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I. 들어가는 말
21세기의 문턱을 향하여 역사의 바퀴가 마지막 힘겨운 회전을 해가던 즈음, 지구촌 곳곳에서는 때아닌 불안과 긴장에 휩싸였다. 정보화시대의 활황기를 구가하며 문명의 진보와 그 힘의 위력을 과시하던 세계는 마치 전쟁에서 겁에 질린 패장의 모습으로 갑작스레 몸을 움츠리고 있었다. 오래 전 누군가가 지구 곳곳에 은밀히 설치한 무수한 시한 폭탄들이 뒤늦게 발견되어 2000년 0시와 더불어 동시다발로 터질 운명에라도 직면한 듯, 모두다 몸을 숙인 채 초긴장의 상태에 돌입하였다. 그러나 허탈하게도 2000년의 0시가 지나면서 모든 것은 한때의 우스꽝스런 해프닝으로 끝나고 말았다. 이른바 Y2K, 곧이어 사람들의 입에서는 다행스런 한숨 못지 않게 '인류 최대의 사기극'이었다느니 '상업주의의 계략'이었다느니 하는 비난과 원성과 조롱의 소리가 한동안 끊이지 않았다. 이제는 유행과 계절이 지나 꺼내 입기 민망한 외투 같은 개념이 된 Y2K 문제는 역사의 배면으로 그렇게 사라져 갔다. 이런 희화적 사건은 적어도 오늘의 우리에게 정보화시대의 수혜 만큼이나 이런 현실 속에는 잠복된 위험들이 동시에 도사리고 있다는 사실을 실감케 하였다. 마치 우리 신체의 신경계가 그러하듯이 사이버는 우리의 인류의 삶 속에 깊숙이 파고들어 각 분야의 모든 영역에서 피하여서는 살 수 없는 그 무엇이 되어가고 있음을 실감케 한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사이버시대의 도래 앞에서 기독교 신앙의 중심적 행위인 예배는 어떻게 대응하여야 할 것인가? 예배와 사이버시대는 어떤 만남을 갖게 될 수 있을 것인가? 적지 않은 많은 사람들이 지금도 그러하거니와 앞으로의 세계도 사이버시대라는 만만치 않은 현실에 직면케 되리라고 예측하고 있다. 이미 거부할 수 없는 실체로 우리의 삶 속에 깊이 자리잡고 있고 또 앞으로도 심화될 사이버 현실에 대하여 우리의 신앙의 양상을 예단하고 신앙의 중심행위인 예배의 대안적 방향을 생각해 보는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일이라고 여겨진다.
II. 사이버 세상과 미래
산업사회에서 기계가 우리의 육체적인 노동을 떠맡았던 것처럼, 정보화사회에서는 컴퓨터가 우리의 정신적인 임무들을 점점 더 비중 있게 담당케 될 것임은 이미 1946년 최초의 컴퓨터 ENIAC의 출현이후 컴퓨터의 엄청난 진보를 통해 증명되어 왔다. 미국의 Futurist 잡지는 1990년대 후반, 컴퓨터가 초당 계산해 낼 수 있는 숫자를 600만개로 보았고 이후 머지않아 그것의 1만배를 능가하는 변화가 있을 것임을 예견했다. 또 10억 비트, 즉, 오늘날 우리가 보통 사용하는 4메가 바이트 칩의 256배 이상을 담을 수 있는 메모리칩 개발을 알린지는 이미 여러 해 전의 일이다. 심지어 앞으로 10년 내에 현재의 수퍼 컴퓨터보다 1,000배 빠른 컴퓨터가 나올 것이 예상되고 있는 상황이다. 가히 상상할 수 없는 정보사회의 현실을 빠르게 실감케 하는 내용이다.
산업사회에 이어서 전개된 정보화 사회는 엘빈 토플러가 지난 세기말 예견한 대로 그 힘의 중심추를 무력이나 자본이 아닌 지식과 정보로 이동시켰다. 이러한 변화는 힘과 재력의 소유가 대체로 나이와 경험 등에 비례할 것으로 여기던 통념적 인식을 벗어나서 년령 혹은 경륜 등과 무관하게 젊은 파워집단이 정보화의 첨병인 인터넷 업계에서 가장 빈번히 실세화되고 있음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세계적인 갑부인 마이크로소프트사의 사장 빌 게이츠나 야후사의 제리 양 혹은 한국계 일본인 손정의 등, 그 실제적 예들은 요즘 유행하는 벤처 창업의 성공 사례 등에서도 무수히 발견되어진다.
이와 같은 정보화의 큰 물결과 더불어 오늘날 널리 사용되고 있는 사이버(cyber)란 용어는 주로 개개 컴퓨터를 착발지(着發地)로 하여 무수한 컴퓨터 운용 주체들이 네트워크를 통해 상호 연결되어 형성하는 비물리적, 사회적 공간을 지칭하는 형용어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근자에는 이와 같이 컴퓨터를 매개로 해서 형성되는 모든 사회적 공간에 대해 사이버 경매, 사이버 음악회, 사이버 박람회 등, 습관처럼 사이버라는 접두어를 즐겨 붙이기도 한다. 비록 이러한 새로운 공간형성에 관련된 물리적 요소들이 단지 무수한 컴퓨터와 그것을 연결하는 네트와 비물리적 기호들인 비트(bit)의 집적지가 있을 뿐이지만 이들을 통해 형성되는 가상공간은 가히 무한대에 이를 만큼 많은 현실을 창출해내는 공간이기도 하다.
우선 사이버공간이 가져온 우리 삶의 변화와 긍정적 측면들을 다음과 같이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Cyber는 인간의 정신적 활동의 확대를 가져왔다.
정보화의 큰 물결 속에서 사이버라는 새롭고도 한계를 가늠할 수 없는 사회적 공간의 형성은 많은 사람들의 삶의 공간을 급속히 무한대로 확대시켜 나가고 있다. Cyber는 분명, 비트의 조합에 의한 이미지의 조작이요, 기호임에도 불구하고 물리적 현실 못지 않게 사회적 장으로서 현대인의 정신영역을 점거해 가고 있다. 과거 스크린에서 투사된 이미지가 일방적이고 수동성을 전제하였다면, 사이버는 양방적이고 주체적인 참여가 가능한 이미지이며, 더 나아가서는 누구나 특별하고 복잡한 절차 없이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인간의 정신적 활동영역'을 확대시켜 놓은 공간이다. 인간의 최상의 욕구로서의 '자아실현'을 달성하는데 도구적 기여를 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더 나아가 이런 자아실현을 위한 여타의 장애들을 현격하게 줄여 놓아서 평등의 정의를 보편화 시켜가고 있다. 과거 우월한 혹은 기득적(旣得的) 소수의 목소리에 의해서 사회형성이 이루어지던 과거 산업사회의 커뮤니케이션 구조는 가히 해체적 위기를 맞고 있다고 볼 정도로 각양의 목소리에 의해서 재편되고 있다. '디지털 경제'라는 책으로 유명해진 시장 분석가 돈 댑코스트는 'N세대의 무서운 아이들'이라는 새책에서 네트워크 환경에서 자란 'Wired generation' 혹은 'Digital' 세대를 묘사했다. 그에 의하면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어린이들이 사회적으로 중차대한 현안들에 대해 강력한 권위를 갖게 됐다'고 보고 이들의 사회진출은 덜 위계적이면서 더욱 협력적인 현실로 바꾸어 놓고 있다고 평가하고 있다. 실제로 선거철에 출마자들이 네티즌들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 적지 않은 신경을 쓰고 그들의 사이버상의 여론에 촉각을 곤두세우는 모습은 제도적 절차로 인해 더 이상 장벽을 느끼지 않는 수평화된 다중의 목소리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는 현실을 반영하고 있다.
Cyber는 지구촌 공동체의 상호 관심을 확대했다.
사이버는 분명 오늘을 사는 사람들에게 커다란 삶의 이기이며 국경과 거리를 뛰어 넘어 수많은 정보의 주체들과의 만남을 제공하여 더더욱 다양한 삶의 질을 경험케한 도구이다. 이러한 새로운 경험은 과거에 제한된 울타리 안에서 살아가던 지역 공동체의 삶의 터전을 전지구적인 경역(境域)으로 확대시켜 놓은 것이다. 사이버라는 가상적 공간은 비록 물리적 공간은 아님에도 사회적 활동 공간으로서 기능하며 그 영역을 전지구적 공동체의 물리적 현실에 직간접으로 긴밀하게 영향을 주고 있는 것이다.
사이버를 통한 사회적 활동영역의 확장은 과거에 알려져 있지 않았던 주변 세계에 대한 새로운 앎의 정도를 증대시켰고 따라서 그만큼 책임의 분량도 확대해 놓았다. 예수의 이웃의 개념은 단순한 지리적 근접성에 기초한 구획이 아니었다. 누구든 어려움 당하는 자에게 자비를 베푸는 자가 곧 이웃이었다.(눅 10:37) 그러므로 누구든 어려움에 처한 사람이나 집단은 교회의 관심권 안에 포괄된다. 사이버를 매개로 생겨난, 주변 세상에 대한 인식의 확대는 곧 이들 세상에 대한 더 큰 책임적 관심과 배려의 확대를 가져온 것이다.
지구촌 어느 한 곳에서 발생한 작은 문제들도 특정의 사람들에게는 구체적인 관심을 보일 수 있는 사건들이 된다. 과거 큼직 큼직한 사건들은 유수 미디어를 통해서 알려졌지만 소수의 특정 이해집단 간의 문제는 감추어지기 일쑤였다. 사이버는 바로 이런 현실에서 거리와 국경을 뛰어넘어 관심과 이해를 호소하고 또 그 대상을 만나는 데에 요긴한 도구가 될 수 있게 하고 있다. 종래 특정의 거대 미디어들의 시각에서, 혹은 그들이 배경으로 하고 있는 국가나 진영의 이익의 관점에서 일방적으로 전해지던 구조가 수많은 개개 목소리들의 쌍방적 교환이라는 구조로 바뀌어 지고 있다. 이점은 다양한 저변의 목소리가 보다 폭넓게 반영되고 있다는 말이 되기도 한다. 오늘의 우리는 전체 지구가 하나의 공동체임을 의식하게된 현상에 보다 익숙하게 되었다. 우리의 관심의 영역을, 우리의 돌봄의 영역을 이와 같이 거시적으로 확대해서 볼 수 있게 하는데는 사이버의 수단적 역할이 기여하고 있음을 목도하고 있는 것이다.
사이버는 문화적 다채성(多彩性)과 동질성의 도구가 되고 있다
사이버의 세상에서는 폭넓은 다양성의 시대가 전개될 것을 예상케 한다. 사이버 세상은 국제사회의 언어를 급격히 영어로 평정해 가고 있다. 영어가 일상의 통화언어가 되어가면서 국경이나 거리의 장벽을 뛰어넘어 함께 일하는 현실적인 의미의 지구촌화가 가속화되고 있다. 이러한 지구촌화로 인해 지역문화들은 퇴조하고 다양한 문화들이 서로 교환되면서 공존할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기독교의 외형적 틀이 역사적으로 문화적인 변용을 겪어온 것이 사실이지만 사이버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문화적인 변용은 그 속도가 매우 빠르고 다양성의 폭이 넓을 것이다.
이와 더불어 문화에 대한 이해도 새롭게 조명될 필요가 있다. 산업사회에서 문화의 이미지는 차별성이었다. 문화를 떠올릴 때마다 타자와 다른 특정 문화의 차별적 특징을 연상하였다. 분명히 문화간 차별성은 어느 정도는 항구적으로 존속하게 될 것이다. 인종적으로 흑인과 백인과 황인 및 갈색인종이 존재하듯, 지역간 서로 다른 대조적 기후와 환경이 존재하듯, 문화도 따라서 외견상 차별성은 정도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지속적 특징이 될 것이다.
그러나 사이버 시대의 문화는 차별 못지 않게 오히려 서로간 동질성 내지는 유사성을 발견하는 계기를 갖게 될 것이다. 사람들은 다양한 문화들과의 접촉을 통해서 자신 혹은 자신이 속한 집단 내에 내재된 무한한 문화적 다채성(多彩性)을 발견하는 계기를 맞는다. 결과적으로 이것은 타자에 대한 이해를 한층 증대시킨다. 이것은 일종의 자신에 대한 새로운 영역의 발견일 수 있다. 이러한 새로운 공간의 발견, 인간의 자신에 대한 확장을 바로 사이버가 첨예화시킨다.
문화는 분명 다양성을 띄게 될 것이고 더욱 세분화된 모습일 것이다. 지구촌 공동체의 다양한 문화는 서로간 공유 대상으로 인식되어져야 한다. 이런 목적은 공유가 가능토록 하는 도구적 뒷받침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사이버는 바로 이러한 일의 도구적 기능을 감당할 것이 틀림이 없다. 이 점은 기독교 신앙의 중심행위로서의 예배가 자신의 정체를 분명히 하면서 동시에 다양한 현실에 대해서 적절하고도 신속하게 전술적 변용을 시도해야할 이유가 되는 것이다.
III. 사이버 세상과 그늘
사이버시대가 제시하는 새로운 현실의 긍정적 측면들에도 불구하고 우려되는 부작용으로서의 그늘도 간과할 수 없다. 다음과 같이 전망할 수 있다.
비사회화 및 고립화의 시대가 심화될 수 있다.
사람들의 비사회화 및 고립화가 심화될 것이다. 사이버가 제공하는 공간이 사회적 장을 제공한다고는 하지만 몸과 정신이 전인적으로 어우러져서 함께 참여하고 살아가는 물리적 현실로서의 사회와는 다르다. 몸 없는 사회적 공간이다. 자신을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 아닌, 왜곡되거나 그릇 과장된 모습으로 자신을 드러낸다. 타자와의 진실한 만남도, 인격적 만남도 기대하기 어렵다. 현실에서는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자기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노출해야 한다. 함께 지속적으로 어우러지기 위해 땀과 정성이 필요할 뿐만 아니라 때로는 양보와 타협을 반복해야 하고 진실을 담고 있어야 한다. 다른 사람과 만나서 서로 다른 견해에 부딪치며 겪게 되는 일 속에서 좌절이 있을 수 있지만 이것들을 극복하는 속에서 인간과 세계에 대한 깊은 이해를 더해간다.
그러나 사이버 공간에서는 먼저 서로에 대한 깊은 관심도, 관련도 미약하다. 다만 일회적이고 이기적인 수요에 관심하기 때문에 현실에서 경험되는 버거운 무게를 피하는 도피적 공간으로 삼으려 한다. 사이버에 몰두하게 되는 경우는 바로 이런 현실의 무게를 기피하려는 인간의 나약성에서 비롯되기도 한다. 사람들은 이 버거운 현실에서 점차 퇴각하여 사이버 세계에 갇힌 채 다른 사람들과의 접촉을 기피하고 고립된 오락을 즐기게 되면서 비사회화, 고립화를 경험하게 된다. 사이버가 제공하는 공간이 일종의 사회적 공간임에는 틀림이 없으나 이러한 사이버 세계에의 몰두는 실상은 사이버공간이 인간의 도피적 공간을 제공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사회가 점차 복잡해지고 다원화되어가면서 인간은 점차 사회적으로 더 깊은 정신적 아노미에 빠져들기 때문이다. 인간에게 주는 견디기 힘든 중압에 기인하기도 한다. 결국 이러한 현상은 최악의 경우 '함께 함'을 근간으로 하는 예배의 삶에 큰 부담이 될 수 있다.
중우적(衆遇的) 대중사회가 될 수 있다.
분명 사이버 시대 하에서 일방 통행적이고 중앙집중적인 콤뮤니케이션 방식은 크게 수정될 것이 예견된다. 규모상 차이는 있을지라도 다양한 목소리의 주체들이 과거 거대 미디어들이 해내던 언론기능의 일부를 떠맡게 된다는 것이다. 이들 무수한 목소리들은 저마다의 의견을 통해서 거대한 여론의 바다를 이룬다. 그러나 이들 사이버 사회의 목소리들이 항상 품위 있게 정제된 목소리이기를 기대하기란 쉽지 않다. 때로는 마치 뉴욕 시내의 낡은 건물에 휘갈겨 놓은 무수한 낙서처럼 탁월한 생각의 발현도 아니고 공유의 가치를 지니지도 않은, 그렇고 그런 낙서들로 사이버공간이 채워질 수도 있다.
이런 현상에서 필연적으로 뒤따르는 결과는 중우성(衆遇性)이다. 사회는 정신적 지주를 필요로 하며 권위 있는 지도자를 요청한다. 이것은 사회의 존립을 위한 기초로서 마치 항해하는 배의 운명을 다루는 기능에 비견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우적 사회에서는 지도적 권위가 쉽게 무시된다. 검증과 절차를 거쳐 항해의 키를 맡은 지도자들이 설 자리가 없다. 사람들은 곧 다수의 판단은 항상 옳은 것이라는 그릇된 신화를 따라 다중의 합의된 목소리에 가치를 부여하기 시작한다. 심지어 중우적 대중의 목소리에 힘이 실리게 되고 사람들은 그것을 기준으로 판단하고 생각한다. 이렇게 되면 정작 가치도 기준도 없이 사회의 물결이 흘러가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대중은 전체적으로 우매의 길을 선택할 우려가 있다.
더 나아가서 중우적 대중사회에서는 윤리의식의 결여나 이성적 사고의 퇴조로 삶의 천박성이 심화될 수 있다. 사이버의 익명성을 악용해 무절제하고 부도덕한 행위를 용이하게 해내어 다수에게 일시적으로 가해할 수 있다. 또한 비윤리적 감정의 표현들을 쏟아내고 이성적으로 생각하고 지혜로운 결정을 하는 능력을 잃을 수 있다. 편의성을 추구하기 때문에 두뇌의 공동화 현상이 일어나고, 복잡한 것을 싫어하고 간략하고 감성의 추진에 좌우되는 인성상의 저급화가 초래된다. 간단한 기계조작방식만 깨우치면 되는 사회가 되어서 지성적 사고가 후퇴하고 사려 없는 감성적 행동화가 심해질 수 있다. 이것은 매우 심각한 현상일 수 있다. 이것이 윤리적인 퇴폐현상과 함께 맞물려 더욱 심각한 상황으로 발전될 수 있다.
지역 공동체의 해체를 예견할 수 있다.
사이버 시대는 우선 사람들로 하여금 밖에 나가 먼 거리를 오가며 활동하던 생활패턴의 변화를 가져온다. 홈뱅킹이나 홈쇼핑의 편의적 수단 등이 그 예이다. 그 결과로 생겨난 시간적 여유는 여가 혹은 창의적 활동 등에 더 많이 사용할 수 있게 된다. 장소를 근거로 하는 직장개념의 변화가 수반될 것이 틀림이 없다. 많은 사람들이 교통지옥을 경험하면서 직장에 출근하는 지금의 상황과는 좀 다른 양상이 전개될 가능성이 많다. 집에서 상당수의 일들을 처리하는 재택근무의 방식이 늘어난다. 학교수업도 마찬가지로 출석보다는 재택수업(home-schooling)으로 사이버에 더 많이 의존할 가능성이 높다.
이렇게 되면 자연히 사람들은 좋은 환경을 찿아서 도시 외 지역으로 주거를 선택하는 상황으로 인해 필연적으로 지리적 연계를 기반으로 하는 지역공동체의 해체가 야기된다. 과거 산업사회에서의 주거와 일터의 거리는 교통과 통신의 발달에도 불구하고 출퇴근의 용이성을 고려한 경역에 머물렀다. 그러나 이제 사이버 세상은 주거의 범위를 훨씬 확대해 놓는다.
지역공동체의 해체는 긍정적인 면보다는 부정적인 면이 많다. 지역공동체의 구성원들이 서로 함께 전인적으로 어우러짐을 통해서 얻게 되는 것은 서로간의 유익의 측면도 있지만 여기에는 서로에 대한 어느 정도의 책임과 관심이 수반된다. 그러나 지역공동체가 해체되고 사이버를 매개로 가상공간상의 관계로 대체될 경우 삶의 척박성은 매우 심화될 수 있다. 함께 어우러짐에서 서로 교감되는 인간애가 스며들 여지가 없고 표피적인 관계, 이기적 수요에 의한 관계들로만 채워지기 때문이다.
이러한 지역공동체의 해체는 지역을 단위로 해서 형성되는 오늘의 교회들의 결집력을 매우 약화시킬 가능성이 있다. 신앙은 단순히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라는 편협한 도식에 국한될 수 없고 이웃과 전인적인 관계를 통해서 구현되어져야만 한다. 이것은 신자들이 함께 회집하는 일 속에서 가시화 된다. 교회가 극렬한 박해 속에서도 함께 모이기를 힘썼던 이유도 이점과 무관치 않다.
IV. 사이버시대의 대안예배는 가능한 것인가?
그렇다면 이런 사이버시대의 예배는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가? 신앙에 대한 관심을 잃어버리고 교회의 출석도 마다하는 앞으로의 세대를 위해서 향후 우리들의 예배는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가? 최근 모 기독교 방송사에서 직원들을 대상으로 하여 설문조사를 한 바 있다. 그 내용 중, '한국 교회가 추구해야할 21세기 선교방식'으로서 어떤 것이 있을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에 대해서 가장 높은 비율로서 41%가 '정보통신을 통한 매체선교'라고 답했다. 방송언론인들의 시각에서 피부로 느끼고 있는 바를 표명한 것이라고 여겨진다. 사이버 시대의 도래 앞에서 기독교 신앙의 중심행위인 예배의 대안적 모색은 매우 중대한 주제임을 확인시켜주고 있다. 여기서 필자는 대안적 예배라는 표현이 자칫 대체적 예배의 출현이 필요함을 시사하는 듯한 함의와는 달리 대안적 조처들을 제시하고자 한다. 앞으로의 예배가 지향해야될 원칙적인 내용으로서 다음과 같은 것들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예배와 삶과의 관련성을 높여야 한다.
사람들이 예배로부터 멀어지게 되는 원인 중에 하나는 그들이 매일 부딪치는 삶과의 연관성이 약하기 때문이다. 구도자 예배를 처음 시작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는 미국의 Willow Creek 교회가 1975년에 교회를 설립하기 앞서서 교회가 속할 공동체에 대한 이해를 높이기 위해 설문조사를 실시하였다. 그 결과 교회에 잘 다니지 않는 사람들이 왜 안 다니게 되었는지에 대한 이유를 5가지로 제시하였는데 그 중에 '예배가 지루하며 생명력이 없다'는 것과 '설교가 실제 세상에서의 일상의 삶과 관련이 없다'는 답이 눈길을 끌고 있다. 이같은 설문조사를 Williow Creek 교회는 구도자 예배의 중요한 자료로 사용하였다. 구도자 예배에 대한 예배 신학적 평가는 부정과 긍정을 다 포함하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시적 사건을 재현하는 예배가 사람들의 외면으로 미처 전달할 기회마저 잃어버리고 있는 오늘의 현실을 볼 때 구도자 예배는 신선하고 도전적인 대안을 보여주고 있음은 인정되어야 할 것이다.
아무리 좋은 내용을 예배가 담고 있어도 예배 자체 안에 사람들의 관심을 끌어 모으지 못한다면 무용지물이 되고 만다. 흔히 있는 일로서 예배가 교리적인 주입에만 치중하거나 회중들의 현실에 눈을 돌리지 않으면 흥미를 끌지 못한다. 그나마 인내력 있는 신자들도 현실과의 괴리로 이중적 삶을 살 수 밖에 없다. 상황이 성경보다 우위에 있을 수는 없지만 상황에 대해 예배는 진지한 답을 제공해야 한다. 예배는 그 틀과 각각의 요소들 속에서 현실과의 깊은 연관성을 반영해야 한다. 이 땅위에서의 예배는 현실과 유리된 고립된 의식으로만 인식되어 구원받은 자들의 분리된 의식이 되어서는 안된다. 예배자들을 이 세상 속에 끊임없이 투입(input)시키고 그들을 통해서 반응(feedback)을 취합하기를 거듭하는 장인 것이다. 그래서 미국의 대표적 개신교단인 PCUSA(장로교회)나 UMC(연합감리교회) 등은 그들의 예배의 구조를 에큐메니칼 모델에 따라 네 개의 구조로 나누고 마지막 부문을 다른 교단과 달리 파송(sending 혹은 sending forth)이라고 명명하였다.
예배의 요소들 가운데서도 몇몇 예로 전통적인 예배의 방식들이 그러했듯이 예배에서의 고정된 기도문이나 공동기도 등에서 이런 현실과의 관련을 깊이 있게 반영해야 한다. 단편적인 예이기는 하지만 오늘날 한국의 주류 교단들의 예식서에서 '사람들의 기도'(인도자와 회중이 교대로 기도하는 중보적 성격의 기도)는 회중들의 삶의 거울이 될 수 있는 부분임에도 불구하고 누락되어 있는 점은 아쉬운 점이기도 하다. 예배와 삶의 관련노력은 예배로부터 소외되어 가는 회중을 붙잡는 적절한 흡인력이 될 수 있다.
예배의 상호성(communality)을 확대해야 한다.
사이버시대에 생길 수 있는 인간소외는 사이버를 통해서 접하는 가상현실과 왜곡된 타자들과의 만남에 지나치게 탐닉하여 스스로도 인지하지 못하는 중에 실제적인 관계의 역동을 잃어버린 현실에서 생겨난다. 예배는 바로 이런 현실에서 인간을 잇는 이음매가 되어야 한다. 근간의 예배들이 그나마 주일 하루, 짧으면 채 한 시간도 안돼는 예배 중에 사람들 상호간 수평적 교제를 협소하게 제한하는 일은 매우 아쉬운 점이다. 짧은 예배가 모든 것을 다 함유할 수는 없지만 수평적 화해와 만남의 상징성은 더욱 강화되어야할 필요가 있다.
전통적으로 예배의 중심에 위치해 있었던 성만찬은 수직적 화해의 사건일 뿐만 아니라 수평적 화해의 자리였다. 수직적이라 함은 하나님과의 화해를 말한다. 수평적이라 함은 곧 예배자 상호간 또는 공동체의 지체들과의 화해였다. 비교적 기독교 초기의 상세한 예배모습을 기술한 I Apology는 참여자들이 성만찬 예식의 시작점에서 남자와 남자 그리고 여자와 여자가 상호 입맞춤으로 완벽한 화해의 상징행위를 시행하였음을 전해주고 있다. 그래서 오늘날 어떤 전통들에서는 성만찬을 상호교류라는 의미를 지니는 Communion 혹은 Holy Communion이라는 명칭으로 일컫는다. William R. Crockett도 H. de Lubac의 생각을 지지하면서 '주의 몸을 분변치 못하고 먹고 마시는' 행위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곧 그 지체들과의 화해 없이 먹는 행위를 지칭한 것이라고 말한다.
서로 만남으로서 체득되는 역동이 오늘의 예배에서 되살아나야 한다. 오늘날 예전적 교회들의 예식들 안에서 보통 평화의 나눔이라는 요소가 있긴 하지만 매우 형식적일 뿐이다. 함께 손잡고 인사를 나누며 공동의 관심사를 나누고 격려하는 것이 예배의 수직적 요소--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에 초점을 맞추는--못지 않게 중요한 것이다. 비물리적 사이버공간이 결코 가져다 줄 수 없는 사람들과의 만남과 교제를 통해서 예배자는 하나님과의 만남이 구현되어야 할 대상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예배 안에 회중의 참여도를 확대해야 한다.
예배에서 참여도를 말할 때 두 가지 측면을 고려할 수 있을 것이다. 예배의 순서에 신자들이 실제로 어느 정도 참여할 수 있도록 열려있느냐의 여부를 다루는 형식적 측면과 신자들이 어느 정도 심도 있게 예배 안에서 그리스도의 임재 사건에 몰입하느냐를 다루는 내용적 측면으로 구분될 수 있을 것이다. 전자를 위해서 예배의 준비나 기획에 보다 넓은 층의 평신도 지도자들이 참여케 하는 방안이 고려될 수 있을 것이다. 신앙적 검증을 거친 각 부서의 지도자들 혹은 전문인들이 다양한 회중의 요구에 부응하는 전달방식을 강구하기 위해 예배의 기획에 관여하는 일은 충분히 제고되어야 한다. 예배의 사전 기획을 위해서 최근 널리 알려진 교회력(The Christian Year)이나 성서정과(Lectionary)의 사용이 바람직 할 것이다. 교회력과 성서일과에 따른 예배는 회중들로 하여금 예배의 주제나 진행방향을 예상케 하고 준비케 할 수 있다.
내용적인 면에서의 참여도를 제고하기 위해서는 복잡한 예배상의 여러 절차들을 평이하면서 간소하게 다듬어야 할 것이다. 오늘의 교회들이 예전적 갱신에 대한 관심으로 전통적인 예배요소들을 첨가하고 있지만 그 의미나 내용이 쉽게 회중들에게 전달되지 않은 채 주술적으로 시행되지 않도록 유념해야 할 것이다. 현대적 삶에 맞는 언어와 상징체계 등으로 바뀌지 않은 채 덧붙여질 경우 사족이 될 수 있음을 유의해야 한다. 일부 교회에서 행하고 있는 영상예배는 일단 원활한 콤뮤니케이션을 통한 참여를 돕는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다. 사이버 시대의 인지수단에 익숙한 세대를 위해서 대안적일 수 있다. 그러나 영상예배에서 민감하게 다루어져야 할 것은 상징성의 문제이다. 영상의 특징일 수 있는 과장 가능성과 허구적 이미지 등에 유의하고 절제된 객관성을 유지해야할 것이다. 그 외에도 성경봉독시(특히 성서정과를 사용할 때) 드라마나 촌극 등의 예술적 표현을 차용하거나 이해하기 쉬운 역본들을 허용하여 성서에 대한 무지가 증대되는 현대인들에게 말씀에 보다 친숙할 수 있게 도와줄 수 있을 것이다.
예배의 다양성을 적극 허용해야 한다.
앞서 언급한 대로 사이버 시대의 중요한 특징의 하나는 다양성이다. 사람들은 다양한 세계와 문화에 그 어느 때 보다도 손쉽게 개방되어 있다. 실제로 오늘날 많은 교회들이 예배개혁운동으로 인해 다른 전통들에 대해 더 많이 이해하게 되면서 다양성의 필요를 더한층 인식하고 있다. 특정의 예배 형식이나 스타일만을 배타적으로 옳다고 고집하기는 어려운 개방적 현실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예배의식이나 내용에 대해서도 편협주의에 빠져서 다른 것에 대한 무조건적인 단죄보다는 오히려 그 다양성을 인정하고 그 속에서 기독교적인 정체를 지켜나가기 위한 끊임없는 노력과 검증이 더 요구될 뿐임을 인식하여야 할 것이다.
특히 우리 한국교회는 한 주간 안에도 많은 예배들을 시행한다. 이들 예배들의 각각을 신중하게 차별화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종래의 말씀중심의 전통개신교예배와 더불어 예전성을 갖춘 예배, 또는 기도와 찬양이 주가된 예배 등을 배정하여 특색 있게 운용하는 것도 생각해 볼만하다. 다양성의 또 한 예로 음악에 있어서도 다채로운 장르를 인정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사이버 시대의 세대적 격차는 훨씬 더 심할 것이 예상되기 때문이다. 성가대 찬양도 너무 수준 높은 선곡으로 인해 자칫 회중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보통인데 이는 마치 중세기의 챈트가 젼혀 회중의 심정을 대변할 수 없었던 것과 같은 현상이 될 수 있다.
V. 나오는 말
사이버시대를 위한 예배의 대안을 찾는 노력은 결코 기존의 예배를 대신하여 사이버상의 예배로 대치하여야 한다는 논의가 되어서는 안된다. 사이버가 제공하는 예배가 결코 기존의 예배를 대치할 수는 없는 일이다. 시대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예배는 함께 모여서 그리스도안에서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며 성령의 도움을 통한 인간의 응답이 이루어지는 자리요, 그 응답은 수직적이며 수평적인 것이 되어야 한다. 정보화시대의 내용으로서의 사이버공간은 분명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에 있어서 삶의 한 양식을 규정하는 사회적 공간임에 틀림이 없다. 더욱 편리하고 폭넓은 삶의 질을 경험하게 한 문명의 이기이다. 그러나 속도감과 편의 및 무한대의 정보의 향유가 항상 인간의 삶의 질을 고양시키는 것은 아니다. 더더욱 신앙적 가치와 항상 등식이 될 수도 없다. 다만 이런 정보화의 물결, 사이버 공간의 확대를 어떻게 창의적으로 예배의 현장에 사용하느냐, 그래서 통전적 삶을 잃어 버리고 예배로부터 멀어져 간 회중들과 사람들을 어떻게 회집(assembly)의 자리에 불러들이느냐가 중요한 관건이라고 할 수 있다. 사이버시대의 도래 앞에서 만일 예배가 구태의연 하려고만 한다면 거센 도전의 물결 앞에 예배의 역동은 사라지게 될 수도 있다. 교회는 사이버공간을 무조건 방치할 수는 없다. 중우적 대중에 의해서 끌려가는 곳이 되게 해서는 안된다. 이 공간을 끝없이 기독교적 가치로 일구어 나가야 한다. 더 나아가서 예배는 이 현실에 대해서 그 정체를 지키면서 신속하고도 적절하게 변화할 수 있어야 한다. 사이버 시대의 기독교신앙의 정체를 분명히 하면서 전술적 변용의 과제를 안고 있는 기독교의 예배는 신앙의 최우선적 권위인 성경과 그것의 개별 해석적 역사인 전통을 향한 끝없는 반성적 성찰을 통해서 이 작업을 계속해 나가야 할 것이다
21세기의 문턱을 향하여 역사의 바퀴가 마지막 힘겨운 회전을 해가던 즈음, 지구촌 곳곳에서는 때아닌 불안과 긴장에 휩싸였다. 정보화시대의 활황기를 구가하며 문명의 진보와 그 힘의 위력을 과시하던 세계는 마치 전쟁에서 겁에 질린 패장의 모습으로 갑작스레 몸을 움츠리고 있었다. 오래 전 누군가가 지구 곳곳에 은밀히 설치한 무수한 시한 폭탄들이 뒤늦게 발견되어 2000년 0시와 더불어 동시다발로 터질 운명에라도 직면한 듯, 모두다 몸을 숙인 채 초긴장의 상태에 돌입하였다. 그러나 허탈하게도 2000년의 0시가 지나면서 모든 것은 한때의 우스꽝스런 해프닝으로 끝나고 말았다. 이른바 Y2K, 곧이어 사람들의 입에서는 다행스런 한숨 못지 않게 '인류 최대의 사기극'이었다느니 '상업주의의 계략'이었다느니 하는 비난과 원성과 조롱의 소리가 한동안 끊이지 않았다. 이제는 유행과 계절이 지나 꺼내 입기 민망한 외투 같은 개념이 된 Y2K 문제는 역사의 배면으로 그렇게 사라져 갔다. 이런 희화적 사건은 적어도 오늘의 우리에게 정보화시대의 수혜 만큼이나 이런 현실 속에는 잠복된 위험들이 동시에 도사리고 있다는 사실을 실감케 하였다. 마치 우리 신체의 신경계가 그러하듯이 사이버는 우리의 인류의 삶 속에 깊숙이 파고들어 각 분야의 모든 영역에서 피하여서는 살 수 없는 그 무엇이 되어가고 있음을 실감케 한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사이버시대의 도래 앞에서 기독교 신앙의 중심적 행위인 예배는 어떻게 대응하여야 할 것인가? 예배와 사이버시대는 어떤 만남을 갖게 될 수 있을 것인가? 적지 않은 많은 사람들이 지금도 그러하거니와 앞으로의 세계도 사이버시대라는 만만치 않은 현실에 직면케 되리라고 예측하고 있다. 이미 거부할 수 없는 실체로 우리의 삶 속에 깊이 자리잡고 있고 또 앞으로도 심화될 사이버 현실에 대하여 우리의 신앙의 양상을 예단하고 신앙의 중심행위인 예배의 대안적 방향을 생각해 보는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일이라고 여겨진다.
II. 사이버 세상과 미래
산업사회에서 기계가 우리의 육체적인 노동을 떠맡았던 것처럼, 정보화사회에서는 컴퓨터가 우리의 정신적인 임무들을 점점 더 비중 있게 담당케 될 것임은 이미 1946년 최초의 컴퓨터 ENIAC의 출현이후 컴퓨터의 엄청난 진보를 통해 증명되어 왔다. 미국의 Futurist 잡지는 1990년대 후반, 컴퓨터가 초당 계산해 낼 수 있는 숫자를 600만개로 보았고 이후 머지않아 그것의 1만배를 능가하는 변화가 있을 것임을 예견했다. 또 10억 비트, 즉, 오늘날 우리가 보통 사용하는 4메가 바이트 칩의 256배 이상을 담을 수 있는 메모리칩 개발을 알린지는 이미 여러 해 전의 일이다. 심지어 앞으로 10년 내에 현재의 수퍼 컴퓨터보다 1,000배 빠른 컴퓨터가 나올 것이 예상되고 있는 상황이다. 가히 상상할 수 없는 정보사회의 현실을 빠르게 실감케 하는 내용이다.
산업사회에 이어서 전개된 정보화 사회는 엘빈 토플러가 지난 세기말 예견한 대로 그 힘의 중심추를 무력이나 자본이 아닌 지식과 정보로 이동시켰다. 이러한 변화는 힘과 재력의 소유가 대체로 나이와 경험 등에 비례할 것으로 여기던 통념적 인식을 벗어나서 년령 혹은 경륜 등과 무관하게 젊은 파워집단이 정보화의 첨병인 인터넷 업계에서 가장 빈번히 실세화되고 있음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세계적인 갑부인 마이크로소프트사의 사장 빌 게이츠나 야후사의 제리 양 혹은 한국계 일본인 손정의 등, 그 실제적 예들은 요즘 유행하는 벤처 창업의 성공 사례 등에서도 무수히 발견되어진다.
이와 같은 정보화의 큰 물결과 더불어 오늘날 널리 사용되고 있는 사이버(cyber)란 용어는 주로 개개 컴퓨터를 착발지(着發地)로 하여 무수한 컴퓨터 운용 주체들이 네트워크를 통해 상호 연결되어 형성하는 비물리적, 사회적 공간을 지칭하는 형용어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근자에는 이와 같이 컴퓨터를 매개로 해서 형성되는 모든 사회적 공간에 대해 사이버 경매, 사이버 음악회, 사이버 박람회 등, 습관처럼 사이버라는 접두어를 즐겨 붙이기도 한다. 비록 이러한 새로운 공간형성에 관련된 물리적 요소들이 단지 무수한 컴퓨터와 그것을 연결하는 네트와 비물리적 기호들인 비트(bit)의 집적지가 있을 뿐이지만 이들을 통해 형성되는 가상공간은 가히 무한대에 이를 만큼 많은 현실을 창출해내는 공간이기도 하다.
우선 사이버공간이 가져온 우리 삶의 변화와 긍정적 측면들을 다음과 같이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Cyber는 인간의 정신적 활동의 확대를 가져왔다.
정보화의 큰 물결 속에서 사이버라는 새롭고도 한계를 가늠할 수 없는 사회적 공간의 형성은 많은 사람들의 삶의 공간을 급속히 무한대로 확대시켜 나가고 있다. Cyber는 분명, 비트의 조합에 의한 이미지의 조작이요, 기호임에도 불구하고 물리적 현실 못지 않게 사회적 장으로서 현대인의 정신영역을 점거해 가고 있다. 과거 스크린에서 투사된 이미지가 일방적이고 수동성을 전제하였다면, 사이버는 양방적이고 주체적인 참여가 가능한 이미지이며, 더 나아가서는 누구나 특별하고 복잡한 절차 없이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인간의 정신적 활동영역'을 확대시켜 놓은 공간이다. 인간의 최상의 욕구로서의 '자아실현'을 달성하는데 도구적 기여를 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더 나아가 이런 자아실현을 위한 여타의 장애들을 현격하게 줄여 놓아서 평등의 정의를 보편화 시켜가고 있다. 과거 우월한 혹은 기득적(旣得的) 소수의 목소리에 의해서 사회형성이 이루어지던 과거 산업사회의 커뮤니케이션 구조는 가히 해체적 위기를 맞고 있다고 볼 정도로 각양의 목소리에 의해서 재편되고 있다. '디지털 경제'라는 책으로 유명해진 시장 분석가 돈 댑코스트는 'N세대의 무서운 아이들'이라는 새책에서 네트워크 환경에서 자란 'Wired generation' 혹은 'Digital' 세대를 묘사했다. 그에 의하면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어린이들이 사회적으로 중차대한 현안들에 대해 강력한 권위를 갖게 됐다'고 보고 이들의 사회진출은 덜 위계적이면서 더욱 협력적인 현실로 바꾸어 놓고 있다고 평가하고 있다. 실제로 선거철에 출마자들이 네티즌들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 적지 않은 신경을 쓰고 그들의 사이버상의 여론에 촉각을 곤두세우는 모습은 제도적 절차로 인해 더 이상 장벽을 느끼지 않는 수평화된 다중의 목소리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는 현실을 반영하고 있다.
Cyber는 지구촌 공동체의 상호 관심을 확대했다.
사이버는 분명 오늘을 사는 사람들에게 커다란 삶의 이기이며 국경과 거리를 뛰어 넘어 수많은 정보의 주체들과의 만남을 제공하여 더더욱 다양한 삶의 질을 경험케한 도구이다. 이러한 새로운 경험은 과거에 제한된 울타리 안에서 살아가던 지역 공동체의 삶의 터전을 전지구적인 경역(境域)으로 확대시켜 놓은 것이다. 사이버라는 가상적 공간은 비록 물리적 공간은 아님에도 사회적 활동 공간으로서 기능하며 그 영역을 전지구적 공동체의 물리적 현실에 직간접으로 긴밀하게 영향을 주고 있는 것이다.
사이버를 통한 사회적 활동영역의 확장은 과거에 알려져 있지 않았던 주변 세계에 대한 새로운 앎의 정도를 증대시켰고 따라서 그만큼 책임의 분량도 확대해 놓았다. 예수의 이웃의 개념은 단순한 지리적 근접성에 기초한 구획이 아니었다. 누구든 어려움 당하는 자에게 자비를 베푸는 자가 곧 이웃이었다.(눅 10:37) 그러므로 누구든 어려움에 처한 사람이나 집단은 교회의 관심권 안에 포괄된다. 사이버를 매개로 생겨난, 주변 세상에 대한 인식의 확대는 곧 이들 세상에 대한 더 큰 책임적 관심과 배려의 확대를 가져온 것이다.
지구촌 어느 한 곳에서 발생한 작은 문제들도 특정의 사람들에게는 구체적인 관심을 보일 수 있는 사건들이 된다. 과거 큼직 큼직한 사건들은 유수 미디어를 통해서 알려졌지만 소수의 특정 이해집단 간의 문제는 감추어지기 일쑤였다. 사이버는 바로 이런 현실에서 거리와 국경을 뛰어넘어 관심과 이해를 호소하고 또 그 대상을 만나는 데에 요긴한 도구가 될 수 있게 하고 있다. 종래 특정의 거대 미디어들의 시각에서, 혹은 그들이 배경으로 하고 있는 국가나 진영의 이익의 관점에서 일방적으로 전해지던 구조가 수많은 개개 목소리들의 쌍방적 교환이라는 구조로 바뀌어 지고 있다. 이점은 다양한 저변의 목소리가 보다 폭넓게 반영되고 있다는 말이 되기도 한다. 오늘의 우리는 전체 지구가 하나의 공동체임을 의식하게된 현상에 보다 익숙하게 되었다. 우리의 관심의 영역을, 우리의 돌봄의 영역을 이와 같이 거시적으로 확대해서 볼 수 있게 하는데는 사이버의 수단적 역할이 기여하고 있음을 목도하고 있는 것이다.
사이버는 문화적 다채성(多彩性)과 동질성의 도구가 되고 있다
사이버의 세상에서는 폭넓은 다양성의 시대가 전개될 것을 예상케 한다. 사이버 세상은 국제사회의 언어를 급격히 영어로 평정해 가고 있다. 영어가 일상의 통화언어가 되어가면서 국경이나 거리의 장벽을 뛰어넘어 함께 일하는 현실적인 의미의 지구촌화가 가속화되고 있다. 이러한 지구촌화로 인해 지역문화들은 퇴조하고 다양한 문화들이 서로 교환되면서 공존할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기독교의 외형적 틀이 역사적으로 문화적인 변용을 겪어온 것이 사실이지만 사이버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문화적인 변용은 그 속도가 매우 빠르고 다양성의 폭이 넓을 것이다.
이와 더불어 문화에 대한 이해도 새롭게 조명될 필요가 있다. 산업사회에서 문화의 이미지는 차별성이었다. 문화를 떠올릴 때마다 타자와 다른 특정 문화의 차별적 특징을 연상하였다. 분명히 문화간 차별성은 어느 정도는 항구적으로 존속하게 될 것이다. 인종적으로 흑인과 백인과 황인 및 갈색인종이 존재하듯, 지역간 서로 다른 대조적 기후와 환경이 존재하듯, 문화도 따라서 외견상 차별성은 정도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지속적 특징이 될 것이다.
그러나 사이버 시대의 문화는 차별 못지 않게 오히려 서로간 동질성 내지는 유사성을 발견하는 계기를 갖게 될 것이다. 사람들은 다양한 문화들과의 접촉을 통해서 자신 혹은 자신이 속한 집단 내에 내재된 무한한 문화적 다채성(多彩性)을 발견하는 계기를 맞는다. 결과적으로 이것은 타자에 대한 이해를 한층 증대시킨다. 이것은 일종의 자신에 대한 새로운 영역의 발견일 수 있다. 이러한 새로운 공간의 발견, 인간의 자신에 대한 확장을 바로 사이버가 첨예화시킨다.
문화는 분명 다양성을 띄게 될 것이고 더욱 세분화된 모습일 것이다. 지구촌 공동체의 다양한 문화는 서로간 공유 대상으로 인식되어져야 한다. 이런 목적은 공유가 가능토록 하는 도구적 뒷받침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사이버는 바로 이러한 일의 도구적 기능을 감당할 것이 틀림이 없다. 이 점은 기독교 신앙의 중심행위로서의 예배가 자신의 정체를 분명히 하면서 동시에 다양한 현실에 대해서 적절하고도 신속하게 전술적 변용을 시도해야할 이유가 되는 것이다.
III. 사이버 세상과 그늘
사이버시대가 제시하는 새로운 현실의 긍정적 측면들에도 불구하고 우려되는 부작용으로서의 그늘도 간과할 수 없다. 다음과 같이 전망할 수 있다.
비사회화 및 고립화의 시대가 심화될 수 있다.
사람들의 비사회화 및 고립화가 심화될 것이다. 사이버가 제공하는 공간이 사회적 장을 제공한다고는 하지만 몸과 정신이 전인적으로 어우러져서 함께 참여하고 살아가는 물리적 현실로서의 사회와는 다르다. 몸 없는 사회적 공간이다. 자신을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 아닌, 왜곡되거나 그릇 과장된 모습으로 자신을 드러낸다. 타자와의 진실한 만남도, 인격적 만남도 기대하기 어렵다. 현실에서는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자기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노출해야 한다. 함께 지속적으로 어우러지기 위해 땀과 정성이 필요할 뿐만 아니라 때로는 양보와 타협을 반복해야 하고 진실을 담고 있어야 한다. 다른 사람과 만나서 서로 다른 견해에 부딪치며 겪게 되는 일 속에서 좌절이 있을 수 있지만 이것들을 극복하는 속에서 인간과 세계에 대한 깊은 이해를 더해간다.
그러나 사이버 공간에서는 먼저 서로에 대한 깊은 관심도, 관련도 미약하다. 다만 일회적이고 이기적인 수요에 관심하기 때문에 현실에서 경험되는 버거운 무게를 피하는 도피적 공간으로 삼으려 한다. 사이버에 몰두하게 되는 경우는 바로 이런 현실의 무게를 기피하려는 인간의 나약성에서 비롯되기도 한다. 사람들은 이 버거운 현실에서 점차 퇴각하여 사이버 세계에 갇힌 채 다른 사람들과의 접촉을 기피하고 고립된 오락을 즐기게 되면서 비사회화, 고립화를 경험하게 된다. 사이버가 제공하는 공간이 일종의 사회적 공간임에는 틀림이 없으나 이러한 사이버 세계에의 몰두는 실상은 사이버공간이 인간의 도피적 공간을 제공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사회가 점차 복잡해지고 다원화되어가면서 인간은 점차 사회적으로 더 깊은 정신적 아노미에 빠져들기 때문이다. 인간에게 주는 견디기 힘든 중압에 기인하기도 한다. 결국 이러한 현상은 최악의 경우 '함께 함'을 근간으로 하는 예배의 삶에 큰 부담이 될 수 있다.
중우적(衆遇的) 대중사회가 될 수 있다.
분명 사이버 시대 하에서 일방 통행적이고 중앙집중적인 콤뮤니케이션 방식은 크게 수정될 것이 예견된다. 규모상 차이는 있을지라도 다양한 목소리의 주체들이 과거 거대 미디어들이 해내던 언론기능의 일부를 떠맡게 된다는 것이다. 이들 무수한 목소리들은 저마다의 의견을 통해서 거대한 여론의 바다를 이룬다. 그러나 이들 사이버 사회의 목소리들이 항상 품위 있게 정제된 목소리이기를 기대하기란 쉽지 않다. 때로는 마치 뉴욕 시내의 낡은 건물에 휘갈겨 놓은 무수한 낙서처럼 탁월한 생각의 발현도 아니고 공유의 가치를 지니지도 않은, 그렇고 그런 낙서들로 사이버공간이 채워질 수도 있다.
이런 현상에서 필연적으로 뒤따르는 결과는 중우성(衆遇性)이다. 사회는 정신적 지주를 필요로 하며 권위 있는 지도자를 요청한다. 이것은 사회의 존립을 위한 기초로서 마치 항해하는 배의 운명을 다루는 기능에 비견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우적 사회에서는 지도적 권위가 쉽게 무시된다. 검증과 절차를 거쳐 항해의 키를 맡은 지도자들이 설 자리가 없다. 사람들은 곧 다수의 판단은 항상 옳은 것이라는 그릇된 신화를 따라 다중의 합의된 목소리에 가치를 부여하기 시작한다. 심지어 중우적 대중의 목소리에 힘이 실리게 되고 사람들은 그것을 기준으로 판단하고 생각한다. 이렇게 되면 정작 가치도 기준도 없이 사회의 물결이 흘러가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대중은 전체적으로 우매의 길을 선택할 우려가 있다.
더 나아가서 중우적 대중사회에서는 윤리의식의 결여나 이성적 사고의 퇴조로 삶의 천박성이 심화될 수 있다. 사이버의 익명성을 악용해 무절제하고 부도덕한 행위를 용이하게 해내어 다수에게 일시적으로 가해할 수 있다. 또한 비윤리적 감정의 표현들을 쏟아내고 이성적으로 생각하고 지혜로운 결정을 하는 능력을 잃을 수 있다. 편의성을 추구하기 때문에 두뇌의 공동화 현상이 일어나고, 복잡한 것을 싫어하고 간략하고 감성의 추진에 좌우되는 인성상의 저급화가 초래된다. 간단한 기계조작방식만 깨우치면 되는 사회가 되어서 지성적 사고가 후퇴하고 사려 없는 감성적 행동화가 심해질 수 있다. 이것은 매우 심각한 현상일 수 있다. 이것이 윤리적인 퇴폐현상과 함께 맞물려 더욱 심각한 상황으로 발전될 수 있다.
지역 공동체의 해체를 예견할 수 있다.
사이버 시대는 우선 사람들로 하여금 밖에 나가 먼 거리를 오가며 활동하던 생활패턴의 변화를 가져온다. 홈뱅킹이나 홈쇼핑의 편의적 수단 등이 그 예이다. 그 결과로 생겨난 시간적 여유는 여가 혹은 창의적 활동 등에 더 많이 사용할 수 있게 된다. 장소를 근거로 하는 직장개념의 변화가 수반될 것이 틀림이 없다. 많은 사람들이 교통지옥을 경험하면서 직장에 출근하는 지금의 상황과는 좀 다른 양상이 전개될 가능성이 많다. 집에서 상당수의 일들을 처리하는 재택근무의 방식이 늘어난다. 학교수업도 마찬가지로 출석보다는 재택수업(home-schooling)으로 사이버에 더 많이 의존할 가능성이 높다.
이렇게 되면 자연히 사람들은 좋은 환경을 찿아서 도시 외 지역으로 주거를 선택하는 상황으로 인해 필연적으로 지리적 연계를 기반으로 하는 지역공동체의 해체가 야기된다. 과거 산업사회에서의 주거와 일터의 거리는 교통과 통신의 발달에도 불구하고 출퇴근의 용이성을 고려한 경역에 머물렀다. 그러나 이제 사이버 세상은 주거의 범위를 훨씬 확대해 놓는다.
지역공동체의 해체는 긍정적인 면보다는 부정적인 면이 많다. 지역공동체의 구성원들이 서로 함께 전인적으로 어우러짐을 통해서 얻게 되는 것은 서로간의 유익의 측면도 있지만 여기에는 서로에 대한 어느 정도의 책임과 관심이 수반된다. 그러나 지역공동체가 해체되고 사이버를 매개로 가상공간상의 관계로 대체될 경우 삶의 척박성은 매우 심화될 수 있다. 함께 어우러짐에서 서로 교감되는 인간애가 스며들 여지가 없고 표피적인 관계, 이기적 수요에 의한 관계들로만 채워지기 때문이다.
이러한 지역공동체의 해체는 지역을 단위로 해서 형성되는 오늘의 교회들의 결집력을 매우 약화시킬 가능성이 있다. 신앙은 단순히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라는 편협한 도식에 국한될 수 없고 이웃과 전인적인 관계를 통해서 구현되어져야만 한다. 이것은 신자들이 함께 회집하는 일 속에서 가시화 된다. 교회가 극렬한 박해 속에서도 함께 모이기를 힘썼던 이유도 이점과 무관치 않다.
IV. 사이버시대의 대안예배는 가능한 것인가?
그렇다면 이런 사이버시대의 예배는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가? 신앙에 대한 관심을 잃어버리고 교회의 출석도 마다하는 앞으로의 세대를 위해서 향후 우리들의 예배는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가? 최근 모 기독교 방송사에서 직원들을 대상으로 하여 설문조사를 한 바 있다. 그 내용 중, '한국 교회가 추구해야할 21세기 선교방식'으로서 어떤 것이 있을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에 대해서 가장 높은 비율로서 41%가 '정보통신을 통한 매체선교'라고 답했다. 방송언론인들의 시각에서 피부로 느끼고 있는 바를 표명한 것이라고 여겨진다. 사이버 시대의 도래 앞에서 기독교 신앙의 중심행위인 예배의 대안적 모색은 매우 중대한 주제임을 확인시켜주고 있다. 여기서 필자는 대안적 예배라는 표현이 자칫 대체적 예배의 출현이 필요함을 시사하는 듯한 함의와는 달리 대안적 조처들을 제시하고자 한다. 앞으로의 예배가 지향해야될 원칙적인 내용으로서 다음과 같은 것들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예배와 삶과의 관련성을 높여야 한다.
사람들이 예배로부터 멀어지게 되는 원인 중에 하나는 그들이 매일 부딪치는 삶과의 연관성이 약하기 때문이다. 구도자 예배를 처음 시작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는 미국의 Willow Creek 교회가 1975년에 교회를 설립하기 앞서서 교회가 속할 공동체에 대한 이해를 높이기 위해 설문조사를 실시하였다. 그 결과 교회에 잘 다니지 않는 사람들이 왜 안 다니게 되었는지에 대한 이유를 5가지로 제시하였는데 그 중에 '예배가 지루하며 생명력이 없다'는 것과 '설교가 실제 세상에서의 일상의 삶과 관련이 없다'는 답이 눈길을 끌고 있다. 이같은 설문조사를 Williow Creek 교회는 구도자 예배의 중요한 자료로 사용하였다. 구도자 예배에 대한 예배 신학적 평가는 부정과 긍정을 다 포함하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시적 사건을 재현하는 예배가 사람들의 외면으로 미처 전달할 기회마저 잃어버리고 있는 오늘의 현실을 볼 때 구도자 예배는 신선하고 도전적인 대안을 보여주고 있음은 인정되어야 할 것이다.
아무리 좋은 내용을 예배가 담고 있어도 예배 자체 안에 사람들의 관심을 끌어 모으지 못한다면 무용지물이 되고 만다. 흔히 있는 일로서 예배가 교리적인 주입에만 치중하거나 회중들의 현실에 눈을 돌리지 않으면 흥미를 끌지 못한다. 그나마 인내력 있는 신자들도 현실과의 괴리로 이중적 삶을 살 수 밖에 없다. 상황이 성경보다 우위에 있을 수는 없지만 상황에 대해 예배는 진지한 답을 제공해야 한다. 예배는 그 틀과 각각의 요소들 속에서 현실과의 깊은 연관성을 반영해야 한다. 이 땅위에서의 예배는 현실과 유리된 고립된 의식으로만 인식되어 구원받은 자들의 분리된 의식이 되어서는 안된다. 예배자들을 이 세상 속에 끊임없이 투입(input)시키고 그들을 통해서 반응(feedback)을 취합하기를 거듭하는 장인 것이다. 그래서 미국의 대표적 개신교단인 PCUSA(장로교회)나 UMC(연합감리교회) 등은 그들의 예배의 구조를 에큐메니칼 모델에 따라 네 개의 구조로 나누고 마지막 부문을 다른 교단과 달리 파송(sending 혹은 sending forth)이라고 명명하였다.
예배의 요소들 가운데서도 몇몇 예로 전통적인 예배의 방식들이 그러했듯이 예배에서의 고정된 기도문이나 공동기도 등에서 이런 현실과의 관련을 깊이 있게 반영해야 한다. 단편적인 예이기는 하지만 오늘날 한국의 주류 교단들의 예식서에서 '사람들의 기도'(인도자와 회중이 교대로 기도하는 중보적 성격의 기도)는 회중들의 삶의 거울이 될 수 있는 부분임에도 불구하고 누락되어 있는 점은 아쉬운 점이기도 하다. 예배와 삶의 관련노력은 예배로부터 소외되어 가는 회중을 붙잡는 적절한 흡인력이 될 수 있다.
예배의 상호성(communality)을 확대해야 한다.
사이버시대에 생길 수 있는 인간소외는 사이버를 통해서 접하는 가상현실과 왜곡된 타자들과의 만남에 지나치게 탐닉하여 스스로도 인지하지 못하는 중에 실제적인 관계의 역동을 잃어버린 현실에서 생겨난다. 예배는 바로 이런 현실에서 인간을 잇는 이음매가 되어야 한다. 근간의 예배들이 그나마 주일 하루, 짧으면 채 한 시간도 안돼는 예배 중에 사람들 상호간 수평적 교제를 협소하게 제한하는 일은 매우 아쉬운 점이다. 짧은 예배가 모든 것을 다 함유할 수는 없지만 수평적 화해와 만남의 상징성은 더욱 강화되어야할 필요가 있다.
전통적으로 예배의 중심에 위치해 있었던 성만찬은 수직적 화해의 사건일 뿐만 아니라 수평적 화해의 자리였다. 수직적이라 함은 하나님과의 화해를 말한다. 수평적이라 함은 곧 예배자 상호간 또는 공동체의 지체들과의 화해였다. 비교적 기독교 초기의 상세한 예배모습을 기술한 I Apology는 참여자들이 성만찬 예식의 시작점에서 남자와 남자 그리고 여자와 여자가 상호 입맞춤으로 완벽한 화해의 상징행위를 시행하였음을 전해주고 있다. 그래서 오늘날 어떤 전통들에서는 성만찬을 상호교류라는 의미를 지니는 Communion 혹은 Holy Communion이라는 명칭으로 일컫는다. William R. Crockett도 H. de Lubac의 생각을 지지하면서 '주의 몸을 분변치 못하고 먹고 마시는' 행위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곧 그 지체들과의 화해 없이 먹는 행위를 지칭한 것이라고 말한다.
서로 만남으로서 체득되는 역동이 오늘의 예배에서 되살아나야 한다. 오늘날 예전적 교회들의 예식들 안에서 보통 평화의 나눔이라는 요소가 있긴 하지만 매우 형식적일 뿐이다. 함께 손잡고 인사를 나누며 공동의 관심사를 나누고 격려하는 것이 예배의 수직적 요소--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에 초점을 맞추는--못지 않게 중요한 것이다. 비물리적 사이버공간이 결코 가져다 줄 수 없는 사람들과의 만남과 교제를 통해서 예배자는 하나님과의 만남이 구현되어야 할 대상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예배 안에 회중의 참여도를 확대해야 한다.
예배에서 참여도를 말할 때 두 가지 측면을 고려할 수 있을 것이다. 예배의 순서에 신자들이 실제로 어느 정도 참여할 수 있도록 열려있느냐의 여부를 다루는 형식적 측면과 신자들이 어느 정도 심도 있게 예배 안에서 그리스도의 임재 사건에 몰입하느냐를 다루는 내용적 측면으로 구분될 수 있을 것이다. 전자를 위해서 예배의 준비나 기획에 보다 넓은 층의 평신도 지도자들이 참여케 하는 방안이 고려될 수 있을 것이다. 신앙적 검증을 거친 각 부서의 지도자들 혹은 전문인들이 다양한 회중의 요구에 부응하는 전달방식을 강구하기 위해 예배의 기획에 관여하는 일은 충분히 제고되어야 한다. 예배의 사전 기획을 위해서 최근 널리 알려진 교회력(The Christian Year)이나 성서정과(Lectionary)의 사용이 바람직 할 것이다. 교회력과 성서일과에 따른 예배는 회중들로 하여금 예배의 주제나 진행방향을 예상케 하고 준비케 할 수 있다.
내용적인 면에서의 참여도를 제고하기 위해서는 복잡한 예배상의 여러 절차들을 평이하면서 간소하게 다듬어야 할 것이다. 오늘의 교회들이 예전적 갱신에 대한 관심으로 전통적인 예배요소들을 첨가하고 있지만 그 의미나 내용이 쉽게 회중들에게 전달되지 않은 채 주술적으로 시행되지 않도록 유념해야 할 것이다. 현대적 삶에 맞는 언어와 상징체계 등으로 바뀌지 않은 채 덧붙여질 경우 사족이 될 수 있음을 유의해야 한다. 일부 교회에서 행하고 있는 영상예배는 일단 원활한 콤뮤니케이션을 통한 참여를 돕는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다. 사이버 시대의 인지수단에 익숙한 세대를 위해서 대안적일 수 있다. 그러나 영상예배에서 민감하게 다루어져야 할 것은 상징성의 문제이다. 영상의 특징일 수 있는 과장 가능성과 허구적 이미지 등에 유의하고 절제된 객관성을 유지해야할 것이다. 그 외에도 성경봉독시(특히 성서정과를 사용할 때) 드라마나 촌극 등의 예술적 표현을 차용하거나 이해하기 쉬운 역본들을 허용하여 성서에 대한 무지가 증대되는 현대인들에게 말씀에 보다 친숙할 수 있게 도와줄 수 있을 것이다.
예배의 다양성을 적극 허용해야 한다.
앞서 언급한 대로 사이버 시대의 중요한 특징의 하나는 다양성이다. 사람들은 다양한 세계와 문화에 그 어느 때 보다도 손쉽게 개방되어 있다. 실제로 오늘날 많은 교회들이 예배개혁운동으로 인해 다른 전통들에 대해 더 많이 이해하게 되면서 다양성의 필요를 더한층 인식하고 있다. 특정의 예배 형식이나 스타일만을 배타적으로 옳다고 고집하기는 어려운 개방적 현실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예배의식이나 내용에 대해서도 편협주의에 빠져서 다른 것에 대한 무조건적인 단죄보다는 오히려 그 다양성을 인정하고 그 속에서 기독교적인 정체를 지켜나가기 위한 끊임없는 노력과 검증이 더 요구될 뿐임을 인식하여야 할 것이다.
특히 우리 한국교회는 한 주간 안에도 많은 예배들을 시행한다. 이들 예배들의 각각을 신중하게 차별화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종래의 말씀중심의 전통개신교예배와 더불어 예전성을 갖춘 예배, 또는 기도와 찬양이 주가된 예배 등을 배정하여 특색 있게 운용하는 것도 생각해 볼만하다. 다양성의 또 한 예로 음악에 있어서도 다채로운 장르를 인정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사이버 시대의 세대적 격차는 훨씬 더 심할 것이 예상되기 때문이다. 성가대 찬양도 너무 수준 높은 선곡으로 인해 자칫 회중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보통인데 이는 마치 중세기의 챈트가 젼혀 회중의 심정을 대변할 수 없었던 것과 같은 현상이 될 수 있다.
V. 나오는 말
사이버시대를 위한 예배의 대안을 찾는 노력은 결코 기존의 예배를 대신하여 사이버상의 예배로 대치하여야 한다는 논의가 되어서는 안된다. 사이버가 제공하는 예배가 결코 기존의 예배를 대치할 수는 없는 일이다. 시대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예배는 함께 모여서 그리스도안에서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며 성령의 도움을 통한 인간의 응답이 이루어지는 자리요, 그 응답은 수직적이며 수평적인 것이 되어야 한다. 정보화시대의 내용으로서의 사이버공간은 분명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에 있어서 삶의 한 양식을 규정하는 사회적 공간임에 틀림이 없다. 더욱 편리하고 폭넓은 삶의 질을 경험하게 한 문명의 이기이다. 그러나 속도감과 편의 및 무한대의 정보의 향유가 항상 인간의 삶의 질을 고양시키는 것은 아니다. 더더욱 신앙적 가치와 항상 등식이 될 수도 없다. 다만 이런 정보화의 물결, 사이버 공간의 확대를 어떻게 창의적으로 예배의 현장에 사용하느냐, 그래서 통전적 삶을 잃어 버리고 예배로부터 멀어져 간 회중들과 사람들을 어떻게 회집(assembly)의 자리에 불러들이느냐가 중요한 관건이라고 할 수 있다. 사이버시대의 도래 앞에서 만일 예배가 구태의연 하려고만 한다면 거센 도전의 물결 앞에 예배의 역동은 사라지게 될 수도 있다. 교회는 사이버공간을 무조건 방치할 수는 없다. 중우적 대중에 의해서 끌려가는 곳이 되게 해서는 안된다. 이 공간을 끝없이 기독교적 가치로 일구어 나가야 한다. 더 나아가서 예배는 이 현실에 대해서 그 정체를 지키면서 신속하고도 적절하게 변화할 수 있어야 한다. 사이버 시대의 기독교신앙의 정체를 분명히 하면서 전술적 변용의 과제를 안고 있는 기독교의 예배는 신앙의 최우선적 권위인 성경과 그것의 개별 해석적 역사인 전통을 향한 끝없는 반성적 성찰을 통해서 이 작업을 계속해 나가야 할 것이다
최신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