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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베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마가복음 궁극이............... 조회 수 686 추천 수 0 2015.07.21 09:4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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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막2:19-21 
설교자 : 김경형 목사 
참고 : 궁극교회 주일예배 

2장 19절-21절: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금식할 수 있느냐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는 금식할 수 없나니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날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기운 새것이 낡은 그것을 당기어 해어짐이 더하게 되느니라.


금식은 어느 때 하라는 것이냐? 금식은 신랑을 빼앗길 때 하는 것이다. 그러면 신랑을 누가 빼앗아 가느냐? 또 신랑을 빼앗기게 되면 신부는 어떤 상태가 될까?


신랑이란 용어 속에는 많은 의미가 함축되어 있는데, 신랑이라 하면 어떤 느낌이 드느냐? 신부 입장에서 신랑을 어떻게 생각하는 거냐? 사랑하는 사람이다. 사랑하는 이유는? 미워할 이유도 있고 사랑할 이유가 있는데 왜 사랑을 할까? 평생 반려자이므로? 왜 평생의 반려자로 삼는 거냐? 평생을 반려자로 삼는 것은 기쁘고 즐겁고 행복하고, 그리고 그 안에는 정복도 들어있고 번창 번성 이게 다 들어있다. 말하자면 세상을 다 차지하는 것과 같다.


옛날사람들은 신랑을 잃어버리면 자기 혼자 못 살아서 목매달아 죽기도 했다. 그러니까 ‘난 이제 희망이 없다. 즐거움이 없다. 이제 살아봐야 뭐하느냐’ 하고 자기 목숨을 끊는 것이다.


이게 ‘어리석다’ 하기 그 이전에 신랑이라는 의미가 뭐냐? 신랑이 신부를 사랑한다면 그 의미는? 신랑이 신부를 사랑하는 마음이 있다면 말하자면 고생시키지 않고, 때리지 않고, 미워하지 않고, 거기에는 희생도 들어있고, 내가 고생하는 한이 있더라도, 내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고생을 안 시킨다는 것도 들어있다. 사랑에는 그런 맛들이 다 들어있다.


일반적으로 생각하면 그런데, 이 일반적인 생각을 영원으로 늘어뜨려 봐라. 영원히 그렇게 해 주실 신랑이 누구냐? 주님이시다. 신부는 성도 자기다. 또는 교회다.


신랑을 빼앗기면 분하고 억울하고 슬프고 괴롭고 외롭고, 사랑을 받을 데도 없고, 의지할 데도 없고, 생산도 없고 희망도 없고 소망도 없고 건설도 없고 확장도 없고 계대도 없다.


역사적 사건적으로 보면 바벨론 70년 포로생활이 됐고, 또는 그 전에도 그 후에도 강대국의 속국이 되어 있을 때도 있었다. 그건 빼앗긴 거다. 다시 말하면 주님을 빼앗긴 거다. 주님을 빼앗긴 증거를 현재적으로 보면 말씀을 빼앗긴 거다. 주님의 말씀은 시랑의 말씀이다. 따라서 말씀을 빼앗기면 신랑을 빼앗긴 거고, 말씀을 사랑 안 하면 신랑을 사랑을 안 하는 것이다.


아버지를 사랑하느냐? 아버지의 말씀에 순종이 들어있다. 아버지를 사랑하지 않으면 말씀순종은 없다. 이렇게 되면 제 멋대로 가고, 자기 생각대로 하게 된다. 이걸 영적 계시적으로 보면 현재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이치의 말씀을 놓치고 산다면 신랑을 빼앗긴 상태다.


그냥 예수 믿는다가 아니라 예수를 믿으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요, 이게 구원 되신 예수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성령의 사람으로 만들어지는 이게 들어있다. 그런데 예수 믿으면서도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말씀을 받지 않는다면 문제는 그 자기는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인격화 성품화가 안 되는 거다.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되느니만큼 그 예수로 즐거워하고 만족하고, 채찍이 들어가고 전투가 들어가고 이김이 들어가는 건데 그게 없다면 그 자는 그리스도의 성품은 없는 거다.


현재 많은 기독교회들이 있지만 거의가 세상 쪽으로 흐르고 있다. 이거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이치로 인격화 성품화 되는 것과는 관계가 없다. 그러니까 기도하는 것이나 교회에서 설교로 강조하는 것은 세상의 요구 조건성이 들어있으니 이런 자들은 사람이 많으면 교회부흥이라고 보는 거다.


우리는 그 이전에 믿는 나의 인격과 성품이 뭘로 됐느냐? ‘길이요 진리요 생명으로 됐느냐’ 그걸 보는 거다. 이치로 들어가 있느냐? 이게 그의 말로 나오게 된다. 말은 그 사람 속에서 여문 열매요, 자기 속의 신앙이 그렇다고 하는 의미가 된다.


어리석고 미련한 신부는 세상에 속한 임시성적이고 변질되고 현세적인 것을 붙잡고 즉, 형벌 받을 것을 붙잡고 ‘이게 나의 신랑이다’ 한다. 이게 인본주의적 사고방식이요, 세상에 속한 신앙이다. 다시 말하면 사단 마귀의 시험에 다 넘어간 상태의 신앙이다. 쉽게 말하면 마귀의 밥이고, 거짓 종들의 밥이고, 이단자들의 밥이고, 세상의 노예다. 이건 ‘가난하게 산다’ 그걸 말하는 게 아니라 신앙의 사상과 정신과 마음이 그렇다는 것이다.


가룟유다가 예수를 따르면서도 돈을 좋아하니까 다른 사람이 겉으로 볼 때는 ‘예수 따른다. 예수 믿는다’ 하지만 그의 속 중심을 보니 누구의 마음을 닮았느냐? 마귀의 마음을 닮았다. 그래서 예수님은 ‘마귀니라’ 그랬다.


마귀의 마음을 닮은 인도자는 세상을 자랑하며 ‘그 세상을 믿음으로 취하라. 믿음으로 이루라’ 한다. 눈에 보이는 그런 것으로 잘 되면 ‘영광 받으시옵소서’ 한다. 마귀의 수법이 참 교묘하다. 성경구절을 자기 속이 된 대로 갖다 붙인다. 이건 마귀의 말이다.


세상을 붙들고 ‘세상 것을 이루어 달라’ 하는 것은 알고 보면 그 중심사상이 세상인데, 예수님보고 ‘그게 이루어져야 내가 행복하겠습니다. 그게 이루어져야 내가 하나님께 이런 저런 영광을 돌리겠습니다’ 한다. 이게 신랑을 빼앗긴 상태의 신앙이다. 이런 경우 ‘믿음이 약하다’ 그런 표현을 쓰기가 어렵다. 신앙 면에서 질적으로 전혀 다른 것이기 때문이다. 신앙 면에서 질이 전혀 다른 것과, ‘신앙이 어리다’ 하는 것과 구별을 할 줄 알아야 한다.


뜀 뛸 때 내가 빨리는 못 뛰지만 일등의 뒤를 계속 따라가는 것은 어리고 실력은 없는 것이지만 그러나 그 노선으로 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잘 뛰어도 그 노선이 아니고 딴 노선으로 뛰면 이건 본질이 아니다. 그런 경우 ‘약하다’로 보는 게 아니다.


신랑을 왜 빼앗길까? 교회는 신부요, 믿는 자기는 교회다. 건물이 교회가 아니라 예수 믿는 자기가 교회다. 교회는 건물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니라 인간을 두고, 성도를 두고 하는 말이다. 따라서 믿는 자기는 교회요 신부요, 주님은 신랑이다.


그러면 내가 신랑이 되고 주님이 신부가 되면 좋겠는데 왜 내가 신부고 주님이 신랑이라고 하느냐? 그 안의 내용을 생각해 봐라. 내가 신랑이고 주님이 신부라고 하면 어떻게 될까? 신부가 고생을 진탕할 것이다. 신랑이 실력도 없고 머리가 영리하지도 않고 임시성이고 그러니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주님이 신랑이고 우리가 신부라면 주님이 우리를 부려먹고 고생을 시킬까, 아니면 우리를 엄청나게 행복하게 해 줄까? 주님은 절대자요, 신령계 물질계가 다 당신 것이다.


교회를 다른 말로 표현한다면 이스라엘이 광야로 나갔는데 그게 다 광야교회다. 우리도 광야 같은 세상에 살고 있는 광야교회다. 광야에 사는 성도가 이방인들과 싸울 때에 그 성도를 위해서 해와 달을 정지시킬 정도로 그런 주님이시다. 성도 나를 위해서 천체를 잡아 돌리신다. 나를 위해서라면 신랑인 그 분이 당신의 몸을 십자가에 내던지기까지 하신다.


당신의 몸을 성도를 위해 내던지는 것은 ‘나는 죽을 테니 너는 잘 먹고 잘 살아라’ 그거냐, 아니면 ‘내가 죽고 살아날 터이니 내가 살아나는 건 너를 또 그렇게 살리겠다’ 하는 약속이 들어있는 거냐? 후자다. 그러니까 ‘죽어도 살아나는 분이니 살아난 그 신랑을 보고 신부야, 너도 그 분의 삶으로 따라오라’ 하는 것이다. 진짜 신부는 그렇게 따라가느냐, 가다가 세상길로 빠지겠느냐? 성경은 당신의 이름을 걸고 참 신부인 오늘날 나에게 하신 약속이 들어있다. 그걸 못 믿겠느냐?


교회는 신부요 주님은 신랑인데, 이것을 전제해 놓고 신부가 왜 신랑을 왜 빼앗기느냐? 예수 신랑을 존귀히 여길 줄 모르니까 빼앗긴 거다.


그러면 내가 신랑을 빼앗겼다고 해서 내가 주님의 신부가 아니냐? 신부는 신부다. 그러나 신부가 신랑을 빼앗기면 어떤 상태가 될까? 진짜 사랑하는 사이란다면 분하고 억울하고 슬프고 괴롭고 외롭고 사랑을 받을 곳도 없고 의지할 곳도 없고 생산도 없고 희망도 없고 소망도 건설도 없고 확장도 없고 실력도 없고 계대도 없는 것이다.


신랑이 정상적이라면 신부를 버리지 않을 것이다. 비정상이니까 버릴 것이고, 신부도 신랑을 사랑할 줄을 모르고 비정상이니까 신랑을 버릴 것이다. 서로가 그렇다. 오늘날 그런 게 참 많다. 왜? 전부 돈 보고 허우대 보고 결혼을 하기 때문이다. 진정으로 중심을 보고 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그게 진짠데.


무화과는 설익으면 정말 맛없다. 무화과는 꽃이 열매 안으로 핀다. 이게 세월이 흐르고 속에서 충만해지면 열매가 벌어진다. 그러면 그 안이 전부 꿀이다. 이게 성도다. 그런데 일반적인 꽃은 확 피면 보기가 좋지만 향기가 없으면 나비가 안 온다. 향기로운 냄새가 나야 벌이나 나비가 와서 그 다음이 씨가 맺힌다.


예수신랑을 귀한 줄을 모르니까 빼앗긴 것이고, 예수신랑을 종으로 부려먹으니까 빼앗긴 것이고, 예수신랑보다 세상을 붙잡고 단꿈을 꾸니까 빼앗기는 것이다. 그런 너에게는 이런 가치 있는 신랑이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현재 자기가 예수신랑을 빼앗겼다고 느껴지느냐? 그렇다면 금식을 하라. 금식은 음식을 안 먹는 거다. 못 먹는 게 아니라 안 먹는 거다. 못 먹는 것과, 안 먹는 것은 다르다.


그런데 금식을 안 먹는 것으로만 알지 말고 금식이란 무엇을 뜻하는 거냐? 왜 금식을 할까? 그냥 배고프라고 하는 것이냐, 무엇에 집중하기 위한 의미냐? 금식을 할 때는 그냥 금식이라기보다도 그 속에 뭘 하기 위한 그게 들어있다. 자기 소원성취 하기 위해서 그거 응답 받으려고 집중하기 위해서 안 먹는 사람이 많이 있다.


신랑을 빼앗겼을 때 금식하라는 말은 그 속에 의미하는 뜻이 전 인격의 집중성을 말한다. 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요 구원자 되신 그 주님을 찾기 위해서, 그 신랑을 찾기 위해서 전 인격의 집중성이다.


평소에 머리를 기르고 있다가 어떤 일로 인해서 정신을 차리느라고 머리를 깎는 경우가 있다. 자기 속에 들어있는 정신에 의해서 그렇게 나타나지는 것이다. 머리에 이가 많아서 깎는 건 아니다. 무엇에 집중하기 위한 의미에서다.


주님은 신랑을 빼앗겼을 때 금식하라고 그랬는데 오늘날 금식하는 사람들을 보면 금식을 하면 그 자체가 신앙이 좋다고 보는 것이 문제다. 자주 금식을 하는 사람을 ‘신앙이 좋다. 믿음이 크다’ 그렇게 보면 안 된다. 그건 질이 다른 거다. 그런데 신랑을 잃어버리고도 잃어버린 줄을 모르는 정신 나간 교인들이 참 많다.


신랑이 있으면 어떤 상태가 되고, 없으면 어떤 상태가 되느냐? 이것만 알더라도 ‘내가 신랑을 빼앗겼구나. 신랑이 있구나’ 하는 걸 자단할 수 있는 거다. 신랑을 가진 자는 앞에서 뭐라고 했느냐? 그 내용이 긍정적으로 붙어있다. 기쁘고 즐겁다. 내 마음상태만 보고도 신랑을 빼앗겼는지 아닌지 알 수 있다.


신랑이 있다는 말은 예수 믿는 사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을 붙잡고 이룰구원을 이뤄나가니까 기쁘고 즐겁고 행복하고 정복이 들어가고 관계성이 바로 들어가니 이게 신랑을 갖고 있다는 말이다. 이게 안 되는 상태는 신랑이 없다는 말이 된다. 신앙의 정신 상태를 갖고 와서 보라는 것이다. 실질적으로 빼앗긴 자와 가진 자는 정신 상태에서 그게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단순히 금식한다고 해서 신랑이 오는 것은 아니다. 신랑은 신부의 마음을 보고 온다. 바리새인들의 외식신앙의 금식기도의 자랑은 신랑 되신 예수님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


금식을 자주 하는 것을 자랑하는 신앙은 자기 몸이 저주를 받아서 죽는 줄 알아야 한다. 금식 잘한다고 자랑하고 돌아다니면 그 몸은 저주의 몸이다. 얼마 못 가서 그 몸은 못 쓴다.


신랑과 같이 있을 때는 금식할 이유가 없다. 왜? 날마다 진리생명의 말씀을 먹는 말씀잔치를 하기 때문이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구원의 주님과 함께 있을 때는 진리생명의 말씀을 부지런히 먹고 마시고 성장하고 활동하고 영능의 실력을 쌓고 움직이게 된다.


신랑을 모신 자와 신랑을 모신 가정과 신랑을 머리로 한 교회는 진리생명의 말씀잔치에 늘 기쁘고 즐거운 것이다. 그러나 신랑을 못 만난 자들은 진리생명의 말씀을 먹지 못하고 있으니 영적 상태로 보면 날마다 금식상태다. 생명의 말씀을 못 먹고 있는 상태가 금식상태라. 그런데 이걸 영적으로 못 보고 ‘밥을 먹느냐, 안 먹느냐’ 그런 금식으로 생각을 하고 말들을 한다.

눈에 보여지는 것은 전부는 비유요 비사다. 눈에 보여지는 것은 실상이 아니다. 전부는 비유와 비사인데, 거기에는 상징도 들어있고 상태도 들어있다. 영적인 면이 실상이다.


21절: 낡은 옷에 생베 조각을 꿰매면 낡은 옷이 생베조각을 당겨서 둘 다 완전히 못쓰게 된다. 그런 어리석은 사람이 있느냐? 육의 생각에다 영의 생각을 붙여서 짜깁기가 되는 거냐? 근본적으로 질적으로 달라서 안 된다. 육의 생각은 100년이란다면 영의 생각은 영원히다. 그러니까 여기에는 서로 주장을 하면 대립만 일어난다.


그런데 영의 생각을 가지면 육의 효력도 볼 수 있지만 육의 생각을 가지면 영의 효력을 전혀 볼 수가 없다. 영의 생각을 가지면 육의 수입을 볼 수도 있다. 영의 생각은 높다. 높은 곳에서는 아래를 보면 다 보인다. 그런데 밑에서 위로 본다는 것은 힘들다. 질적 의미에서 못 본다. 도달이 안 되는 세계다.


여기서 생베 조각은 사람이 한 번도 안 쓴, 색이 바라지도 않았고 줄지도 않는 그야말로 새로운 것이다. 그러나 낡은 옷은 색도 바랬고 옷이 낡아 뒤틀리고 하늘거린다. 이런 낡은 옷이 찢어지고 구멍이 났다고 해서 생베 조각을 붙여 깁으면 이거는 완전히 더 못 쓰게 된다. 그러니까 어리석고 미련한 헛일이 된다. 낡은 옷에 생베 조각을 꿰매지 말라는 것은 헛일을 하지 말라는 것이다.


낡은 옷이란 시간 안에 든 모든 것을 말한다. 시간 안에 든 인간의 몸을 둘러쓰고 있는 모든 보호대책은 모두 낡은 옷에 해당이 된다.


시간 속에 속하는 모든 것은 변질성을 전제하고 있다. ‘안 그렇다’가 아니라 변질성을 전제로 하고 있다. 물질과 물질성에 속한 것과 그 이해타산과 그 사고방식은 전부는 시간 속에 속하는 것이므로 변질성을 전제하고 있다. 그래서 돈을 빌려줬다면 빌려간 사람이 갚으면 다행이지만 빌리면서 갚겠다고 하는 그 말을 믿으면 안 된다.


인간의 역사는, 세상역사는 항상 돌고 있다. 지나가고 있다. 그걸 정지돼 있는 것처럼 생각하면 안 된다. 시간 속에 든 것은 멈춤이 없다. 이 시간 속이 든 것은 변질성이 전제돼 있다. 자기가 가만 서 있으면 사람은 멈춘 것처럼 보이지만 세월은 시간 속에 든 그 사람을 공동묘지로 끌고 가고 있다.


시간 속에 든 외부 모양 형태 색상 행동도 다 변질이 되고, 종교적인 제도와 틀도 다 변질성을 갖고 있다. 종교적인 제도의 계획이라는 틀 속에 하나님의 계획은 안 들어간다. 자기가 신앙한다고 해서, 소원기도 한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자기 기도를 들어주는 경우는 어떤 경우일까? 하나님 뜻에 맞는 것은 들어주신다. 하나님의 뜻에 맞는 건 변질성이 없는 거다. 몸은 시간 속에서 변질돼 가지만 자기 속에 하나님의 것으로 들어있는 것은 실상적인 것이므로 변질성이 없다.


종교적인 신앙의 그 틀 안에 하나님은 안 들어간다. 이치적으로 말한다면 간장 담는 작은 깍쟁이 속에 대접이 안 들어간다. 이치적으로 안 된다 그 말이다. 이치가 안 맞는다 그 말이다. 그러나 인간의 계획을 하나님의 계획에 맞춘다면 그거는 하나님의 계속 속에 들어간다. 하나님이 주시려는 것으로 들어가 있기 때문이다.


종교적인 부흥 발전이라는 그 사고방식에 성령님의 역사가 움직이느냐? 그건 안 된다. 인간의 학문 속에 하나님의 생명적 영적 이치가 들어갈 수 있느냐? 안 들어간다. 질적 본질적으로 이치가 안 맞고 안 되는 거다. 질이 다른 세계다. 인본주의 사고방식의 신앙에 성령님께서 역사하시느냐? 그건 안 된다.


야곱의 우물가에서 예수님이 사마리아 여자와 대화할 때 예배의식과 식순이 없는 가운데서도 예수님께서는 ‘신령과 진정의 예배는 곧 이때다’ 라고 말씀을 하셨는데 뭐가 맞아서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냐? 사마리아 여자가 예수님의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여서 그의 속에서 생수의 강이 흐르는 그 질적인 면을 보고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그게 신앙이고 실상이다.


그런데 대제사장과 서기관 율법사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이걸 들었다면 ‘그 장면이 어째서 신령과 진정의 예배냐?’ 하며 펄쩍 뛸 것이다.


그러니까 신령과 진정의 예배는 예배의식 순서의 틀 속에 들어 있느냐, 그 틀과는 상관이 없느냐? 상관이 없다. 상관이 없다고 해서 제각금 펄펄 날뛰고 제각금 얘기하면 되는 거냐? 예배의 식순은 은혜를 받기 위해서 최소한의 정신 가짐 마음 가짐의 준비다. 그런데 예배의 메시지가 실상적인 메시지가 아니라면 그건 아니다. 없다. 종교적인 사고방식의 신앙에는 예수님의 소원 목적과 성령님의 역사는 들어가지를 않는다. 인간 자기 계획에 하나님은 들어가지를 않는다.


예수님의 머리가 교회냐, 아니면 교회의 머리가 예수님이냐? 교회의 머리가 예수님이다. 그렇다면 교회는 누구의 말씀과 명령대로 움직여 나가야 하느냐? 교회의 머리는 예수님이니 교회는 예수님 말씀대로 움직여야 한다. 그러면 사상도 그래야 하고, 이치가 그래야 하고, 정신과 소원과 목적도 모든 취미도, 교인들의 일반상식도 그렇게 들어가야 한다.


더 간단히 말해서 예수님께서 생각하는 상식과, 일반사람들이 생각하는 상식의 질이 다르냐, 같으냐? 질이 다르다. 예수님의 상식은 아무리 일반상식이라도 하늘로부터 온 것이니 그 상식에는 구원이 들어있다. 그러나 세상에서 아무리 특수한 상식이라도, 기발한 아이디어라도 그건 영인성장과는 관계가 없다. 구원과는 관계가 없다. (계속)


김경형목사님이 교역자 신학생을 대상으로 매 주 정례적으로 진행하는 신학 및 성경연구 모임을 통해 영원 전에 하나님의 의지세계에서 인간구원을 설정하게 된 원인과 동기와 목적을 깨닫고 하나님의 본질의 신앙으로 나가는 주의 종들이 누룩처럼 퍼져나가고 있습니다.
참석하실 분은 031-207-5159, 또는 010-8886-5159로 문의해 주세요.(평신도도 참석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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