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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의 도우심

로마서 정용섭 목사............... 조회 수 815 추천 수 0 2015.07.16 23:5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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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롬8:22-27 
설교자 : 정용섭 목사 
참고 : http://dabia.net/xe/8204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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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의 도우심

롬 8:22-27, 성령강림절, 2015년 5월24일

 

22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 23 그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 24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25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26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27 마음을 살피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어리석은 질문을 하나 드리겠습니다. 여러분들은 지금 행복하신가요? 대답은 제각각일 겁니다. 행복하다거나 또는 그렇지 않다고 말할 겁니다. 실제로는 행복하지 않는데도 행복한 것처럼 대답할 수도 있고, 실제로는 행복한데도 개인적으로 불행하게 느낄 수도 있습니다. 행복의 문제는 주관적인 것으로 보입니다. 연봉 3천만 원으로도 행복하게 사는 사람이 있지만, 1억 원으로도 불행하게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신체가 건강한데도 불만이 많은 사람이 있고, 상대적으로 몸이 약하지만 만족스럽게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느 쪽에 속했든지 실제로는 탄식소리를 낼 수밖에 없습니다. 바울은 그 사실을 오늘 제2 독서 롬 8:22절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

 

바울이 말하는 피조물은 사람만이 아니라 모든 사물과 모든 생명체를 가리킵니다. 장미, 민들레, 뻐꾸기, 고양이, 벌레와 곤충, 여러 물고기, 그리고 하늘의 별과 구름과 강과 산이 그것입니다. 만물이 탄식과 고통 가운데 놓여 있다는 바울의 말을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너무 비관적인가요? 저는 바울의 이 말이 세상을 정확하게 뚫어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일단 상식적으로 생각해보십시오. 사람은 아무 것도 영원히 소유할 수가 없습니다. 돈과 건강만이 아니라 생명 자체도 소유할 수가 없습니다. 모든 것들은 우리 손에서 빠져나갈 뿐만 아니라 우리 자체가 결국 파괴됩니다. 우리 가족이 하양 아파트에서 살다가 원당 숲으로 들어가면서 겪게 되는 불편한 일은 쓰레기 처리입니다. 특히 음식물 처리가 어렵습니다. 처음에는 일일이 정해진 통에 담아 면소재지의 큰길가에 내다놓았는데, 그게 귀찮아서 이제는 집 마당의 텃밭 옆에 구덩이를 파서 해결합니다. 저는 이틀에 한 번씩 썩어가는 음식물을 그 현장에서 확인합니다. 그 쓰레기가 저의 미래입니다. 아름다웠던 꽃들도 시들고 떨어져 말라 썩습니다. 탄식이 나오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바울이 사용한 헬라어 ‘수스테나제이’를 개역개정 성경은 ‘함께 탄식하며’로, 공동번역은 ‘다 함께 신음하며’로 번역했습니다. 루터는 ‘함께 갈망하며’로 번역했습니다. 탄식이나 신음이나 갈망은 근본적으로 비슷한 의미입니다. 돈을 많이 벌려는 갈망이 있는데, 이로 인해서 탄식할 수밖에 없습니다. 인생살이의 성공여부에 상관없이 탄식이라는 실존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결혼 이전의 젊은이들은 자기 이상형을 만나면 더 이상 갈망이 없을 것으로 생각하지만, 그것도 착각입니다. 죽을 때까지 갈망과 탄식이 끝나지 않습니다.


그런 갈망이나 탄식은 믿음이 부족한 탓이라고 생각하는 기독교인들이 있습니다. 믿음만 강하면 모든 문제를 다 해결할 수 있다고 말입니다. 그래서 믿음을 달라고 하나님께 매달립니다. 그것은 착각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도 인간 실존의 탄식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이것도 제 이야기가 아니라 바울의 가르침입니다. 23절에서 그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의 탄식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분명하게 말합니다.

 

그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가리킵니다. 그를 믿고 그를 통해서 부활 생명을 약속으로 받은 기독교인들은 당연히 구원을 받은 사람인데도 불구하고 아직 생명 완성의 단계에 이르지는 못했습니다. 여전히 갈망하고 탄식합니다. 여전히 배가 고프고, 몸이 아프기도 하고, 지나친 욕정에 빠지기도 합니다. 여전히 이기적이고, 때로는 알게 모르게 거짓말도 합니다. 교회 문제도 그렇습니다. 교회가 작으면 작은 대로, 크면 큰 대로 갈망과 탄식이 그치지 않습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의 삶도 구원과 거리가 먼 것처럼 보일 때가 많습니다. 바울은 오늘 본문 앞장인 롬 7:19절에서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이런 자신의 영적 실존을 탄식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린다는 게 바로 이런 뜻입니다.


바울의 신학적 분석을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나는 옳다고 봅니다. 기독교인들도 상대적인 차이가 있긴 하지만 실제 삶에서 갈등과 모순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예수 믿으면 늘 기쁘고 평화로워야 하는데, 모두 그걸 기대하겠지만, 현실은 전혀 그렇지 못합니다. 예수 믿어도 별 다를 게 없다는 사실로 인해서 믿음 생활을 포기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런 모순과 갈등을, 즉 탄식의 상황을 직면하면서 버텨낼 수 없어서 변질된 길을 찾는 사람들이 구원파에 속한 이들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구원받았다는 사실에만 집중합니다. 거기에 맹목적으로 빠져들면 탄식할 수밖에 없는 현실의 문제가 해결된 것처럼 착각할 수 있습니다. 정통 교회에서도 비슷한 현상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몸의 속량’이 가리키는 영적 깊이를 외면한 채 예수 믿고 구원받았으니 주님을 위해서 교회에 충성 봉사하며 살면 된다는 식입니다. 원칙적으로 틀린 말은 아니지만 바울이 가리키는 믿는 자들의 탄식을 전혀 눈치 채지 못한 신앙 행태입니다. 이런 방식의 신앙 행태에 머물면 신앙이 변질, 왜곡될 수 있습니다. 위선에 빠지거나 관념에 떨어집니다. 신앙이 뜬구름 잡는 이야기가 됩니다.


바울의 설명을 좀더 따라갑시다. 그는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신앙 문제를 처리하지 않습니다. 생각이 미칠 수 있는 데까지 계속 밀고 들어갑니다. 몸의 속량이라고 할 때의 ‘몸’은 한 인간의 총체적 인격을 가리킵니다. 총체적 인격이 속량된다는 것을 사도신경은 ‘몸의 부활’이라고 표현했습니다. 그것이 곧 구원입니다. 그 몸의 부활을 희망함으로써 우리는 구원받은 사람들입니다. 본문 24,25절에 따르면 이 희망은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은 다 시간이 지나가면서 시들고 없어지기 때문에 그것을 희망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탄식하는 이유는 보이는 것만으로 영적 만족을 얻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몸의 속량은 지금 우리가 볼 수 없는 부활의 영광, 또는 부활의 현실에서 이뤄집니다. 그게 아직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2천 년 전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한번 일어났지만 다시 은폐의 세계로 들어갔으며, 종말 때에 분명하게 일어날 것입니다. 그 종말의 사건이 바로 바울이 말하는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바로 그것, 아직은 보지 못하는 것을, 즉 하나님께서 권능으로 행하실 부활의 영광을, 생명의 절정을 희망합니다. 그 희망이 아직 완성되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는 여전히 세상에서 탄식합니다. 우리는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마냥 탄식만 하고 있으면 될까요?


25절을 루터의 번역으로 읽겠습니다.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들을 희망한다면, 그러면 우리는 인내심을 갖고 기다려야 합니다.” 바울은 기다려야 한다고 말합니다. 기다림이 기독교 영성이 중심이라고 해야 과언이 아닙니다. 이 기다림에는 인내심이 필요합니다. 편안하게 카페에 앉아서 친구를 기다리는 게 아닙니다. 탄식할 수밖에 없는 삶의 현장에서 기다려야 합니다. 일정한 시간이 정해진 것도 아닙니다. 이런 기독교인의 삶은 답답합니다. 아예 몸의 속량에 관심이 없든지, 부활의 영광에 대한 희망이 없으면 차리라 마음은 편할지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막막하고 답답해도 오직 굳센 믿음 안에서 주님의 재림을 기다려야만 할까요? 하나님은 우리를 고아처럼 내버려둔 채 스스로 어떻게 헤쳐 나가는지 두고 보는 분일까요? 우리가 처한 현실을 보면 그렇게 생각될 여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생각이 부족한 겁니다. 우리보다 먼저 이런 문제를 뚫어본 바울이 본문에서 무어라 말하는지를 보십시오. 26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바울은 우리가 무엇을 기도해야 할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연약하지만 성령이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며, 우리를 위해서 친히 간구하신다고 말했습니다. 이어지는 27절에서도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들을 위하여 간구하신다고 했습니다. 세 번에 걸쳐서 성령의 도우심을 말했습니다. 세 번째로 언급된 ‘성도’는 구체적으로 교회 공동체를 가리킵니다. 성령이 돕는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믿을 수 있다면 탄식의 세상살이에서도 인내심을 갖고 몸의 속량을 기다릴 수 있습니다. 문제는 그 성령의 도우심을 어떻게 인식하고 믿을 수 있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아무런 근거도 없지 무조건 믿을 수는 없습니다. 성령이 주식투자 같은 거라면 실증적으로 논증해낼 수 있겠지만, 성령은 하나님과 마찬가지로 눈에 보이지도 않고 손에 잡히지도 않기 때문에 확인하기 어렵습니다. 나름대로 확인해보려는 시도가 지난 기독교 역사에서 여러 번 시도되었습니다.


26절 말씀에서 그 단서를 찾을 수 있습니다. 바울은 성령이 돕는다는 말을 하면서 이해하기 어려운 표현을 합니다.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해서 친히 간구하신다는 겁니다. 탄식이라는 단어는 앞에서 두 번이나 반복되었습니다. 세상의 모든 피조물들은 함께 탄식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예수를 믿는 사람들도 역시 속으로 탄식합니다. 그런데 이제 세 번째로 성령마저 탄식한다고 했습니다. 성령의 탄식! 이게 말이 될까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성령도 피조물이나 기독교인들과 마찬가지로 ‘몸의 속량’을 애타게 기다린다는 말은 아니겠지요. 이 표현은 오랫동안 난해구절로 남아 있었습니다. 성서학자들이 대체로 동의하는 설명은 다음과 같습니다. 성령이 탄식한다는 말은 당시의 열광주의 신앙행태를 가리킵니다. 구체적으로는 방언입니다. 방언은 남이 알아듣지 못하는 언어로 행해지던 기도의 한 행태입니다. 열광적이고 몰아적인 현상으로 나타납니다. 비슷한 현상을 무당들에게서 볼 수 있습니다. 다른 종교나 유사 종교에서도 이런 현상은 종종 일어납니다.


바울은 고전 14장에서 이 문제를 자세하게 다루었습니다. 고린도교회는 방언을 가장 큰 은사로 여겼습니다. 왜냐하면 방언이 천사의 말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방언을 통해서 천상의 세계와 소통한다는 뜻입니다. 고린도교회에서는 개인이 기도할 때만이 아니라 예배 시간에도 중구난방으로 방언이 행해졌습니다. 바울은 이런 방언 현상이 교회의 질서를 깨뜨리고 선교에도 지장을 준다고 판단했습니다. 자신도 방언을 하는 사람이지만 방언은 철저하게 절제되어야 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고전 14:19절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교회에서 네가 남을 가르치기 위하여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 일만 마디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 나으니라.” 여기서 가르치는 건 예언, 즉 설교를 가리킵니다. 바울이 볼 때 방언은 믿지 않는 자들이 믿음의 단계에 들어가기 위한 수단이고, 예언은 믿는 자들을 위한 것입니다. 예배는 믿는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것이기 때문에 알아들을 수 없는 방언이 아니라 알아들을 수 있는 예언이, 즉 설교가 그 중심에 놓여야 합니다. 바울이 방언을 부정한 것은 물론 아닙니다. 열광적인 예배 행태에 대한 충고입니다.


지금 바울이 편지를 쓰고 있는 로마교회에도 방언 집단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상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탄식할 수밖에 없는 세상살이에서 기독교 신앙을 뜨겁게 경험하면서 살아가려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이 선택한 길은 엑스타시 경험입니다. 부활에 대한 직접적인 경험입니다. 다른 사람은 물론이고 자기 스스로도 무슨 기도를 하는지 모를 정도의 황홀경에 빠져드는 경험입니다. 이를 통해서 그들은 자신들의 영혼이 고양되는 경험을 합니다. 세상도 없고 자기도 없고 오직 부활의 그리스도만 현실이 됩니다. 탄식이라는 실존도 사라집니다. 이미 천국에 들어간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그것이 바로 성령을 받은 증거라고 여겼습니다.


바울은 그런 방식의 신앙 행태에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방언으로 대표되는 열광적인 예배 행태는 예배의 영적인 풍요가 아니라 오히려 결핍에 대한 표식이었습니다. ‘성령의 말할 수 없는 탄식’이라는 바울의 진술이 가리키는 의미가 바로 그것입니다. 이를 통해서 바울이 로마 교회에 말하고 싶은 것은 성령의 탄식에 의존할 게 아니라 성령이 우리를 위해서 ‘친히’ 간구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교회를 위해서 간구한다는 사실입니다. 그 사실을 바울은 27절에서 이렇게 정리했습니다.

 

마음을 살피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나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참으로 놀라운 통찰이자 믿음이자 가르침입니다. 창조자인 하나님의 영이면서, 부활의 영광을 입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인 성령이 우리를 위해서 간구하신다는 겁니다. 이는 곧 성령이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중재자 역할을 한다는 뜻입니다. 성령이 주도적으로 신자들과 교회 공동체를 이끌어갑니다. 속된 표현으로 성령은 우리의 든든한 ‘빽’입니다. 빽이 있으면 상황이 어려워도 걱정하지 않습니다. 문제가 이미 해결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오늘 본문에 바로 이어지는 롬 8:28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협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저는 위에서 성령의 도우심을 어떻게 확인할 수 있나, 하고 여러분을 대신해서 질문했습니다. 제 설교에서 대답을 찾으셨는지요. 이에 대한 딱 떨어지는 대답은 아무도 제시할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 커피나 포도주의 깊은 맛을 잘 모르는 사람에게 그것을 딱 떨어지게 설명할 수 없는 거와 같습니다. 커피나 포도주의 맛은 설명이 아니라 자주 마시고 공부하면서 경험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성령의 도우심을 전문적으로 공부하고 의존하는 이들의 모임이 바로 에클레시아, 교회입니다. 초기 교부들이 교회를 성령의 피조물이라고 규정한 것도 여기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이런 전통에 따라서 2015년 오순절 성령강림절 예배에 참석한 여러분들에게 간곡하게 말씀드립니다. 다음의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성령께서 연약함 가운데서 ‘몸의 속량’을 기다리면 살아가는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성령께서 이런 사람들의 공동체인 교회를 위해서 친히 간구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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