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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요10:12-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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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허태수 목사 |
참고 : | 2015.6.5주일예배 http://sungamch.net 춘천성암교회 |
누가 바르고 누가 그른 지도자인가
요10:12-13
저는 군대엘 가지 못했지만, 갔다 온 분들의 말을 들으면 군대는 소대장이나 향도를 잘 만나야 한다고들 합니다. 이건 비단 군대만이 아닐 겁니다. 여성들이 주로 하는 계도 계주를 잘못 만나 패가망신을 했다는 이야기를 듣지 않습니까? 이 말 혹은 경험들이 지닌 속내는 어떤 리더냐에 따라 그 구성원 또는 공동체의 행복과 불행이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어리버리한 리더를 만나면 구성원들이 고생을 하겠죠. 자기 욕심을 먼저 차리는 리더라면 아마도 구성원들은 그 리더의 소비재로 전락하게 될 겁니다. 세상을 읽지 못하고, 구성원의 마음도 읽지 못하는 리더를 만나면 모두가 캄캄한 절벽을 더듬으며 가는 것과 같을 겁니다.
이런 연장선상에서 교회의 리더, 그가 목사거나 혹은 장로라고 할 때 그들이 어떤 리더가 되어야 하는가 하는 문제도 아주 중요합니다. 더욱이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아 알게 하는 목사의 직무에 있어서 그 역할은 가장 중차대한 문제가 아닐 수 없을 겁니다. 사실 오늘 우리는 리더의 행동양식 하나하나까지를 이야기할 시간은 없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에 나오는 예수님의 말씀을 근거로 ‘누가 바른 리더고 누가 그른 리더냐’하는 총론만 생각하려고 합니다. 예수님은 리더의 중요성을 돋워 말씀하느라고 ‘삯꾼’이라는 표현을 합니다. 아마도 사회 전반에 삯꾼 리더가 없는 세상이 사람 살기 좋은 세상일 겁니다. 그러면 교회의 리더로서 ‘삯꾼’은 어떤 리더를 두고 하시는 말씀일까요?
사실 이 말씀은 뚱딴지처럼 등장한 말씀이 아닙니다. 요한복음 6장에서 시작되는 오병이어의 기적이야기에서부터 이러지는 논조입니다. 6:1-15절에는 군중들에게 떡을 먹이시는 장면이 나오죠. 그리고는 바다 위를 걸으면서 겁에 떠는 사람들을 다독이는 장면이 배치됩니다. 그런 다음에 예수님은 긴 설교를 하십니다. 간단하게 먹이는 기적과, 물위를 걷는 초자연적인 기적을 보이셨지만‘ 이게 내가 보일 수 있는 전부다’그러면 될 텐데 뭔가 다른 이야기를 하십니다. 마치 우리가 아이들에게 기껏 돈가스 사줘서 먹인 다음에 ‘여기 와서 앉아봐라. 잘 먹었지? 그러니 이제 내 말을 들어야 한다’고 하면서 인생에 대해서, 공부에 대해서, 부모님 말씀 잘 들어야 하는 이유에 대해서 일장 설교를 늘어놓는 우리네 부모와 같이 말입니다. 그게 22~60절까지입니다. 그러니까 앞에 떡 먹이고, 물 위를 걸었던 건 다른 속내가 계셨다는 뜻입니다.
자, 여기서 우리는 뭘 읽을 수 있나요? 제자들 가운데 내분이 일어났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과 행동에 대해서 다른 해석과 의견을 내 놓은 것입니다. 그리고는 예수의 길에서 떠난 제자들이 생기기 시작합니다. 61~66절을 보세요. 그러면서 예수님은 ‘영’과 ‘육’이라는 이분법적 분리를 합니다. 배신자인 가룟 유다의 존재가 예고되는 곳도 이곳입니다. 그러니까 앞의 사건들이 결국 제자들을 구분하는 사건의 단초가 되는 겁니다.
그런 다음에 우리는 12장1-8을 봅니다. 거기엔 비싼 향유를 예수님의 발가락에 쏟아 붓는 여인에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표면적으로만 보면 아주 감동적인 이야기지만 예수님은 여기서 감동적이거나 감동인 이야기를 하려는 게 아닙니다. 요한복음에서 이 향유 여인이야기는 다른 복음서와는 다른 해석을 가집니다. 요한복음에서 이 사건은 ‘감동’에 초점에 맞추어져 있지 않습니다. 엉뚱하게도 ‘영’과 ‘육’의 문제가 대두됩니다.
마26:6-13에, 막14:3-9에, 눅7:36-50에 이 이야기가 나옵니다. 초기 기독교 공동체 안에서 이 야이기는 그만큼 유명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같은 사건을 공동체마다 약간씩 다르게 전합니다. 누가는 새로운 이야기로 구성합니다. 마태나 마가는 유사한 흐름으로 이 이야기를 전합니다. 마태와 마가는 종말에 관한 예고로 향유 여인 이야기를 전합니다. 누가가 새로운 이야기로 전달을 했다는 말은, 이 이야기를 ‘감동적인 행위를 한 여인’에게 초점을 맞추지 않고 ‘예수 대 제자’의 문제로 보았다는 겁니다. 모름지기 제자란 이 여인처럼 이래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은 다르게 이 이야기를 전달합니다. 어떻게 다르냐고요? 12장 9-11을 보세요. 향유를 부은 여인의 이야기를 마르다-마리아-나사로 가족 이야기와 결합을 시키고, 부수적으로 제자중의 한 사람인 가룟 유다의 탐욕스러움을 가미시킵니다.
다시, 앞의 6:63절의 ‘영과 육’의 대립을 연상케 하는 부분입니다. 여인의 행위는 ‘영’이고 가룟 유다의 행실은 ‘육’이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다시 그 앞에 놓인 오병이어의 이야기가 주는 메시지와도 같습니다. 자신이 먹기에도 모자라는 것을 모두가 내놓고 함께 먹으니 오히려 남았다는 사건을 대중들은 사회적으로만 해석을 합니다. 적은 것으로 많은 사람을 먹이니 얼마나 사회적으로 바람직한 것이겠어요?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를 왕으로 옹립하려고 했다는 겁니다. 그러나 예수는 그걸 피해 사라졌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보세요. 세상에는 ‘나쁜 권력’이라는 게 있습니다. 예수 당시 정치적으로는 로마나 종교지도자들의 권력은 나쁜 권력입니다. 그런 나쁜 권력을 제자들은 ‘예수라는 권력’으로 대체하려고 합니다. 즉, 나쁜 권력을 다른 권력으로 극복하려는 것이었지요. 예수님의 제자들, 그리고 빵을 나눠 먹으면서 ‘예수님을 세상의 왕으로 옹립하면 뭔가 달라지겠다’고 생각하는 세상권력의 변화 전략에 대해서 예수님, 요한복음은 비판적입니다. 이건 유대주의적 물신주의 신앙이며 혁명주의적 신앙이기도 합니다. 이것은 무늬만 신앙이었지 본질은 권력의 재편성이었던 것입니다. 이것 때문에 제자들 간에 내분이 생긴 거고, 가룟 유다가 탄생하는 겁니다.
예수님은 이런 일절의 정신과 행동 양식을 ‘육’에 속했다고 말하는 겁니다. 그걸 12장 향유를 부은 여인의 이야기에서 가룟 유다의 얼굴로 재현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보세요. 6장에 나오는 ‘육’에 속한 자들이라 규정된 이들이 파렴치한들입니까? 비싼 향유를 발에 붓는 여인을 향해 ‘가난한 자들’운운하는 가룟 유다의 행실이 그렇게 비난당할 일입니까? 이들은 모두 파렴치한 이들이 아니라 억눌린 이들을 해방해야 한다고 외치는 혁명주의였습니다. 요즘으로 치면 ‘사회봉사와 헌신’의 가치인데 그게 뭐 잘못 된 겁니까? 여인의 개인적인 감정이 공익적 가치보다 우선하지는 않지 않습니까?
자 이런 성서 해석의 전제를 깔고 ‘삯꾼’이 등장합니다.
요1:장12-13이죠.
대중들의 입장에서 앞의 주장들은 굉장한 가치와 설득력을 가졌습니다. 교회로 말하면 ‘양’들은 그런 그들을 믿고 따르지만, 그들의 가르침이 옳다고 받아들이고 그들의 경건함에 의존하지만, 그들은 실상 그들 자신의 양을 생각해서 그러는 건 아니라는 겁니다. 양을 생각하기 보단 다른 가치를 양을 거래하는 자에 불과하다는 겁니다. 이걸 읽을 수 있습니까? 육의 제자들이 사람들의 배부름에 환희를 보내는 것은 그걸 아용해서 혁명의 에너지로 환산하고자 했던 것이라는 겁니다. 가룟 유다가 한 여인의 실존적인 고백을 공익을 위한 비용의 낭비로 해석을 한 것은 그가 실제 공익을 위하는 놈이 아니라 그렇게 하여 ‘자기 주머니를 채우려’는 것이었다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삯꾼’입니다. 요한복음의 예수님은 그게 참을 수 없는 겁니다. 그렇게 처신하는 것은 진정으로 예수를 배반하는 것이었습니다.
오늘날, 교회서건 나라에서건 ‘국민이나 교우를 위한 척’하는 모든 언설이나 행동, 법이나 규칙, 윤리거나 교리가 실제 다른 무엇을 이루어내기 위한 에너지 전환의 전술인지 아닌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삯꾼 목사’가 누군지, ‘참 목자’가 누군지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기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서 말합니다. “나는 참 목자다.” 이게 무슨 말씀인지 이해되어야 여러분은 온전한 기독교 안에, 예수 안에 머무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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