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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하심은...

마태복음 류공석 목사............... 조회 수 667 추천 수 0 2015.08.14 16:3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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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마7:13-14 
설교자 : 류공석 목사 
참고 : 텔아비브욥바교회 http://telavivchurch.org (이스라엘)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하심은...
2010년 10월 16일(토) 텔아비브 욥바교회
본문: 마태복음 7:13-14

  지난 주중에 전 세계적인 뉴스가 있었다. 아주 감동적이고 기적적인 드라마가 펼쳐졌다. 칠레의 광산 700여 미터 지하에 갇혀 있던 33명의 광부들이 69일 만에 구조된 사건이었다. 8월 5일에 광산의 갱도가 붕괴되면서 33명의 광부들이 고립되었는데, 17일 만에 이들이 살아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그 후 이들을 구출하기 위해 칠레 정부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서 협조를 했다. 매몰된 사건 현장은 ‘희망 캠프’로 불려 졌고 이들을 살리기 위한 최선을 노력이 진행되었다. 그래서 69일 만에 총 22시간에 걸쳐 33명이 모두 무사히 구조될 수 있었다.

  그런데 이들을 구조한 것은 특수캡슐이었는데, 직경 54cm 정도로 한 사람이 들어갈 수 있는 캡슐이었다. 위에서부터 이들이 있는 곳까지 수직으로 터널을 파고 그 터널에 이 특수캡슐을 넣어 한 사람씩 구조해낸 것이다. 그래서 이 작전이 결정되었을 때 광부들 중에 비만한 사람들에게는 살을 뺄 것을 주문했고, 구조 전까지 지름 12cm의 작은 통로로 최소한의 음식이 공급되었기 때문에 저절로 살이 빠졌다고 한다. 말이 69일이지 두 달이 넘는 결코 짧지 않은 기간 동안 공포와 두려움이 있었고, 내부의 갈등도 많았지만 이들은 구조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 버텼고, 그래서 69일 만에 열린 그 좁은 갱도를 통해 구조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이 감격적인 뉴스를 보면서 저는 오늘 본문 말씀이 생각났다. ‘맞다. 비록 한 사람이 겨우 들어갈 수 있는 캡슐이고 터널이지만 그 캡슐 문을 열고 들어가야 살고 그 좁은 길로 들어가야 살 수 있다.’라는 것이다. 오늘 본문이 그것을 말하고 있지 않은가?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이 말씀 역시 매우 유명한 말씀이다. 앙드레 지드의 소설 제목이기도 한데, 물론 내용은 본문과 다르지만, 어찌되었든 기독교를 떠나 많은 사람들이 한두 번 이상은 들었을만한 매우 유명한 말씀이다.

  그런데, 이 역시 지난 주 황금률처럼 오해하는 경우도 있고 악용하는 경우도 많다. 이 말씀을 악용하는 경우는 이단들이 그러하다. 안상홍 증인회(안증회, 안상홍 하나님의 교회, 안상홍, 장길자)의 경우 자신들만이 구원의 좁은 문이고 기성 교회들은 멸망의 길로 가는 넓은 문이라고 주장한다. 안식교도 마찬가지고 신천지도 마찬가지다. 이 본문은 가지고 자신들의 교리를 정당화하려고 악용을 한다. 이것은 초대교회 때도 있었다. 영지주의가 그러했다. 그들 역시 자신들만이 구원에 이르는 좁은 문이라고 주장을 했다. 이런 이단 사상에 미혹되는 일이 없도록 하라.

  그리고 본문을 오해하는 경우는 두 가지 경우인데, 첫째는 이 본문은 단순히 교리적으로만 해석하는 경우이다. 좁은 문은 생명으로 인도하는 길이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는 것을 말한다. 어떤 행위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이다라고 하면서 이 본문을 단순히 처리해버리는 경우이다.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은 불변의 진리이나 본문은 단순히 그것만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둘째는 본문에서 말하고 있는 좁은 문을 고통의 길, 고난의 길, 부담스러운 길로만 보면서 회피하는 경우이다. 어찌 보면 이 경우가 더 많은지 모르겠다. 그러나 이것은 본문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데서 오는 오해이다.

  지난주에 황금률에 대한 말씀 때에도 강조했지만 어떤 본문만 떼어서 보면 본문이 원래 말하고 하는 의미를 놓치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그래서 우리는 늘 전후 맥락을 보면서 전체 본문을 보면서 이해해야 한다고 했다. 이 본문도 마찬가지다. 이 본문의 의미는 이 본문이 어디에 속해 있는지를 보면 알 수 있다.

  어디에 위치해 있는가? 산상수훈이다. 마태복음 5장부터 7장까지를 예수님께서 산 위에서 가르침을 주신 것이기에 산상수훈, 혹은 산상복음이라고 부른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은 무슨 내용을 받고 있는가? 산상수훈의 내용을 받고 있다. 벌써 의미가 좀 더 확실해지지 않는가?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좁은 문이란 산상수훈에서 가르쳐주신 그런 삶, 즉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그런 삶으로 들어가라는 의미이다. 이것은 조금 뒤에 자세히 보도록 하자.

  전후 문맥에서 우리가 특별히 알아야 할 것은 여기서부터 7장 끝까지가 산상수훈의 결론부에 해당한다는 사실이다. 결론이란 무엇인가? 앞에서 주장한 것들을 정리 요약하면서 확실하게 하는 것이다. 설교에서 있어서는 어떤 역할을 하는가? 다시 한 번 강조하고 호소하면서 결단을 촉구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 설교에 있어서 결론부이다.

  산상수훈은 예수님의 가르침, 설교이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무엇을 호소하고 무엇을 결단하기를 촉구하시는가? 앞에서 가르쳐주신 그런 삶,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답게 생각하고 살아가는 삶,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삶을 살아갈 것을 호소하고 결단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본문부터 7장 마지막까지의 결론부에서 중심적으로 사용되는 단어는 동사이다. 그것도 ‘행하는 것’과 관련된 동사들이다. 택하라, 행하라는 것이다. 그런 동사가 9번 사용되고 있다. 무엇을 말하는가? 매우 단호하고도 적극적인 결단을 촉구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예수님의 이러한 단호하고도 애타는 호소와 촉구에 귀를 기울여 들을 수 있어야 한다. 왜? 우리를 너무나도 사랑하시는 주님의 호소이며 촉구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좁은 문과 넓은 문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가?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

  이 말씀에 따르면 좁은 문은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이고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고, 반대로 넓은 문은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인데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다. 그래서 좁은 문은 좁은 길과 같은 의미이고 넓은 문은 넓은 길과 같다. 좁은 문, 좁은 길은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이요 길이며, 넓은 문, 넓은 길은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이요 길이다.

  이 말씀은 오랜 성서적이고 유대적인 사상을 담아 예수님께서 전하신 말씀이다. 유대인들에게는 의인과 악인으로 대표되는 두 부류의 사람들이 있고, 이들이 각기 가는 길이 의의 길이고 악의 길이다. 이 두 길에 대한 이해는 오랜 성경적인 전통이고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에게는 매우 익숙한 개념이었다. 쿰란에서 발견된 사해사본에도 의인의 길과 악인의 길에 대한 묘사가 되어 있다.

  그 배경이 되는 성경 말씀은 시편 1편이다.
  “1.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2.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3.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4. 악인들은 그렇지 아니함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5. 그러므로 악인들은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들이 의인들의 모임에 들지 못하리로다 6. 무릇 의인들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들의 길은 망하리로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사랑하고 암송하는 말씀이다. 6절에 보면 의인들의 길과 악인들의 길이 나온다. 의인들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들의 길은 망하게 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의인들의 길은 생명으로 인도하는 길이고 악인들의 길은 멸망으로 가는 길이라는 사실이다.

  이 두 길에 대한 성경적인 개념이 유대인들에게 깊게 자리 잡고 있었고, 이러한 전통적인 개념을 가지고 예수님께서는 이 두 길을 좁은 길과 넓은 길로 말씀하신 것이다. 그렇다면 좁은 길은 곧 의인들의 길이고 넓은 길은 악인들의 길이다.

  시편 1편에서 구체적인 내용을 보자. 악인들의 길은 무엇인가? 1절에 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악인들의 길은 다른 것 아니다. 악한 꾀다. 영어 성경에는 counsel로 되어 있다. 악한 생각, 악한 계획, 악한 의도, 악한 목적, 악한 조언들을 말한다. 악인들에게서 선한 생각이나 계획이나 조언이 나올 수 있겠는가? 그런 것이다. 또 죄인들의 길, 죄를 짓는 길이다. 악한 자들이 가는 길은 죄를 짓는 길이다. 그 길로 간다. 그 길로 가는 것을 즐긴다. 또한 오만한 자들의 자리이다. 이것은 하나님과 다른 사람들을 무시하고 깔보면서 자기가 최고인줄 아는 교만이다.

  어떤가? 악인들의 길이 다 여기에 속해 있지 않은가? 반면에 의인들의 길은 어떠한가? 우선은 이러한 악인들의 길, 즉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고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는 것부터 시작한다.

  나는 의인이다, 최소한 악인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자꾸만 악인들의 꾀를 따르고 죄인들의 길에 서고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는다, 그렇다면 이 사람은 의인인가 악인인가? 이 사람이 따르는 길은 생명으로 가는 길인가 멸망으로 가는 길인가? 아주 중요한 질문이다. 이에 대한 답은 설교를 계속 들으면서 여러분들이 찾아보라.

  문제는 무엇이냐 하면 많은 의인들이, 즉 그리스도인들이, 성도들이 자꾸만 악인들의 꾀를 따르고 죄인들의 길에 서고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는다는 것이다. 예수님을 믿는다, 그것은 의인임을 말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계속해서 그 가치관과 삶에서는 악인들의 꾀를 따르고 죄인들의 길에 서로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는다는 것이다.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좁은 길과 넓은 길 중에서 어느 길이 더 가기 쉬울까? 의인들의 길과 악인들의 길 중에서 어느 길이 더 가기 쉬울까? 넓은 길, 악인들의 길이다. 이 길이 훨씬 더 가기 쉽다. 주께서 원하시는 길보다 내 마음대로 가는 길이 훨씬 쉽다.

  순종하는 것보다 무시하고 내 마음대로 하는 것이 훨씬 쉽다. 날마다 기도하며 말씀 묵상하는 것보다 내가 하고 싶은 것, 내게 편한 것 하는 것이 훨씬 쉽다. 어떠한 경우에라도 예배의 자리를 지키는 것보다 내 편의에 따라 하는 것이 훨씬 쉽다. 어떠한 장애도 없고 제한도 없다. 왜? 그것이 우리의 본성이거든. 우리의 죄성과 우리의 탐심이 원하는 길이거든.

  나의 죄성과 탐욕이 이끄는 대로 가자고 하는 대로 가면 된다. 얼마나 쉽나? 그냥 가기만 하면 된다. 길이 넓다. 넓고 편하다. 얼마나 달콤한 것들이 많은가? 얼마나 좋은 것들이 많은가? 그 길로 가는 사람들도 많다. 그러니 내가 가는 이 길이 별로 틀린 것 같지 않다. 그렇지 않은가? ‘다들 그렇게 하는데 뭘’ 이런 생각, 이런 말 얼마나 많이 하고 사는가?

  그런데 그 길은 어떤 길인가? 그 넓고 편한 그 길이 나를 어떤 곳으로 이끄는가? 생명인가? 아니다. 파멸이고 멸망의 길이고 심판의 길이다. 무서운 일이다. 의인이라 할 수 있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성도들이 이러한 길을 걷고 있단 말이다. 좁은 길로 가라고 초청받은 그리스도인들이 실제의 가치관과 삶에서는 여전히 악인들의 길, 넓은 길을 가고 있다는 말이다. 너무나도 가슴 아프고 안타까운 일이다.

  넓고 편하고 익숙하고 달콤한 그 길이 나를 결국에는 멸망의 길로 이끌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교회만 다닌다고 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 아니다. 입으로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한다고 해서 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명심하라. 그에 합당한 가치관과 삶이 따라야 한다. 그것이 진정한 믿음 아니겠는가?

  나의 믿음을 무엇으로 증명할 것인가? 교회 다니고 예배드리고 주일 성수하고 십일조 하고 봉사하는 것으로? 내가 직분을 맡고 있다는 것으로? 아니다. 나의 삶에 있어서 실제적인 가치관과 삶을 통해서다.

  예수님 믿은 후 바로 성인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점점 나의 가치관이 바뀌고 삶이 바뀌어야 한다. 그 전에는 악인들이 가는 길을 갔다면 이제는 의인들의 길을 가야 한다. 악인들의 꾀, 그 생각, 가치관에서 떠나 이제는 하나님께서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를 분별하여 그 뜻을 따라야 한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고 사람들 앞에서도 교만했던 모습에서 이제는 하나님을 두려워 할 줄 알고 사람들을 용납하고 섬기며 사랑하는 모습으로 변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의인들의 길이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좁은 길이다.

  넓은 문, 넓은 길로 가는 것은 쉽고 편하다. 그러나 의인들의 길, 좁은 길은 그리 쉽지 않고 때로는 어렵다. 왤까? 익숙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쉽지 않고 어렵다.

  조금 다른 경우지만 이와 비슷한 경험을 나는 요즘 하고 있다. 지난 8월 셋째 주부터 지금까지 6kg의 체중을 감량했다. 일주일에 거의 1kg씩 뺀 셈이다. 그리한 이유는 몸에 이상이 생겼다. 우려할 상황은 아니지만 초기에 이를 잡기 위해 굳은 결심을 하고 식사량을 줄이고 몸에 해로운 음식(기름에 튀긴 것, 단 것, 탄수화물, 커피 등)을 먹지 않고나 줄이고 날마다 한 시간씩 운동을 했다.

  이것이 생각보다 쉽지 않다. 나는 내가 좋아하는 음식을 먹는 것이 쉽고 날마다 운동하는 것은 그리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다. 그런데 거의 두 달 가까이 이렇게 하고 있는 것은 건강에 대한 것이었지만 무엇보다 목회와 가정을 위한 것이었다. 이제 본격적으로 목회를 해야 할 나이에 건강이 장애물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고 가족을 위해서도 내가 건강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런 마음을 가지고 두 달 가까이 해왔다.

  누가 그러더라. 40일 동안 계속하면 그것이 몸에 밴다고. 그런데 그렇지 않더라. 40일이 지나 두 달 가까이 되어감에도 여전히 나는 전에 내가 좋아했던 음식들이 더 익숙하고 편하고 날마다 운동하는 것이 몸에 배었음에도 힘들거나 피곤할 때는 예전처럼 그냥 쉬는 것이 아직도 더 익숙하고 편하다. 다만 나 자신과의 싸움이니까 억지로 이겨낼 뿐이다. 왤까? 두 달보다 훨씬 더 긴 세월동안 그렇게 살았거든.

  경우는 다르지만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 우리에게 익숙한 것은 우리의 죄성과 탐욕이 이끄는 길이다. 그러한 가치관과 삶은 어렵지 않다. 예수님을 믿은 후에도 여전히 우리에게 익숙한 길은 넓은 길, 우리의 죄성과 탐욕이 이끄는 길이란 말이다.

  그래서 좁은 문, 좁은 길이 쉽지 않고 어렵게 느껴진다. 익숙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의 본성에 반대되는 길이기 때문이다. 나의 죄성과 탐욕을 거스르는 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 길이 나를 생명으로 인도한다는 것이다. 익숙하지 않고 때로는 힘들지만 꾸준한 식사요법과 운동요법을 통해 질병을 이겨내고 건강해지는 것처럼 익숙하지 않고 그래서 어렵게 느껴지는 그 길이 나를 생명으로 인도한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이 길을 가야하는 것이다. 우리의 익숙함과 편함 때문에 생명의 길을 잃어서는 안 되지 않는가?

  좁은 문, 좁은 길, 우리를 생명으로 이끄는 길은 어떤 길인가? 요한복음 14:6을 보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여기서 무엇이라 말씀하셨는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이 말을 연결하면 이렇게 읽을 수도 있다. 내가 곧 진리와 생명으로, 아버지 하나님께로 너희들을 인도하는 길이다. 또한 요한복음 10:7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

  나는 양의 문이라, I am the gate for the sheep, 주님께서 친히 양들, 즉 우리들을 생명의 길로 인도하는 문이라는 것이다. 우리를 생명의 길로 인도하시기 위해 목숨까지 버리신 선한 목자시다. 그러기에 예수님의 문으로 들어가는 자는 영생을 얻게 된다. 예수님이 곧 우리를 생명으로 이끄는 길이요 문이시라는 말씀이다.

  그렇다면 좁은 문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말하는 것이다. 예수님이 바로 우리를 구원의 길, 생명의 길로 인도하시는 좁은 문, 좁은 길이시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주님으로 영접하는 것이 바로 좁은 문, 좁은 길로 들어서는 출발점이다.

  예수님을 믿는가? 나의 구주로, 나의 주님으로 믿는가? 그렇다면 여러분들은 이미 좁은 문, 좁은 길로 들어선 것이다. 이미 생명의 길로 들어섰다는 것이다. 그 길이 여러분들을 생명의 길로 인도할 것이다. 믿는가?

  그렇다면 이제 우리가 해야 할 것이 무엇인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좁은 문, 좁은 길로 들어선 우리들이 해야 할 것이 무엇인가? 계속해서 이 길을 가야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길은 어떤가? 좁고 협착하다. 왜 좁은가? 자기 부인의 길이기 때문이다. 자기를 주장하는 것이 죄의 본성이다. 자기주장의 길은 넓다.

  그러나 자기 부인의 길은 좁다. 하나님을 나의 주인으로 인정하고 하나님의 뜻에 따르기 위해서는 자기 부인이 있어야 한다. 원수까지 용서하고 사랑하는 것은 자기 부인 외에는 없다. 화평케 하는 자가 되는 것은 자기 부인 외에는 없다. 참된 구제와 금식과 기도와 섬김은 자기 부인의 길이다. 이 길은 좁다. 그러나 이 좁은 길을 통해서만 우리는 생명의 길로 갈 수 있다.

  협착하다는 말을 영어성경이나 다른 한글 현대어 성경에는 험하다는 표현을 했는데, 원어의 의미로는 괴롭히다, 박해하다, 억압하다란 의미를 갖고 있다. 예수님을 믿어 좁은 길을 가는 것은 괴롭힘과 억압과 박해가 따르는 경우가 많다. 초대교회 성도들을 보라. 예수님을 메시아로, 구주로 믿음으로 인해 얼마나 많은 괴롭힘과 억압과 박해를 받았는가? 기독교 역사를 보라. 우리나라의 경우도 보라. 예수님을 믿음으로 인해 얼마나 많은 괴로움과 박해를 받았는지? 그래도 그들은 그 길을 포기하지 않았다. 왜? 그 길이 생명의 길임을 알기에!

  우리 교우 중 서중모 성도 모친께서 지금 위중하시다. 그래서 지난 목요일 가족들이 모두 한국으로 갔다. 그 모친께서 가족을 모두 예수님께 인도한 분이시다. 처음에 예수님을 믿었을 때 괴로움은 말할 수 없었단다. 예수 믿지 않는 가정, 미신을 따르는 가정에서 며느리가 예수를 믿으니 얼마나 많은 핍박이 있었겠는가? 많은 고생을 하셨단다. 그럼에도 그 길이 생명의 길임을 알기에 결코 포기하지 않으셨고, 그 결과 가족을 모두 예수님께서 인도할 수 있었단다. 서중모 성도가 그러더라. ‘저를 예수님께로 인도해주신 분이 바로 어머니십니다.’ 그러면서 눈물을 글썽였다.

  예수님을 믿어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길을 가는 것은 생명의 길이지만 동시에 좁고 험한 길이다. 이런 핍박이 없어도 세상 가운데서 그러한 길을 가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직장에서 좁은 길을 가는 것이 쉬울까? 세상 가운데서 좁은 길을 걷는 것이 쉬울까? 아니다. 힘들다. 어렵다. 그래서 좁고 험한 길이다. 그래서 생각보다 많은 성도들이 세상 가운데서, 직장에서 좁은 길이 아닌 넓은 길을 택하고 있다. 그 길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넓은 길을 택하고 있다. 그 길이 쉽고 익숙하고 어렵지 않고 다들 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길은 악인들의 길이요 멸망으로 이끄는 길이다.

  문제는 다른 것이 아니라 이미 좁은 문, 좁은 길로 들어선 사람들이 자꾸만 넓은 길로 가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한 그리스도인들에게 주님께서는 강력히 호소하고 분명한 결단을 촉구하고 계시다. 계속해서 좁은 길로 가라는 것이다. 자기부인의 좁은 길을 가고, 비록 그 길로 가기에 어려움이 있고 핍박이 있을지라도 그 길을 가라는 것이다. 의인이 악인의 모임에 있는 것이 옳지 않고 거룩한 성도가 죄인들의 길을 걷는 것이 합당치 못하다는 것이다. 지금 당장 그 길을 떠나 다시 좁은 길, 생명의 길로 가라는 것이다. 결단하라는 것이다.

  우리 앞에는 좁은 길과 넓은 길 둘 만 있지 중간지대는 없다. 회색지대는 없다. 좁은 길에 있어야 할 내가 넓은 길을 가고 있는 것은 중간지대가 아니다. ‘그래도 내가 믿고 있으니까... 교회는 다니니까... 봉사는 하니까...’ 이런 생각으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중간지대는 없다. 이 시간 결단하라. 이것은 주님의 명령이다.

  좁은 문, 좁은 길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하고 주님과 함께 주님께서 원하시고 보여주시고 가르쳐주신 대로 살아가는 길이다. 산상수훈의 내용대로 하면 하나님의 나라 백성으로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삶을 살아가는 길이다. 나의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길이다. 이것을 다른 말로는 성화의 길이라고 한다.

  지난 주중에 제자훈련 때 이 성화에 대해 다루었다. 성화, 거룩할 聖, 될 化, 우리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삶,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삶을 말한다. 거룩에 대해 말할 때 부정적인 반응은 이것을 매우 부담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이거나 나는 할 수 없다는 패배의식내지는 무관심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왜? 나는 거룩하지 못하거든. 나를 보니까 전혀 거룩하지 못하기 때문이고, 주님께서 제시하신 기준을 보니까 도저히 할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당신은 거룩한가? 이 질문에 나는 거룩하다고 당당히 말할 수 있다. 교만이라고 생각하는가? 아니다. 성경에 있는 그대로 말하는 것이다. 거룩의 개념은 구별이다. 하나님께로 구별된 것이 거룩이다. 나는 하나님께로 구별되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나는 하나님께 구별된 하나님의 것이다. 그러기에 나는 거룩하다.

  무슨 말인지 알겠는가? 신분상 나는 거룩하다는 말이다. 실제의 나의 삶이 거룩해서가 아니라 나의 신분이 하나님께 구별된 하나님의 것이기에 거룩하다는 말이다. 이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거룩의 개념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거룩한 무리, 성도라고 부르는 것이다.

  다시 한 번 묻는다. 당신의 거룩한가? 거룩하다. 분명히 기억하라. 내가 정말 거룩해서가 아니라 나를 당신의 자녀로 삼아주신 하나님의 은혜로 나는 거룩한 신분이 된 것이다. 왕자와 공주가 아무리 개차반이어도 그 신분은 변함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청하시는 것은 신분상의 거룩함으로 머무는 것이 아니라 실제의 삶에서도 거룩해지는 것이다. 우리를 거룩하게 하신 하나님의 뜻에 따라 거룩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구별된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순종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고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이고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여기에 우리의 거룩의 동기와 근거가 있는 것이다. 왜 거룩한 삶을 살아가야 하는가? 오늘 본문으로 하면 왜 좁은 길로 계속 걸어가야 하는가? 우리가 거룩한 신분이기 때문이다. 거룩해지기 위해서 그렇게 사는 것이 아니라 이미 거룩해졌기에 그렇게 사는 것이다. 그 출발과 동기가 다르다.

  그리고 이 길은 좁고 험하지만 우리가 가지 못할 길이 아니다. 거룩은 우리가 이루지 못할 목표가 아니란 말이다. 그런 패배의식, 무관심에서 이제는 벗어나라. 할 수 있다. 왠가? 주님과 함께 가는 길이기 때문이다. 주님께서 도와주시는 길이기 때문이다.

  나 혼자서는 하지 못한다. 왜? 내게는 그런 능력이 없다. 내게 익숙하고 편한 것은 거룩이 아니고 좁은 길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 혼자서는 거룩한 삶을 살아가기 어렵고 좁은 길을 가는 것이 어렵다. 그러나 주님께서 함께 하시면 할 수 있다. 믿는가?

  좁은 길은 주님과 함께 가는 길이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주님께서 이미 가신 길이다. 주님께서 이미 가신 그 길 내가 따라가는 길이다. 주님께서 걸어가신 대로 나도 가면 되고, 주님께서 보여주신 대로 나도 살아가면 되고,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대로 그 방향대로 가면 된다.

  그렇게 가고자 하는 나를 주님께서는 홀로 두지 아니하시고 나와 함께 하심으로 나를 도우시고 인도해주신다. 로마서 8:34을 보자.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인간의 몸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서는 지금도 하나님 우편에 계셔서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고 계신다. 나는 홀로가 아니라는 말이다. 나 혼자 이 길을 가는 것이 아니다.

  요한복음 14:16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또 다른 보혜사는 성령님을 말한다. 보혜사란 옆에서 돕는 자, 위로하는 자, 인도하는 자를 말한다. 또 다른 보혜사란 말은 누군가 이미 보혜사가 있었다는 말이다. 그분이 누구인가? 예수님이시다. 예수님께서 이미 우리를 돕고 위로하고 생명의 길로 인도하시는 보혜사이셨는데, 이제 십자가 죽음 이후에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하나님께로 돌아갈 것이므로, 예수님을 대신해서 이 땅에서 우리와 함께 있어 돕고 위로하고 생명의 길로 인도할 또 다른 보혜사를 보내시겠다는 말씀이다. 그 또 다른 보혜사가 바로 성령님이시다. 성령님은 성도들을 위해 이 땅에 오신 것이다.

  예수님을 구주로 믿어 좁은 문, 좁은 길로 들어선 우리를 옆에서 도우시며 위로하시고 힘을 주시며 생명의 길로 인도하시는 분이 바로 성령님이시다. 그러기에 성령충만을 사모하라고 하시는 것이고 성령님의 뜻에 순종하라고 하시는 것이다. 내 힘만 가지고는 안되지만 나와 함께 하시는 성령님의 능력과 인도하심을 의지할 때 능히 이 길을 갈 수 있는 것이다.

  문제는 내 안에 이 길을 가고자 하는 결단과 소망이다. 이것은 내 몫이란 이야기다. 다시 한 번 주님의 말씀으로 촉구한다. 주님께서 보여주시고 가르쳐주신 이 길, 주님 닮아가는 이 길, 거룩한 성도로 합당한 거룩한 삶,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이 길이 생명이 길임을 명심하고 이 길을 가라. 머뭇거리지 말라. 결단하라.

  예전에 이런 동화를 읽은 적이 있다. 어느 나라 왕에게 아들이 셋 있었다. 어느 아들에게 왕위를 넘겨줄까 고민하다가 세 왕자에게 온 세계에 돌아다니면서 내가 원하는 보물을 찾아오라고 했다. 얼마간의 시간을 주었고, 그 동안 왕이 있는 곳까지 금으로 길을 놓았다. 그리고 왕자들이 돌아왔다. 첫째 왕자는 그 보물을 찾지 못해 죄송스런 마음에 금길을 밟지 못하고 옆으로 왔다. 둘째 왕자 역시 그러했다. 그러나 셋째 왕자는 보물을 찾았기에 당당하게 금길을 밟고 왕 앞에 이르렀다.

  우리가 셋째 왕자와 같은 사람들 아닌가?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보물을 찾은 사람들이다. 하나님의 나라와 의라는 인생의 보물을 찾은 사람들이다. 이 보물을 찾은 사람은 당당하게 금길을 걸어간다. 그 길은 영광의 길이고 생명의 길이기 때문이다.

  좁은 길은 결코 부담스럽고 고통스럽고 힘든 길이 아니다. 비록 좁고 험한 길이지만 그 길은 보물을 발견한 사람들이 걷는 당당한 금길이다. 영광의 길이고 생명의 길이다. 이 길을 가라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신다. 그러기에 우리에게 생명의 길을 보여주셨고, 그 길로 인도하셨고, 계속해서 그 길을 가길 원하신다. 예수 그리스도의 길, 예수 그리스도께서 걸어가셨고, 보여주셨고, 가르쳐주신 이 길을 가자. 주님과 함께, 주님의 능력과 인도하심 가운데 이 길을 가자. 그래서 장차 우리에게 주어질 생명의 면류관, 영광의 면류관을 받아쓰는 우리 모두가 되길 축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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