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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눅12:13-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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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이승남 목사 |
참고 : | http://www.baekseokchurch.kr |
탐심을 물리 치라
누가복음 12:13-21
오늘 본문은 천국의 꿈을 가지고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바른 물질 관'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한 청년에게 '탐심을 물리치라'고 하신 후에 그 유명한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로 우리에게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먼저 재물에 대한 교훈입니다. 사실 재물이나 재물의 축적 그 자체가 나쁜 것이 아닙니다. 재산과 그 축적의 목적과 관심이 어디에 있느냐가 중요합니다. 재물을 두고 그것이 누구로부터 온 것인지를 생각할 줄 알고 어떻게 써야 할지를 알아야 합니다. 돈은 좋은 것입니다. 돈이 있으면 많은 일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돈 자체를 너무 좋아하거나 재물을 너무 믿는 것은 위험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삶의 의미를 왜곡시키기 쉽기 때문입니다. '돈만 있으면 무엇이든 할 수 있고, 돈만 많으면 세상에 걱정할 일이 없다. 고 여기게 되기 때문입니다. 돈을 인생의 전부로 여기는 오류에 빠지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인간의 삶은 그 본질이 돈에 있는 것이 아니라 관계에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돈만 있으면 그 관계를 잊어버리게 됩니다. 사람과의 관계, 그리고 가장 중요한 하나님과의 관계 말입니다. 여러분,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갖지 못한 채 소유하고 있는 재물은 그 인생을 행복하게 할 수 없습니다. 돈은 잔뜩 벌어놓았는데 사람들과의 관계가 좋지 않으면 무슨 행복이 있고 평안히 있겠습니까? 돈이 없을 때는 그렇지 않았는데 돈이 많아지면 주위의 모든 사람이 다 도둑놈 같아 보이기 쉽습니다. 누가 와서 무슨 말을 해도 그저 어떻게 해서든 뜯어먹으려는 수작들로만 여겨지게 됩니다. 그러니까 늘 불안해지고 웅크리게 됩니다. '나는 돈만 있으면 부모형제도 친구도 친척도 다 필요 없어. 나 혼자 얼마든지 행복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정말 불쌍한 사람입니다.
돈이 많으면 많을수록 더 많은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가질 수 있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입니다. 돈이 많으면 많을수록 하나님과 더 가까워질 수 있는 사람이 정말로 복 있는 사람입니다. 돈은 하나님을 위하여 좋은 일을 할 수 있는 기회와 수단을 제공하기도 하지만, 하나님을 향한 전적 헌신에 장애가 될 수도 있습니다. 돈은 종종 우리를 하나님과 멀어지게 만드는 원인이 됩니다. 하나님에게 등 돌리게 만드는 주범이 되기 쉽습니다. 우리의 가장 크고 가장 확실한 재산은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임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입니다.(13-15)
본문의 배경을 보면 1절에 '무리가 수만 명이 모인 곳'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시고 계실 때 한 청년이 예수께 나와 '상속'문제를 해결해 달라는 것입니다. 그 당시 유대인들의 삶에 큰 부분을 차지하는 문화가 있었습니다. 무슨 문제가 생기면 지혜로운 랍비에게 부탁해서 해결하는 그런 자세입니다. 오늘 말씀에 보면 어떤 사람이 재산 분배 문제 때문에 예수님께 찾아와서 해결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지혜 있는 랍비로 생각했기 때문에 나온 것입니다. 13절에 '내 형을 명하여 유산을 나와 나누게 하소서'입니다. 사실 유산문제는 참 어려운 문제입니다. 형제 사이도 갈라놓고, 어떤 경우 살인도 생기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보면 장자 이야기가 참 많이 나옵니다. 유대 나라는 장자가 갖는 특권이 대단한 나라입니다. 왜 야곱이 팥죽 한 그릇을 주면서 장자의 명분을 빼앗았습니까? 장자의 특권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그 형제는 유산문제로 형제 사이에 의가 좋지 않거나, 나쁜 관계임을 충분히 짐작하게 합니다. 유대 법에 의하면 유산은 형이 동생의 두 배를 가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형제가 두 명일 경우 유산은 세 몫으로 나누어 그 ⅔를 형이 가지고 ⅓을 동생이 가지게 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형이 동생의 배를 가지게 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형이 부모를 모셔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만일 아버지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게 되었기 때문에 형이 부모를 모실 필요가 없게 되었고, 그래서 동생 입장에서 보면 아무리 형이지만 두 몫을 가져야 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이 들면 동생은 형에게 부모님을 모시지 않았으니 반반 나누자 했을 것이고, 그러면 형은 '무슨 소리냐, 법대로 나누자. 내가 부모를 모시건 안 모시건 형은 형이다. 그러므로 유산의 ⅔는 내 것'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는데, 그렇게 되면 형제 사이에 유산이 시비가 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저마다 자기 유리한 쪽으로만 해석하기 때문입니다.
부모 입장에서 보면 엄청 슬픈 일입니다. 효는 형제가 화목하며 사는 것입니다. 가장 큰 효가 바로 형제 우애입니다. 이 형제 우애는 하나님도 기뻐하십니다. 시133:1절에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옛날 초등학교 교과서에 '의좋은 형제'라는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농사가 다 끝난 가을에 형이 생각을 해봅니다. '동생이 이제 결혼을 했는데 필요한 것이 많을 것이다.' 그래서 자기 논에 있는 볏단을 동생 몰래 지게로 져다가 동생 논의 볏단에 쌓아주었습니다. 그런데 동생도 또 생각을 합니다. '우리는 이제 결혼해서 두 식구밖에 없는데 형은 식구가 많으니 저것 가지고는 안 되겠다.' 그래서 밤에 몰래 가서 자기 논의 볏단을 지게로 져서 형의 논의 볏단에 쌓아놨습니다. 그런데 이상합니다. 아무리 가져다주어도 날마다 똑같은 것입니다. '이상하다.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다.' 어느 달밤에 '그래도 형을 더 갖다 주어야지.' '그래도 동생을 더 갖다 주어야지.' 그리고 지게에 볏단을 가득히 지고 서로 가다가 중간에서 만났습니다. 그래서 둘이 너무 감격해서 붙들고 엉엉 울었다는 내용의 과목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런 형제들이 다 죽었는가 안보입니다. 여하튼 본문에 등장하는 형제는 유산문제로 서로 마음이 상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동생이 예수님께 찾아와서 유산문제를 잘 해결해 달라고 부탁한 것입니다.
사실 이 유산문제, 그 유산이 땅이든, 집이든, 돈이든 간에 유산 문제 때문에 형제간에 갈등이 있고, 그 문제가 잘 해결되지 않는 이유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탐심(貪心) 때문입니다.
이 탐심이 발동하면 형제간도 갈라지고, 원수지간이 되기도 합니다. 부부사이도 없습니다. 이 탐심이 발동하면 예수님에게 부탁해서라도 내 탐심의 문제를 해결하고 싶어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문제를 부탁하는 사람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주는 답변은 하지 않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 치라'고 하십니다.
이 탐심(貪心)이란 도대체 무엇입니까? '더 많이 가지고자 하는 마음'이 곧 탐심이 됩니다. 분수에 넘치도록 더 가지겠다는 마음이, 탐심입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한계를 모르는 소유욕' 이것이 곧 탐심입니다. 이 탐심이 있는 한 합리적인 의논은 불가합니다. 의(義)도 이루어 질 수 없습니다. 이 탐심이 마음에서 떠나지 않는 한 지난 일도 괘씸하게 생각되어 용서가 안되고, 그러다 보니 현재도 마음이 편치 못하고, 무엇 보다 미래에 일어날 일까지 예상하면서 미리 불편하고, 미리 행복하지 못합니다. 다 탐심 때문에 일어나는 불편한 심기입니다.
미국의 대재벌 록펠러도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내가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소유가 넉넉하다고 해서 행복한 것은 아니다. 내가 클리블랜드에서 처음 직장 생활을 시작할 때, 한 주에 3불을 받아도 하도 귀하게 여겨져서 화장실로 달려가 몰래 세어보곤 했고 그 때는 그 주급 3불이 천하를 얻은 듯 가슴 뿌듯하고 행복했다. 그런데 지금은 그렇지 않다. 지금은 그때보다 엄청나게 재산이 많아졌지만 행복은 오히려 그렇지 못하다. 만일 그 때 그 행복을 도로 살 수만 있다면, 나는 지금의 재산을 다 내 놓겠다.'
록펠러의 이 말은 우리가 귀담아 들어야 할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사람의 행복이란 소유와 비례하는 것은 결코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혹 여러분 중 돈이 없다고 '난 불행하다.' 이렇게 생각하지 말기를 바랍니다. 가졌다고 교만할 것 없고, 못 가졌다고 비굴할 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이 14절에 '이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장이나 물건 나누는 자로 세웠느냐?' 하시고는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 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고 하십니다.
여기 '생명'은 하나님이 주신 영원한 생명이지만, 여기서는 그 생명이 살아가는 동안의 생명의 연한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탐심을 말씀하시면서 한 가지를 더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생명입니다. 이 생명이라는 주제와 탐심이라는 주제는 아주 중요한 주제입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생명과 소유라는 두 개념은 서로 관계가 없다고 생각합니다마는 현실적으로는 그렇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소유가 넉넉하면, 그의 생명도 풍성하다. 그의 생명이 건강하다. 뿐만 아니라 소유가 넉넉한 사람이 장수한다. 심지어 잘하면 영생까지 할 수도 있을지 모른다.'고 착각하고 삽니다. 여러분, 그렇습니까? 소유가 넉넉하면 그의 생명도 풍성하고, 가난하면 그 생명이 빈약한 것입니까? 소유가 넉넉하면 그의 생명이 건강하고, 가난하면 그 생명은 비실, 비실 합니까? 아닙니다.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물론 소유가 넉넉하고 많으면 치료는 잘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생명의 보장은 없습니다. 행복도 마찬가지입니다. 소유가 넉넉하면 가난한 사람보다도 더 행복합니까? 그것은 가난한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생각하는 것이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데 있지 않다.'는 것은 소유가 넉넉하다고 생명이 보장된다는 것이 아니고, 죽지 않는다는 것도 아니며 소유가 넉넉하다고 구원과 생명과 영생이 보장된다는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왜냐하면 구원과 생명과 영생은, 오직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기 때문이며 그것은 오직 은혜로, 은총으로, 믿음으로만 받기 때문입니다.
탐심은 인간의 영혼을 파괴시킵니다. 마23:25절에서 예수님이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그 마음속에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다.'고 책망하셨고, 골3:5절에서는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고 하셨습니다. 어느 날 사탄이 한 청년을 찾아왔습니다. 그는 열 개의 병을 보이면서 청년에게 제안을 합니다. '여기 아홉 개의 병에는 꿀물이 들어있고 한 개의 병에만 극약이 들어있는데 열 개 중에 아무거나 하나를 골라 마시면 엄청난 돈을 네게 주겠다.'는 것입니다. 청년은 고개를 저으면서 '아무리 돈이 좋지만 하나밖에 없는 생명과 바꿀 수는 없지' 하며 그의 솔깃한 제안을 거절합니다. 그러나 사탄은 계속 말합니다. '극약은 열 개 중에 하나야. 겨우 하나일 뿐이야. 잘 생각해 보라고' 계속되는 사탄의 유혹에 청년은 속으로 그 돈이 그에게 가져다줄 평안함과 쾌락을 가늠해 봅니다.
'그래 딱 한 번만 하는 거다. 이번 한 번으로 난 평생 고생 안하고 즐겁게 살 수 있지.'
잠15:16절에 '가산이 적어도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크게 부하고 번뇌하는 것보다 나으니라' 인간의 생사뿐만 아니라 화와 복(禍福)이 모두 하나님을 믿고 사는 그 여부에 달려 있습니다. 여러분, 가진 것이 많은 적든 예수 믿고 오직 하나님을 섬기는 생활로 여러분의 삶이 항상 기쁘고 행복하시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바른 물질 관'을 갖고 살아야 합니다. 재물의 원어는 '마몬'인데 이는 '돈을 관장하는 신(神)'이란 뜻입니다. 예수님은 돈을 단순히 교환의 매체나 부의 축적 수단으로 보신 것이 아니라 돈을 통해 사람들의 영혼을 통제하는 신으로 보신 것입니다.
그만큼 돈이 사람들에게 미치는 영향력이 중요하므로 성경적 재정 관이 그만큼 중요합니다. 돈 그 자체는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돈은 그 자체로는 중립적입니다. 좋은 것도 아니고 나쁜 것도 아닙니다. 문제는 돈을 관리하는 사람이 문제입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돈의 가치가 어디에 있습니까? 돈은 쓰는데서 가치가 나옵니다. 특별히 잘 써야 좋은 가치가 창출됩니다. 과연 우리는 크리스천으로 어떻게 돈을 써야 될까요? 어떻게 쓰는 게 잘 쓰는 걸까요? 성경을 보면 세 가지 방법이 제시되어 있습니다.
'돈은 쓰고 누리는 것(누림)과, 하나님께 헌금하는 것(드림)과, 그리고 이웃에게 나눠주는 것(나눔)' 등이 있습니다. 이 세 가지 방법을 잘 구사하면 우리는 돈으로 인해 더 행복해질 수 있다고 성경은 가르치고 있습니다.'누림'입니다. 즉 누리라는 것입니다. 돈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잘 사용하면서 즐기라고 주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누림을 위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전5:19절에 '어떤 사람에게든지 하나님이 재물과 부요를 주사 능히 누리게 하시며 분복을 받아 수고함으로 즐거워하게 하신 것은 하나님의 선물이라' 신12:7절에 '거기 곧 너희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먹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 손으로 수고한 일에 복 주심을 인하여 너희와 너희 가족이 즐거워할지니라' 수고해서 돈을 벌고, 그 돈으로 가족들이 즐기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물질의 주인임을 기억하고 하나님께 드리는 데 사용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누리되 신앙이 성숙해 지면서 '누림의 비율'은 점차 낮추어가고, '드림의 비율과 나눔의 비율'을 높여가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드림과 나눔을 위해 돈을 쓰는 것을 가리켜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마6:20절에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적질도 못하느니라'
누리는 것은 즐겁고 좋지만 사실은 그때뿐입니다. 쌓아두는 것보다 낫지만 결국은 다 사라지는 것입니다. 반면 하늘에 쌓아두는 것은 위험하거나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안전하고 영원한 것입니다. 세상에서 사라질 돈을 가지고 영원한 하늘의 보화를 사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이 헌금을 많이 강조합니다. 왜 그러실 까요? 하나님이 돈이 없어서 궁해서 그런 겁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만물이 하나님의 것입니다. 하나님이 돈이 필요해서 그런 게 아니라, 돈을 통해 '마음'을 받으시려는 것입니다.
마6:21절에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이 말씀대로 돈에 사람의 마음이 담깁니다. 그래서 돈 쓰는 것을 보면 그 사람의 신앙과 인격을 파악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헌금을 통해 그 사람의 신앙과 마음을 받고 싶어하십니다. 하나님이 만물의 주인임을 고백하는 신앙, 그래서 감사하는 마음을 받기를 소원하십니다.
'너희 소유를 팔아 구제하여 낡아지지 아니하는 주머니를 만들라 곧 하늘에 둔바 다함이 없는 보물이니 거기는 도적도 가까이 하는 일이 없고 좀도 먹는 일이 없느니라' 이웃을 구제하는 것은 하늘의 주머니를 채우는 것입니다. 또 히13:16절에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누어주기를 잊지 말라 하나님은 이 같은 제사를 기뻐하시느니라' 선행과 나눔은 하나님이 받으시는 제사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또 잠19:17절에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어 드리는 것이니 그의 선행을 그에게 갚아 주시리라'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무엇인가?(16-21) 한 부자가 있었습니다. 그가 들판에 나가 보았더니 농사가 잘되어 대 풍작이 예상됩니다. '작년보다 이번 수확이 더 많게 생겼는데 전에 가지고 있던 창고는 도저히 그 많은 곡식을 다 저장할 수가 없겠구나! 옳지 전에 있던 창고를 헐어버리고 새로 더 크게 짓자. 그리고 모든 곡식과 내 소유 전부를 거기에 쌓아 두자'고 생각하고 그 부자는 곳간을 넓히는 개조작업을 착수합니다. 이 사람의 예상은 적중했습니다. 그는 선견지명이 있었습니다. 그는 미래를 내다보는 미래지향적인 안목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해 가을에 그는 풍성한 소출을 거둬들인 다음에 곳간마다 가득가득 쌓아두었습니다. 그 모든 곡식을 다 쌓아두니 기분이 좋아졌습니다. 기분이 좋아진 그는 자기 마음속으로 독백하기를 19절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 장면에 개입하셨습니다. 그 날 밤 하나님이 이 부자에게 나타나셔서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20절에 '어리석은 자여 오늘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이 부자는 오직 자기만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그 부자는 '내 곡식, 내 곳간, 내 영혼' 등 '나'만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우리말 성경은 그냥 '곡식'이라고만 번역을 했습니다. 그러나 헬라어 원어성경에는 '내 곡식'으로 나와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 많은 곡식이 다 자기의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만큼 부자는 자기 소유에 대해서 강한 집착을 보였습니다. 이 부자는 '나'가 아니라 '우리'를 생각할 줄 모르는 사람입니다. 물론 그 부자는 부정한 방법으로 소득을 올린 것은 아닙니다. 밭의 소출이 풍성해서 얻은 곡식이요 재산입니다. 성실한 농부로 성공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은 당연히 자기 재산은 자신의 것으로서 응당 자신을 위하여 쓰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바로 이 사람이 가진 '이기주의'와 '개인주의'는 현대인의 삶의 철학이기도 합니다. 문제는 '자기중심적인 탐욕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멀어지게 합니다. 부자는 이렇게 자기가 소출이 많은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을 몰랐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때에 따라 햇빛과 비를 내려 주셔서 소출이 풍성하게 된 것을 몰랐습니다. 그는 소출을 곳간에 쌓아 두는 것만을 알았지 받은 바 하나님께 감사하고 이웃에게 베푸는 것을 몰랐습니다.
이 사람은 재산이 자신의 것인 줄로만 알았습니다. 그는 재산이 하나님의 것이라는 것을 몰랐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것을 일시 위탁받아 관리하는 청지기인 것을 몰랐습니다.
'어리석은 자는 헬라어 단어의 원 뜻은 '생각이 없는 자'입니다. 물론 부자는 많이 생각했습니다. 골똘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 19절을 보면, 그는 마땅히 생각해야 할 세 가지를 잊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르시되' 부자는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오늘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부자는 자기의 죽음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부자는 다른 사람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부자가 하나님을 생각했더라면, 하나님께 감사했을 것입니다. 부자가 자기의 죽음을 생각했더라면, 여러 해 쓸 곡식과 물건을 쌓아 두려고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부자가 다른 사람을 생각했더라면, 감사한 마음으로 남들과 함께 기쁨을 나누었을 것입니다. 부자는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이 없습니다
이 부자는 '자기 관'이 어리석었습니다. 영혼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밤에 내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도로 찾으리니'란 말은 영혼의 주인은 하나님임을 분명히 하는 것입니다. 영혼은 내 마음대로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물질과 영혼의 일시적인 청지기일 뿐입니다. 제대하는 군인이 모든 것 다 반납하듯이 끝나는 날 모두를 반납해야 합니다. 어리석은 한 부자는 하나님이 자기 생명을 거두어 가실 때 속수무책인 존재임을 알지 못했습니다. '오늘 밤'이라는 말이 그의 모든 계획을 완전히 수포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이 부자는 이 세상에서 천년만년 살 것 같은 착각 속에 살았습니다. 21절에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못한 자가 되지 말고 부요한 자'가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여기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다.'는 것은 하나님과 아주 좋은 관계 속에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백석교회 사랑하는 성도는 가족들과 함께 주안에서 날마다 행복하게 살아가는 지혜로운 참 행복한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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