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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대상10: 6-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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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창인 목사 |
참고 : | 충현교회 |
마음에 새기고 삽시다
역대상 10: 6-14
김창인 목사
명심이라는 말은 마음에 새긴다는 뜻인데 오직 여호와만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마음에 새기라는 말씀입니다. 천상 천하에 신의 이름을 가진 존재들이 많으나 전부 거짓 신일 뿐이요 참신은 오직 여호와뿐임을 마음에 새기고 살면 믿음이 바로 되고 생활이 성화 되며 인격이 성숙되는 은혜가 나타날 것입니다. 사람들은 마음에 무엇을 새기느냐에 따라서 삶의 결과가 하늘과 땅만큼 차이가 납니다. 가령 남편이 오직 아내만을 마음에 새기고 살면 행복의 주인공이 되겠지만 다른 여자를 마음에 새기고 산다면 불행의 주인공이 되고 맙니다. 행복과 불행은 천양지차가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오늘 본문의 사건을 통해서 우리 성도들이 무엇을 마음에 새기고 살아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 명심할 바를 상고해 보겠습니다.
I. 가장의 책임(6-10)
물건이 변질되면 쓸 수가 없습니다. 결국에는 버릴 수밖에 없습니다. 아무리 맛좋은 음식일지라도 변질이 되면 역시 버리게 됩니다. 먹을 수 없고 먹었다가는 큰 탈이 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변질된 사람은 백해무익한 존재가 됩니다. 걸레와 쓰레기처럼 꼴사나운 존재로 전락하고 맙니다. 요즘 정치 판에서 변질되고 있는 인간들을 보십시오. 인간 걸레조각 같고 쓰레기 같아서 눈뜨고는 차마 볼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말씀 중에 악한 농부에 대한 비유가 있습니다. 포도원 주인이 온갖 것을 모두 갖추고 전혀 부족함이 없는 상황에서 농부에게 세로 주었습니다. 그때 그 농부는 얼마나 순진했고 착했습니까? 제때에 세를 바치기로 철석같이 약속하였습니다. 돈 한푼 없이도 살수가 났습니다. 그 해에 열심히 농사를 지었고 또 풍년이 들어 소출이 대단하였습니다. 엄청난 소득을 본 농부는 탐욕이 일기 시작하더니 그만 사람이 달라지고 말았습니다. 즉 변질이 되고 말았습니다. 주인에게 감사한 마음으로 세를 바쳐야 할 그가 세를 받으러 오는 종들을 때려죽이는 가 하면 마지막에는 주인의 외아들까지 죽이고 포도원 자체를 빼앗으려고 하였습니다. 사람이 악해지기 시작하면 끝이 없는 것 같습니다. 악이 악을 낳기 때문입니다. 결국 그 인간은 주인에 의하여 빼앗기고 쫓겨나고 멸망을 당했습니다. 욕심이 잉태한 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 즉 사망을 낳는다는 말씀이 진리 그대로였습니다. 변질된 그 농부, 그 가장은 자기는 물론 온 가족을 망케 하였습니다. 가장의 책임이 얼마나 크다고 하는 것을 망각했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본문 6절에서 10절의 내용을 보십시오. 사울 왕이 전쟁에 나가서 자신도 전사했고 세 아들도 함께 죽었습니다. 블레셋 사람 사울의 머리와 갑옷을 취하여다가 그 갑옷은 자기들의 신이 묘에 두었고 그 머리는 다곤의 묘에 매달았습니다. 동시에 그의 온 집이 함께 망하였다고 성경은 아울러 증거 합니다. 그와 그의 가정이 말로가 얼마나 비참합니까? 사울이 처음에 왕이 될 때 그에게는 인간미가 있었습니다. 부모에게 효성이 극진했던 아들이었고 한때는 선지자들과 섞여 예언도 하였던 청년입니다. 그런가 하면 그가 왕으로 제비 뽑히자 감당을 못하겠다고 스스로 숨어버렸던 겸손한 사람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차차 왕권을 확립해 가면서 권세의 맛을 들이기 시작한 후에는 사람 자체가 점점 변질되어 갔습니다. 나중에는 하나님을 저버리고 무당을 찾았습니다. 심지어 악신에 붙잡혀 시달리기도 하였습니다. 그는 점점 교만하여져 겸손이란 그림자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버렸습니다. 결국 그는 아들들과 함께 전쟁에 나갔다가 모두 전사하는 불행의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시작은 좋았으나 끝은 말이 아니었습니다. 가장의 책임을 전혀 마음에 두지 않았기에 패가 망신을 당했습니다. 가장의 책임을 항상 마음에 새기고 살아야 합니다.
II. 은혜의 보답(11-12)
열 문둥병자가 예수님의 말씀으로 고침을 받았습니다. 아홉 명의 유대인은 전혀 예수님께 다시 나타난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백성으로 당연히 받을 것을 받았다는 생각에서였습니다. 그러나 사마리아인 한 사람은 예수께 찾아와서 사례하였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그의 사례를 받으시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고 기뻐하셨습니다. 은혜의 보답은 이처럼 하나님께 영광이 됩니다. 그리고 이어서 주님이 하신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 하였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병이 나았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병은 이미 나았습니다. 이 말씀은 네가 믿음으로 영혼이 구원을 얻었다는 뜻입니다(벧전1:9). 병 고침 보다 더 큰 은혜요 축복입니다. 그러므로 사마리아인은 병 고침 받은 은혜를 감사하였더니 보다 더 큰 구원의 은혜를 받았습니다.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 하였느니라는 말씀이 영적인 구원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감사하는 사람은 이처럼 더 받고, 더 받으나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은 받았던 것도 빼앗깁니다. 즉 은혜를 보답하는 것은 이처럼 귀합니다.
본문을 보면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이 은혜를 오래 동안 기억하고 있다가 보답한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사울이 왕으로 즉위한지 얼마 되지 아니하였을 때 암몬 사람 나하스가 무리를 거느리고 올라와서 길르앗 야베스를 공격하려고 하였습니다. 야베스 사람들이 항복하고 섬기기로 다짐하지만 나하스의 요구는 오른 눈을 빼라는 것입니다. 암담한 상황에 처했습니다. 너무도 난감한 중에 사울 왕에게 기별하였습니다. 이때 사울 왕은 온 이스라엘 자손들 중에서 33만 명을 모집하여 암몬 사람들을 격파하고 길르앗 야베스를 구원하였습니다. 꿈같은 현실이었습니다. 이때 야베스 사람들은 사울 왕에 대한 고마움을 잊을 수가 없었습니다. 경험은 어떤 면으로든지 하나도 버릴 것이 없습니다. 어느덧 40년의 세월이 지났습니다. 사울 왕이 블레셋과 싸움에 나갔다가 전사하였고 그의 머리는 다곤의 묘에 달리고 시체는 벧산 성벽에 못 박혀 구경거리가 되었습니다. 그가 추구했던 행복의 3박자는 하나님을 떠나게 했고 그 결과는 민망할 정도로 비참하였습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길르앗 야베스 용사들이 일어나 사울 왕의 시체를 적진 가운데서 찾아다가 장례를 지냈습니다. 결국 야베스 사람들은 40년 전에 입은 은혜를 잊지 않고 보답하였습니다. 다윗이 왕이 된 후에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에게 사자를 보내 축복하였습니다. 동시에 이 선행에 대해서 반드시 보답하겠다고 다짐도 하였습니다(삼하2:4-7). 은혜를 보답하는 것을 가리켜 선행이라 하였습니다. 즉 보답을 받을만한 선행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선행은 인격에 의한 것이지 재능에 의한 것은 아닙니다. 믿음에 의한 것이지 영웅심에 의한 것은 아닙니다. 믿는 사람이라면 은혜의 보답을 마음에 새기고 살아야 하겠습니다.
III. 하나님의 주권(13-14)
한번은 세례요한에게 그의 제자들이 찾아와서 예수님께 대한 질투 섞인 말로 아뢰었습니다. 즉 선생님께서 증거 하시던 자가 세례를 주매 사람이 다 그에게로 가더이다 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세례요한의 제자들은 예수님을 하나의 경쟁자로 본 것입니다. 이런 경쟁심리를 가진 제자들에게 세례요한은 "만일 하늘에서 주신 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 것도 받을 수 없느니라"는 말로 제자들의 허망한 생각을 가라앉혔습니다(요3:22-30). 하나님의 주권을 간단 명료하게 설명해줌으로 문제를 풀었습니다. 하나님이 주시지 않으면 받을 사람이 없고 하나님이 주시면 거절할 권리도 사람에겐 없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불가항력적인 은혜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을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자칫 잘못하면 인간의 주권과 하나님의 책임이라는 오류에 빠지기 쉽습니다. 인간의 책임을 강조하다 보면 인본주의에 빠지게 되고 하나님의 주권만 강조하다 보면 자칫 숙명론에 빠지기 쉽습니다. 이 양자를 잘 조화시킨 사람이 세례요한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는가 하면 자기의 책임도 강조하여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고 선언하였습니다. 그 중에서도 우선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을 염두에 두고 살아야 할 것도 암시해 주고 있습니다.
본문에서도 엄연히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즉 사울이 죽은 것은 여호와께 범죄하였음이라 저가 여호와의 말씀을 지키지 아니하고 또 신접한 자에게 가르치기를 청하고 여호와께 묻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저를 죽이시고 그 나라를 이새의 아들 다윗에게 돌리셨더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한때 사울을 왕으로 세웠으나 그가 신접한 자에게 가르치기를 청하는가 하면 불순종이 다반사라고 할 만큼 변질이 되었으므로 왕위를 폐하시고 말았습니다. 사울을 왕으로 세우시는 것도 폐하시는 것도 모두 하나님께서 주장하신 주권적 행사였습니다. 절대자의 주권적 행사이기에 누구도 거부할 수 없습니다. 본문은 곧 이어서 다윗의 사적을 간단히 소개하고 있습니다. 즉 그 나라를 이새의 아들 다윗에게 돌리셨더라고 하였습니다. 이 사실을 누가는 사도행전에서 이렇게 밝혔습니다. "그 후에 저희가 왕을 구하거늘 하나님이 베냐민 지파 사람 기스의 아들 사울을 40년간 주셨다가 폐하시고 다윗을 왕으로 세우시고 증거하여 가라사대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게 하리라 하시더니" 라고 하였습니다(행13:21-22). 여기에서 명심할 일은 하나님의 주권 행사는 "내 마음", "내 뜻"에 근거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과 뜻이 주권행사의 표준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마음에 거슬리는 사람은 폐하시고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은 세우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다윗에게 나라를 돌려 그 뜻을 다 이루게 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은 항상 하나님의 주권을 계산하고 살아야 합니다. 욥이 받은 갑절의 축복은 우연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모든 것을 다 잃었을 때, 더 이상 잃을 것이 없을 때 "주신 자도 여호와이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이니다."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이처럼 하나님 주권을 철저히 고백하고 순종할 때 갑절의 축복이 주어졌습니다. 욥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어야 하겠습니다.
성도는 잊고 살아야 할 것이 있고 마음에 깊이 새기고 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은 우리에게 가장의 책임을 명심하라고 합니다. 가장에게 그 가정의 운명이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은혜에 보답해야 한다는 것을 마음에 새기라고 합니다. 은혜를 보답할 줄 모르는 자에게 다시 주어질 은혜는 없기 까닭입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주권을 명심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절대자로서 주권적 행사를 하시기 때문에 순종하는 길에 삶이 풍요로워 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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