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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요14:1-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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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영봉 목사 |
참고 : | 와싱톤한인교회 http://www.kumcgw.org |
2014년 5월 18일 주일 예배 설교
와싱톤한인교회 김영봉 목사
보게 하소서(Let Me See You)
요한복음(John) 14:1-10
1.
렉셔너리(Lectionary)에 따라 읽은 오늘의 말씀은 장례식에서 가장 자주 읽히는 말씀 중 하나입니다. 여러 가지 면에서 장례식에서 읽기에 안성맞춤인 것처럼 보입니다. 처음 시작하는 대목이 특히 그렇습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아라. (1절)
Do not let your hearts be troubled.
영어 번역에서 알 수 있듯, 직역하자면 "너희의 마음이 흔들리지 않게 하라"가 됩니다. 우리 말의 '근심'은 어떤 상황 때문에 마음이 흔들리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그러니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는 번역은 잘 된 번역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으면 먼저 슬픔이 압도합니다. 그 사람을 더 이상 볼 수 없다는 사실은 큰 아픔이 됩니다. 아픈 이별일수록 더 그렇습니다만, 소위 '호상'(好喪)이라고 부를만한 경우에도 여전히 아픔은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으면 또한 근심도 생깁니다. 노령의 부모님을 잃으면, "어머니 없이 혹은 아버님 없이 허전해서 어쩌나?" 하는 막연한 근심이 생깁니다. 아내 혹은 남편을 잃는 것은 더 큰 근심을 만들어 냅니다. 홀로 살아갈 길이 막막해 보이기 때문입니다. 어린 시절 혹은 젊은 시절에 부모님을 잃는 것은 더할 수 없는 큰 근심의 원인이 됩니다. 어린 자식을 마음에 묻어야 하는 경우에도 그렇습니다.
그러니 이 말씀은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슬퍼하며 근심하는 사람에게 강력한 위로가 됩니다. 왜 근심하지 말라고 합니까? 주님은 이어서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
You believe in God; also believe in me.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을 때 근심하는 이유는 그 사람만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상황에 이르면 다른 것은 생각할 수 없습니다. 잃어버린 것만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다 보면 그것 없이는 살아야 할 이유가 전혀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눈을 돌려 하나님을 보고 또한 당신을 보라고 말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또한 당신을 믿으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믿는다'는 말은 '의지한다' 혹은 '신뢰한다'는 뜻입니다. 사랑한다는 말은 의지한다는 뜻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다는 말은 의지할 대상을 잃었다는 뜻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으면 땅이 꺼진 것 같고 세상이 깜깜해진 것 같이 느껴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런 상황에 처한 사람에게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나를 의지하라고. 아버지 하나님을 의지하라고. 그러면 사랑했던 사람과 헤어져도 여전히 살 이유가 있고 기뻐할 이유가 있음을 알게 될 것이라고.
다음에 이어지는 말씀도 역시 장례식장에 가장 어울립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2
내 아버지의 집에는 있을 곳이 많다. 그렇지 않았다면, 내가 너희가 있을 곳을 마련하러 간다고 너희에게 말했겠느냐? 나는 너희가 있을 곳을 마련하러 간다. 내가 가서 너희가 있을 곳을 마련하면, 다시 와서 너희를 나에게로 데려다가, 내가 있는 곳에 너희도 함께 있게 하겠다. (2-3절)
저는 평균 한 해에 열 번 정도 장례식을 집전합니다. 이제는 전문가가 되었습니다. 그런 과정에서 알게 된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장례식장에서는 모두가 하나님을 믿고 천국을 믿는 것처럼 보입니다. 교회에 전혀 안 다니던 사람도 조사를 할 때면 "어머니, 천국에서 편안히 쉬세요. 곧 다시 뵈어요"라고 말합니다. 유가족을 위로하는 사람들도 달리 할 말이 없으니 "좋은 곳에 가셨을 거예요"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진실로 그렇게 믿고 말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습니다.
주님은 빈말로 이렇게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실제로 그렇게 믿으셨습니다. 하나님이 계시고, 하나님의 나라가 있다는 것을 아셨고, 또한 믿으셨습니다. 이제 곧 당신이 십자가에 달려 죽음을 당할 터인데, 그것은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가는 과정이라고 믿으셨습니다.
여기서 주님은 캐러반 여행을 비유로 삼으십니다. 예수님 당시에 먼 길을 갈 때는 여러 사람이 한 무리를 지어 이동을 했습니다. 야수의 위협과 강도의 위협에서 서로를 보호하려는 것입니다. 일행 중에는 매일 홀로 낙타를 몰고 일행에 앞어서 예정된 숙박지를 향해 달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일행이 하룻 밤 머무를 장소를 물색해 두고는 다시 돌아와 일행을 인도해 갑니다.
주님은 이 비유를 사용하십니다. 십자가에 달려 죽는 것은 제자들보다 앞 서서 하나님의 품으로 가는 것이라고, 가서 제자들이 머물 곳을 마련하려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먼저 가셔서 필요한 모든 것을 준비해 놓고 다시 와서 제자들을 데려가겠다고 하십니다. 그러니 근심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지금은 헤어지지만 다시 만날 것이고, 영원히 함께 거할 집이 하나님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믿는다면, 이 말씀은 죽음의 문턱에 이른 이들에게도 위로가 되며, 사랑하는 사람들을 잃은 사람들에게도 위로가 됩니다. 예수님이 헛 것을 본 것도 아니고 빈말로 위로하는 것도 아니라면, 이 말씀을 믿을 수 있습니다. 비유로 말씀하셔서 정확히 무엇인지 알 수 없지만, 죽음이 끝이 아니며, 이 땅에 지은 집보다 더 영원한 집이 있으며, 그 집에 나를 위한 공간이 마련되어 있음을 믿을 수 있습니다. 그것을 믿으면 큰 위로와 힘이 됩니다.
부모님을 뵈러 한국에 방문할 때면 형제들이 제게 메시지를 보내 옵니다. 방 하나를 따로 치워 놓았으니 언제든지 와서 쉬라고 말입니다. 먼 길을 떠날 때 "이곳에 당신을 위한 방이 마련되어 있습니다"라는 말이 얼마나 큰 위로와 힘이 되는지요! 세상 천지에 하룻밤도 편안히 쉴 방이 없다는 사실은 이 세상을 얼마나 낯설게 느끼게 만드는지요! 하물며 죽음의 문턱 앞에서 갈 곳이 어디인지도 모르고 자신을 위한 방이 준비되어 있는지도 모른다면, 아마도 발길이 떨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하나님을 믿으십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십니까? 그분을 신뢰하고 의지하십니까? 하나님께서 다스리는 영원한 나라가 있음을 믿습니까? 주님께서 미리 그곳에 당신을 위한 방을 마련해 두고 계심을 믿으십니까? 예수 그리스도와 인격적인 관계 안에 들어가지 못하면 그 사실이 믿어지지 않습니다. 부디, 여러분 모두가 "너를 위한 방이 아버지 집에 마련되어 있다"는 음성을 주님으로부터 들으시기 바랍니다.
3.
여기까지만 읽으면, 이 말씀은 장례식에 딱 맞는 말씀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계속 이어지는 말씀을 읽어 보면, 이 말씀의 초점이 죽고 나서 가는 천국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물론, 죽고 나서 가는 천국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말씀을 하십니다.
아버지 집에 가서 방을 마련하고 다시 오겠다고 말씀하시고 나서,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알고 있다."(4절) 앞뒤 정황을 따져 볼 때, 제자들 가운데 주님께서 가시는 길을 알고 있던 사람은 없었습니다.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그 길에 대해 가르침을 주시기 위함이었던 것 같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제자 중 하나인 도마가 묻습니다. "주님, 우리는 주님께서 어디로 가시는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그 길을 알겠습니까?" 다른 제자들의 심정도 같았을 것입니다. 도마는 하나님의 집이 우주 한 공간에 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어디에 그 집이 있는지 그리고 그곳에 어떻게 가는지 알지 못하는데, 어찌 주님은 "너희는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알고 있다"고 말씀하시는지, 도마는 궁금했을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께서 대답하십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거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로 갈 사람이 없다. (6절)
바로 이것이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주고자 하셨던 말씀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해 그리고 그 나라에 이르는 길에 대해 도마와 제자들이 오해하고 있었기에 그것을 수정해 주시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짧은 말씀의 배후에는 다음과 같은 말씀이 숨어 있는 셈입니다.
도마야, 너는 하나님 나라가 저 멀리 어디에 있는 줄로 생각하느냐? 아니다. 하나님 나라는 바로 여기에 있다. 너는 하나님에게 이르는 길을 찾느냐? 하나님이 네 안에 있고, 네가 하나님 안에 있는데 어디서 길을 찾느냐? 하나님을 만나러 어디로 가야 한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네가 선 자리에서 하나님을 보지 못하면 어디에서도 찾지 못한다. 내가 어디로 간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내가 길이다. 나를 믿으면 하나님께 가는 길이 열린다. 내가 진리다. 나를 믿으면 진리를 발견한다. 내가 생명이다. 나를 얻으면 생명을 얻는다. 나를 떠나서는 하나님께 이르는 길을 찾지 못한다.
도마와 제자들은 앞에서 주님께서 하신 말씀을 오해했습니다. '하나님의 집'에 대한 말씀을 죽어서 가는, '저 멀리 있는 천국'에 대한 말씀으로 오해했습니다. 이제 그 오해가 드러났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아버지의 집'은 '하늘의 궁전'이 아닙니다. 하나님 자신을 말합니다. 주님께서 아버지의 집으로 가신다는 말은 하나님 아버지와 친밀한 관계 안으로 들어간다는 뜻입니다. 다시 오셔서 우리를 아버지 집으로 데리고 가신다는 말은 그와 같은 친밀한 관계로 우리를 인도하실 것이라는 뜻입니다.
주님께서는 계속하여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나를 알았더라면 내 아버지도 알았을 것이다. 이제 너희는 내 아버지를 알고 있으며, 그분을 이미 보았다. (7절)
여기서 다시금 '알다'라는 말이 나옵니다. 인격적으로 사귀어 아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사귀어 안다면,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을 알게 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알기 위해서 허공을 살필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주목해야 합니다. 그분이 곧 길입니다. 진리이며 생명입니다. 그분을 만나면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 안에서 진리를 얻고 생명을 얻습니다.
곁에서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또 다른 제자 빌립이 끼어 들어 말합니다.
주님, 우리에게 아버지를 보여 주십시오. 그러면 좋겠습니다. (8절)
"좋겠습니다"라는 말은 정확하게 번역하자면 "만족하겠습니다"가 됩니다. 주님께서 조금 전에 도마에게 하신 말씀을 아직도 알아듣지 못하고 다시금 하나님 아버지를 보게 해 달라고 부탁합니다. 그러자 주님께서 대답하십니다.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사람은 아버지를 보았다. 그런데 네가 어찌하여 "우리에게 아버지를 보여 주십시오" 하고 말하느냐?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네가 믿지 않느냐? 내가 너희에게 하는 말은 내 마음대로 하는 것이 아니다.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면서 자기의 일을 하신다. (9-10절)
4.
인간에게는 누구나 빌립이 가지고 있던 열망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보고 싶은 열망, 말입니다. 이 땅에서 보아온 것과는 다른 세상을 보고 싶어하는 열망, 말입니다. 신문에서 읽는 세상 말고, 뭔가 영원하고 참되고 거룩한 세상을 보고 싶어합니다. 그런 것이 존재한다면 하나님에게서밖에는 찾을 곳이 없을 것입니다.
그 옛날 모세도 하나님께 그런 열망을 드러낸 적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유랑하는 것에 지쳐 있을 때, 하나님께 "저에게 주님의 영광을 보여 주십시오"(출 33:18)라고 청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요청을 거절하십니다. 주님의 영광을 보고서 살아남을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 대신 하나님은 당신의 뒷모습만 보게 해 주겠다고 하십니다. 이것도 역시 비유입니다. '하나님의 등'을 본다는 말은 하나님의 임재를 희미하게, 단편적으로, 부분적으로 본다는 뜻입니다. 인간으로서는 그렇게 볼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다윗도 시편을 통해 그 같은 열망을 자주 표현합니다. 그 중 하나입니다.
하나님,
주님은 나의 하나님입니다.
내가 주님을 애타게 찾습니다.
물기 없는 땅,
메마르고 황폐한 땅에서
내 영혼이 주님을 찾아 목이 마르고,
이 몸도 주님을 애타게 그리워합니다. (시 63:1)
인간은 하나님에 의해 지어진 존재이기에 어린 아이가 엄마를 떠나서는 살 수 없듯이 우리의 영원한 모태인 하나님에 대한 뿌리 깊은 갈망이 있습니다. 하나님 없이 사는 삶은 마치 물기 없는 땅, 메마르고 황폐한 땅에서 사는 것과 같습니다. 처음에는 하나님 없이도 살 수 있을 것 같았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갈증이 깊어 갑니다. 그 갈증의 끝에서 우리는 부르짖습니다.
주님, 우리에게 아버지를 보여 주십시오. 그러면 만족하겠습니다.
Lord, show me the Father and that will be enough for us.
이 갈증과 이 염원이 저에게도 있고 여러분에게도 있습니다. 누구에게는 그것이 강하고 누구에게는 약할 뿐, 누구에게나 다 있습니다. C. S. Lewis는 그런 갈증과 염원이 있다는 사실 자체가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증거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인간은 경험해 본 것이 아니면 염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에게서 나왔기에
하나님이 아니고는 채워지지 않는 갈증과 염원이 있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이 갈증을 해결하고 이 염원을 이룰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볼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있을까요? 하나님을 떠나 기갈에 지친 영혼이 어떻게 하면 다시금 영혼의 모태에 돌아가 안식과 위로와 힘을 얻을 수 있을까요?
주님은 오늘 말씀을 통해 대답해 주십니다. 그 열망을 지금 여기서 채울 수 있다고 하십니다. 죽기까지 기다리지 않아도 된다고 하십니다. 멀리 가야 하는 것도 아니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선 이 자리에서 하나님을 볼 수 있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는 길이 있다고 하십니다. 당신을 믿으면 그 길이 열린다고 하십니다.
"내 아버지 집에 있을 곳이 많다"는 말은 "아버지의 품이 넓다"는 뜻입니다. 그분의 품은 이 세상 모든 사람을 끌어 안고도 남습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심으로써 아버지 하나님에게 돌아갈 길이 활짝 열렸고, 또한 품이 넉넉히 마련되어 있습니다. 바울 사도가 말한 것처럼, 우리가 육신의 한계를 벗어나면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하나님을 뵐 날이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곳에 사는 동안에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보고 그분의 영광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을 보면, 빌립의 말대로 진정한 만족을 얻습니다. 그 무엇으로도 채워지지 않던 영혼의 갈증이 채워집니다.
그 갈증이 채워지면 흔들리고 요동치던 마음이 안정을 찾습니다. 인생의 풍파가 몰아쳐도 마음은 고요합니다. 그 평안의 힘으로 우리는 인생의 파고를 잠재울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주어진 길을 견고하게 갈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맡겨진 사명을 신실하게 감당할 수 있습니다. 마침내 주님의 나라에 이르러 나를 위해 마련된 방에 영원한 둥지를 틀 때까지 이 땅에서 주님과 함께 동행하며 주님의 뜻을 위해 살아가게 됩니다.
5.
오늘의 말씀을 묵상하고 준비하는 과정에 찬양이 하나 생각났습니다. "Open the Eyes of My Heart"(내 마음의 눈을 뜨게 하소서)라는 노래가 그것입니다. 제가 가장 좋아하는 찬양 중 하나입니다.
최근에 어느 교우께서 보내 주신 영상에서 이 찬양을 감명깊게 들었습니다. 그 찬양을 부른 사람의 이름은 크리스토퍼 더플리(Christopher Duffley)라는, 올 해 열 두 살의 소년입니다.
크리스토퍼는 코케인 중독에 빠진 엄마에게서 6개월만에 미숙아로 태어났습니다. 태어났을 때 1파운드 12온스였다고 합니다. 그의 장기에는 엄마에게서 전해 받은 코케인 성분이 있었고, 살 가망이 없었습니다. 다행히 그는 수 많은 고비를 넘기고 살아 남았습니다만, 시력을 잃었고 자폐증까지 얻었습니다. 양부모로부터 버림받은 크리스토퍼는 forster care에 맡겨졌고, 두 살 때 독실한 믿음의 사람이었던 고모에게 입양이 됩니다. 고모는 온 가족과 함께 정성껏 그를 키웁니다.
고모는 크리스토퍼에게 절대 음감(perfect pitch)이 있음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노래를 가르칩니다. 그 과정에서 음악적인 재능이 뛰어난 것을 발견합니다. 그의 노래 실력은 조금씩 알려져 나갔고, 이제는 미국 전역으로 불려다니며 찬양으로 복음을 전하는 사역자가 되었습니다. www.christopherduffley.com에 들어가면 그의 이야기와 활동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제가 본 영상은 열 살 때 어느 교회에서 찬양한 실황입니다. 저는 이 영상을 보고 큰 감동과 충격을 받았습니다. 앞을 보지 못하고 자폐증에 사로잡힌 아이가 무대에서 온 힘을 다해 "내 눈을 열어 주셔서 주님을 보게 하소서"라고 노래하는데, 그 호소가 너무도 절절하게 들렸습니다. 그 영상을 보는 동안 마음 속으로 "주님, 저 아이의 마음의 눈을 뜨게 하셔서 정말 주님을 보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게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저 자신에게 대해서도 그 기도를 올리게 되었습니다. 크리스토퍼에게 주님 보는 것이 절대적이고 절박한 문제인 것처럼, 그것은 나에게도 절대적이고 절박한 문제라고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그 영상을 보여 드리려 합니다. 부디, 그의 찬양을 보고 듣는 동안에 여러분에게도 크리스토퍼의 그 열망이 전염되기를 기도합니다. 그 열망으로 더욱 주님을 찾게 되기를 바랍니다.
(영상)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보셨습니까? 하나님을 만나셨습니까? 그분의 영광의 뒷모습을 보신 적이 있습니까? 어찌 보면, 크리스토퍼는 육신의 눈은 멀었지만 마음의 눈은 뜨고 사는 사람인지 모릅니다. 육신의 눈으로 보는 세계보다 더 기가막힌 세상을 보고 살아갈지 모릅니다. 반면, 육신의 눈으로만 세상을 보면서 그것을 전부로 알고 사는 사람은 어찌 보면 크리스토퍼만 못한 삶을 살고 있는 것일지 모릅니다.
주님께서는 안식일에 나면서부터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을 보게 해 주셨습니다. 그것을 보고는 바리새파 사람들이 시비를 걸어 옵니다.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될 일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 때 주님께서 "나는 이 세상을 심판하러 왔다. 못 보는 사람은 보게 하고, 보는 사람은 못 보게 하려는 것이다"(요 9:39)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말을 듣고 바리새파 사람들이 "우리도 눈이 먼 사람이란 말이요?"(40절)라고 되묻습니다. 그러자 주님은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너희가 눈이 먼 사람들이라면, 도리어 죄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지금 본다고 말하니, 너희의 죄가 그대로 남아 있다. (41절)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육신의 눈만이 아니라 마음의 눈까지 뜨고 사십니까? 하나님의 임재를 보고 살아가십니까? 때때로 하나님의 영광의 뒷모습을 보십니까? 그것을 보고자 하는 간절한 열망이 있습니까? 하나님이 아니고는 채워지지 않는 갈증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보기 위해 힘쓰고 있습니까? 크리스토퍼처럼 그렇게 간절하게 "내 마음의 눈을 열어 주소서"라고 간구한 적이 있습니까?
부디, 늘 주님과 함께 동행하심으로 성령께서 여러분의 마음의 눈을 열어 주셔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시기를 기도합니다. 마음의 눈을 뜨지 못하면 육안에 들어오는 모든 것이 우리의 마음을 흔들 것입니다. 반면, 마음의 눈을 떠서 하나님을 보면, 육안에 들어오는 어떤 것도 우리 마음을 흔들지 못할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세상이 주지 못할 평안'입니다. 이 평안의 능력이 저와 여러분에게 넘치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오, 주님
저희의 마음의 눈을 뜨게 하소서.
우리가 하나님 품에 안겨 있음을 보게 하시고
우리가 하나님 나라 안에 있음을 알게 하소서.
그 무엇도 우리를 흔들 수 없음을
알게 하시고
보게 하소서.
아멘.
설교를 올릴 때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 주세요. 이단 자료는 통보없이 즉시 삭제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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