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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시8: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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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영봉 목사 |
참고 : | 와싱톤한인교회 http://www.kumcgw.org |
2014년 6월 15일 주일 설교
와싱톤한인교회 김영봉 목사
하늘 아빠(Heavenly Daddy)
시편(Psalms) 8:1-9
1.
Happy Father's Day! 이 세상의 모든 아버지들에게 그리고 아버지를 둔 모든 이들에게 주님의 은총이 함께 하기를 기도합니다. 특별히, 보고 싶어도 볼 수 없어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이들 모두에게 하늘의 위로가 있기를 기도합니다. 또한 아버지의 역할을 감당하느라 고군분투하고 있는 이들에게 주님께서 고갈되지 않는 영적 능력을 공급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오늘의 말씀을 준비하는 중에 '아버지상'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살아온 반세기 동안에도 아버지상에 많은 변화가 있었습니다. 혹시나 이 문제에 대해 연구한 글이 있는가 하여 인터넷 검색을 하다가 흥미로운 글을 발견했습니다. 2012년 4월 30일자 <농민신문>에 기고된 손수정 기자의 글입니다. 제목은 '드라마로 본 아버지상 변천사'입니다.
기자는 TV가 일반인들에게 보급된 이후로 크게 인기를 끌었던 드라마들을 골라 그 드라마에 반영된 아버지상을 살펴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의미있고 흥미로운 변화가 발견되었습니다.
1970년대에 최초로 인기를 끌었던 드라마가 '아씨'였다고 합니다. 이 때 저는 TV 없는 집에서 살았기에 직접 보지는
못했습니다. 이 드라마에서 아버지는 완고하고 이기적이고 무책임한 태도로 아내와 자식들을 생고생시키는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70년대 이전에 살았던 아버지들의 일반적인 모습이었습니다.
"잘 살아 보세"라는 노래가 동네 마다 울려 퍼지고 '새마을운동'과 함께 산업화가 이루어지던 70년대 이후는 아버지들이 열심히 일하던 시대입니다. 이 시기에 인기를 끈 '꽃피는 팔도강산' 혹은 '전원일기'같은 드라마에서 아버지는 교과서처럼 바르게 살고 가족과 사회의 버팀목이 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서 직장에서 온갖 어려움을 당하면서도 아버지들은 가정에 돌아와서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말 없이 신문을 읽고 있었습니다.
기자에 따르면, 1990년도를 전후하여 아버지상에 급격한 변화가 생깁니다. 손 대는 일마다 실패하는 아버지, 유흥이나 도박에 빠진 아버지, 명퇴를 당하여 혼자 바깥으로 떠도는 아버지의 모습이 주를 이루었습니다. 사회에서 밀리고 가정에서 무시 당하는 아버지들이 많았습니다. 때로는 아버지가 드라마에 등장하지도 않습니다. 과로사 혹은 사고사로 세상을 떠났거나 이혼 당한 것입니다. 딸과 어머니가 삶을 헤쳐나가는 드라마도 인기를 끈 것이 이 시기였다고 합니다. 2000년도를 넘어서면서 아버지의 존재감은 바닦을 칩니다. <아버지처럼 살기 싫었어> 라는 제목까지 있었다니, 알만 합니다. 가족들의 버팀목이 아니라 처치곤란의 짐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로부터 10여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새로운 아버지상이 자리를 잡고 있다는 것이 기자의 평가입니다. 분수와 원칙을 아는 아버지, 존재감이 뚜렷하지는 않지만 보이지 않게 가족들의 힘이 되어 주는 아버지, 따뜻하고 자상하게 살피는 아버지의 모습이 자주 그려진다고 합니다. 때로 무력하고 실패하는 아버지 모습도 그려지지만, 가족들은 전처럼 무시하고 왕따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 아버지를 위로하고 보살핍니다. 여러 번의 우여곡절을 거쳐서 이 시대에 맞는 바람직한 아버지상을 찾아가고 있다는 뜻입니다.
2.
이 기사를 읽고 몇 가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내 아버지는 어떤 분이었나?"라는 생각 그리고 "나는 어떤 아버지였는가?"라는 생각이 제일 먼저 들었습니다. 여러분도 그랬을 것입니다. 혹시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아픈 것 뿐이어서 기억하기도 싫은 분들이 계시다면, 하나님께서 위로와 치유를 허락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혹시 아버지로서 자식들에게 잘못한 것이 너무 많아 마음 아픈 분들이 계시다면, 더 늦기 전에 자녀들에게 용서를 구하고 눈물 겨운 사랑의 기억을 만들만한 능력을 하늘로부터 얻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그런 질문들과 함께 든 또 하나의 생각이 있었습니다. "우리에게는 이상적인 아버지상이 없었구나!"라는 자각이었습니다.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아버지가 무엇이며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 감도 잡지 못한 상태에서 아버지가 되어 버립니다. 그러니 자신이 경험한 아버지가 모델이 됩니다. 아버지에 대한 경험이 긍정적이었던 사람은 자신의 아버지처럼 말하고 행동합니다. 반대로, 아버지에 대한 경험이 부정적이었던 사람은 아버지와는 정반대로 말하고 행동합니다. 그러는 과정에서 자녀들은 상처를 받고 고통을 받습니다.
생각이 여기에 이르면, "우리가 모델로 삼을만한 이상적인 아버지상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가?"라고 묻게 됩니다.
저는 이 질문을 마음에 품고 렉셔너리가 정한 이번 주 성경 본문들을 읽어 보았습니다. 교회력에 따르면, 오늘은 '삼위일체주일'(the Trinity Sunday)입니다. '예수님의 승천 주일'(the Ascension Sunday), '성령강림 주일'(the Pentecost)에 이어 '삼위일체주일'이 오는 것은 자연스러운 순서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을 제대로 알면 창조주 하나님을 알게 되고, 그렇게 되면 성삼위 하나님(God the Trinity)에 대해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오늘 읽도록 정해진 성서일과 중에서 저는 이미 읽어드린 시편 8편에 머물렀습니다. 그 본문을 읽는 '하늘 아버지'(Heavenly Father)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찾는 이상적인 아버지상이 하늘 아버지에게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시편은 다윗이 지은 시입니다. 단언할 수는 없지만, 목동으로 일할 때 이 시편을 지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지난 주간에 목회자들과 직원들이 모여 예배 드리며 이 본문을 읽고 나눔을 가졌는데, 어느 목사님이 그러십니다. 다윗은 분명히 이 시를 밤에 지었을 것이라고. 그 증거가3절에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손수 만드신 저 큰 하늘과
주님께서 친히 달아 놓으신
저 달과 별들을 내가 봅니다.
증거가 보입니까? 달과 별은 있는데 해가 없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이 시는 눈 감고 상상하여 지은 것이 아니라, 실제로 밤에 어떤 광경을 보고 지은 것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래서 다윗이 목동으로 일할 때 이 시를 지었을 것이라고 추측하는 것입니다. 그는 한 밤 중에 양들을 모두 동굴 안으로 몰아 넣고 동굴 입구에서 모닥불을 피워 놓고 불침번을 서면서 꾸벅 꾸벅 졸다가 어느 순간엔가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 보았을 것입니다. 순간, 그는 숨을 쉴 수조차 없는 엄청난 감격에 압도됩니다
지난 가을, 저는 교우들과 함께 요르단 남부에 있는 '와디 럼'(Wadi Rum)이라는 사막에서 하룻 밤을 지낸 적이 있습니다. 우리 일행은 하늘에서 펼쳐지는 '소리 없는 불꽃놀이'에 한 동안 넋을 잃었습니다. 하늘 가득히 펼쳐진 은하수를 본 것이 얼마만이었는지요! 어릴 적 고향 마당에서 보았던 그 모습이었습니다. 그 때, 저는 이 시편을 교우들에게 읽어 주었습니다. 구절 구절, 단어 하나 하나가 얼마나 절절하게 느껴지던지요!
그 모든 것이 저절로 생긴 것이라고 믿는 사람은 그냥 감탄만 하고 말겠지만, 그 모든 것 배후에 창조주가 계시다고 믿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그분을 생각하고 찬양하게 되겠지요. 다윗은 그 '소리 없는 불꽃 놀이'에 활짝 깨어나 그 모든 것을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을 생각합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노래하지요.
주 우리 하나님,
주님의 이름이 온 땅에서
어찌 그리 위엄이 넘치는지요?
저 하늘 높이까지
주님의 위엄 가득합니다. (1절)
3.
이 시편을 가만히 살펴 보면, 다윗이 놀라고 감격한 이유가 그 어마어마한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위대하심 때문만은 아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다윗으로 하여금 눈물이 핑 돌게 할만큼 감동하게 한 것은 하나님의 위엄이 아니라 다른 데 있었습니다. 그 어마어마한 분이 우주의 티끌만도 못한 자신을 아시고 사랑하시고 돌보신다는 사실 때문이었습니다. 4절 이하에 그 고백이 표현되어 있습니다.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님께서 이렇게까지
생각하여 주시며,
사람의 아들이 무엇이기에
주님께서 이렇게까지
돌보아 주십니까?
주님께서는 그를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그에게 존귀하고 영화로운 왕관을
씌워 주셨습니다.
주님께서 손수 지으신 만물을
다스리게 하시고,
모든 것을
그의 발 아래에 두셨습니다. (4-6절)
저에게도 그런 경험이 있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의 위대하심에 눈 뜰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의 작음에 눈 뜹니다. '작음'이라고 표현했습니다만, 창조자 하나님의 위대하심에 비하면 '작음'이라는 단어가 성에 차지 않습니다. '없음'이라고 해야 옳을 것입니다. 그분에 비하면, 나의 존재는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그 위대하신 하나님이 이슬처럼 맺혔다가 사라지는 것 같은 우리 인생을 기억하시고 알아주시며 돌보아 주신다니 믿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누구신지 제대로 알지 못할 때는 그 사실이 그리 놀랍지도 않고 때로는 당연해 보이기도 했습니다. 때로는 우리에게 당연히 그럴 자격이 있는 것처럼 말하고 행동하기도 했습니다.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는 노래를 부르면서 우리 자신에게 진정으로 사랑받을 가치가 있는 줄로 착각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에게 제대로 눈 뜨고 나니 그게 아님을 알겠습니다. 내가 나를 생각해도 의미 없고 가치 없습니다. 하나님의 위엄에 압도되자 다윗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얼마나 작은 존재인지를 깨닫습니다.
그 순간, 그는 그 동안 간직해 왔던 믿음에 대해 질문하게 됩니다. 그에게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돌보시고 지켜 주셨다는 부인할 수 없는 증거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그 전에는 그 사실이 그저 감사하기만 했는데, 하나님이 얼마나 위대하신 분인지를 알고 나니, 왜 하나님이 자신처럼 하잘 것 없는 존재를 돌보시고 지키시고 사랑하시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우주 안에서 지구는 미세한 먼지와 같고, 지구 전체에 비하면 나라는 존재는 또 다시 미세먼지와 같습니다. 그렇다면 나라는 존재는 하나님께 얼마나 작은 존재이겠습니까? 그런데 그 하나님이 나를 알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나를 돌보신다는 것입니다.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게 믿어집니까? 안 믿어집니다. 그렇게 믿기에는 하나님은 너무도 크고 나는 너무도 작습니다. 그렇게 믿기에는 그분은 너무도 거룩하고 나는 너무도 부정합니다. 그런 분이 그런 나를 아시고 사랑하실 리가 도무지 없어 보입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이 나를 돌보시고 사랑하신다는, 부인하지 못할 증거가 있으니 어쩝니까? 다윗은 한 밤 중에 은하수 아래에서 그 사실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 사실을 알고는 하나님의 불가항력적인 사랑 앞에서 무너진 것입니다.
지난 주 목회자와 직원들이 드리는 예배에서 첫 아기의 출산을 준비하고 있는 전도사님이 그러십니다. 요즈음 아내와 자신의 최고의 관심사는 태어날 아이에게 필요한 것을 하나도 빠짐 없이 준비하는 것이라고. 그런 상황에서 이 시편을 읽으니, "아, 하나님도 이렇게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세심하게 준비하셨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합니다. 아직 얼굴도 보지 못한 아이를 위해 그렇게 노력하는 이유는 자녀를 향한 부모의 무조건적인 사랑 때문입니다. 그 사랑을 다윗은 밤 하늘 아래에서 자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마지막 절에서 다시 한 번 고백합니다.
주 우리의 하나님,
주님의 이름이 온 땅에서
어찌 그리 위엄이 넘치는지요? (9절)
아, 이제야 알겠습니다. 다윗이 여기서 하나님의 위엄과 영광을 찬양하는 이유는 그분이 크고 위대하고 영광스럽기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다윗이 하나님을 이렇게 높이는 이유는 그분의 섬세하고 자비롭고 은혜로운 사랑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그 사랑을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사랑하시는 분이 어떤 분인지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가슴 벅찬 감동으로 노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4.
이 하나님, 온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 그 위엄과 영광과 위대하심을 감히 상상할 수 없는 이 하나님을 우리는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우리의 주님 예수께서는 심지어 '아버지'가 아니라 '아바'라고 부르라 하셨습니다. 아람어 '아바'는 우리 말의 '아빠' 혹은 영어의 Daddy와 같은 말입니다. 아버지와 자녀 사이에 사랑의 관계가 만들어져야만 부를 수 있는 이름입니다. 그러므로 창조주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르라는 주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여 알라는 뜻입니다.
바로 여기에 좋은 아버지가 되는 길이 있습니다. 온 우주의 창조자이신 하나님을 만나 그분을 '하늘 아빠'라고 부르며 살아가는 관계에 들어가는 것, 바로 그것이 좋은 아버지가 되는 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바로 그 하나님을 만나는 길입니다. 십자가의 은혜 안에서 우리는 창조주 하나님을 '하늘 아빠'라고 부르며 살아갑니다. 그렇게 매일 하나님과 사귀며 살다 보면, 우리는 베드로 사도가 말한대로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는 사람"(벧후 1:4)이 됩니다. 하나님을 사귀어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할 때 일어나는 결과를,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열성을 다하여 여러분의 믿음에 덕을 더하고, 덕에 지식을 더하고, 지식에 절제를 더하고, 절제에 인내를 더하고, 인내에 경건을 더하고, 경건에 성도간의 우애를 더하고, 신도간의 우애에 사랑을 더하도록 하십시오. (벧후 1:5-7)
창조주 하나님을 '하늘 아빠'라고 부르는 사람은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 성장하고 성숙합니다. 부부가 서로 사귀어 살면 서로 닮게 되어 있습니다. 학생이 선생을 좋아하고 사귀면 저절로 선생을 닮게 되어 있습니다. 자식이 아버지를 사랑하고 존경하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아버지를 닮아가고 있음을 발견합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그런데,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는 얼마나 더 그렇겠습니까?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 믿음과 덕과 지식과 절제와 인내와 경건과 사랑에 있어서 부단히 자라간다면, 얼마나 좋은 아버지가 되겠습니까?
그러므로 한 사람의 아버지로서 혹은 아버지를 존경하며 사랑하는 아들로서 모든 아버지들에게 권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창조주 하나님을 만나 사귀시어 '하늘 아빠'라고 부를 수 있도록 자라가시기 바랍니다. 저의 경험으로 분명히 말씀 드릴 수 있습니다. 자식이 아버지를 존경하게 되는 가장 중요한 요인은 인격입니다. 끊임없이 인격이 성숙해 가는 과정을 보는 것은 자녀에게는 더 없는 기쁨이요 자랑입니다. 아버지를 존경하고 아버지처럼 살고 싶은 마음이 들게 합니다.
자식이 커갈수록 작아지는 아버지들이 대부분입니다. 인격적인 성장이 멈추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럴 때 아버지는 더 이상 존경과 신뢰의 대상이 되지 못합니다. 오히려 측은히 여김을 받습니다. 반면, 나이가 들어갈수록 인격과 인품이 더 깊어지는 분들이 있습니다. 모든 자녀들은 그런 아버지를 보고 싶어합니다. 그것은 철학만으로도 안 되고 학문으로는 더 더욱 안 됩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에 참여하여 자라는 것이 유일한 길입니다.
영적인 성장은 교회 일에 열심을 다하는 것으로는 안 됩니다. 종교적인 형식만으로도 안 됩니다. 그런 것들이 필요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런 것들을 통해서 정작 얻어야 할 것은 창조주 하나님을 알고 사귀고 닮아가는 것입니다. 영적 성장이 없다면 교회에 열심히 다니는 것 혹은 종교적인 형식은 오히려 위선의 냄새만 진하게 만듭니다. 영적 성장 없이 종교적인 형식만 무성할 경우, 자녀들은 존경하는 것이 아니라 외면해 버립니다.
5.
요즈음 한국에서 기독교가 한 없이 추락하고 있습니다. 세월호 사건의 주범이 개신교와 관련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들을 이단이라고 하지만, 세상 사람들은 한 통속이라고 생각합니다. 세월호 사건이 터진 후에 일부 대형 교회 목사님들이 망언에 가까운 말들을 생각 없이 쏟아 냈습니다. 요즈음은 한국에서 교회 브랜드 파워 1위인 어느 교회의 장로님이 총리로 지명되었는데, 그가 평소에 한 강연과 글이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그 모든 것이 한 개인의 양식의 문제가 아니라 신앙의 문제로 부각되고 있습니다. 개신교회에는 모두 그런 사람들만 있고 그런 사람들만 키워내는 것처럼 오해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그로 인해 기독교는 끝을 알 수 없는 추락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내 사랑하는 교회가 이 지경이 된 것을 보면서 참담함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저는 목사라서가 아니라 한 개인으로서 기독교 복음을 믿게 된 것을 가장 감사한 일로 여기고 있고, 그 복음을 개신교를 통해 받았다는 사실에도 감사하게 느껴왔습니다. 신학을 공부해 보니, 개신교 신학과 신앙 전통이 성서에 가장 가깝습니다. 게다가, 제가 태어나고 자란 감리교회를 사랑합니다. 그런데 제가 사랑하는 교회가 조롱당하고 있습니다. 이미 교회에 다니고 있는 사람들조차 교회를 떠나고 싶어할 정도로 문제가 심각합니다.
왜 이 지경이 되었을까요? 거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만, 가장 큰 이유는 지난 세월 동안 신앙의 본질을 외면한 우리의 과실에 있습니다. 교회는 크게 키웠으나,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도록 이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교회에는 열심히 다녔으나,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는 일에는 게을렀기 때문입니다. 신앙 직분은 커졌지만, 그에 걸맞는 영적인 성장은 없었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능력으로 성공했지만, 믿음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는 것에는 관심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개신교와 개신교인이 존경의 대상이 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가 이와 같은 상황에 처한 것이 참담하기는 하지만, 어찌 보면 교회가 새로워질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일지도 모릅니다. 지금의 상황에서 하나님은 우리 모두에게 믿음의 본질로 돌아가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모든 허울과 욕망과 형식을 내려 놓고 창조주 하나님 앞에 겸손히 무릎 꿇고 십자가의 은혜를 힘 입어 그분에게 '하늘 아빠'라고 부르는 참된 영적 관계 안으로 들어오라고 부르시는 것 같습니다. 그것에만, 오직 그것에만 희망이 있습니다. 그런 관계 안에서 머물러 살아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할 때 비로소 세상은 우리를 다시 보기 시작할 것입니다.
이 일이 가정 안에서 먼저 일어나야 합니다. 아버지 된 사람들이 먼저 해야 합니다. 그것은 아버지들 자신들에게도 필요한 일이지만, 자녀들이 가장 바라는 일입니다. 앞에서도 보았지만, 오늘의 아버지들이 많이 부드러워졌고 자상해졌고 사랑이 많아졌습니다. 하지만 자녀들은 아버지에게서 자비와 사랑과 애정도 원하지만 덕과 인격과 성품을 보고 싶어합니다. 언제나 한 걸음 앞서 가면서 삶의 길잡이가 되어 주고 영감의 원천이 되어 주는 아버지를 보고 싶어합니다.
돈 많이 벌어서 부족함 없이 살게 해 주는 것이 아버지의 책임이라고 오해하지 말아야 합니다. 요즈음의 세상 풍조는 그렇게 착각하게 만듭니다. 철 없는 자녀들은 그것을 좋아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제대로 철이 들었다면 존경하고 의지할만한 아버지를 구합니다. 원칙도 없고 철학도 없이 큰 소리로 윽박지르고 고집이나 피우고 자기 생각대로 밀어부치는 아버지가 아니라, 말 없이 큰 산이 되어 주는 아버지를 보고 싶어합니다. 이런 아버지가 요즈음은 보기 드뭅니다. 멸종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얼마 전, 한국에서 지방 선거가 있었습니다. 이 때, 서울 지역 교육감 후보로 나섰던 두 아버지가 화제가 되었습니다. 공교롭게도 두 사람 모두 개신교인입니다. 한 사람의 딸은 "나의 아버지같은 사람이 교육감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글을 인터넷에 올려서 여론 조사 1위를 달리고 있던 아버지를 선거에서 떨어지게 만들었습니다. 반면, 또 한 사람의 아들은 "나의 아버지가 이런 분입니다. 나의 아버지야말로 진정한 교육자입니다"라는 글을 인터넷에 올려 후보 중 가장 지지율이 낮았던 아버지가 교육감으로 당선되게 하는데 일조를 했습니다. 아버지 된 사람들에게는 깊이 생각하게 만들어 주는 사건이었습니다.
자녀에게 신뢰와 존경을 받으며 자녀의 삶에 영감의 원천과 삶의 길잡이가 되어 주는 아버지, 어떻게 하면 그런 아버지가 될 수 있을까요? 다윗처럼 창조주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에 눈 뜨는 것, 그리고 십자가의 공로를 힘 잆어 그 하나님 앞에 나아가 '하늘 아빠'라고 부르며 사귀는 것, 그리하여 성령의 은총으로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여 부단히 자라는 것, 바로 여기에 길이 있습니다. 그와 같은 영적 성장이 지속될 때, 자녀들은 아버지들을 보면서 제 길을 찾고 어렵고 힘들 때 의지할 언덕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믿는 이들이 가정 안에서부터 존경과 신뢰를 회복해야만 사회적으로도 그런 변화가 일어날 것입니다.
6.
오늘의 말씀은 아버지들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하늘 아빠'는 남자든 여자든, 청년이든 노인이든, 모두 당신을 만나고 사귀고 닮아가기를 기대하십니다. 그리하여 그분의 성품에 참여하기를 원하십니다. 부단히 영적으로 성장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의 '하늘 아빠'는 당신이 주시는 능력으로 성공하기를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인격에서 있어서 성장하기를 원하십니다. 자식의 말과 행동을 통해 그 아버지가 어떤 사람인지 드러나듯, 우리의 말과 행실을 통해 우리의 '하늘 아빠'가 어떤 분인지를 드러내기 원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부디, 저와 여러분, 우리 모두가 창조주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르는 관계 안에 늘 머물러 살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그렇게, 늘 하나님과 사귀어 살아감으로 '하늘 아빠'를 닮아가고, 그분처럼 거룩하고 의롭고 참되게, 그리고 자비롭고 친절하고 은혜롭게 모든 이들을 섬기는 삶을 살기 바랍니다. 그렇게 할 때 아버지는 좋은 아버지가 되고, 어머니는 좋은 어머니가 되며, 자식은 좋은 자식이 될 것입니다. 그럴 때, 가정에서 아버지와 어머니의 권위가 회복될 것이며, 그렇게 사는 사람들이 많아질 때 우리 사회는 교회를 다시 신뢰하게 되고 믿는 사람들을 존경하게 되며, 그럴 때 비로소 우리가 전하는 복음에 귀 기우리게 될 것입니다. 이같은 은혜가 저와 여러분,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하늘 아빠,
저희로
아빠의 위대하심에 눈 뜨게 하소서.
하늘 아빠,
저희로
아빠의 세밀한 사랑을 경험하게 하소서.
그리하여
하늘 아빠를 닮아가고
하늘 아빠처럼 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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