복의 극치가 된다.
기독교의 설교의 메시지 수준도, 성경공부를 하는 수준도 하나님의 질적 본질적 수준으로 올라가야 한다. 성경을 역사만 알거나, 일반 도덕성적인 개념으로 사회 윤리 기준에 성경을 맞추는 게 아니다. 하나님에게 맞추는 거다. 사람을 하나님 차원으로 끌어 올리는 거다. 천지를 지배할 수 있는 수준으로 올리는 거다. 그래서 ‘생명과 따먹고 지키고 다스리고 정복하고 땅에 편만하라’ 하는 그게 들어있는 거다. 이게 교회에 대한 명령이다. 그런데 타락된 세상은 무기를 가지고 살상을 하는 면으로 정복을 한다. 이거는 사망적인 거지 생명적 참 정복은 아니다. 그걸 분명히 알아야 한다.
신부 신랑은 표면적으로 볼 때도 사랑의 극치, 행복의 극치가 있어야 한다. 이게 없으면 딴 여자 딴 남자를 보게 된다. 물질적 개념으로 맺어진 부부는 위험하다. 결혼이다 하면 살면서 최하로 내려갈 걸 항상 염두에 두고 살아야 하는 건데 늘 물질적인 행복만을 생각하고 맺어지면 그들에게 최하의 사건이 부딪치면 그만 싸우고 헤어지고 하게 된다. 그럼에도 결혼할 때 물질적 조건을 가지고 불쿼나가고, 그 면으로 소유성을 가지면 행복한 줄로 안다. 그건 잘못 생각한 거다.
시집 장가를 가려면 반드시 의사단일이 붙어야 한다. 의사단일은 소원 목적 단일이 들어가는 거다. 안 믿는 사람이 믿는 사람을 사랑한다고 하며 기어코 따라 붙는다면 안 믿는 그 사람을 주님 쪽으로 밀착이 되게 해야 한다. 밀착이 안 되면 안 된다. 분명히 그 선을 그어 놓아야 한다. 육덩이 고깃덩어리 사랑은 금방 식어버리고, 고깃덩어리 사랑을 많이 주고 많이 받을수록 사람이 죽는 거다.
신랑 신부를 말하는 것은 비유적으로 말하는 거다. 그 속에 사랑의 극치, 행복의 극치가 들어있다. 이제 여기서 육체적 신랑 신부를 떼 내면 이 신랑 신부는 껍데기가 된다. 그러니까 이 신랑 신부를 떼 내면 사랑의 극치, 행복의 극치, 인격적 애정적 결합만 딱 남는다. 즉 신랑 신부는 비유요 껍데기니까 이건 떼놓으면 그 다음에 사랑의 극치, 행복의 극치만 남는데 이건 인격에 관한 것이다.
여기서 이걸 우리가 계시적으로 보면 껍데기는 떼놓고 사랑의 극치, 행복의 극치, 즉 알맹이만 가지고 있다면 이 사람은 신랑을 갖고 있는 것이다. 지금 이걸 말하려고 하는 거다. 일반 물질세상은 이건 없다.
성경을 보면 역사계시가 주로 많은데 이게 다 비유와 비사다. 사건도 비유다. 그래서 우리는 이 껍데기를 벗겨버리고 그 속의 알맹이를 가지고 와서, 이 알맹이는 변질이 안 되는 것이고 시대적 바람을 타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이걸 주격으로 세워놓고 그 다음에 행동 활동을 보는 거다. 그런데 대부분은 그 알맹이는 보지 못하고 표면, 껍데기를 보는 것에 그치고, 또 그 기준을 가지고 자기가 자꾸 물질적 소유성을 가지려고 그러는데, 그럴수록 힘이 드는 거다.
우리가 예수님이라 할 때 자꾸 인간 예수만 생각을 하는데 그 인간 예수 속에는 그 분의 언행심사가 있으니 이 전부는 구원의 이치다. 인간이 사는 변치 않는 도리가 그 안에 다 들어있다. 그러니까 우리가 그걸 이치적으로 알면 알수록 예수 믿는 게 참 편해진다. 그래서 예수님께 오는 자는 짐이 덜어지는 거다. 쉬워진다. 모르면 어렵다. 자기 스스로가 어렵게 만들어 놓는다. 그러니 얼마나 고통스러우냐?
우리가 일반적으로 보면 세상을 살 때 자기의 성격이나 성질이 급하거나 더러워서 일을 더 꼬이게 만들고 어렵게 만드는 경우가 참 많다. 그런데 그 탓을 보통은 누구에게 돌리느냐? 남에게로 돌리더라. 그러니 이게 병이다. 이 병을 고쳐주는 병원이 어디냐? 하나님의 것으로 본질화 되는 그런 교회로 가야 한다. 그런 종을 찾아가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목사를 신격화 시키면 안 된다.
늘 사랑하던 신랑을 빼앗겼다면 그 신부의 마음이 어떤 상태가 됐겠느냐? 신랑을 빼앗겼는데도 그 마음이 아무렇지도 않다면 사랑이 아니었거나, 숨겨놓은 신랑이 있다거나 그렇게 될 것이다. 예수 믿는 성도가 예수님을 빼앗겼는데도 아무렇지도 않게 있다면 그는 세상이라고 하는 바람둥이를 신랑으로 삼고 있다고 보는 거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보면 세상바람이 든 신랑도 많다. 본처 내버려두고 맨날 밖에서 자고 들어오고. 그렇게 밖에서 몇 년씩 굴러다니다가 병이 들어서 집에 들어오면 그거 받아주겠느냐? 일반적으로 그게 회개냐? 그렇게 해줬더니 남편이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 그건 미안해서 믿는 거다. 자기 몸이 병들어 놓으니 수종들어 달라는 거다. 일반세상에서는 그런 일들이 흔하다.
우리는 인간의 존재가치를 알아야 한다. 인간 자기의 존재가치는 구원이라는 게 들어있다는 점이다. 구원 때문에 너를 만들어 놨다. 그러면 구원이 뭐냐? 하나님의 성품을 입는 거다. 이 목적으로 너를 인간으로 만들어 놨다. 그러니까 네가 인간이라면 그 목적으로 살아야 한다.
그런데 일반세상은 그게 없기 때문에 그만 인정정실로 울고불고 하며 평생을 고생 고생 하며 살기도 한다. 이건 성경으로 보면 심판이다. 하나님 앞에서 인간을 못 깨달으면 고생을 하고도 심판을 받고 형벌을 받고 한다. 못 깨달으면 그렇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성경을 통해서 깨달아야 한다. 이유는 없다. 하나님의 온전의 성품을 입지 못하면 사람 사는 가치가 없다. 고생한 가치도 없고, 잘 산 가치도 없는 거다. 늘 말씀드리지만 하나님께서 너를 인간으로 만들어 놓은 이유와 목적이 있다. 그 목적을 네가 찾아라. 인간이란다면 네가 찾아야 된다.
우리에게는 이방종교는 용납이 안 된다. 우주만물을 창조하신 그 분을 찾아야지 이방종교인들처럼 뭘 그러고 있느냐? 이방종교는 세상에서 말하는 종교다. 우리 기독교는 종교가 아니다. 전도서에도 말하고 있지만 하나님을 믿는 것은 사람의 본분이다. 성경은 말하고 있다. ‘네 눈에 즉, 창문에 빛이 떨어지기 전에, 늙어져서 눈물이 고여지기 전에 창조자를 기억하라. 자기 집을 지탱하고 있는 힘 있는 자 즉, 등뼈가 굽어지기 전에 창조자를 기억하라.’
인간이면서 자기를 만든 하나님을 바로 모른다면 너는 인간 너를 모르는 존재다. 네가 너를 모르는 존재인데 어떻게 남을 알겠느냐? 그러면 부모를 알 수 있나, 남편을 알 수 있나, 아내를 알 수 있나, 자식을 알 수 있나, 형제를 알 수 있나? 모른다. 모르기 때문에 형제들끼리 그렇게 피 터지게 싸우는 거다.
그러면 그런 사람들이 대학 물을 안 먹었고 학박사가 아닌 줄 아느냐? 법을 모르느냐? 참 인간 존재목적을 알지를 못해서 그 모양이다. 모르면 그렇다. 모르면 사람이 미련하고, 모르면 사람이 무식하고 인간 연관관계성을 모른다.
우리는 예수 믿고 성경을 배우면서 제발 헛 믿지 말아라. 교회 헛 다니지 말아라. 헛 충성봉사 하지 말아라. 성경이 지시하는 대로 하나님의 온전자로 만들어져 가는 자기 존재가 돼야 한다. 세상 밑으로 들어가서 종노릇 하지 말아라.
예수 안 믿는 남편이나 아내가 있으면 예수 믿게 만들어라. 얻어맞아 죽을 각오를 하고 만들어 놔라. 안 그러면 헤어지는 수밖에 없다. 왜 그러냐? 교회라고 하면 바로 교인 자기다. 교회는 세상 밑으로 들어가는 법이 없다. 들어가면 안 된다. 들어가면 죽는 거다. 들어가면 사망이고, 들어가면 형벌이고, 하나님의 진노고 심판이다. 역사가 이것을 증명을 한다. 너는 세상 밑으로 들어갈 자가 아니라 생명과 먹고 지키고 다스리고 정복할 자다. 꼬리가 아니고 머리다.
일반적으로 인간정실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의 이룰구원 차원에서 이용 활용하는 매개물이다. 대화를 통해 상대를 나와 가깝게 만들어서 하나님의 본질의 사람으로 만들어지도록 하는 하나의 매개물이다. 인정정실이 주격이 돼서 하나님의 온전한 성품을 입어가는 그 면에 네가 망조 들지 말아라. 그러면 너에게는 심판이다. 개체적 심판인 사심판으로 들어간다.
예수 믿는 성도가 예수를 빼앗겼는데도 아무렇지도 않게 있다면 세상 바람둥이를 신랑으로 삼고 있구나. 세상정신을 자기의 신랑처럼 삼고 있구나. 그렇게 되니 바로 자기가 바람둥이나 마찬가지다. 세상 소원 목적적인 정신 사상을 갖고 있으면 그 자기는 텍사스 골목에서 몸 파는 여자가 아니라 할지라도 신앙정조와 정절을 파는 교인이다. 그러니 정신을 차려라. 그런 정신을 가지고 예수 똑바로 믿는 사람 한 사람도 없다.
그러면 신랑을 왜 빼앗겼을까? 그 이유를 캐보면 신랑을 지키지 않았거나 등한시 했거나 이다. 이건 일반적으로 얼마든지 생각할 수 있는 거다. 그 다음에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세상을 더 사랑했거나, 아니면 신랑의 존재가치 존귀성을 몰랐거나, 아니면 신랑의 존재가치를 바로 아는 사람에게 빼앗겼거나, 신랑의 존재가치를 인격적 차원에서 몰랐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다른 여자(성도)가 이걸 가만 보니 예수님이 인격적으로 상당히 존재가치가 있는 분이니까 이 예수님을 빼앗아 가버렸다. 영의 눈으로 인격적 차원으로 보는 거다.
이게 지금 하나님의 질을 기준을 세워놓고 일반사람들이 다 알고 있는 일반적인 것을 갖고 와서 사람 속에 들어있는 질적 성질적 성격적인 것을 영원한 것으로 늘어뜨려서 깨닫는 거다. 영원적인 것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 임시적인 것을 갖고 들어오는 거다.
성경은 영적인 것이요 영원한 것을 말하는데 이 성경을 세상의 임시적인 것으로 뒤집어 놓는 것이 거짓 종들이다. 우리는 영원한 것을 깨닫기 위해서 세상 임시적인 것을 갖고 와서 이해를 시키는 거다.
어떤 것이 자기 신랑이다? 사랑의 극치, 행복의 극치. 현재 부부는 그래야 한다. 영원한 것을 기준으로 세워놓고 그렇게 들어가야 한다.
현재 부부는 모형적이고 비유적이기 때문에 언젠가 갈라서고 없어지고 죽기도 한다. 그런데 예수 믿는 성도로서 신랑이 있고 남편이 있는 사람을 말하려는 게 아니라 자기 속에서 행복의 극치, 사랑의 극치 이게 자기 신랑이라 그 말이다. 극치라 하면 하나님의 것 이상은 없는 거다. 지금 이건 주님을 두고 하는 말이다. 주님의 그 수준으로 극치로 들어가는 이것을 말한다. 보이는 신랑 신부도 위치적으로 그 정신 사상으로 올려야 한다. 그래야 이 세상에 살면서도 믿는 성도로서 가치 있게 사는 거다.
세상 물질이나 세상적인 소원 목적은 천국에 필요가 없다. 필요가 없다는 말은 갖다 내버리라는 그 말이 아니고 첫째로 삼지를 않는다 그 말이다. 그러니까 천국의 사람은 물질을 소원 목적으로 살지를 않는다.
예수 그리스도는 너희에게 꼭 필요하다. 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부활 승천으로써 떠났지만 성령으로 다시 오시는 것은 내가 네 안에, 네 안에 내가 결합할 목적으로 오시는 거다. 몸과 몸으로 있을 때는 결합이 안 된다. 그러니까 부활 승천해서 가신 후에 성령으로 다시 오신다고 약속을 하신 것은 내가 네 안에, 네 안에 내가 결합이라고 하는 인격적 애정적 결합적 수수관계를 갖자는 뜻에서 그걸 염두에 두고 보혜사 성령님으로 오시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보면 그렇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다시 오신다는 이것을 개인 신앙으로 볼 때에 믿음이 없거나 약할 때는 예수님을 알려고 부지런히 성경을 보면서 구약에서 선지자들이 말한 거나, 신약에서 자기가 성경을 보면서 만나본 예수님의 언행심사 속에 들어있는 하늘의 뜻이 발견이 되니 그 다음에 성령님이 오셔서 나를 감화 감동시키고 하는 그런 순서로 되는 거다.
우리 신앙세계는 성경을 역사적으로만 알고 있으면 안 된다. 그러면 이룰구원 면에서 현재적으로 영인성장, 영능의 실력이 안 된다. 현재에서 역사하는 그 면을 이치적으로 알아야 자기가 신앙의 확신을 갖고 믿음의 확신을 갖고 영인성장이 되는 것이다.
우리가 혈루증 든 여자의 삶을 봤지만 이 여자의 삶 전부는 사망계로 빠져나갔다. 이걸 현재의 자신들에게 이치적으로 갖다 대면 본인들이 자기의 전 삶이 사망계로 빠져나가는 것을 알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영접이 될 때는 그 다음에 자기의 전 생애는 영원 궁극적인 영생의 세계로 이전이 다 되는 거다. 이게 성경 구약에 있다.
그런데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교인들이나 유대 종교지도자들의 신앙의 성질을 볼 때에 너희들은 개인적으로 민족적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필요가 없다고 하니, 필요 없다는 증거가 예수님을 죽여 버린 것이다. 그러니까 그런 너희들에게는 예수가 필요가 없다는 거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부활 승천으로 가버리는 거다. 이렇게 보면 이룰구원이 되고, 저렇게 보면 저주가 되는구나.
예수 믿는 건 오늘날 우리들에게도, 기독교회 안에도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인 세계가 활동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성도가 진리생명 하나님의 말씀과 관계없이 살 때는 진리생명의 말씀과 관계가 없이 살기 때문에 성령님이 떠나시는 것이다.
예수님을 영접을 안 하니 예수님은 역사적으로 떠났다. 이게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것은 내가 말씀과 관계없이 사니까 성령님은 너로부터 떠나버린다. 이제 너에게 성령님의 역사는 없다. 성령님의 역사가 없으면 그 다음에는 재앙의 역사적인 사건이 너를 덮칠 것이다.
이 사실을 역사적으로 보면 주후 70년에 로마 군대들이 와서 예루살렘을 다 불바다로 만들었다. 이것을 과거의 역사로만 보면 안 된다. 그렇게 망할 수밖에 없는 그들의 신앙이라고 하는 그 정신 사상을 오늘날 기독교 안에서도 볼 줄 알아야 한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구원을 귀한 줄 모르거나, 딴 것을 붙잡느라고 등한시 하거나, 미워하거나 죽이거나 하면 결론은 빼앗기는 거다. ‘너에게 필요 없다. 내가 갖고 간다’ 하는 것이다. 다 빼앗긴다.
성경에 ‘있는 자는 받겠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도 빼앗기리라’ 했다. 그러면 무엇이 있는 자고, 무엇이 없는 자냐? 이건 오늘날 자기에게 다 해당이 되는 말이다. 빼앗기게 되면 이유가 없다. 자기 처참이요 자기 비참이다. 눈은 어둡게 되고 헐벗은 사람과 같이 된다.
18절: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들은 금식한다. 그런데 왜 예수님의 제자들은 금식을 안 했나? 제자들은 비유적으로 신랑이신 예수와 함께 있기 때문에 늘 진리생명의 말씀잔치를 하니까 금식을 안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교제가 잘 돼 나간다. 그러나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교인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처럼 늘 먹지를 못한다. 뭘? 말씀잔치를 못 먹는다.
바리새교인들은 자기들이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금식을 하는 거다. 금식을 해야 신앙이라고 말을 한다. 금식을 안 하면 신앙이 없다고 하고, 금식을 하면 신앙이 있다고 하고, 40일을 금식을 하면 ‘와, 신앙 크다’ 하는 그런 사고방식이다. 하지만 신앙은 먹어야 신앙이 되는 거다. 뭘 먹어야? 예수님을 먹어야, 구원을 먹어야, 진리생명의 말씀을 먹어야 신앙이 되는 거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예수님은 먹어야 신앙이라고 한다. 안 먹으면 뭐냐? 자동적으로 금식이 되는 거다. 그런데 예수님 당시 때의 바리새인들은 종교 의식적으로 일주일에 두 번 세 번 금식을 해야 신앙이라고 본다. ‘무슨 옷을 입어야 수녀다. 중이다’ 하고 보듯이 그렇게 겉으로 보고 판단을 했다.
요한의 제자들은 예수님을 발견하기 위한 금식이다. 요한은 예수님을 자꾸 소개하고 있다. 그런데 바리새교인들은 금식을 잘하는 것을 신앙의 잣대로 삼고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있다. 그러나 신앙이란 길이요 진리요 생명과를 먹고 하나님의 온전한 사람으로 만들어지며 주님과 예수님과 인격적 애정적 결합적 수수관계적으로 동거 동락 동석을 하는 것이 신앙이다.
육에 속한 교인들은 외부의 어떤 행동 활동을 기준으로 세워서 그걸 잣대로 ‘신앙이 좋네. 나쁘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속성을, 주님의 속성을 네가 얼마나 많이 먹었느냐? 옳은 진리이치를 네가 얼마나 많이 먹었느냐?’ 하는 걸 신앙으로 쳐준다. 예수를 믿기는 믿어도 이치를 잘못 알고 있거나 잘못 배웠거나 알지 못한다면 성경을 깨닫기는 힘들다.
우리가 여기서 알고 갈 것은 딴 말은 다 껍데기다. 그러면 가져가야 할 알맹이는 뭐냐? 인격수준의 극치, 사랑의 극치 그게 바로 너의 신랑이다. 그게 바로 영의 눈을 가지고 신앙적 사상적 차원에서 보는 너의 신랑이다. 그게 참 신앙이다 그 말이다.
기독자들 모두는 너나 나나 할 것 없이 인격자로서 자리를 사랑의 극치의 수준으로 올려야 한다. 그런데 수 년 수십 년을 예수를 믿어도, 수 년 수십 년을 목회를 하면서도 맨 세상만 구하다 갔다면 본문을 놓고 생각할 때에 예수 헛 믿고 헛 목회하고 갔구나.
그러니 이렇게 되면 나온다는 게 결국은 세상을 독차지하려고 하고, 세상을 좀 더 많이 끌어당기려 하고, 맨 ‘축복 축복’만 할 테니 사람이 얼마나 저질이냐? 많은 걸 놓고, 먹는 걸 놓고 ‘축복 축복’ 하면 하나님의 얼굴이 어떻게 되는 거냐? 그 신앙의 질이 어떻게 되는 거냐? 수준이 어떻게 되는 거냐? (계속)
김경형목사님이 교역자 신학생을 대상으로 매 주 정례적으로 진행하는 신학 및 성경연구 모임을 통해 영원 전에 하나님의 의지세계에서 인간구원을 설정하게 된 원인과 동기와 목적을 깨닫고 하나님의 본질의 신앙으로 나가는 주의 종들이 누룩처럼 퍼져나가고 있습니다.
참석하실 분은 031-207-5159, 또는 010-8886-5159로 문의해 주세요.(평신도도 참석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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