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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수의 계절은 늘 우리 곁에 와 있다

요한복음 권진관 형제............... 조회 수 665 추천 수 0 2015.07.24 19:45: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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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요4:31-38 
설교자 : 권진관 형제 
참고 : http://www.saegilchurch.or.kr/144365 

추수의 계절은 늘 우리 곁에 와 있다(요4:31-38)


2013년 9월 29일 추수감사주일 예배

권진관 형제(성공회대학교 조직신학 교수)

 

추수감사절은 우리의 나그네 같은 삶 속에서도 뒤를 돌아보고 우리의 여정이 그래도 축복이 많은 여정이라는 것을 되새기며, 특히 부모님들과 조상님들의 여정을 돌아보며 결실의 첫 열매의 감사를 그분들이 향하여 가신 하나님께 돌리는 계절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맺은 모든 결실은 존재의 근원이신 하나님에게 돌리는 것이 추수감사입니다. 그런데 오늘 저는 이러한 추수감사는 우리가 항상 매일 같이 행해야 할 과제가 아닌가 생각하면서 오늘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오늘의 본문에서 보면, 추수 때가 되기도 전에 이미 추수할 수 있다고 하는 예수님의 말씀이 눈에 띕니다. 넉 달이 지난 후에야 추수할 수 있다고 하는데 예수님은 ‘밭을 보라, 이미 곡식이 익어서 거둘 때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 거둘 알곡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알곡’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추수 때가 아니더라도 언제나 추수할 것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그것을 보지 못하고, 느끼지 못하고, 알지 못하기 때문에 추수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드리기 위해서 이번 저의 안식년에 있었던 일들 중 몇 가지를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제가 이번 한 학기 동안 안식년을 갖게 되어 독일 마인츠의 대학에 가 있었습니다. 그 대학의 원래 이름은 요하네스 구텐베르크 대학입니다. 저는 미국에서 공부한 적은 있었지만, 독일에서 체재하면서 학교에서 연구하고 강의해 본 적은 처음입니다. 그러는 중에 이곳저곳 여행도 다녀왔습니다. 제가 이번 독일에 가려고 결심했던 것은 역시 하루라도 더 젊었을 때에 가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시기를 활용하여 여행도 다녀보고 싶었던 것으로 제 나름으로는 결단하고 독일로 갔습니다. 이번에 6개월을 외국에 체재하면서 외롭다는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고향을 떠난 삶에서 오는 외로움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것이 우리의 삶이라고 생각하고 받아들였습니다. 우리 생을 여행으로 비유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 모두는 어떤 면에서 나그네이기도 합니다.

 

우리 옛날 노래에 ”노세 노세 젊어서 노세 늙어지면 못 노나니~ 가세 가세 산천 경계로 늙기나 전에 구경가세~”라는 가사가 있습니다마는, 젊어서 여행 떠나자는 얘기를 많이들 합니다. 늙어지면 여행가기가 귀찮아지고 몸도 아프고 한다고 하니 젊어서 가는 것이 좋은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데 여행의 진미는 무엇이냐 하면 바로 앞의 일을 생각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특히 아주 모르는 곳을 향해 갈 때면 더욱 그러합니다. 전연 모르는 곳으로 여행을 떠나면 바로 앞에 무슨 일이 전개될지 모릅니다. 우리 인생을 여행과 비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행 할 때에는 네비게이션으로 다닐 수 있지만, 인생에는 이런 것이 있을 수 없습니다. 전연 모르는 곳으로 낯선 여행을 떠나는 것처럼, 우리의 인생도 그와 마찬가지입니다.

 

이번 독일 체류 중에 다른 나라로 혹은 기차로 혹은 자동차로 여행을 떠났었는데 그야말로 앞을 알지 못하는 일이 전개되는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이태리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기차를 타고 알프스를 넘어 베니스 역에 도착했습니다. 기차역에서 2-3분 거리에 있다고 되어 있는 호텔이 한 시간 이상 떨어져 있어서 베니스 골목들을 뒤져서 잠잘 호텔을 밤늦게 찾아들어간 적이 있었습니다. 스페인에 도착하자마자 공항에서 네비게이션 장착되지 않은 차를 빌려서 숙소를 찾아가는데 길 표지는 무슨 말인지 알 수 없고, 언어는 통하지 않고 지명은 왜 그리 긴지 도대체 호텔을 찾을 수가 없는 기진맥진한 상태에서 어떤 천사를 만나 무사히 호텔에 든 적도 있었습니다. 로마에서의 여행도 마찬가지입니다. 거기에서는 다른 분의 소개로 알게 된 어떤 한인 교회 목사에게 연락을 해 놓고 무작정 로마의 한 호텔에 들어갔는데, 극적으로 만나게 되어 그 목사님과 함께 로마의 순교자들의 교회들, 소렌토 근처 사도 바울이 도착한 해안가, 그리고 폼페이 유적지 등을 돌아볼 수도 있었고, 그 분의 로마교회에 가서 설교도 하면서, 그 목사 부부와 우리 부부가 친구가 되는 경험도 했습니다. 이러한 모든 일들은 전연 계획되지 않은 일들이었는데 일어난 것입니다. 여행 중에는 앞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여행이 진짜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여행이라고 하는 행동이 없었다면 지금 이 자리에서 이런 얘기도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저는 행동이 가지고 있는 존재론적, 진리적, 계시적인 의미를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행동이 가지고 있는 중요성, 의의에 대해 관심을 가지려고 합니다. 행동이 우리의 존재를 결정해 주기 때문입니다.

 

이번에 주로 체류했던 독일에서의 경험을 말씀드려보려고 합니다. 처음으로 한 장기 체류는 저에게 일종에 새로운 것을 가져다주는 경험이었습니다. 저는 주로 미국에서 공부했고 미국을 자주 방문하여서 미국인들의 습성이나 분위기를 어느 정도 알고 있다고 생각합니다마는 이번 독일에서의 경험으로 서양사람들 특히 백인들 사이에 큰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선 독일인과 영미계인들과의 차이, 그리고 동구와 서구의 차이. 라틴계, 슬라브계 등과의 차이를 보면서, 백인들이 하나가 아니라, 다양하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들 간의 경쟁이 치열하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특히 세계는 영미계와 독일계(독일, 스위스, 오스트리아 등)의 경쟁이 치열한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여기에 프랑스를 비롯한 이태리 등 라틴계의 추격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독일인들은 공동체적이고, 차분하고, 실제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 과학이 발달했고, 동시에 철학이 발전한 나라입니다. 독일인의 진지함, 학문적 태도를 보면서, 그들이 아무리 다양한 과외 활동을 하더라도 자기들의 전문분야에 대한 연구는 진지하게 하고 있고, 수준도 매우 높은 것을 보았습니다. 독일에서 나그네 같은 생활을 하면서 거둔 결실은 존재라고 하는 개념을 발견한 것입니다. 존재라는 것이 우리의 모든 생각과 행동을 좌우하며 근원이라는 발견한 것이었는데, 이것이 제가 거둔 수확이었습니다. 존재론은 저의 신학을 세우는 일에도 크나큰 도움을 주게 되었습니다. 오늘 저는 행동을 통해서 결실을 맺으며, 행동을 통해서 우리의 존재가 드러난다는 지극히 평범한 얘기를 하려고 합니다.

 

행동이라는 말을 하기 전에 사족을 붙여보겠습니다. 우리 아시아에서, 특히 불교의 사상에서, 행위, 행동이 삶에 너무나 중요하다는 사상을 가진 말이 있습니다. 그것은 카르마(Karma)라는 개념입니다. 카르마라는 사상은 업보 사상이라고 하는데, 즉 행동, 카르마가 우리의 현재와 미래를 결정한다는 사상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선행(善行)을 하면 현재와 미래의 내가 좋게 바뀐다는 것입니다.

 

좋은 과거가 좋은 미래를 형성해 준다는 말은 우리가 아무 실천도 없이 그냥 우연히, 혹은 갑작스럽게 좋은 미래를 가지게 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그런 면에서 업보, Karma는 의미 있는 개념입니다. 좋은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는 것이 아니라, 좋은 열매 즉 좋은 행동이 좋은 나무, 좋은 사람을 만든다는 얘기입니다. 행위가 사람을 그렇게 만듭니다. 카르마 사상에서, 행위는 현재적인 것인데, 그 행위는 지나가는 현재이므로 시간이 가면서 사라지는 것 같지만, 그 행동의 결과는 미래에 나타난다는 생각입니다. 불교의 카르마 사상은 매우 강력한 존재론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불교의 카르마 교리는 행동이 존재의 형태(form)까지도 바꿀 수 있는 힘이 있다고 할 정도입니다. 예를 들어 카르마의 결과로 축생이 될 수도 있고 귀한 인간이 될 수도 있다는 교리입니다. 불교의 카르마 사상은 행위의 강력한 힘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의 행위는 불균형한 힘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므로 우리의 모든 행위는 힘의 과다, 능력의 과다, 사회적 지위의 고하라고 하는 힘의 불균형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므로 우리의 미래를 결정하는 결정적인 요소는 우리의 행위만일 수 없고, 힘의 불균형이라고 하는 이러한 조건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데, 불교에서는 이러한 점을 간과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가난하고 힘없는 젊은이가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그 가난의 올가미를 벗어날 수 없는 현실은 이렇게 힘의 불균형, 가진 것의 차이에서 오는 것입니다. 아무리 최선을 다해도 결실이 이루어지지 않는 조건이 지배하고 있다면 카르마 사상도 한갓 헛구호요 헛된 사상이 아니겠습니까? 오늘의 젊은이들이 아무리 노력해도 좌절한다면, 카르마의 교리는 효과가 없는 것이겠습니다. 우리 사회는 가난한 젊은이가 아무리 노력을 해도 성공할 수 없는 사회로 점점 더 치닫고 있습니다. 부모가 전문직으로 갈 수 있도록 붙들어주고 기다려주고, 도와주는 젊은이들은 잘 살아가고, 성공합니다. 그렇지 않은 젊은이들은 계속 힘들게 살아가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카르마 교리가 우리 사회에서는 제한적으로만 적용이 됩니다. 그러나 우리의 상황이 아무리 힘의 불균형의 상황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을 뛰어넘어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힘은 역시 우리 인간 주체들의 결단과 행동밖에는 없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열심히 하면 모든 것이 잘 될 것이고, 착하면 좋은 결과가 있을 것이라고 하는 현실모르는 순진한 카르마를 믿어서는 안 되지만, 그러나 이 순진함을 넘어서서 상황의 척박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극복하고자 시도하는 행위(카르마)의 가치를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의 행동은 우리의 지금의 운명을 넘어서게 하고 새로운 운명을 개척하게 만드는 유일한 길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이제 존재에 대해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존재란 독일어로는 Sein, 영어로는 Being입니다. 존재란 가장 중요한 것이지만, 개체의 상태로 있지 않기 때문에, 가장 보편적인 것이지만, 볼 수 있거나 만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가끔 공기의 중요성을 잊고 지내듯이, 존재라는 것을 잊고 지내는 것이 사실입니다. 모든 존재자들은 자기의 존재를 가지고 있고, 존재자(주체)의 행위는 이 존재에 근거해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존재는 객관화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의 인식을 쉽게 빗겨갑니다.

 

그러나 우리가 다만 알 수 있는 것은 우리의 행위가 그 존재를 실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존재를 가지고 있는 존재입니다. 인간을 가리키는 human being이란 말에서 human은 존재라는 being을 가지고 있습니다. I am 이라고 할 때 am 즉 be 동사는 항상 나(I)와 함께 있습니다. I am thinking, I am loving, I am a man, I am good. 인간만이 자기가 “무엇 이다”라고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가장 존재론적인 인간입니다. 인간은 being이며, 이 being은 특별히 인간의 가능성을 가리킵니다. 인간은 인간 존재이며, 인간이 되어 가는 존재입니다. Human being (인간)은 가능성의 존재입니다. 왜냐하면 이 am 동사 (be 동사) 다음에 무한한 수의 술어가 붙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유한성 속에서도 거의 무한정으로 자기 자신을 변화, 확장시킬 수 있는 존재(be-ing)입니다.

 

신학에서는 신을 인간 존재와 구별하여 “존재 그 자체”(Being Itself)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출애굽기에서 모세가 떨기나무의 불꽃 속으로부터 들려온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이름을 묻자 “나는 스스로 존재하는 자”(I am who I am)이라고 대답했는데, 이것은 존재의 근거, 존재 그 자체로서의 신을 알게 해 줍니다. 우리가 이 존재 그 자체인 신이 있다는 것을 잊고 지낸다거나 모르고 있다면, 우리의 삶은 뿌리가 없는 것이 되고 무의미한 것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구체적인 행동과 삶은 이 존재에 의지해서 궁극적인 의미를 가진다는 것을 잊는 것이 됩니다.

 

인간의 자기의 존재성을 망각하여 잊고 지내거나, 아예 존재성을 부정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오늘날의 물질문명 속에서는 이렇게 내면적인 현실을 잊고, 보이는 것, 구체적인 것, 실체적인 것만을 좇아 사는 것이 보통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우리의 삶이 매우 무미건조해 지게 됩니다. 삶이 단지 성공이냐 실패냐, 즉 결과물에 의하여 판단되어 집니다. 의미의 세계가 사라지고, 단지 보이는 맘몬만이 중요한 것이 됩니다.

 

그러나 존재의 세계, 존재 그 자체가 현실적으로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실패의 삶과 행위도 그 시도와 노력을 했다는 것만 가지고도 존재론적인 의미를 갖게 됩니다. 존재에 대한 의식이 상실되면 실용주의나 공리주의(utilitarianism)적 사고반경, 결과론적 사고 반경 안에 갇힙니다. 그렇게 되면 세상의 모든 일들을 오직 실용성, 이로움으로만 판단하고, 성공과 실패, 출세와 경쟁의 잣대로만 판단하게 되는 그야말로 비인간적인 세계가 이루어지게 될 것입니다. 이처럼 존재는 의미의 원천이 되며, 가능성의 원천을 가리킵니다. 이것은 독일의 철학자인 하이데거, 그리고 신학자인 폴 틸리히와 칼 라너와 같은 학자들로부터 배운 것입니다. 하이데거나 칼 라너와 같은 사람들에 의하면, 존재는 시간성을 가지는데 그 시간성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미래성이라는 것입니다. 존재론적으로 볼 때 과거보다는 미래가 더 무게가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미래는 새롭게 진정한 것을 향한 가능성을 가졌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존재는 미래의 가능성을 포함한 모든 것이므로 초월적인 차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이데거에게 한 가지 흠이 있다고 한다면, 그의 철학이 엘리트들의 삶의 경험에 기초하고 있다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하이데거는 오직 미래의 가능성 아래에서 재창조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미래의 가능성의 조명 아래에서 새로운 존재로의 기대를 사람들은 지향하고 있다고 하는데 지금 굶주린 사람들, 지금 아픈 사람들에게 미래의 조명 아래 과거를 새롭게 이해한다는 것을 도저히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이 저의 소견입니다. 오늘날의 비정규 노동자들, 가난한 노인들, 실직자들, 아르바이트로 근근이 하루하루를 지내고 있는 사람들에게 과거를 미래의 가능성의 관점에서, 새로운 희망의 빛 아래에서, 긍정적으로 이해하고 반추한다는 것은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이러한 일은 미래가 어느 정도 보장되어 있는 사람들에게나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좀 심하게 말씀드리는 것 같지만, 가난한 자들에게, 비정규인들에게 기대란 기대할 수도 없고 오직 절망과 죽음만이 앞에서 어른거릴 뿐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하이데거가 세계에서 독일의 지배적 지위를 확고하게 하려고 했던, 즉 미래가 보장되는 독일을 약속한 히틀러를 지지하게 되는 동기가 있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의 철학이나 신학은 약자들이 자신의 죽을 운명을 넘어설 수 있는 희망을 가질 수 있도록 만드는 데에 공헌해야 합니다. 우리 교회는 이 땅에서 이것을 외쳐야 합니다. 오늘의 힘의 불균형의 불의한 상황에서도 약자들이 희망의 행동을 할 수 있도록 여건을 마련하는 것이 교회와 신학의 책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하여 희망 자체가 불가능한 사람들, 그러한 세대들에게 희망을 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여기에서도 행동이 매우 중요한 것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아무리 어두운 상황에서도 결국 희망을 창출 할 수 있는 행동을 할 수 있어야만 자기의 상황을 뚫고 나갈 수 있다고 볼 때에, 약자들을 포함한 모든 사람들에게는 행동이 필요하고, 이러한 행동 그 자체가 희망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행동만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행위만이 우리에게 새로운 것을 가져다 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행동은 위험할 수 있습니다. 돌발적인 행동, 성찰이 없는 행동, 행동주의적 행동, 모험주의적 행동이 그러한 것입니다. 오늘 아침에도 신나치주의자들의 행동들을 뉴스에서 보았습니다. 특히 자기중심적 무차별적 행동은 사람들을 죽입니다. 무차별 살해사건, 무차별적인 잔인한 테러사건, 이 모든 것은 행동주의자의 행동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 선생은 일찍이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다고 말했습니다. 이러한 믿음이 필수적이라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자기 성찰을 한다는 것은 곧 믿음이 있음을 말합니다. 자기 자신의 존재의 근원을 확인하는 믿음 없이 그냥 행동으로 나간다면 뿌리와 근거가 없는 행동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한 행동은 아무리 해도 헛수고요, 행동자의 인생을 망치게 합니다.

 

행동은 생각과 함께 가야 하는 것이고, 행동은 존재에 뿌리를 두어야 하는 것입니다. 행동과 행위는 중요하지만, 그러나 우리가 행위를 행동의 뿌리인 존재를 잊은 채, 하게 되면 아니함만도 못하게 됩니다. 이러할 때 무위(無爲)가 유위(有爲)보다 낫습니다. 그러나 아무 행동 없는 무위는 뿌리 없는 잘못된 행동을 막아주지만, 아무것도 아니하는 것이 진정한 의미의 동양적인 개념의 무위는 아닙니다. 동양 사상의 무위는 인위적인 행동을 반대하지만, 그렇다고 아무 일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존재에 근거한 물 흐르는 듯 자연스러운 행동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봅니다. 자기 자신의 진정한 존재에 근거한 행동, 행위가 중요합니다. 자기 자신의 존재에 기반을 둔 행동만이 자기 자신의 존재를 온전히 드러내고 그 행동은 구원을 가져다 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존재의 근원은 하나님이라는 것을 말해야 할 것입니다.

 

존재라는 차원이 이미 우리와 함께 하고 있지만 우리는 이것을 잊고 지냅니다. 그리고 그 존재가 근원적인 존재인 신과 이어져 있어서 결국 신과의 교통, 신의 은총을 경험할 수 있게 한다는 것을 현대인들은 잊고 지냅니다. 존재라고 하는 세계 혹은 존재의 지평은 나에게 이미 와 있었고, 나를 초월하게 하는 행동의 근거가 되고 있다는 사실을 현대인들은 그리고 우리들은 잊고 지내고 있습니다. 우리들은 존재의 세계를 의식해야 합니다. 이러한 존재의 세계와 존재의 지평을 의식하는 가운데, 우리는 척박한 상황 속에서도, 올바른 행동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행동을 통해서 추수의 알곡을 얻는 것입니다. 즉, 이러한 행동을 통해서 우리의 구원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봉독한 말씀은 이미 우리 속에 있는 존재의 세계를 인정하는 것이 중요함을 말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처럼, 존재의 지평이 우리에게 이미 와 있기 때문에 우리는 매일매일 추수의 수확을 거둘 수 있습니다.

 

 <기도>

우리는 우리를 둘러싸고 있고, 그것이 너무 우리에게 가까이 있어서, 느끼지 못하고 알지도 못하는 존재의 지평, 존재의 세계를 잊고 지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 각자의 보이지 않는 삶의 원천, 의미의 원천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도와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우리의 모든 행동이 당신께서 허락하신 우리의 진정한 존재를 드러내는 귀한 것들이 되도록 우리를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나를 뛰어넘어 당신이 진정으로 원하시는 새로운 나로 나아갈 수 있도록 인도하시는 존재의 근원인 당신을 느끼며 살면서 좋은 열매를 맺는 우리들 되게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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