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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의 직무

사도행전 정용섭 목사............... 조회 수 613 추천 수 0 2015.07.16 23:5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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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행1:15-17 
설교자 : 정용섭 목사 
참고 : http://dabia.net/xe/8187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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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의 직무

행1:15-17, 21-26, 부활절 일곱째 주일, 2015년 5월17일

 

15 모인 무리의 수가 약 백이십 명이나 되더라 그 때에 베드로가 그 형제들 가운데 일어서서 이르되 16 형제들아 성령이 다윗의 입을 통하여 예수 잡는 자들의 길잡이가 된 유다를 가리켜 미리 말씀하신 성경이 응하였으니 마땅하도다 17 이 사람은 본래 우리 수 가운데 참여하여 이 직무의 한 부분을 맡았던 자라 21 이러하므로 요한의 세례로부터 우리 가운데서 올려져 가신 날까지 주 예수께서 우리 가운데 출입하실 때에 22 항상 우리와 함께 다니던 사람 중에 하나를 세워 우리와 더불어 예수께서 부활하심을 증언할 사람이 되게 하여야 하리라 하거늘 23 그들이 두 사람을 내세우니 하나는 바사바라고도 하고 별명은 유스도라고 하는 요셉이요 하나는 맛디아라 24 그들이 기도하여 이르되 뭇 사람의 마음을 아시는 주여 이 두 사람 중에 누가 주님께 택하신 바 되어 25 봉사와 및 사도의 직무를 대신할 자인지를 보이시옵소서 유다는 이 직무를 버리고 제 곳으로 갔나이다 하고 26 제비 뽑아 맛디아를 얻으니 그가 열한 사도의 수에 들어가니라.

 

예수님에게는 제자가 열두 명이 있었습니다. 제자를 불러 모은 이야기가 복음서에 나옵니다. 예를 들어 베드로와 안드레는 갈릴리 호수에서 고기를 잡다가 ‘나를 따르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따랐고, 마태는 세금을 징수하다가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고 따라나섰습니다. 제자들 중에는 자청해서 찾아온 이들도 있었을 겁니다. 이들 열두 명만 예수님의 제자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이들보다 더 열정적으로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몇 명의 여성들은 예수님이 십자가 처형을 당할 때, 도망 다니던 남자 제자들과 달리 그 현장을 지키고 있었고, 예수님이 묻힌 무덤이 비었다는 걸 가장 먼저 발견하기도 했습니다. 그렇지만 공식적으로는 남자들로 구성된 열두 명의 제자들이 당시 일종의 방랑 수도단체인 나사렛 예수 공동체의 주류였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과 부활 승천 이후에도 제자들은 여전히 교회의 기둥으로 활동했습니다. 가룟 유다는 제자 군에서 탈락되었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배신했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가룟 유다를 대신할 사람을 뽑아서 열두 명의 숫자를 채우려고 했습니다. 12라는 숫자는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에서 보듯이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특별한 의미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일종의 보궐 선거라 할 수 있는 그 이야기가 오늘 제1 독서로 읽은 행 1장에 자세하게 나옵니다.

 

예수 승천 이후 평소에 예수님을 따르던 이들이 예루살렘에서 모임을 시작했다는 사실로부터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그곳에 대략 120명이 모였습니다. 베드로가 나서서 자신의 의견을 다음과 같이 피력합니다.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못마땅하게 여기던 사람들의 앞잡이가 된 것은 이미 구약 성경에 예언된 그대로입니다. 그가 왜 예수님을 배신했는지는 우리도 잘 모릅니다. 자신의 정치 종교적 소신이 예수님을 통해서 실현될 수 없다는 판단이 들은 것일까요? 아니면 예수님의 어떤 말씀이나 행동으로 인해서 실망한 것일까요? 그가 재정을 담당하다가 큰 사고를 친 것일까요? 어떤 사람들은 그가 은 삼십이라는 돈에 탐을 내서 그랬다고 하지만, 그것도 정확하지는 않습니다. 그는 희로애락을 우리와 함께 겪으면서 예수님을 삼년 가까이 따른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모든 것을 부정하고 예수님을 제사장들에게 넘겨주었다는 것은 우리에게 얼마나 큰 충격인지 모릅니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숨어 있는 뜻이 어딘가에 있을 겁니다. 이제 우리는 배신감에 머물러 있을 필요는 없습니다. 그가 하던 일을 대신 맡을 사람을 선택해야 합니다.’ 베드로는 이렇게 교우들을 설득해서 사도 선출을 시도할 수 있었습니다.

 

선출 방법이 재미있습니다. 자격이 있는 두 사람을 일단 정했습니다. 한 사람은 요셉이고, 다른 한 사람은 맛디아입니다. 기도한 뒤에 제비뽑기를 했습니다. 오와 엑스 기호를 적은 조개껍질을 주머니에 넣어두고 후보자들이 눈감고 뽑게 해서 결정한 것일까요? 어쨌든지 제비뽑기의 결과가 나왔습니다. 맛디아가 열두 사도에 합류하게 되었습니다. 열두 사도는 곧 열두 제자를 가리킵니다.

 

오늘 한국교회에서는 각 교단마다 총회장 선거를 할 때 불미스러운 일이 많이 벌어지는데, 이렇게 제비뽑기 식으로 하면 괜찮을까요? 그것도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일단 후보자를 선택해야 하는데, 여기서 또 다시 문제가 일어납니다. 모든 문제를 한꺼번에 해결할 수는 없지만, 교회의 본질을 훼손하지 않는 범위 안에서 민주적인 방식을 찾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관점은 총회장의 자리를 권력이 아니라 봉사의 자리로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서로 총회장을 맡지 않으려는 공감대가 형성되어야 합니다. 실제로도 총회장은 순전히 봉사의 자리입니다. 총회장이 되면 많은 행사에 호출당하기 때문에 개별 교회의 목회도 힘들고, 개인의 영성훈련도 힘들게 됩니다. 일종의 종교적 관료가 되고 맙니다. 그런 총회장을 서로 하겠다고 나선다는 것은 이상한 일입니다.

 

오늘 본문의 설명에 따르면 요셉과 맛디아라는 두 사람을 후보자로 세울 때 기준이 있었습니다. 사도 후보자로서의 자격 요건입니다. 행 1:21,22절에서 베드로가 이렇게 말합니다.

 

요한의 세례로부터 우리 가운데서 올려져 가신 날까지 주 예수께서 우리 가운데 출입하실 때에 항상 우리와 함께 다니던 사람...

 

자격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예수님과 함께 생활한 경험입니다. 예수님은 당시 다른 경건한 유대인들과 마찬가지로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고, 3년 가까이 활동하다가 로마 총독 빌라도 법정에서 십자가형을 받고 처형당한 뒤 무덤에 묻혔다가 부활하고 40일 정도 세상에 머물다가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교회에서 사도로 활동하려는 사람은 이런 전체 과정에 직접 참여한 경험이 있어야만 합니다. 바울이 초기 기독교에서 그렇게 뛰어난 복음 설교자요 전도자며 신학자로 활동했음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 교회로부터 사도로 인정을 받지 못한 이유는 그가 예수님과 직접 생활한 경험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예수님이 살아있는 동안에는 예수님을 몰랐고, 예수님의 추종자들이 교회 공동체를 형성하던 초기에 기독교를 박해했습니다. 세월이 어느 정도 흐른 뒤에 바울은 부활의 주님을 경험하고 자칭 사도로 활동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꾸준하게 예루살렘 교회에 있던 제자들과 좋은 관계를 도모하기 위해서 애를 썼습니다. 이런 노력의 결과인지 모르겠지만 훗날 교회는 바울을 베드로 못지않은 위대한 사도로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어쨌든지 여기서 중요한 것은 사도의 자격은 예수님과의 관계가 밀접해야 하고, 예수님에게 일어난 사건들을 소상하게 인식하고 있어야한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우리는 사도일까요, 아닐까요? 사도를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서 대답은 달라집니다. 2천년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들이었던 사도들만을 사도로 인정한다면 우리는 사도가 될 수 없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사도라고 한다면 우리도 사도가 될 수 있습니다. 사도를 전업 목회자로만 한정한다면 일반 신자들은 사도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복음에 순종해서 살려고 하는 사람이라는 기준으로 본다면 모든 신자들은 사도입니다. 기능이나 역할이라는 점에서는 전업 사역자와 일반 신자가 다르기는 하지만, 전업 사역자나 일반 신자나 모두 똑같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세례 받은 자이며, 모두 똑같이 하나님의 심판을 기다라고 있다는 점에서는 다를 게 하나도 없습니다. 하늘나라에 가면 베드로와 우리는 똑같은 자리에 서게 될 것입니다. 문제는 겉으로 드러나는 형식적인 사도권이 아니라 사도의 내적인 자격입니다. 예수님에게 일어난 사건과 우리가 과연 밀접히 연결되어 있을까요? 그래서 우리 스스로 사도의 자격이 있다고 자부할 수 있을까요?

 

베드로가 제시하는 사도의 자격에서 또 하나의 중요한 요소는 ‘우리와 함께 다니던 사람’입니다. 함께 다닌다는 것은 함께 모인다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교회에 다닌다는 뜻입니다. 개별 교회도 교회이고, 노회나 총회, 더 나가서 모든 기독교 공동체가 다 한 교회입니다. 구체적인 모임에 참여하는 것이 기독교 신앙의 가장 중요한 토대입니다. 가끔 교회 생활은 포기하고 혼자서 말씀을 읽고 공부하고 기도하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건 착각입니다. 그런 방식으로 기독교 신앙은 성립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기독교 신앙이 처음부터 구체적인 모임에서 시작되었다는 사실이 하나이고, 공동체와 분리된 개인으로서는 건강한 신앙을 유지하기 어렵다는 사실이 다른 하나입니다. 예를 들어 서로 사랑하는 남자와 여자가 있다고 합시다. 어떤 이유로 인해서 두 사람이 결혼하지 않았습니다. 떨어져 있으면서도 정신적으로 사랑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부부로서의 사랑을 하는 건 아닙니다. 결혼해서 상대방에게 실망하기도 하고, 때로는 결혼을 후회하는 일이 있어도 결혼을 통해서만 두 사람은 부부의 관계를 맺을 수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보이는 교회의 한 구성원으로서 살아간다는 것은 기독교인의 삶에서 절대적으로 중요합니다. ‘함께 다니던 사람 중에 하나를...’ 세운다는 베드로의 말은 오늘 우리의 신앙생활에서도 여전히 옳습니다.

 

베드로는 본문에서 사도의 직무, 즉 사도가 감당해야 할 사역의 핵심을 정확하게 규정합니다. 행 1:22b은 다음과 같습니다.

 

... 우리와 더불어 예수께서 부활하심을 증언할 사람이 되게 하여야 하리라.

 

예수의 부활에 대한 증언은 사도의 가장 중요한 직무입니다. 사도행전에 등장하는 여러 편의 설교는 모두 예수의 부활을 토대로 합니다. 이는 곧 교회의 가장 중요한 직무가 부활에 대한 증언이라는 의미입니다. 전업 교역자만이 아니라 모든 기독교인들에게는 이런 증언의 책임이 있습니다. 이것은 책임이면서 동시에 더 나가서 기독교인의 권한입니다. 교회를 부활 공동체라고 부르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교회는 예수의 부활에 의해서 시작되었고, 유지되고 완성된다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기독교인이라고 한다면 예수의 부활을 증언해야 합니다. 그럴 때만 기독교인이라는 정체성이 확보될 수 있습니다.

 

예수의 부활을 증언해야 한다는 말은 여러분의 귀에 그럴듯하게 들리겠지만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한다는 말인지 막연하다는 생각이 들지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속사회는 부활과 너무 거리가 멀어서 부활에 대한 증언이라는 말이 실감나게 다가오지 않습니다. ‘예수천국 불신지옥’ 문구가 적힌 팻말을 듣고, 확성기로 큰 소리를 내면서 길거리 전도에 나서는 열광적인 신자들은 누가 듣던 안 듣던 상관없이 용감하게 부활 승리를 외칠 겁니다. 이런 방식의 전도는 현대사회에서 효과가 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기독교 신앙을 외면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역효과가 날 겁니다. 예수부활과 전혀 상관없이 작동되는 듯이 보이는 지금의 세속사회에서 기독교인이 어떻게 예수 부활을 증언해야 할까요? 부활은 21세기에서 볼 때 뒤떨어진 이야기니까 제쳐두고, 지금처럼 원만하게 교회생활을 하는 것으로 충분할까요?

저는

 이 말씀을 저에게 비쳐 보았습니다. 저는 전업 목사니까 예배와 설교를 통해서 부활을 증언하고 선포해야 합니다. 다른 것은 좀 부족해도 이것만은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저는 나름으로 이런 점에서는 최선을 다 했다고 생각합니다. 부활을 주제로 하는 경우만이 아니라 다른 경우에도 부활을 직간접적으로 바탕에 놓고 설교했습니다. 어떤 설교자는 부활에 대한 설교를 소홀히 여깁니다. 부활절에만 부활 설교를 하면 되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여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1) 설교자 스스로 부활이 무엇인지 잘 모를 수 있습니다. 모르는 사람이 그걸 자주 설교할 수는 없는 거 아니겠습니까. 2) 부활을 문자의 차원으로만 이해합니다. 문자에 머물면 영적인 흥미가 떨어지니까 부활 설교를 자주 할 수 없습니다. 3) 부활 사건보다는 다른 일에 관심이 더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건 목사나 일반 신자나 똑같습니다. 교회 운영에 모든 신경을 쏟습니다. 그런 설교자가 부활을 반복해서 설교하기 힘들고, 그런 신자들이 부활 설교를 반복해서 듣기도 힘듭니다. 마음이 들떠 있으면 본질에 마음을 담을 수 없습니다.

 

저에게 문제는 교회에서가 아니라 일상에서 부활을 증언하고 있느냐, 하는 겁니다. 이것도 역시 여러분에게 똑같이 적용되는 문제입니다. 교회 안에서보다는 교회 밖에서의 삶이 훨씬 많은 여러분들은 그 세상에서 어떻게 부활의 증인으로 살고 있으신가요? 저의 경우에, 제가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예수 부활하셨으니 예수 믿으세요.’ 하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여러분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여러분들이 직장 동료나 지인들, 업무 관계로 처음 만나는 사람들에게 부활을 말한다면 그들에 의해서 여러분은 기피의 대상이 될 것이며, 전도의 문도 닫힐 겁니다. 저는 부활의 희망을 알고 경험한 사람의 자세로 사람들을 대합니다. 예수 부활이라는 단어를 직접 거론하는 거는 아니지만 저의 모든 생각과 말과 삶의 태도는 예수 부활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부활을 증언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즉 부활의 영성으로 사람들을 대하는 것이 바로 부활을 증언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살아가려면 먼저 우리에게 부활 경험과 신앙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그게 없으면 아무리 신앙적인 진정성이 있어도 부활 증인으로 살 수 없습니다. 예컨대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포도주를 설명한다고 합시다. 이게 가능하려면 우선 그 사람이 포도주 맛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 설명을 전업으로 하려면 소믈리에가 되어야겠지요. 기독교인들이 부활의 증인으로 살아가려면 영적인 소믈리에가 되어야 합니다. 실제로는 많은 기독교인들이 부활을 모르기도 하고 거기에 관심도 없습니다. 그래도 신앙생활 하는 데는 큰 문제가 없습니다. 단순히 교회생활에 잘 적응하기만 하면 됩니다. 이건 불행입니다. 포도주 맛을 모르면서 포도주 모임에 참여하는 거나 비슷한 겁니다. 잠시 동안은 자기가 모른다는 것을 숨길 수는 있지만 시간이 가면 스스로 견디지 못합니다. 자신이 모른다는 것을 인정하는 건 자존심 상하는 일이고, 그렇다고 교회를 떠날 수도 없기 때문에 대신 다른 일에 매달립니다. 교회 성실한 일꾼이라는 사실만으로 만족하는 겁니다. 사실은 만족하는 게 아니라 만족하는 듯한 포즈를 취할 뿐입니다. 그런 신앙생활은 결국 우리의 영혼을 영양실조와 면역결핍에 걸리게 만듭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는 부활을 단지 문자로만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경험해서 부활을 증언하면서 살아갈 수 있을까요? 그것에 대해서 오늘 성경 본문이 직접적으로는 말하지 않습니다. 간접적인 대답만 찾을 수 있습니다. 부활을 증언한다는 문장에 나오는 ‘증언’이라는 단어는 순교라는 뜻도 있습니다. 순교는 자기가 옳다고 믿는 사실에 자신의 운명을 거는 태도입니다. 부활에 자신의 운명을 건다는 말은 부활에 집중한다는 뜻입니다. 표면적으로가 아니라 실질적으로 집중하는 것입니다. 집중을 할 수 없다면 다음과 같이 둘 중의 하나입니다. 첫째는 죄와 죽음의 문제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을 경험할 수 없습니다. 둘째는 세상살이에 시달려서 영혼에 상처가 난 사람들입니다. 온갖 인간적인 분노와 쾌락에만 정신을 판다면 부활 문제에 집중할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도의 직무가 부활에 대한 증언이라는 베드로의 진술을 기억해두십시오. 이 진술은 부활이 기독교 신앙의 초석이며, 선교의 근거이고, 구원의 길이라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삶에서 부활 생명에 참여한다는 사실보다 더 중요하고, 더 기쁘고, 더 설레는 일은 없지 않습니까. 저를 포함한 여러분 모두가 죄와 죽음에 길들여진 세속의 질서에 굴복당하지 말고 사도의 직무인 부활의 증인으로 용감하고 지혜롭게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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