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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넬료와 베드로의 껍질깨기

사도행전 cyw............... 조회 수 883 추천 수 0 2015.07.24 19:3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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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행10:1-2 
설교자 : 한인섭 형제 
참고 : http://www.saegilchurch.or.kr/143879 

고넬료와 베드로의 껍질깨기(사도행전10:1-2, 15:7-10)

 

2013년 9월 15일 주일예배

한인섭 형제(서울대학교 법과대학 교수)

 

가이사랴에 고넬료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이탈리아 부대라는 로마 군대의 백부장이었다.

그는 경건한 사람으로 온 가족과 더불어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유대 백성에게 자선을 많이 베풀며, 늘 하나님께 기도하는 사람이었다.

(사도행전 10:1-2)

 

많은 논쟁을 한 뒤에, 베드로가 일어나서 그들에게 말하였다. "형제 여러분, 여러분이 아시는 대로, 하나님께서 일찍이 여러분 가운데서 나를 택하셔서, 이방 사람들도 내가 전하는 복음의 말씀을 듣고 믿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사람의 마음 속을 아시는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주신 것과 같이 그들에게도 성령을 주셔서, 그들을 인정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믿음을 보셔서, 그들의 마음을 깨끗하게 하시고, 우리와 그들 사이에, 아무런 차별을 두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지금 여러분은 왜 우리 조상들이나 우리가 다 감당할 수 없던 멍에를 제자들의 목에 메워서,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입니까?

(사도행전 15:7-10)


안녕하십니까.

오늘 예배인도자, 말씀증거자는 신학박사도 아니고 신학 전공도 안한, 그냥 완전 평신도입니다. 그러니까 어쩌면 가장 평신도 공동체스러운 예배가 되겠습니다. 지난주와 다음주엔 신학 박사님들께서 높은 수준의 말씀을 전해주실 것이니, 이번 주는 쉬어가는 주로 생각하고, 맘 편안히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저는 지난 학기를 안식학기로 잘 보냈습니다. 지난 3월부터 7월까지 한 일 중에 하나는 함세웅 신부님과의 길고 긴 대화였습니다. 매주 3시간씩 10여 차례 만나 뵙고, 현대사의 격랑 속에서 천주교의 역할과 민주화운동의 숨은 노력들을 독점하여 듣는 희귀한 행운을 누렸습니다. 우리는 가톨릭 하면 뭔가 완고하고 위계질서에 사로잡힌 반면, 개신교는 자유롭고 사회참여도 손쉬운 것으로 선입견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최근 상황은 오히려 반대인 것 같습니다. 개신교가 수구적 근본주의와 자기교회유일주의에 갇혀 있고, 타종교에 배타적일 뿐 아니라 개신교 내부의 소통도 잘 안 되는 것 같습니다. 한때 왕성했던 사회정의와 사회참여에의 시도도 현저히 약화된 것 같습니다. 반면 가톨릭은 개신교는 물론 타 종교와의 대화에 앞장서고, 덜 독선적입니다. 특히 내년이면 정의구현사제단이 40주년을 맞게 되는 데서도 알 수 있듯이, 세상의 불의를 질타하고 시대의 아픈 현장에 함께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물론 가톨릭 내에 여러 흐름이 있고 바티칸추수주의도 여전하지만, 그 속에서도 정의를 목표로 한 사제들의 모임이 도도하게 지속되어왔다는 게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개신교와 대비해보면 특히 그렇습니다. 가톨릭에 그러한 쇄신이나 혁신의 동력은 무엇이었던가 하는 것도 제 질문 중의 하나였습니다.

 

함 신부님과의 대화를 통해, “제2차 바티칸공의회”란 것을 본격적으로 알게 되었습니다. 교회와 사회와의 높은 담벽을 허물고, 바티칸의 창문을 열고 세상과 대화하고, 세상의 불의를 향해 나아가는 예언자적 소명의 실현을 알았습니다. 물론 가톨릭 전체가 그런 것은 전혀 아니지만, 적어도 사회정의를 열망하고 예언자적 소명을 실현하려는 사제들에게 “제2차 바티칸공회”의 회칙과 합의는 활동의 주요 기반이 되고 있음이 틀림없습니다. 1960년대 초에 바티칸은 이렇게 스스로 사회, 세속을 향해 창문을 열었고, 이후 여러 가지 열매를 맺었습니다. 정의구현사제단의 몇 십 년의 활동도 그 열매의 하나입니다.

 

저는 또 물었습니다. 바티칸 공의회를 비롯하여 역사 여기저기에 “공의회”란 이름이 등장하는데, ‘그 공의회의 유래는 어떻게 됩니까?’ 하고요. 함 신부님은, 바로 사도행전 15장의 예루살렘 공의회를 “원공의회”라 부르고, 모든 공의회는 거기로부터 시작된다고 하셨습니다. 평소에 사도행전을 읽으면서 스쳐갔는데, 집에 와서 정독해보니,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아주 엄청난 결단을 내렸던 회의였음을 알았습니다. 만약 그 회의의 결론이 달리 났다면, 얼마 안가 그리스도교는 유대 땅에 갇혀있다가 곧 문을 닫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예루살렘 원공의회가 열리게 된 배경을 제 나름대로 정리해보니 이러합니다. 유대인 제자들은 유대교의 배경 속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이해했습니다. 그러나 정통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배척하였고, 십자가 처형까지 시켰습니다. 예수님의 무저항-죽음으로 위축되었던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 이후, 용기백배하여 예수님 말씀을 각처에 전합니다. 정통 유대인들은 새로운 가르침을 적대시하고 유대선민주의를 고수하는 반면, 유대 땅 밖의 유대인, 그리고 비유대인들이 오히려 적극적으로 새로운 말씀에 적극 호응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전파하다보니 종래 유대인들의 선민의식과의 충돌이 크게 문제시됩니다.

 

대체로 예루살렘 근처의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이 예수를 믿을 때 전제조건이 필요하다고 내세웠습니다. 이방인들이 유대화되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다시말해 “이방 사람에게도 할례를 행하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도록 해야 합니다”는 거지요. 그러나 비유대인으로서는, 예수님 말씀이 좋아서 믿는 것이지, 무슨 할례의식과 모세율법은 오히려 거추장스러운 장애물일 뿐입니다. 비유대인, 비유대땅의 유대인에게 선교하려는 사도들에게는 이 문제가 보통 딜레마가 아니었을 듯합니다. 반면, 예루살렘 교회 집단은 외지선교사들에게 하나의 종교적 우월감을 확인하기 위한 정치논쟁에서, 유대인이라면 거부하기 어려운 논리 [할례의식+모세율법]을 내세워 자신의 종교적 헤게모니를 강화하는 용도로 쓸수 있었습니다. 비유대인들도 [할례+율법]을 준수하면 될게 아닌가, 그래야 진짜 신자가 아니겠는가 하고 주장하는 거지요. 종교 논쟁이 격렬해지면 대체로 이런 근본주의적, 폐쇄적 입장이 이기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결론은 오히려 반대였던 것 같습니다. ‘어떻게 그런 반전이 일어나게 되었는가?’ 그리고 ‘그 반전을 어떻게 베드로가 주도하게 되었던가?’ 그게 관전 포인트가 되겠습니다.

 

잘 아시다시피 첫 출발은 사도행전 10장입니다. 고넬료와 베드로의 만남이 역사를 변화시키는 첫 출발점입니다. 그 시대의 분위기를 직접 느끼도록 노력하면서 10장 1-2절로 들어갑니다.

 

가이사랴에 고넬료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이탈리아 부대라는 로마 군대의 백부장이었다.

그는 경건한 사람으로 온 가족과 더불어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유대 백성에게 자선을 많이 베풀며, 늘 하나님께 기도하는 사람이었다.

 

지금 우리는 무심코 넘기지만, 10장 1절은 당시 어떤 유대인도 무심하게 읽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가이사랴는 유대를 침략한 로마의 카이사르의 도시란 뜻입니다. 이스라엘 해변 쪽에 축조된 해군요새도시인 거지요. 고넬료는 로마인이겠고요. 이스라엘 식민지를 군사적으로 지배하러 온 로마 부대, 그 중에서 정예부대의 일선 장교였던 거지요. 이렇게 비유하면 어떨까요. “일제시대, 경성 인근에 토요토미 군항에 이토오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야마토 부대라는 일제군대의 중대장이었다.” 이 정도 될까요. 벌써 부정적이고, 상종해서는 큰일 날 인물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2절은 1절을 순식간에 반전시킵니다. 고넬료 중대장이 신앙으로 보나 사회적으로 보나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사람이란 것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사람”이라 했는데, 그때의 하나님은 베드로가 아는 바로 그 하나님은 아닐 것입니다. 아직 베드로의 하나님은 접한 바가 없으니까요. 아마도 “천지신명께 맹세코” 할 때의 그런 천지신명이나, “비나이다 비나이다”할 때 천지만물의 주재자이신 그런 신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짐작됩니다.

 

이런 사람에게 하나님의 천사가 환상 중에 나타나 베드로를 모셔오라고 계시합니다. 로마 군대의 간부가 유대인, 그 중에서도 뭔가 불온한 신흥종교 지도자(예수쟁이)를 자기 집으로 모셔온다는 것은 예사로 힘든 일이 아닐 것입니다. 소문이 금방 퍼져 나갈 것이고, 자기 명예나 직위에 불이익이 곧 닥칠 지도 모를 지경입니다. 그런데도 그는 자기가 알지도 못하는 베드로라는 인물을 모시러, 그 하인과 부하병사를 보냅니다. 한 로마군대의 백부장의 결단, 이것이 새로운 세계를 열어가는 출발점이 됩니다.

 

한편, 베드로는 더 황당한 일을 겪습니다. 하늘에서부터 큰 그릇이 내려오는데, 그 그릇 안에는 “온갖 네 발 짐승들과 땅에 기어다니는 것들과 공중의 새들이 골고루 들어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베드로에게 “일어나 잡아먹으라”고 합니다. 도저히 먹을 수 없는 것을 먹으라 하니, 베드로는 당연히 “주님 절대로 그럴 수 없습니다.” 그리고 “저는 속되고 부정한 것은 한 번도 먹은 일이 없습니다.” 라고 답하는데, 아마 그 답에는 구약의 레위기 등에서 나오는, 유대인이 먹지 말아야 할 금기사항을 잘 지킨다는 유대인 베드로의 자부심(자긍심) 같은 것도 표현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하도 황당한 환상이기에, 도대체 무슨 뜻으로 이런 환상을 보여주었을까 생각하고 있는데, 고넬료가 보낸 사람이 도착하여 베드로를 찾습니다.

 

베드로는 이제 환상을 해몽할 것도 같습니다. 그동안 베드로는 할례하고 모세율법 준수하는, 유대인 중의 유대인이란 자부심을 갖고 살아왔습니다. 예수님 제자가 되었다고, 그 점에서 달라질 것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여태까지 속되고 부정타는 것처럼 여겨온 짓을 이제부터는 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도저히 먹지 못할 것을 먹는 것과 같이 역겹고 거부감이 들어도 하라는 것입니다. 아니, 그런 것에 대해 거부감을 갖는 자체가 잘못된 것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베드로 네가) 속되다고 하지 말아라.” 라고 합니다. 여기서 베드로의 기준과 하나님의 기준은 완전히 다릅니다. 베드로는 유대적/비유대적으로 가르는데, 하나님은 유대인/비유대인을 전혀 가르지 않습니다. 천사는 로마인 고넬료에게도 바로 역사하시고, 그의 기도도 기억하고, 그의 기도도 상달됩니다. 고넬료는 천사의 소리에 바로 적극 반응하지만, 베드로에게는 한 번도 아니고 두 번도 아니고 세 번이나 같은 계시를 내립니다. 그만큼 유대적 아집이 깨뜨리기가 더 어려움을 드러내 줍니다.

 

드디어 만남이 이루어집니다. 로마군대의 장교와 유대인 예수쟁이의 만남입니다. 더 정확히는 고넬료 식구들과 베드로 팀(여럿)이 함께 만납니다. 이건 두 사람 모두에게 위험한 모험입니다. 베드로는 “유대 사람으로서 이방 사람들과 사귀거나 가까이 하는 일 자체가 불법”임을 말해줍니다. 그 불법을 무릅쓰고, 어떤 사람이든 “사람을 속되다거나 부정하다거나 하지 말라”고 한 하나님의 지시에 따른다고 합니다. 이 두 사람의 만남을 식민/피식민의 간격을 뛰어넘고, 로마인/유대인 간의 장애를 뛰어넘습니다. 베드로는 자신의 깨달음을 이렇게 정리합니다.

 

★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외모로 가리지 아니하시는 분이십니다.

★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그가 어느 민족에 속하여 있든지 다 받아주십니다.

★ 예수 그리스도는 (이스라엘 자손 뿐 아니라) 만민의 주님이십니다.

★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습니다.

(사도행전 10:34-43)

 

고넬료와 베드로의 만남의 이야기는 아주 생생하고 가장 상세합니다. 같은 이야기가 3번이나 반복되며, 차지하는 지면도 다른 어떤 에피소드보다 많습니다. 그만큼 중요하다는 것이겠지요. 예루살렘 원공의회에서의 핵심쟁점―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할 것인가, 이방인이 복음을 받아들인다면 그 조건은 무엇인가. 이 복잡하고 끝 간 데 없는 논쟁을 종결지을 수 있었던 것은, 베드로가 고넬료와의 만남을 상세히 전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셔서, 그들의 마음을 깨끗하게 하시고, 우리와 그들 사이에, 아무런 차별을 두지 않으셨습니다.” 라고요.

 

그러면서 공의회에 솔직히 말합니다. 할례의식과 모세율법은 “우리 조상들이나 우리가 다 감당할 수 없었던 멍에” 아니냐고요. 우리에게도 멍에 같았던 그런 것을 왜 이방인에게 덮씌우려 하는가 하고요. 그리고 최후로 말합니다. 우리는 이제 그런 멍에를 벗어던지고,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을 얻자” “우리도 마찬가지고, 그들도 마찬가지다”고요. 공의회는 베드로의 이 특별한 만남의 체험을 존중했습니다. 공의회의 결론은 이렇습니다. “이방 사람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올 때, 괴롭힘을 주지 말자. 다만 우상에게 바친 음식, 음행, 목매어 죽은 것, 피를 멀리하라.” 이 단서는, 강요하거나 전제조건으로 요구할 게 아니라, 다만 그렇게 하는 게 좋겠다는 정도로 권고하자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엄청난 성취가 이루어졌습니다. 첫째, 그리스도교는 유대적 전통의 ‘멍에’를 벗을 수 있었습니다. 둘째, 유대인과 이방인은 예수공동체의 품안에 아무 차별 없이 복음을 받고 들어올 수 있게 되었습니다. 셋째, 주요한 문제를 공의회라는 매우 민주적인 틀로 논의하는 방식을 시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넷째, 이제 그리스도교는 유대교의 한 갈래처럼 보이는 틀을 깨고, 전 세계를 품을 수 있게 활짝 열렸습니다.

 

그런데 베드로에게 나타난 황당한 환상은 과연 무엇일까. 그건 실상 예수님의 보여주신 모범 그것을 그대로 따른 것임에 다름 아닙니다. 예수님이야말로, 여성, 장애인, 이방인, 이방여성에 대해 아무런 차별의식과 장벽감을 느끼지 않고, 모두를 하나님의 자녀로 흔연히 대했습니다. 사람을 만날 때 어떤 거리낌이 없었습니다. 누구를 미워했다면, 제사장, 레위인, 바리새인 등 특권을 갖고 위세를 부리며 위선을 부리는 자들이었고, 선민의식적 기조에서의 어떤 차별의식도 갖고 있지 않았습니다. 베드로가 고넬료를, 율법 위반에도 불구하고 찾아갈 수 있었던 것은, 그 날의 계시(환상)이라는 구체적 계기 뿐 아니라,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 보고 듣고 체험한 그 가르침의 실천입니다. 아니, 환상 그 자체가, 이방인선교에 나서면서 베드로 속에 내재한 두 개의 모습 [유대인=율법주의자=베드로1 v. 예수님=베드로2] 사이의 내면적 갈등의 한 표출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예수 따르미로서 베드로가 그러한 갈등 속에서 결국 예수님=하나님=천사의 길을 결단하는 과정을 여실히 보여준다고 생각되기도 합니다.

 

고넬료와 베드로의 만남을 읽으면서 딱 떠오르는 4자성어가 있습니다. 뭘까요? 줄탁동기(?啄同機) 혹은 줄탁동시(?啄同時)란 말 들어보셨죠. 병아리가 알 속에서 나오려면 먼저 스스로 알을 깨기 위해 부리로 알을 쪼아야 합니다. 그러면 알을 품던 어미닭이 소리를 알아듣고 동시에 밖에서 알을 쪼고, 이렇게 안팎에서 서로 쪼아대어 마침내 껍질이 깨지고 병아리가 밖으로 나옵니다. 병아리가 안에서 쪼는 것을 줄(?)이라 하고, 어미닭이 밖에서 쪼는 것을 탁(啄)이라 합니다. 줄-탁이 동시에 이뤄져야 껍질깨기가 완성됩니다. 그러니 줄탁동시인 것이지요.

 

그런데 이 만남은 상호 줄탁인 것 같습니다. (베드로가 고넬료를 구원했다는 식으로 일방적으로 이야기할게 아닙니다.) 고넬료가 갇혀있는 껍질은 고넬료가 안에서 쪼고, 베드로가 밖에서 쪼아, 고넬료가 밖으로 나옵니다. 또 베드로도 자기껍질 속에 갇혀 있습니다. 베드로가 안에서 쪼고, 고넬료가 밖에서 쪼아 베드로도 밖으로 나올 수 있었습니다. 두 사람의 줄탁은 비유대인과 유대인 기독교도 사이에 줄탁으로 확대됩니다. 그 껍질깨기, 장벽 허물기는 정말 어렵습니다. 사람의 뜻으로 되는 게 아니고, 하나님과 천사와 성령이 이 만남을 위해 직접 개입합니다. 사람은 ‘줄’ 하면, 하나님이 ‘탁’ 하는 것이지요. 하나님,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함부로 속되다, 부정하다고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사람들이 만든 수많은 장벽을 깨고, 모두가 하나님 품에 함께 들어오기를 바랍니다. 사람과 사람, 사람과 하나님은 서로 줄탁하면서 인위적인 장벽들, 편견들, 껍질들을 깨기를 간절히 소망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로 돌아와 봅시다. 우리 속에는, 그리고 우리 주위에는 각종 장벽, 편견, 단단한 껍질들로 포위되어 있습니다. 종교와 종교, 남자와 여자, 지역과 지역, 나라와 나라, 자국인과 이방인 등 겹겹의 벽들이 둘러치고 있습니다. 때문에 우리는 한없이 왜소해집니다. 하나님의 뜻에 반하는 짓거리들이 때로는 하나님의 이름을 빌어 서슴없이 자행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들어 치는 장벽은, 모두가 하나님이 원하는 모습이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러니 기도합시다.

 

고넬료와 베드로의 만남을 갈망하고 주선하신 주님

그들을 둘러싼 껍질을 깰 수 있는 용기와 능력을 주신 주님

오늘 저희들에게도 역사하셔서

우리 속에 있는 각종 껍질들을 깨고,

우리를 둘러싼 각종 장벽들을 녹여서,

모두가 주님의 자매형제로서 서로가 줄-탁할 수 있도록

성령의 줄-탁을 더하여 주시옵소서.

모든 말씀,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의 이름 받들어 기도드립니다. 아멘.

 
평신도 열린공동체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사단법인 새길기독사회문화원, 도서출판 새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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