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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

마가복음 궁극이............... 조회 수 510 추천 수 0 2015.07.21 09:5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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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막2:22-28 
설교자 : 김경형 목사 
참고 : 궁극교회 주일예배 

2장 22절-28절.


22절: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와 부대를 버리게 되리라 오직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느니라 하시니라.


새 포도주를 낡은 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낡은 부대는 곧 터져버린다. 곧 터질 부대 속에 새 포도주를 넣는 사람이 있겠느냐?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육적이며 세상적이며 부패성적인 그 신앙 속에 하나님의 생명적인 신령한 구원이치가, 성령님의 역사가 그 안에 들어가겠느냐는 것이다.


선악과 따먹고 영이 죽어 저주받고 타락된 아담과 하와가 생명과를 먹으려고 에덴동산 안에 들어가려고 했지만 하나님께서 막으셨다. 죄인에게는 그게 안 된다. 못 먹는다 그 말이다. ‘살짝 먹으면 안 됩니까’ 그게 아니고 하나님의 허락이 아니면 아예 안 된다는 것이다.


영적 실상화로 온전케 되는 이치를 모르면 예수님을 죽어라 믿어도 헛 믿고 가게 된다는 것을 알아라. 이치가 안 맞으면 질적으로 매칭이 안 된다. 매칭이 안 되면 질적으로 안 되는 거다. 고집을 세워도 안 된다.


23절-28절: 안식일에 예수께서 밀밭 사이로 지나가실새 그 제자들이 길을 열며 이삭을 자르니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말하되 보시오 저희가 어찌하여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다윗이 자기와 및 함께 한 자들이 핍절되어 시장할 때에 한 일을 읽지 못하였느냐 그가 아비아달 대제사장 때에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제사장 외에는 먹지 못하는 진설병을 먹고 함께 한 자들에게도 주지 아니하였느냐 또 가라사대 안식일은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 이러므로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


안식일의 주인이신 예수님께서 밀밭 사이를 통과하시는데 제자들은 예수님 앞에 한 줄로 서서 길을 내면서 이삭을 따면서 가고, 예수님은 그 제자들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이 장면을 포착한 바리새교인들은 예수님께 말하기를 ‘왜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 하느냐?’ 안식일인데 왜 추수를 하며, 왜 많은 사람들이 다니지도 않는 곳으로 길을 내며 가느냐는 것이다.


일반적으로는 그렇게 보이는 건데, 이게 지금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다. 하나님의 은밀한 뜻을 가르쳐 주기 위해서, 믿는 이치를 가르쳐 주기 위해서, 믿는 사상을 말해주기 위해서 눈에 보이는 행동적인 것을 비유를 갖고 오는 거다.


성경이 성령의 감화 감동으로 기록이 되었다고 하는 것은 그 속에 하나님의 뜻을 넣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성경에 천사들이라고 할 때는 그 속에 영의 활동 들어있고, 영적으로 봐야 알 수 있다는 의미가 그 말 안에 들어있다.


안식일을 율법대로 지키는 그들이 예수님의 제자들이 안식일 날에 하는 것을 보고 그렇게 말할 만도 하고, 뿐만 아니라 이방인들도 그 말을 할 만 하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을 어떻게 지켜야 하는 건지를 깨닫게 해 주시고자 지금 이 일을 벌인 것이다.


창2:2-3절에 보면 안식일은 하나님의 거룩한 날이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그 날은 다 푹 쉬어라. 일을 하면 안 된다. 육신의 일을 하지 않고 예배만 하고 쉬는 날이다’로만 알고 있었다. 그러니까 그들은 안식일에 쉬는 것이 거룩한 것으로만 알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그런 그들 입장에서 볼 때 예수님의 제자들이 왜 안식일에 일을 하느냐는 것이다. 안식일에 왜 밀을 터는 일을 하느냐는 것이다.


그런데 신23:25에 보면 남의 밭에서 낫을 쓰지 않고 손으로 곡식을 따서 먹는 것은 죄가 안 된다는 말도 있다. 또 예수님께서는 구약성경 속에 일어났던 이 일을 상기시킨다. 삼상21:4-에 보면 다윗이 함께 한 자들과 핍절되어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제사장 외에는 먹지 못하는 진설병을 먹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말씀은 죄가 아니라는 것이다.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있다 그 말이다.


안식일은 율법이 있기 전에, 성문계시로 성경을 주기 전에, 창조 때 세상을 만들어 놓으시고 난 다음에 하나님께서 제정을 했다. ‘일곱 째 날을 복을 주사 거룩하게 하셨다’고 했다.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고 이 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 했다.


우리가 안식일이라고 하는 것을 바로 알아야 할 것은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창조를 마치시고 이레 되는 날에 안식을 하셨는데, 이 날은 복을 주사 거룩하게 하는 날이다. 그렇다면 거룩한 복을 누구에게 주는 것이냐? 아담 하와가 대표성으로 들어있는 것이니 곧, 우리 인간에게 주는 것이다.


이렇게 하심은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구원의 대표성으로 알게 하자니 아담과 하와를 대표로 한 것이다. 그러니까 아담 하와가 주격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구원의 주격이다. 그걸 알게 하려니 아담과 하와를 인류의 대표성으로 들고 오는 것이다.


보이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으로부터 말미암았다. 그러니까 어느 것이 기준이냐? 보이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으로 말미암았다고 했으니까 보이지 않는 것이 기준이다. 보이지 않는 것이란 아무 것도 없다는 그런 말이 아니라 실상을 두고 하는 말이다.


여기 이 세상은 현상세계다. 젊은 사람도 얼마 안 있으면 다 쭈그러지고, 몇 십 년 후에 보면 ‘네가 바로 그 얘였느냐’ 할 정도로 얼굴도 달라지고, 또 없어질 사람도 있다. 이 세상은 실상이 아니라 현상이다. 현상적인 우리 육체 속에 실상이 있다. 하나님의 본질로 들어있는 그게 실상이다. 예수를 믿으면서 그게 잘 만들어지고 성장되고 실력화 되는 게 예수 잘 믿는 거다. 그것에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육적인 눈에 보이는 것을 가감하기도 하는 것이다.


구약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안 따르니까 가뭄이 온 것은 그런 자들에게는 일반은혜도 주기 싫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다 차단이다. 비가 안 오면 다 죽어나간다. 그러나 기름 한 방울을 가진 성도는 그 흉년을 거뜬히 이겨낸다. 또 선지자를 모신 가정은 남의 빚도 청산하고 거뜬히 이겨나간다.


아담과 하와를 남으로 보지 말라. 바로 나를 말해주는 거다. 내가 거기에 있었다면 역시 아담 하와와 똑같은 짓을 하게 돼 있다. 안 한다가 아니다. ‘그 때 내가 에덴동산에 있었다면 나는 선악과를 안 따먹는다’ 그렇게 말할 수 있겠으나 성령의 눈으로 보면 네가 현재 세상을 소원 목적적으로 먹고 있으면, 그런 정신 사상을 갖고 있으면 지금 너는 선악과를 먹고 있는 거다. 선악과란 보암직 먹음직 탐스러운 그 정신 사상 소원 목적을 갖는 것을 말한다. 이건 물질계를 기준한, 눈에 보이는 것을 기준한 것을 취하는 것이다.


이 보암직 먹음직 탐스럽게 한 것이 마귀가 예수님에게 한 시험 안에 다 들어있다. 그러니까 에덴동산의 보암직 먹음직 탐스럽게 생겼다고 하는 그 내용을 알려면 마귀가 예수님을 시험한 그 세 가지 시험을 보면 알 수 있다.


처음에 ‘돌로 떡을 만들어 먹어라’ 했는데 먹는 게 굉장히 중요한 시험이다. 그런데 성도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을 먹는 게 성도들의 주식이다. 그리고 성전에서 뛰어내리라는 것은 종교적 세상에서 영웅이 되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건 땅으로 뛰어내리는 것이니까 종교적 땅의 운동인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보면 거의가 첫째 시험에 속았고, 둘째 시험에 속아있고, 세상 영웅이 되라는 세 번째 시험에도 다 속아 있다. 오늘날 세상의 영광을 취하려는 종교적인 목사들은 전부 세 번째 시험에 넘어진 거다. 그 사상에 넘어진 거다.


기독교 안에서 종교적인 세상을 말하면 신앙인줄 알지만 아니다. 그건 기독교 종교라는 이름만 둘러썼다 뿐이지, 예수이름만 둘러썼다 뿐이지 세상이다. 그런데 그걸 모르고 있다.


물질계의 1차 창조는 인간을 지으심으로 마친 것처럼 2차 창조는 인간이 하나님의 온전함을 덧입음으로 마치고, 신령천국에 들어가서 참 안식이 되는 거다. 그러니까 천지창조 때 ‘일곱 째 날을 복을 주사’ 하는 그 말씀 한 마디 속에는 이걸 죽 늘어뜨리면 하나님은 지금도 간접창조를 하신다. 밤잠을 주무시지 않는다. 지금도 짐승을 기르지, 나무를 기르지, 바람 부는 거, 사람을 계속 만들어 놓은 거 다 들어간다. 그래서 우리가 세상을 마치고 신령천국에 들어가서 그 세계의 누림을 염두에 둔 그 말씀이 ‘일곱 째 날을 복을 주사’ 이렇게 들어가 있는 거다.


바리새교인들과 당시의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자신들은 안식일을 잘 지키고 있는데 예수님께서 안식일 날에 각종 병자를 고치시는 것을 보고 예수님께 왜 안식일 날 일을 하느냐는 것이다.


그들도 성경을 갖고 있다. 그런데 이들이 병자를 고치는 일을 안식일 날 하지 말고 다른 날 하라고 말을 했다. 그렇다면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다른 날 사람을 고쳐주느냐? 또 안식일 날에 사람을 교훈으로 온전케 해 주느냐? 그것도 없고, 다른 날도 없고. 그러니까 정말 악한 사람들이다.


일반적으로 악하다는 것은 사람의 몸에 해를 주는 거지만 성경으로 보는, 신앙으로 보는 악함성은 옳은 진리이치 즉,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이 분이 구원의 일을 하고 있고 성령의 사람으로 만드는 일을 하고 있는데 성경구절을 갖고 와서 그걸 하지 말라고 막는 것이 악한 것이다. 하지 말라. 다른 날 하라고 하는 것이다.


우리가 생각을 해 볼 때 예수님께서 당신 스스로가 오늘 할 일을 내일로 미룰까, 아니면 오늘 일은 오늘로 할까? 오늘 일은 오늘 하신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우리의 구원을 위한 일에는 오늘일은 오늘로서 마치는 거다. 그런데 마귀의 수법은 바리새인들로 통해서 내일 하라고 한다. 이게 마귀수법이다. 그런데 이게 마귀수법으로 보이느냐?


마귀의 시험이 ‘이게 마귀시험이다’ 하고 오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성경을 통해 진리본질의 신앙을 모르면 마귀시험에 걸려 있어도 모르는 거다. 왜? 영에 관한 일이므로 그렇다. 기독교 신앙은 영에 관한, 실상에 관한 일이다. 영의 일은 실상적인 일이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할 때 불에 타고 변질되고 오그라지고 삭으면 가짜라고 한다. 그런데 주님이 우리에게 해주고 싶고 만들어 주고 싶어 하시는 것은 실상이다. 영원히 가도 썩지 않고 불에 타지 않는 것이다. 이게 실상이요 진짜다. 그런데 기독자들이 언젠가 불타고 없어질 눈에 보이는 것을 자꾸 진짜 시 보고 있다.


기독자는 이 눈이 바뀌어져야 한다. 보는 세계관이 바껴야 한다. 예수 믿으면서 일반사람들이 세상을 보는 것처럼 세상을 보면 안 된다. 성경에 보면 ‘보라’ 하면서 ‘새 하늘과 새 땅을 준다’고 했다. 예수 믿으면 세계가 달라진다. 세상을 보는 시각성 시감성이 달라진다. 그럼에도 예수 믿는 자가 안 믿는 사람과 시각과 시감성이 같다면 안 바뀐 사람이다.


이 세상은 언젠가 없어진다. 성경에 없어진다고 하니까 없어진다고 말은 하면서 현재 자기가 세상은 안 없어지는 것이라는 사고방식으로 살고 있지 않느냐? 말이 문제가 아니라 예수 믿는 자기 속에 인격이 어떻게 형성이 돼서 지금 세상을 시시각각으로 어떻게 보느냐이다. 영의 눈을 가지고 멀리도 보고 가까이도 보고, 하나님의 진리본질을 가지고 멀리도 보고 가까이도 보고 미래도 보고 해야 한다.


세상을 구하며 예수 믿는 자들은 세상이 언젠가는 불타지는 것으로 알고 그런 걸 구하느냐, 언젠가는 불타진다는 걸 알지 못해서 그런 걸 구하느냐? 알고도 구한다. 그러면 도대체가 그게 뭐냐? 이건 그의 말과 그의 신앙사상이 안 맞는 거다. 예수 믿는 게 안 맞는 거다. 정신이 바른 사람이라면 어떻게 세상은 불타진다고 하면서 세상 것을 소원 목적적으로 구할 수가 있겠느냐?


성경에 악하다는 것은 현재 기독교 종교인들을 두고 하는 말이다. 안 믿는 사람들에게는 ‘악하다. 선하다’ 하는 것을 말할 가치가 안 된다. 구약에 이방이 이스라엘을 정복하고 쳐들어오고 하는 건 안 믿는 사상과 정신이 교회 안으로 들어오는 걸 말해주는 거다. 그걸 누가 갖고 오는 거냐? 예수 믿는 사람이 갖고 오는 거다. 그게 악하다는 것이다. 그걸 하나 하나 벗어나가야 짐도 가볍고 자유로워진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그들에게 ‘아버지께서 일을 하시니 나도 일을 한다’ 그렇게 말씀을 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하시는 일이 아버지 하나님의 일이라는 건데, 그러면 무슨 일이냐? 사람을 하나님의 온전으로 향하게 하고 만들어주고 고쳐주시는 그 온전케 하심이다. 그 온전이 거룩성이다.


그러나 유대 종교인들은 아무 것도 못하면서 예수님을 사사건건 헐뜯고, 그 일을 못하게 하려고 하니 사람을 죽이고 한다. 결국 그들은 하나님 진노의 형벌에 사라지고 말았다. 눈으로 보이는 역사로 이걸 증명해준다.


왜 그들이 형벌을 받았나?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말씀으로 가르쳐서 하나님의 온전한 성품을 입게 해 주려고 하셨다. 각종 병자를 고처주심도 하나님의 온전의 교훈이 다 들어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분을 죽였기 때문이다.


참 안식은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들어진 자가 세상 마지막 날에 천국에 가게 되는데 이 때 참 안식에 들어가게 된다.


그런데 ‘어린아이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못 들어간다’ 라고 사람을 말하는 것은 질적 본질을 말하기 위해서이다. 천국은 하나님의 본질화로 이룰구원으로 자체화 된 것을 갖고 들어간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말은 ‘존재적으로 천국에 못 들어간다’가 아니라 존재 속의 하나님의 본질적인 것을 말을 하자니 존재를 들고 말을 하는 것이다. 제자들이 천국에 못 들어간다면 말이 안 되고 교훈이 안 된다.


예수님은 안식일의 주인이시다. 안식일의 주인이신 예수님께서 안식일을 지키는 정신을 바로 가르쳐 주려고 제자들을 앞세우고 밀밭 사이로 가게 하면서 길을 내게 하고, 또 이삭을 따면서 가게 하신 것이다.


사람이 다니는 길은 다른 길도 많다. 넓은 길도 있고 좁은 길도 있다. 그런데 왜 잘 헐뜯는 바리새교인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길도 없는 곡식 밭 사이로 통과하게 하느냐? 우리에게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정신을 가르치기 위함이다.


예수님께서 가시는 그 길이 지구상에 있는 사람들이 간 그 길을 따라서 간 길이냐, 아니면 예수님 당신이 가시는 길은 창세 이후로 마지막 때까지 모든 사람들이 한 번도 가지 않는 그 길을 가시는 길이냐? 어느 게 예수님의 길이냐? 후자다.


예수님의 가신 길은 창세 이후 어떤 사람이던, 석가도 공자도 그 누구도 못 간다. 세상 모든 인간은 선악과 따먹고 영이 죽은 존재인데 어떻게 그 길을 갈 수가 있느냐? 예수 당신만 가는 길이다. 예수 믿는 우리도 그 길을 가는 거다.


안식일은 율법을 주시기 전에 엿새 동안 세상창조를 마치신 후 이레 되는 날에 복되게 안식하셨고 거룩하게 하신 날이다. 이 말씀 속에는 하나님의 거룩한 것을 받는 날로 되어 있고, 거룩한 것을 받으니 거룩한 사람으로 만들어지고, 영능의 실력성장을 다 마치는 세상 끝 날에 거룩한 나라인 신령천국에서 참 안식을 한다는 계시가 들어있다.


그런데 날짜적 안식일을 고집하는 교인들이나, 안식 후에 예수님께서 부활한 날을 고집하여 주일을 지키는 교인들이나 하나님의 거룩한 것을 주고받는 교인들을 보기란 참 힘들다. 날짜를 고집하는 사상은 거룩한 것을 보기가 힘들다. 날짜 고집은 인격은 아니다.


‘말세에 믿음 보겠느냐?’ 이 말이 말세에는 기독교인들이 주일을 안 지킨다는 말이냐, 아니면 예수 믿는 사람이 아니라 안 믿는 사람들을 염두에 두고 하신 말씀이냐? 예수 믿는 사람에게 하는 말씀이다.


말세인 지금 예수를 믿는다고는 하지만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을 구하고, 세상 넓은 길로 홍수처럼 밀려가고 있는 것을 아무 곳에서나 볼 수 있다. 어디서나 볼 수 있고 아무 곳에서나 볼 수 있다. 본질이 아닌 신앙을 볼 수 있다. 그러니까 ‘말세에 믿음을 보겠느냐’ 하는 것은 말세에는 교인들의 신앙이 본질의 믿음이 아니라는 것이다.


당시의 바리새교인들은 안식일에 의식을 거창하게 했지만 그들의 중심 되는 사상은 하나님의 뜻, 주님의 뜻과는 너무나 거리가 멀다. 그들의 신앙중심인 세상은 하나님의 본질이 아닌 이질이다. 오늘날 기독자들도 마찬가지다. 안식일을 지킨다고 하는 자들이나 주일을 지킨다고 하는 자들이나 모두 신앙의 질이 이질이다. 하나님의 본질이 없다. 예수님의 부활된 그 신앙사상의 질이 없다. 이질이다. 세상 부패성적으로 즉, 세상목적으로 살게 하고 가르치는 신앙들이다. 결국 이들은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에 또 사라질 것이다.


또한 ‘마지막 때는 노아 때와 같고 소돔 고모라 때와 같다’고 했는데 그러면 노아 때와 같다는 것은 노아를 염두에 둔 거냐, 말세에는 노아처럼 사는 사람이 많다 그 말이냐? 아니면 하나님의 아들들이 세상의 딸들을 보고 취함으로 미래의 홍수에 죽을 그들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냐?


또 ‘소돔 고모라 때와 같다’고 한 것은 소돔 고모라 성 사람들을 염두에 둔 말이냐, 롯을 염두에 둔 말이냐? 롯도 소돔 고모라화가 된 것이다. 그러니까 롯이 문제다. ‘그 말 속에 누구를 염두에 두고 깔고 하는 말이냐’를 잘 알아야 한다.


앞의 사람을 보고 말하기를 ‘너는 꼭 누구랑 비슷하다’ 그러면 그 말이 누구보고 말을 하는 거냐? 남을 생각하고 그 말을 하는 거냐, 앞의 사람을 생각하고 그 말을 하는 거냐? 아니면 앞의 사람을 생각하는 것이 없이 딴 사람을 말하는 거냐? 말속의 말을 잘 알아들어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제자들을 알곡이 여문 곡식밭으로 인도하면서 유대 종교지도자들과 바리새교인들이 알지도 못하고 갈 수도 없는 길을 가게 하신다. 이것은 그 길이라야 알곡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 주시는 것이다. 이해가 가느냐? 그 길로 가야 알곡이 있다.


예수님이 인도하신다면 알곡이 없는 길로 인도하겠느냐? 알곡으로 여문 곡식밭으로 인도하면서 길을 내면서 가게 하셨다. 즉, 곡식밭에 자기의 길이 있다는 것이다. 곡식밭에 자기의 길이 있다.


그리고 제자들이 이삭을 따서 손으로 비며먹는 것도 허용을 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영의 양식이 풍부한 곡식밭으로 가라는 것이고, 그곳에 너의 길이 있다는 것이고, 그 길로 가서 그 밭에서 너의 수입을 잡으라는 것이다.


그러면 예수님은 왜 그들의 뒤를 따르는 거냐 하면 보호와 양육하심의 의미가 들어있다.


예수님께서 소경에게 어디 가서 눈을 씻고 오라고 했느냐? 실로암 연못. 실로암의 뜻은 보냄을 받았다는 뜻인데, 그러면 소경이 보냄을 받았다는 말이냐, 실로암 못이 보냄을 받았다는 말이냐? 소경. 사람도 들어있고 실로암 못도 들어있고. 이것의 교훈은 ‘영의 눈이 어두우냐? 그렇다면 실로암 못에 가서 씻어라.’


예수님께서 침을 이겨서 바르든지 안수를 해도 될 일을 왜 거기서는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고 하느냐? 그 못이라야, 그 물이라야 네 눈 밝아지는 거다. 이게 이룰구원 차원에서 교훈이 들어있는 거다. 교회를 갈 때는 눈 밝은 교회로 가라는 것이다. 영의 눈이 뜨이는 교회로 가라. 거기로 가야 네 눈이 뜨인다. 귀문도 열리고 영의 눈도 열리고. 밭은 무슨 밭으로 가라는 거냐? 열매가 잘 익은 밭으로 가라. 거기서 네가 수입을 잡아라. 그게 안식일을 지키는 거다.


주님 당신의 언행심사가 전부는 우리의 구원도리 이치로 들어있다. 그걸 알아라. 하지만 이 바리새교인들 입장에서는 이런 게 보이겠느냐? 안 보인다. (계속)


김경형목사님이 교역자 신학생을 대상으로 매 주 정례적으로 진행하는 신학 및 성경연구 모임을 통해 영원 전에 하나님의 의지세계에서 인간구원을 설정하게 된 원인과 동기와 목적을 깨닫고 하나님의 본질의 신앙으로 나가는 주의 종들이 누룩처럼 퍼져나가고 있습니다.
참석하실 분은 031-207-5159, 또는 010-8886-5159로 문의해 주세요.(평신도도 참석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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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31 마가복음 생베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막2:19-21  김경형 목사  2015-07-21 686
12330 고린도후 은혜를 받으려면 고후6:2  강종수 목사  2015-07-19 725
12329 시편 우리 위해 일하시는 주님 시121:3-6  강승호 목사  2015-07-18 696
12328 누가복음 탐심을 물리 치라 눅12:13-21  이승남 목사  2015-07-18 692
12327 마태복음 예수님의 손은 기적의 손입니다! 마8:1-4, 14-17  이승남 목사  2015-07-18 717
12326 여호수아 믿음으로 축복의 그림을 그려라 수18:1-10  이승남 목사  2015-07-18 792
12325 고린도후 은혜의 자족성 고후12:2-10  정용섭 목사  2015-07-16 6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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