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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가 확실한 설교만 올릴 수 있습니다. |
성경본문 : | 요6:35, 41-5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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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정용섭 목사 |
참고 : | http://dabia.net/xe/834444 |
하늘의 양식
요 6:35, 41-51, 성령강림후 열한번째 주일, 2015년 8월9일
3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41 자기가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라 하시므로 유대인들이 예수에 대하여 수군거려 42 이르되 이는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니냐 그 부모를 우리가 아는데 자기가 지금 어찌하여 하늘에서 내려왔다 하느냐 4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는 서로 수군거리지 말라 44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 45 선지자의 글에 그들이 다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으리라 기록되었은즉 아버지께 듣고 배운 사람마다 내게로 오느니라 46 이는 아버지를 본 자가 있다는 것이 아니니라 오직 하나님에게서 온 자만 아버지를 보았느니라 47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 48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라 49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50 이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 51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 하시니라.
기독교와 불교의 차이를 가장 간단하게 설명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반면에 불교는 석가모니가 깨닫게 해준 자기의 불성을 믿습니다. 기독교는 구원이 자기 밖에서 온다고 믿지만 불교는 구원이 사람 안에 들어 있다고 믿습니다. 따라서 기독교 신앙에서는 예수를 향한 믿음이 중요한 반면에 불교에서는 자기에 대한 실존적 성찰이 중요합니다. 저는 지금 기독교와 불교의 우열을 가리려는 게 아니라 기독교의 특징을 설명하기 위해서 비교했을 뿐입니다. 우리는 처음부터 끝까지 예수님에게 집중합니다. 그분에게서 인류와 세상 전체를 구원할 어떤 근원적인 사건이 일어났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오병이어 사건을 중심으로 진술되고 있는 요 6장도 이런 배경에서 예수님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여기서의 키워드는 ‘생명의 떡’입니다. 예수님이 바로 우리가 먹고 생명을 얻을 수 있는 참된 양식이라는 뜻입니다. 요 6:35절이 이렇게 말합니다.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이 말을 들은 유대 군중들이 얼마나 당혹스러워했을지 상상이 갑니다. 41절에 따르면 그들은 예수님에 대해서 서로 수군거렸습니다. 저 친구 맛이 간 거 아냐, 저건 신성모독적인 발언인데, 약간 인기를 끄니까 할 말 못할 다 하는군, 하면서 한 마디씩 했을 겁니다. 이런 논란 가운데서 가장 그럴듯한 내용이 42절에 나옵니다.
이는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니냐 그 부모를 우리가 아는데 자기를 지금 어찌하여 하늘에서 내려왔다 하느냐
유대 군중들은 예수님의 가족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아버지 요셉이고, 어머니는 마리아였습니다. 이들 부부에게는 다른 자녀들도 많았습니다. 예수님은 이 집의 큰 아들이었습니다. 훗날 예수님의 동생들은 초기 기독교에서 지도자 역할을 했습니다. 그중의 대표자가 예루살렘 교회를 책임지고 있던 야고보입니다. 유대 군중들은 자신들과 다를 게 전혀 없는 예수가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당신이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라는 말은 허튼 소리라는 겁니다. 인간의 모든 속성을 그대로 지니고 있는 당신이 인간을 구원할 메시아라는 사실의 근거를 대라는 겁니다.
사실 예수님에게는 유대 군중들이 원하는 메시아로서의 능력은 없습니다. 그런 메시아 능력은 초월적이어야 합니다. 막강한 힘으로 세상의 악을 징벌해야 합니다. 지금 유대인들이 계속해서 예수님에게 요구하듯이 오병이어에 버금가는 기적을 반복해서 행해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메시아에게는 있을 수 없는 인간적인 한계를 그대로 안고 살았습니다. 결국 십자가에 달렸습니다. 십자가에 달린 자를 그리스도, 즉 메시아로 믿는다는 것은 당시 유대 군중들에게는 말이 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양식이라는 말에 동의할 수 없었습니다. 유대 군중들의 입장이 충분히 이해됩니다. 그들에게 연민이 느껴지기까지 합니다. 그들이 억지를 부려서 예수님을 거부하는 게 아니라 합리적으로 믿어지지 않으니 어쩔 수 없는 겁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 걸까요? 어떤 사람에게는 예수님의 말씀이 받아들여지는데, 어떤 사람에게는 그게 왜 안 될까요?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이건 지성이나 도덕성의 문제가 아닙니다. 전혀 준비가 되지 못한 사람처럼 보이는데도 신앙의 진수를 맛보는 사람이 있고, 완벽한 조건을 갖춘 사람처럼 보이는데도 ‘아니올시다.’에 해당되는 사람이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종교 전문가들인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못한 반면에 세리와 죄인들은 오히려 예수님을 받아들였습니다. 이런 일이 생기는 이유는 이것이 하나님에 의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예측할 수 없는 거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오늘 본문 44절에서 예수님은 유대 군중들에게 수군거리지 말라고 충고하면서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은 인식과 믿음의 가장 궁극적인 차원을 가리키는 말씀입니다. 그런 차원이 아니면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도 없고, 받아들일 수도 없고, 믿을 수도 없습니다. 그냥 시늉만 하는 믿음생활에 머물고 맙니다.
예수님을 하늘의 양식으로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즉 하나님이 이끌어주지 않는 사람들을 억지로 이해시킬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도 못하십니다. 어느 단계에 가면 설명과 설득이 아니라 선포만 필요할 뿐입니다. 이제 예수님은 다시 그런 선포를 하십니다. 요 6장의 핵심 주제인 35절의 내용을 오늘 본문 48, 50, 51절에서 반복해서 선포하셨습니다. 자신이 하늘에서 내려오는 살아있는 떡이라고 말입니다. 이 떡을 먹는 자는 죽지 않고 영원히 산다고 선포하셨습니다. 50절만 공동번역으로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하늘에서 내려 온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죽지 않는다.
이 구절이 말하는 하늘에서 내려온 빵은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빵을 먹는다는 것은 빵과 존재론적으로 하나가 된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분리시킬 수 없는 관계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게 믿음일 수도 있고, 세례일 수도 있고, 성찬 참여일 수도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아니 이런 사람만이 죽지 않습니다. 다른 빵을 먹는 사람은 죽습니다. 본몬 요 6:48절은 유대 조상들이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지만 죽었다고 말합니다. 만나는 아무리 먹어도 죽음을 피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아무리 좋은 집에서 살고, 온갖 건강식품을 섭취해도 죽습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빵을 먹는 사람은 죽지 않는다는 이 말씀이 정말 옳은가요? 도대체 죽지 않는다는 게 무슨 뜻일까요?
우선 확실한 것부터 대답을 찾아봅시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어도 실제로 죽지 않는 건 아닙니다. 예수를 믿든지 안 믿는지 모든 사람은 죽습니다. 죽음은 아무도 피할 수 없는 숙명입니다. 이게 얼마나 다행한 일인지 모릅니다. 만약 예수 믿는 사람들이 죽지 않고 영원히 산다면, 이것보다 더 지루한 일은 없을 겁니다. 아무도 이런 불사(不死)의 운명에서 버텨낼 수 없습니다. 그런 상태에 이르면 모두 죽게 해달라고 애원을 할 겁니다. 똑같은 삶의 영원한 반복은 구원이 아니라 저주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예수 믿는 사람도 때가 되어 죽는다는 것은 오히려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이런 말이 이상하게 들립니까? 여기 예배에 참석한 분들 중에서 다른 사람들은 다 죽고 본인만 500년을 더 살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그 운명을 선택할 분이 있을까요?
하늘의 양식인 예수를 먹는 자가 죽지 않는다는 말은 실제로 죽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라 새로운 생명으로 변화된다는 뜻입니다. 그런 생명의 변화가 곧 부활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늘의 빵을 말씀하시면서 6:44절과 64절에서 ‘내가 그를 마지막 날에 살릴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시 살린다는 것은 변화된다는 뜻입니다. 그게 ‘마지막’에 일어납니다. 그 마지막은 죽음입니다. 그 순간이 되면 우리의 몸은 지금의 모든 기능을 잃어버립니다. 숨을 쉬지 못하고, 밥을 먹지 못하고,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지도 못합니다. 우리의 몸을 구성하고 있던 원소가 다시 지구 전체로 해체됩니다. 그 마지막을 통과하지 않으면 새로운 생명, 즉 영원한 생명으로의 질적인 변화인 부활도 없습니다.
너무 아득한 이야기라서 현실로 느껴지지 않는 분들도 있을 겁니다. 죽음을 다시 생각해보십시오. 우리는 죽음 앞에서 모두 절망합니다. 죽지 않으려고 발버둥을 칩니다. 우리의 삶을 완벽하게 지배하고 있는 경제논리도 따지고 보면 죽음에 대한 무의식적인 두려움을 배경으로 합니다. 그런 두려움이 없다면 아무도 돈 앞에서 비굴해지지 않을 겁니다. 거기에 자기의 영혼을 팔아넘기지는 않을 겁니다. 이제 죽음의 이면을 생각해보십시오. 그 순간이 오면 우리는 더 이상 먹을 수 없습니다. 맛도 배부름도 모릅니다. 이 말은 역설적으로 그런 제한성으로부터 해방된다는 뜻입니다. 인간의 모든 탐욕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겁니다. 더 이상 예쁘게 보여야 한다는 강박이 없습니다. 사람들에게 인정받아야겠다는 욕망도 사라집니다. 그래서 죽음을 영원한 안식이라고 말합니다. 그 순간이 기다려지지 않습니까? 오해는 마십시오. 제가 죽음 예찬론자는 아닙니다. 죽음이 분명히 죄의 결과라는 성경의 가르침을 믿고 있습니다. 저는 지금 현대인들이, 기독교인이냐 아니냐를 불문하고, 막연하게 느끼고 있는 죽음에 대한 과도한 공포가 부활 신앙을 왜곡시키고 있다는 사실을 설명하는 중입니다.
다시 예수님의 말씀으로 돌아갑시다. 예수님이 마지막 때 우리를 살린다는 사실이, 질적으로 새로운 생명으로 변화시킨다는 사실이 분명하다면 하늘의 양식인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가 죽지 않는다는 말씀도 논리적으로 옳습니다. 예를 들어 어느 젊은이가 취업 하려고 회사에 이력서를 내고 시험을 치는 중입니다. 신입 사원 모집에 책임이 있는 그 회사 이사로부터 합격이라는 말을 듣긴 했지만 아직 공식적으로 합격증을 받지 못했다고 합시다. 그러나 이 젊은이는 이미 그 회사에 들어간 거와 같기 때문에 다른 회사를 찾아 나설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마지막 때 살린다는 약속을 주님으로부터 받았기 때문에 죽음과 삶의 문제를 더 이상 고민할 필요가 없습니다. 마지막에 일어날 새로운 생명으로의 변화를 기다리면 됩니다. 그 생명의 순간이 기다려지지요? 그게 어떤 생명인지 궁금해지지요?
하늘에서 ...
앞에서 저는 50절 말씀을 공동번역으로 읽었습니다. “하늘에서 내려 온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죽지 않는다.” 죽지 않는다는 것은 마지막 때 다시 산다는 뜻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유대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광야의 만나와 달리 이 빵은 죽지 않게 하는, 마지막 때 다시 살리는 능력입니다. 그가 바로 예수님입니다. 그가 영생의 빵인 이유는 ‘하늘에서 내려’ 왔기 때문입니다. 하늘이라는 단어는 성경이 궁극적인 생명의 세계를 말할 때마다 나오는 메타포입니다.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부활 후 하늘로 올라가셨다가, 종말 때 세상을 심판하고 생명을 완성하기 위해서 다시 오신다고 합니다. 바울은 빌 3:20절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계 21:1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이런 구절을 찾기 시작하면 끝이 없습니다. 예수님이 내려왔다고 하는, 지금 올라가서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있다고 하는 그 하늘은 어디일까요? 무엇일까요? 이 질문에 대답해야만 마지막 때 다시 살린다는 말씀을 더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늘은 마지막 때 완성될 생명이 은폐되어 있는 곳을 가리킵니다.’ 이렇게 말을 해놓고 이게 정확하게 전달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사실 앞에서 저는 가슴이 답답합니다. 이 말을 또 설명해야 한다는 게 설교자로서 딜레마입니다. 언제까지 설명만 하다가 마는 걸까요?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아무리 많이 해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손으로 만질 수 있는 방식으로 설명할 길은 없는 걸까요? 저는 지금 어쩔 수가 없습니다. 언어 자체의 힘만 믿고 전합니다. 성령이 필요 적절하게 여러분 각자를 이 문장의 깊이에 이르도록 도와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그냥 밀고 나갈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 우리의 생명은 완성된 게 아닙니다. 굳이 인간 타락을 가리키는 선악과 문제를 거론하지 않겠습니다. 지금 우리는 이 세상에서 그 어떤 방식으로도 우리의 영혼이 만족할 수 없다는 것을 압니다. 인류 역사에서도 그렇고, 개인의 삶에서도 그렇습니다. 우리는 지금 이리저리 파편처럼 조각난 삶을 버텨내고 있습니다. 돈이 많아도, 지식이 깊어도, 사회적 수준이 높아도 큰 차이가 없습니다. 우리의 생명은 마지막 때 완성될 것입니다. 그때가 되어야 우리는 생명의 진면목을, 우리의 얼굴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때까지는 생명이 은폐되어 있습니다. 참된 생명이 은폐되어 있는 그곳을 하늘이라고 합니다. 하늘이 바로 하나님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기에 그가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양식입니다. 그 양식을 먹는 자는 죽지 않습니다. 영생을 얻습니다. 이미 얻었습니다. 마지막 때의 생명이 선취(先取)되었습니다. 설명이 더 필요합니까? 예수님이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 수 있느냐고, 또 묻고 싶으신가요? 오늘 거기까지 진도를 더 나갈 수는 없습니다. 이제 설교는 끝났습니다. 다만 영적으로 눈이 밝은 분들을 위해서 저는 한 말씀만 더 드리겠습니다. 그런 분들은 말씀을 온전히 믿되 끊임없이 알고 싶은 게 많기 때문입니다.
궁극적인 생명이 은폐된 하늘은 이미 우리 곁에 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말씀하신 것처럼 그 하늘은 바로 앞에 당도해 있습니다. 하늘은 현실을 초월하는 방식으로 여기 현실 안에 내재해 있습니다. 그래서 구약성서 기자들은 하나님의 영광이 세상에 가득하다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 요즘 저는 미야자키의 애니메이션 영화를 보고 있습니다. <바람이 분다>에서 ‘누가 바람을 보았는가?’라는 대사가 나옵니다. 바람은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순식간에 불어옵니다. 바람이 불지 않는다고 해서 바람이 없는 게 아닙니다. 다른 방식으로 존재하고 있는 것을 우리가 놓치고 있을 뿐입니다. 다른 것에 한눈을 팔고 있는 사람에게는 바람이 보이지도, 느껴지지도 않습니다. 들을 귀 있는 사람만이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듯이 바로 우리 눈앞에 와 있는 하늘도 볼 수 있는 사람만 볼 수 있습니다.
임박한 하나님 나라, 생명의 나라, 하나님의 통치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에게 가장 적나라하게 나타났습니다. 예수가 바로 거기에 이르는 절대적인 길입니다. 그가 하늘에서 내려온 양식이라는 뜻입니다. 참으로 놀라운 사실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을 실제로 그렇게 이해하고, 경험하고, 믿은 적이 있으십니까? 예수와 그에게 일어난 일을 단지 소문으로가 아니라 실제로 아십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하늘의 양식을 먹은 사람들이고, 이미 하늘의 생명을 얻은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만나에만 머물러 있던 이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무엇을 얻을까, 잃을까 염려하지 않습니다. 세상 다른 그 어떤 것도 부러워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하늘의 양식인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 되었다는 사실에 자신의 운명을 걸고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용감하게 살아갈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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