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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막3: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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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경형 목사 |
참고 : | 궁극교회 주일예배 |
3장 1절-6절: 예수께서 다시 회당에 들어가시니 한편 손 마른 사람이 거기 있는지라 사람들이 예수를 송사하려 하여 안식일에 그 사람을 고치시는가 엿보거늘 예수께서 손 마른 사람에게 이르시되 한 가운데 일어서라 하시고 저희에게 이르시되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하시니 저희가 잠잠하거늘 저희 마음의 완악함을 근심하사 노하심으로 저희를 둘러보시고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내밀라 하시니 그가 내밀매 그 손이 회복되었더라 바리새인들이 나가서 곧 헤롯당과 함께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꼬 의논하니라.
1, 2절에 보면 회당 안에 또 들어가셔서 보니까 거기에 손 마른 사람이 있었다. 그런데 사람들이 예수님을 송사하려고 엿보고 있었다. 이것을 보면 예수님을 송사하려고 일부러 손 마른 사람을 데려다 놓았을 수도 있다.
설령 그렇다 해도 예수님은 사람들의 그 마음을 다 아시고 회당에서 나갔다가 다시 또 회당 안으로 들어오신 것이다. 누가 뭐라고 해도 그 사람을 고쳐주시려고, 또 사람들을 깨우쳐 주시려고.
손 마른 사람을 보고 ‘한 가운데 일어서라’ 하시니 사방에 있는 사람들에게 다 보인다. 그리고 예수님이 그들에게 물으신다. ‘안식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중에 어느 것이 옳으냐’ 하고 물으셨다.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중에 어느 것이 옳으냐? 선을 행하는 게 옳다. 그리고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중에 어느 것이 옳으냐? 생명을 구하는 게 옳다. 일반상식으로도 그렇다.
그런데 여기에서 예수님께서 선이라고 하시는 것과, 일반사람들이 선이라고 하는 것은 다르다. 일반적으로 예수 안 믿는 사람들이 선이라 할 때는 남에게 유익되게 도와주는 것을 선이라고 한다. 공짜로 먹여주고 공짜로 입혀주고 공짜로 공부시켜주고 하는 것. 어쨌든 상대를 이롭도록 좋도록 유익되게 하는 걸 다 선이라고 한다. 돈 받고 해주는 것보다 안 받고 해주는 걸 더 선이라고 한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자타에게 하나님의 온전의 성품을 닮아지게 하는 이걸 선이라고 하신다.
선은 영원히 좋아야 하는 건데, 세상 사람들의 선은 임시적으로 좋게 해 주는 것이고, 예수님의 선은 하늘나라에 들어가서도 영원히 하나님이 인정해주고 그 선을 내가 인정을 받는 것이다.
악을 행하는 것은 안 믿는 사람들은 사람을 해치고 남의 것을 뺏어서 자기 것으로 착복을 하고 거짓말하는 것 등을 말한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악을 행하는 것은 사람을 하나님의 성품으로 닮지 못하게 방해를 놓는 것을 악이라고 하신다. 그 생각의 차이를 느낄 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리는 일을 못하게 만드는 것이 악이다.
그리고 교회적으로 보면 목사님들이 교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의 뜻을 깨닫게 해서 옳고 그름의 가치판단을 갖게 해서 하나님 것을 취하도록 만드는 이것이 선인데, 그러지 않고 ‘예수 믿으면 세상에서 뭐든지 만사형통이다’ 하는 식으로 가르친다면 이건 악이다. 예수님께서 말씀을 전하는 목적은 하늘의 것을 가르치시는 것인데 그게 아니라 ‘예수 믿으면 세상에서 부자 되고’ 하는 건 목적이 그렇게 들어가 있기 때문에 악이 되는 거다.
설교도 하나님께서 원하는 좋아하는 설교가 있고, 하나님께서 미워하고 저주하시는 설교가 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것을 가르치는 자들을 거짓 종들이요 이단자들이라고 하는 거다. 성경은 하늘의 뜻을 말하고 있는데 거짓된 목사는 땅의 것으로 말을 한다. 일반적으로 사기 치고 거짓말하는 그걸 말하는 게 아니다.
하나님의 뜻과는 정 반대가 되게 예수를 믿거나 정 반대적으로 가르치면 악한 것이다. 그런데 안 믿는 세상에서는 사람을 상해하는 것을 악이라고 한다.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중에 하나님의 생명으로 살리는 게 선이고 사랑이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리지 않는 건 죽이는 것이고 악이다.
그래서 예수 믿는 것은 적극적으로 옳은 것으로 의로 선으로 사랑으로 진실로 살리는 거다. 이게 하나님 사랑이다. 소극은 어떤 면으로 보면 자기가 죄에 감염 안 되려고 하고, 또 죄를 안 지으려고 하는 자기 방비만 되어 있는 것이다. 이보다 더 좋은 것은 적극적인 면에서 실력이 되고, 그 실력에서 정복으로 나가는 것이다.
우리 예수 믿는 것은 적극이다. 전쟁에서 싸울 때 무장도 해야 하지만 더 좋은 싸움은 적극적인 돌격전이다. 그러니까 앉아서 고스란히 당하는 것보다 정복자로 나가서 죽는 게 낫다. 이게 하나님 앞에 더 옳은 거다.
가정에서도 어떤 상황에서 ‘이건 가만있어야겠다. 나서면 얻어터지고 싸움이 나겠는데’ 하는 것도 있지만, 소극적이면 사람이 주로 조용한 쪽이면서 희생성이 없고 상대 쪽에서 내 쪽으로 요구성이 많아진다. 우리는 그것보다 더 좋은 것은 내 쪽에서 눈치 것 알아서 적극적으로 척척 해 나가는 것이 긍정적이고 훨씬 좋다.
성경을 깨달으려면 용어나 표현으로는 일반세상에서 쓰는 거나 교회에서 쓰는 거나 같을 수도 있겠지만 ‘땅의 일 땅의 뜻, 하늘의 일 하늘의 뜻’이라고 할 때 그 개념을 바꿔야 한다. 우리가 신28:도 읽었지만 그 안을 들여다보면 영적으로 다 들어가 있다. 영적인 면은 하나님의 뜻이다.
그 중심을 염두에 두고 성경을 깨달아 나가야 하는 건데 그게 바로 못 서면, 다르게 말하면 사람이 진리에 바로 못 서면 그 사람은 세상의 어떤 유행바람 물가바람 정치바람이 불면 거기에 날려간다. 사람이 그렇게 된다. 중심이 없다. 세상이 가자고 하는 대로 따라다닌다. 이건 신앙사상으로 보면 지조가 없는 거다.
그 다음에 일반적으로 사람은 그 정신 마음이 중요하다고 하는데, 우리가 신앙적으로 보면 사람은 그 마음이 진리를 붙잡고 있는 게 더 중요한 거다. 그게 아니면 그 사람은 마음은 세상을 따라서 갈팡질팡하고, 몸도 거기에 따라서 갈팡질팡하게 된다. 그러니까 마음이 중요하되 진리를 붙잡은 그 마음이 더 중요하다.
사람은 마음에 따라서 몸이 움직여 나간다. 마음도 없이 몸이 움직이면 그건 어떤 사람이냐? 정신없는 사람이다. 그러니까 마음이 중요하냐, 몸이 중요하냐? 마음이다. 그런데 그 마음이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있으면 참 좋은 마음이다. 예쁜 마음이고 강한 마음이다. 정절이 있는 마음이다. 참 아름다운 사람이다. 그런데 세상이 말세 때라 그런지 생명의 진리의 말씀을 붙잡은 사람이 쉽지를 않다. ‘말세에 믿음을 보겠느냐’ 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가만 듣고 보면 계시가 없이 들어도 일반 상식적으로도 옳은 말이다. 죽이는 것과 살리는 것 중에 어느 것이 옳으냐? 살리는 게 옳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 속에는 하나님의 뜻이 들어있기 때문에 그렇게 말씀하신 그 말씀의 껍데기를 다시 까야 한다. 그래야 우리가 정신적 영적인 면을 먹을 수가 있다.
손이 마르면 보기가 흉하다. 그러니까 이게 무슨 말이냐? 손이 마르면 보기가 흉하니까 사람 앞에 내놓을 수가 없다. 감춰야 한다. 손톱만 길어도 내놓을 수 있느냐? 감춰야 한다.
그러면 고생을 한 어머니가 손을 내놓으면 보기가 흉한데, 어머니의 이 손은 거칠어도 보기 흉한 게 아니다. 손을 딱 만져보면 ‘아, 이 분이 자녀를 키우면서 험한 세상을 살았구나’ 하는 걸 느낄 수 있다. 그렇게 살아온 인생 그 마음을 생각해 봐라. 진짜 보기 흉한 손은 일도 안 하고 통통한 손이다. 일 할 줄 모르는 손은 보기 흉한 손이다.
어쨌든 손이 마르면 보기가 흉하고, 줄 수도 받을 수도 없고, 무슨 일을 할 수도 없고, 봉사를 할 수도 없다. 이렇게 되면 인인관계 연관관계에서 수수관계가 이루어지지를 않는다. 우리 인간세계는 주거니 받거니가 돼야 연관관계가 친해지고 아름다워지고 한다.
일반적으로도 남에게 무엇을 줄 때는 받고자 하는 마음으로 하지 말라. 우리는 선을 뿌리고 가면 된다. 특히 결혼식이나 장례식 때 나중에 자기도 그런 일을 당할 때 받고자 하는 마음으로 많이들 주는데 그런 마음을 갖지 말라. 주고는 잊어버려라. 곡식 거둘 때는 나쁜 것은 얼른 내버리면서 왜 좋은 마음으로 준 것을 잊지 않고 있느냐?
영적인 면에서 보면 손이 마르면 주는 역사 받는 역사를 할 수가 없다. 다시 말하면 주고자 하는 마음 받고자 하는 마음이 없는 것을 말한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받고자 하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 또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을 주고자 하는 마음도 있어야 한다. 참 아름다운 마음이다. 이게 없다면 주는 역사가 있을 수가 없다. 다시 말하면 예수를 믿으면서 한 사람에게도 전도도 못하고 늙어 죽을 때까지 자기 혼자 믿고 자기 혼자 교회 다니고 했다면 이게 뭐냐? 받는 것도 없었고 주는 것도 없었구나. 그렇게 살지 말아라.
인간의 세계에 많은 사람을 만들어 놓은 것은 주기도 하고 받기도 하라는 것이다. 형편이 좋으면 주기도 하고, 또 형편이 나쁘면 받기도 하고. 그게 좋은 것이다. 그게 옳은 것이다. 사실 바리새인들과 유대 종교지도자들도 손 마른 사람과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을 지금 예수님은 말씀하는 것이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바리새교인들만 아니라 지금의 우리들에게도 그런 병이 있을 수 있다. 영의 눈을 가지고 보면 영적 면에서 주거니 받거니 하는 게 아름다운 건데 줄줄도 모르고 받을 줄도 모르고 하는 게 있다.
신학교 다닐 때 내가 해미에 살았으니까 서울에 올라갔다가 집으로 내려오려고 하면 스승목사님께서 차비하라고 한 2만 원 정도 주시면 나는 ‘괜찮습니다’ 하니까 목사님께서 야단을 하셨다. 말하자면 윗 어른이 주는 것에는 교훈이 들어있고 정신이 들어있는 것이다. 그런데 일반적인 생각으로 쫓아오면서 주면 할 수 없이 받는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말라고 하면서 야단을 하셨다.
거기에 무슨 교훈이 있느냐? ‘위에서 은혜를 베풀 때 받을 줄 알아라. 그리고 받고 너도 나처럼 또 줄줄 알아라’ 하는 그게 들어있다. 내가 그걸 깨달았다. 그래서 나도 이제 목사님들에게 차비를 주는 때가 있는데 그러면 ‘아이고, 있습니다’ 하며 안 받으려고 하면 나는 교만하다고 한다.
어른이 주는 거 ‘예, 감사합니다’ 하고 받을 줄도 알아야 한다. 그리고 다른 사람이 어려울 때 줄줄도 알아야 된다. 그렇게 하라고 주는 것이다. 그러면서 눈에 보이지 않는 관계성이 잘 형성되고 이루어지는 것이다. 주는 그걸 교훈으로 들어야 한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이 깨달을 게 많다.
그리고 부모가 자녀들 집에 가면 부모가 잘 살면 돈을 주고 나오는 거지만 그런데 자녀입장에서 굶을 정도가 아니면 부모 공경성에서 나오는 정신이 부모님이 차비를 갖고 왔다고 해도 ‘가면서 식사라도 하고 가시라’고 하며 용돈을 드리면 그 얼마나 따뜻하고 좋으냐? 사람 관계성에서는 찬 것보다 따뜻한 게 좋다. (계속)
김경형목사님이 교역자 신학생을 대상으로 매 주 정례적으로 진행하는 신학 및 성경연구 모임을 통해 영원 전에 하나님의 의지세계에서 인간구원을 설정하게 된 원인과 동기와 목적을 깨닫고 하나님의 본질의 신앙으로 나가는 주의 종들이 누룩처럼 퍼져나가고 있습니다.
참석하실 분은 031-207-5159, 또는 010-8886-5159로 문의해 주세요.(평신도도 참석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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