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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막4:21-27 
설교자 : 김경형 목사 
참고 : 궁극교회 주일예배 

4장 21절-27절: 또 저희에게 이르시되 사람이 등불을 가져오는 것은 말 아래나 평상 아래나 두려 함이냐 등경 위에 두려 함이 아니냐 드러내려 하지 않고는 숨긴 것이 없고 나타내려 하지 않고는 감추인 것이 없느니라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 또 가라사대 너희가 무엇을 듣는가 스스로 삼가라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요 또 더 받으리니 있는 자는 받을 것이요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또 가라사대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이 씨를 땅에 뿌림과 같으니 저가 밤낮 자고 깨고 하는 중에 씨가 나서 자라되 그 어떻게 된 것을 알지 못하느니라.


세상에서는 에덴동산에서 생명과를 따먹지 않고 선악과를 따먹은 불순종으로 인해 타락한 이후로 두 가지 종류의 지식이 흐르고 있다. 무슨 지식과 무슨 지식? 생명과 먹은 지식과 선악과 먹은 지식.


그러면 하늘로부터 오신 그 분의 말씀은 생명과 지식이니 그 말씀을 먹으면 성령의 열매가 열리게 된다. 이러면 속성적으로 성품적으로 인격적으로 하나님의 속성을 닮는 것이다. 그 닮는 것은 이 세상 사람들이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이다.


이 세상에는 예수님에게 들어있는 그 정신 소원 목적 이해타산 평가성이 있고, 에덴동산에서 선악과 따먹은 이후에 타락되고 저주 받은 사람들의 지식에서 나온 이해타산 평가성 소원 목적성 존귀 영광성 행복성이 있다. 그런데 선악과 먹은 이후에 나온 존귀 영광 행복성은 영원히 가는 게 아니라 임시성이다.


안 믿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지식은 선악과 따먹고 나온 지식이고, 예수 믿는 사람들은 생명과 먹은 지식인데, 그것도 예수님의 본질과 똑같은 것이다. 예수님의 것은 하나님의 것과 동일이요 동성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가 신경을 쓰고 문제로 삼는 것은 생명과 먹은 지식이 성경의 지식인데 성경에 보니 거짓 종들, 이단자들, 적그리스도, 배로 하나님을 삼는 자들 등이 기독교 안에서 선악과 먹은 지식을 가지고 생명과 먹은 지식을 둘러엎는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늘의 것이 둘러엎어지니 땅의 것이 된다. 이렇게 해서 선악과 먹은 그 지식의 기준을 가지고 아무리 행복을 부르짖어도 그건 고작 올라가봐야 땅의 것이다. 그 이상은 못 올라간다.


아무리 존귀영광 행복이라고 해도 땅의 것은 시대 따라 상황 따라 사람 따라 조건 따라 다 변질이 된다. 그런데 세상의 소원 목적적인 것으로 예수를 믿고 있다면 그 사람의 이해타산 평가성 전부는 상황 따라 바람 따라 시대 따라 장소에 따라 다 바꾸어진다. 그런 의미에서 이 자는 거짓말쟁이다.


안 믿는 사람은 그걸 모른다. 약속을 할 때 한 두 번은 그 약속을 지킬 수가 있지만 계속 약속을 지킨다는 게 쉽지는 않다. 왜? 일부러 안 지키는 것도 있겠지만 상황이 약속을 지키지 못하게 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니까 상황에, 시대에, 물질에 목적을 두고, 시간 따라 움직이는 것에 목적을 두고 있다면 그 사람은 인간 보기에 정직하다고 그럴지 모르지만 그 지식 자체의 수준성이 생명과 먹은 게 아니고 선악과 먹은 지식이니 여기에는 형벌이요 진노요 심판이요, 하늘에 해당되는 의나 선은 없다. 세상에서 알아주는 것일 뿐이다.


우리는 예수를 믿으면서 하나님께서 알아주고 인정해주시는 신앙을 가져야지 육적으로 세상적으로 자기 소원대로 해달라고 믿어서는 안 된다. 이런 사람은 기준이 예수님 쪽이 아닌 자기 쪽이라서 ‘예수님, 사랑합니다. 고마우신 하나님’ 이런 식으로 말을 할지라도 자기 주관적 소원 목적에서 ‘나에게 잘 해 주겠지’ 하며 그렇게 말을 하는 것이다.


우리의 신앙의 개념은 주님이 날 알아주고 주님이 날 인정해주는 것인데, 인조적인 인본주의 신앙은 ‘내가 이렇게 주님을 사랑합니다. 그러니 나를 알아주십시오’ 하는 식이다. 우리는 ‘날 알아주십시오’ 그게 아니라 ‘당신이 알아서 당신의 기쁘신 뜻대로 해 주십시오’이다. 그것이 나에게 최고의 영광이고 존귀고 행복이고 영광이다.


그런데 사람이 늘 선악과 따먹은 일반적 수준에서 살기 때문에 이게 잘 이해가 안 된다. 그래서 그렇게 예수 믿다가는 굶어죽을 것 같고, 세상에서 알아주지 않을 것 같고 그렇다. 그러나 아니다. 하나님께서 불을 올렸는데 인간이 그 불을 끄집어 내리면 어떻게 되느냐? 인간 자기가 다치고 캄캄해진다. 쉽게 말하면 역사적으로 예수님을 죽이고 한 자들이 결국은 주후 70년에 로마군대의 군홧발에 짓밟혔다. 그걸 알아야 한다.


역사를 주권적으로 돌리는 분은 그 분이다. 그러니까 내가 그 분의 의사에 맞추면 그 분이 나를 어떻게 돌리시건 그게 다 나 좋도록 돌리는 것이다. 하지만 인간기준에서 보면 죽을 지경이다. 아닌 말로 그런 게 있다. 학교 다닐 때 공부를 못하면 벌을 선다. 선생님이 나오라고 해서 그 학생의 머리를 뱅뱅 돌리면 누가 어지러우냐? 그 학생은 죽을 지경이다. 그런 것과 같다. 그러나 그게 다 나 좋게 해 주려는 것이다.


기독교 신앙이 바로 박히면 예수 믿기가 참 쉽고 편하고 행복하고 기쁘고 즐거운 것인데 세상적인 믿음이 들어가 있으면 옳은 이치의 교훈이 그렇게 듣기가 힘들다. 옛날얘기를 구수하게 하면 그건 재미가 있지만 깨달음의 이치를 듣는다는 것은 지식을 바꾸는 수준인데 이걸 안 바꾸려고 한다. 그러니 되게 삐그덕 거린다.


그래서 삐그덕 거리지 말라고 비유를 들면 성령께서 하늘에서 그 사람의 머리에 기름을 붓는다. 머리가 진리이치로 잘 돌아가면 그게 성령의 감화다. 그래서 구약에 보면 물론 그렇게 안 하고도 세웠지만 왕, 제사장, 선지자를 세우려면 머리에 기름을 붙는다. 그게 성령의 인침, 성령의 감화 감동을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거다.


성령을 받은 사람은 신체적 어떤 체험을 안 해도 하나님의 진리의 지혜지식이 들어있기 때문에 잘 돌아간다. 이게 성령님에 감화된 사람이다. 교회 안에서 자기들끼리 싸워서 삐그덕 거리고 잡소리 나고 하는 건 성령에 감화된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건물은 예배당이고, 교회는 교인들이다. 영이 중생함을 받은 성도들의 무리가 교회 회원들이다. 영이 중생한 사람이 어디를 가서 모이던 그거는 교회다. 그 교회가 어디로 이사를 가서 혼자 떨어져 있다고 해도 교회다. 교회는 없어지지를 않는다. 주님의 기본은혜를 한 번 받으면 그 사람은 천국에 가는데, 가령 사람 보기에 십자가나 교회간판을 안 붙였어도 영이 중생한 사람들이 모인 곳이 교회요, 그 교회 안에 개인적으로 있는 사람은 개인적인 교회다. 일단 교회가 되면 없어지지 않는다. 어디에 있던지 혹 잘못해서 하나님으로부터 두들겨 맞든지 간에 마지막 날에는 교회는 부활돼서 올라간다. 그러니 교회라고 하는 것을 신중하게 깊이 생각을 해야 된다. 이웃에서 얼마든지 볼 수 있는 개념으로 교회 다닌다 그런 게 아니다.


교회에게는 성경을 통해 하나님께서 하고자는 역사가 따라간다. 도망을 못 간다. 하나님께서 지어놓으신 공기를 못 마시면 자기는 죽는다. 벗어날 수가 없다. 그런 것처럼 인간으로 생겨졌다면 인간창조의 원인과 동기와 목적이 자기에게 붙는 거다. 그런 우리 인간이다. 안 믿는 사람은 이걸 우습게 생각하고, 교회(예배당) 나가는 것을 하나의 종교로 알고 ‘믿어도 되고, 안 믿어도 되고’ 하는 것으로 생각을 한다. 우리는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된다.


교회에서 세상 육적인 것, 물질적인 것, 사건적인 것, 상황적인 것이 목적적으로 많이 들어 있을수록 영적인 판단이 흐려진다. 사건이 움직이는 속에 어떤 사람들이 어떤 정신을 가지고 움직이고 있는지를 보는 면에 흐리다. 안 보인다.


성경에는 사람들의 정신이 돌아가는 걸 보면, 지도자들의 정신이 돌아가는 걸 보면, 특히 교회 안에서 돌아가는 걸 보면 ‘아, 이게 미래적으로 어떻게 되겠구나’ 하는 이걸 볼 수 있는 게 있다. 점쟁이가 예수 믿는 사람을 놓고 얼마나 점을 잘 칠 런지 모르지만 우리가 그 점쟁이를 탁 보면 ‘아, 이 점쟁이는 미래적으로 어떻게 되겠구나’ 하는 걸 안다.


교회에서 세상 육적인 교훈을 많이 들으면 들을수록 영적인 판단이 흐려지는 것이고, 영적인 진리이치를 주는 교회에서 그 교훈을 많이 들으면 들을수록 판단이 빠르다. ‘영적’ 하게 되면 성령님의 활동이 들어있다는 것인데, 성령님의 활동은 빠르다. 번개 이상 빠르다. 그런 면에서 ‘영적’ 하는 거고, 또 하나는 사람의 마음을 볼 수 있다는 면에서 ‘영적’ 하는 거다. 악령의 활동, 성령님의 활동을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영적’ 하고 들어가는 거다.


사람의 마음이 예수를 안 믿는 사람은 영적이냐, 육적이냐? 육적이다. 왜? 소원 목적이 전부는 눈에 보이는 쪽으로 들어가 있기 때문이다. 눈에 보이는 것은 다 세상과 육에 속하는 것이다. 이런 것은 다 변질되고 썩고 요동되고 진동되고 불타지고 바람 불면 재가 돼서 날아간다.


오늘날 교인들이 눈에 안 보이는 것 즉, 영적인 이치를 많이 들을수록 영육 간에 판단이 빠르고, 영원한 이해타산도 빠르고, 그리고 판단이 빠르니 깨닫는 소득도 많아지고 정확도가 높아지는 것이다.


‘무엇을 듣는가 스스로 조심하라.’ 네가 처절하게 되든지, 존귀 영광자가 되든지 스스로 조심하라는 것이다. 스스로 책임을 지라는 거다. 네가 어떻게 들었느냐? 육으로 들었느냐? 그러면 너는 처절하게 된다. 네가 존귀 영광자가 되었느냐? 영적인 면으로 깨닫는 면으로 들은 것이다. 그 책임성이 스스로에게 들어가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이치의 말씀을 영적으로 생각하면 항상 소득이 많다. 자기 생각이 늘 길이요 진리요 생명을 인생 삶의 지표로 삼고, 교과서로 삼고, 늘 말씀에서 자기 살 길을 생각하며 모든 사물에 판단을 내리면 항상 소득이 많다.


비유에서 해석이 되지만 육적으로만, 눈에 보이는 위주로만, 물질적 소유적으로만 듣게 되면 그 사람은 성경을 아무리 들어도 비유적으로만 그친다. 그 이상은 못 들어간다. 그 비유에서 영적인 헤아림이 없으면 자기가 시간 투자한 것, 물질 투자한 것, 노력 투자한 것, 젊음 투자한 것, 자기의 일생 전폭이 영생 쪽이 아니라 사망 쪽으로 다 빼앗기는 것이다. 사망 쪽으로 다 빼앗긴다. 이 말은 지옥에 간다는 게 아니라 학생으로 말하면 너는 공부를 하나도 못한다.


예수 믿기 전의 그 삶은 전부 사망으로 흘러가 버린 것이다. 그러나 예수 믿은 후에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이치 쪽으로 들어가서 하나님의 의사단일로 들어간 사상이라면 그 사람의 삶 전부는 영생이요 생명이요 자기 영능의 실력이 되는 거다. 안 그러면 다 빼앗긴다.


젊은이가 꼭 늙어서 죽으라는 법은 없다. 젊은이도 일찍 죽기도 하더라. 다시 말하면 인간의 표현으로 하자면 ‘네가 아무리 젊어도 앞으로 살아봐야 너는 별 볼 일이 없겠구나’ 하는 사람이 있는 것처럼 예수를 그렇게 믿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전부는 영생 쪽이 아닌 사망 쪽으로 빼앗기는 삶을 사는 사람은 왜 그렇게 된 것이냐? 예수님을 너무 잘 믿어서 그렇게 된 것이냐, 예수님을 안 믿어서 그렇게 된 거냐, 자기의 헤아림이 잘못돼서 그렇게 된 거냐?


26절, 27절: 땅에 씨를 뿌리면 싹은 밤에도 자란다. 그러면 식물은 잠을 안 자는 것이냐? 자기는 자는데 크기는 하는 거냐?


하나님의 나라는 땅에 씨를 뿌림과 같다. 그러니까 생명이 있는 말씀을 받아놓으면 자란다. 성장이 된다.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하나님의 말씀 속에는 하나님의 생명이 들어있으니 이 말씀을 받는 것은 그 사람의 마음 밭에 생명의 씨가 뿌려지는 것이다. 지금으로 말하자면 말씀을 듣는 것을 말한다. ‘세상에서 부자 되라’ 그런 거 말고.


그 다음에는 씨가 땅에 떨어져서 밤낮 자고 깨고 하는 중에 씨가 자라듯이 믿음이 자꾸 자라게 되는 건데, 밤과 낮이 교체가 되는 것처럼 자기의 환경이 좋을 때는 좋고 나쁠 때는 나쁜 그런 삶의 와중에 자기의 신앙이 얼마나 커지고 자라는지 인간 자기는 잘 알지를 못한다.


우리가 ‘안 듣는다. 안 듣는다’ 그래도 항상 이치의 말씀을 듣는 그 자리에 있으면 녹음이 되듯이 그래도 들은 귀가 있어서 이웃교회에 가서 들으면 맛이 싹 달라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그건 왜 그러냐? 은연중에 귀로 들어간 게 감염이 된 것이다. 이걸 무시하면 안 된다. 그래서 인간 자기는 감염성을 가진 존재다. 그러면 왜 감염성을 넣어서 지었나? 하나님을 감염하라는 것이다.


세계은행을 다 주는 게 좋으냐, 하나님 한 분이면 좋으냐? 돈이 좋으냐? 은행도 지구 안에 들어있다. 각 나라 은행이 지구라고 하는 땅에 있다. 그러면 이 지구는 누구 거냐? 하나님 것이다. 하나님께서 만들어서 공중에 실도 없이 매달아 놨다. 그래서 떠있다.


사건 환경이 좋았다 나빴다 하는 그런 와중에 자기의 신앙이 얼마만큼 자라는지 자기는 잘 모르나 남이 보면 어느 정도 직감하게 된다. 키가 얼마나 컸는지는 자로 재보면 안다. 무게도 저울로 달아보면 안다. 기준 척도가 있어야 한다. 거기에 의해서 정확하게 안다.


밤낮으로 세상을 염려 걱정하고, 이 자식 저 자식 걱정을 하면 그 사람의 얼굴이 확 달라진다. 그런데 예수 믿고 기쁘고 즐겁고 좋아서 나가도 콧소리를 흥얼거리고 하면 그 기쁜 마음이 얼굴에 표정으로 나온다. 사람의 얼굴은 마음의 거울이다. 본인들이 살아오면서 신앙이 얼마나 컸는지 안 보인다. 그런데 타인이 어느 정도는 안다. 얼마만큼 자랐구나.


사실은 싹이 크면 클수록 싹은 땅과는 점점 멀어진다. 그러면 점점 하늘과는 가까워지는 거다. 그러니까 어린 싹이 점점 커져서 땅과 멀어지니 태양과 하늘과 가까워진다. 이치적으로 보면 그렇다. 이걸 자라는 과정으로만 보지 말고 이치적으로 보면 이건 희망이 있고 좋은 거다. 맨날 그대로면 뿌리에 벌레가 먹은 거다.


그런데 여기서 자랄 수 있는 신앙은 영적 헤아림을 전제하고 있는 것이다. 세상적 육적 비진리적 옛사람 부패성적 마귀적인 가르침에는 자라지를 못한다. 다 빼앗긴다. 자기 생애 전부는 헛 살게 된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실력적으로 영인성장으로 잘 여물어져야 한다.


마지막으로, 열 명에게 한 므나씩 줬느냐? 딴 데 보면 한 므나씩 줬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열 므나를 남겼고, 이 사람에게는 ‘열 고을을 다스리라’ 했다. 또 어떤 사람은 한 므나로 다섯을 남겼다. 그러면 수건에 싸놓은 사람은 한 고을을 다스리느냐, 자기도 못 다스리느냐? 자기도 못 다스린다. 그러니 얻는 게 없다. 제 혼자라도 못 다스렸다. 그래서 ‘한 므나를 갖고 있는 자는 죽여라’ 한다. 창조의 목적관에서 보면 못 쓰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다섯 므나를 남긴 사람이 열 므나를 남겨서 열 고을을 차지한 사람을 볼 때 어떻게 생각하겠느냐? ‘그럴 줄 알았다면 내가 좀 더 열심히 노력을 해서 열 므나가 아니라 스므 므나까지 남길 걸’ 하겠지만 이미 지나간 것이다.


열 고을을 다스리려면 사람을 알아야지, 사람의 성격 성질을 알아야지. 다스린다는 것은 말씀이치로 다스리는 것이다. 사람을 다스려야 생산도 나오고, 사람이 축복된 사람이 되는 거다. 재앙을 받은 사람은, 사형을 받을 사람은 자기 스스로도 자기가 자기를 못 다스리는구나.


자기 인생살이를 공으로 살지 말라. 우리는 빈 손 들고 가지를 않는다. 자기를 잘 익은 곡식처럼 영능의 실력자로 만들어서 떠나야 하는 거다. 안 믿는 사람은 공수래라고 하지만 우리는 그런 게 아니다. 사람이라면 사람 속에 하나님의 속성을 잔뜩 갖고 가야 한다. 이 속성은 영적인 것이다. 그렇게 하라고 영과 육의 결합체로 자기를 만든 것이다. 육신은 화장터에서 다 불에 타지지만 우리 성도의 영적인 것은 타지를 않는다. 다 변화 부활된다. (계속)


김경형목사님이 교역자 신학생을 대상으로 20여년 동안 매 주 정례적으로 진행하는 신학 및 성경연구 모임을 통해 영원 전에 하나님의 의지세계에서 인간구원을 설정하게 된 원인과 동기와 목적을 깨닫고 하나님의 본질의 신앙으로 나가는 주의 종들이 누룩처럼 퍼져나가고 있습니다.
참석하실 분은 031-207-5159, 또는 010-8886-5159로 문의해 주세요.(평신도도 참석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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