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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 김학현 목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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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과 간디>(박홍규 지음 / 들녘 펴냄 / 2015. 5 / 312쪽 / 1만4000 원)
독재 시대보다 더한 겨울, ‘저항하라!’
[책 뒤안길] 다르면서 같은 길을 간 <함석헌과 간디>
김학현(연서교회목사) | 승인2015.06.11 13:36
일 년 전이다. 지난해 6월 10일, 박근혜 대통령은 문창극 서울대 초빙교수를 총리 후보로 지명했다. 이튿날 KBS 9시 뉴스는 문창극 총리 지명자가 교회에서 했던 강연의 녹취록을 공개했다. 문 후보자가 근현대사를 보는 시각에 문제가 있다는 보도였다.
문 후보자는 일본에 의한 식민지배는 ‘하나님의 뜻’이라며, “이조 5백년 허송세월을 보낸 민족”이어서 “(하나님께서) 너희들은 시련이 필요하다”고 했다고 했다. 남북문제에 대해서도, “(하나님께서) 남북분단을 만들어 주셨다”며 “완전 독립을 주셨으면 우리는 공산화 될 수밖에 없었다”고 분단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했다.
함석헌이 친일 반민족주의자?
KBS 보도 이후 보수진영과 진보진영 간에 문 후보자 역사인식에 대한 뜨거운 설전이 오갔다. 이때 <동아일보> 송평인 논설위원은 2014년 6월 24일자, ‘함석헌을 문창극처럼 편집하면’이란 칼럼에서 문 후보자를 함석헌의 역사인식에 빗대며 아무 문제없다고 논했다.
함석헌의 <뜻으로 본 한국 역사>를 인용하며 함석헌을 “친일 반민족주의자로 만들어 보겠다”고 말했다. 함석헌은 조선이 망한 것은 하나님의 분노 때문이고, 일본 지배도 받아야 할 교육이 있기 때문이며, 식민지 근대화론까지 제기했다. 그가 인용한 부분은 아래와 같다.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고 민족자결주의에 따라 많은 민족이 해방이 돼도 우리는 빠졌고, 3·1운동을 일으켜 민족 역사에서 전에 못 보던 용기와 통일과 평화의 정신을 보였건만 그것으로도 안 됐다. 받아야 할 교육이 아직 있고, 겪어야 할 시련이 또 있다.”
“당초에 일본이 올 때 먼저 신작로를 내고, 철도를 깔고, 토지를 측량하고, 농사 개방을 하고. 광산을 캐내고, 어업을 장려하고, 공업을 일으키고, 은행을 세우고, 각 방면으로 자본주의화에 힘썼다. 그리하여 오랫동안 양반들의 착취로 원시상태를 못 면했던 경제에 처음으로 근대적인 발전이 시작됐다.”
젊었을 때 <씨알의 소리> 발행인, 민중운동가 정도로 알고 있던 함석헌 선생의 역사인식 문제는 그리 알고 있는 게 없는 터라, ‘함석헌과 문창극의 역사인식이 같다고?’ 하는 정도로 지나갔다. 그러나 <함석헌과 간디>(들녘 펴냄)을 읽으며 함석헌 선생의 ‘하나님의 뜻’으로 읽히는 섭리역사, 고난의 역사에 대하여 더 심도 있게 다가갈 수 있었다. 저자는 문창극 사태가 저작의 동기라고 말한다.
우리의 고난 역사를 ‘하나님의 뜻’으로 보았다는 관점이 함석헌과 문창극이 같으니 둘의 역사관은 본질적으로 같은 것일까. 결론적으로 말하면 그렇지 않다. 역사를 ‘하나님의 뜻’으로 읽는 것은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의 역사관이다. 그런 맥락에서 함석헌과 문창극은 닿아 있는 듯 보인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이란 단어를 같이 사용했을 뿐, 하나님의 뜻에 대한 이해나, 고난의 의미를 적용하는 데는 큰 차이가 있다. 특히 씨알(민중)을 대하는 태도는 정반대다. 기득권과 승자의 위치에서 보는 ‘하나님의 뜻’과 보편적 진리의
근원자로서의 ‘하나님의 뜻’은 극과 극이다.
일 년 전 문창극 때문에 친일 반민족주의자로 몰릴 뻔한 함석헌, 왜 하필 지금 함석헌인가. 저자는 ‘봄이 왔지만 봄 같지 않다(春來不以春)’며 민주주의는 봄을 맞았지만 문익환이 겪었던 고난의 겨울로 돌아가고 말았다고 말한다. 함석헌이 살아낸 고난의 독재 시대보다 지금이 더 추운 겨울이어서 더 함석헌이 절실하다고 말한다.
‘겨울이 오면 어찌 봄이 멀겠는가’
학자, 종교인, 언론인, 지도자 무엇보다 인간의 모범이었던 함석헌을 숭배하기보다 비평함으로 진가를 알아보자고 제안한다. 영국의 비숍이 조선을 ‘더럽고 게으르다’고 한 것과 함석헌이 ‘썩을 대로 썩은 이씨 조선’이라고 한 게 같은 뜻이 아니다. 비숍은 제국주의적 발상에서 한 말이고, 함석헌은 고난 받는 이의 역사적 관점과 세계를 아우르는 종교적(기독교) 신념에서 한 말이다.
마찬가지로 문창극과 함석헌의 ‘고난의 역사’나 ‘하나님의 뜻’은 전혀 다른 문제가 된다. ‘독재도 신의 섭리이고, 침략도 신의 섭리이고, 억압도 신의 섭리’라고 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책은 함석헌을 알기 위해서는 간디를 알아야 한다는 점에서 함석헌과 간디를 함께 비평하고 있다. 책은 영국의 시인 셸리의 <서풍>이란 시로부터 출발한다.
시는 “오 거친 서풍, 가을의 숨결이여”로 시작하여 “예언의 나팔을 불어라. 오오, 바람이여! 겨울이 오면 어찌 봄이 멀겠는가”로 끝난다. 셸리는 반체제와 혁명으로 일구는 봄은 비폭력이란 도구를 사용해야 한다고 말한다. 간디는 셸리와 톨스토이에게서 비폭력을 배운다. 당연히 함석헌도 간디나 셸리로부터 비폭력 사상을 받아들인다.
저자의 말처럼, “셸리, 간디, 함석헌은 살았던 시대와 나라는 달랐지만 세 사람 모두 위대한 생태주의자 혁명가였다. 인류의 스승이자 미래의 예언자”였다. 간디는 사회사상가 존 러스킨에게서 사회개혁사상을, 톨스토이에게서 진실과 새로운 삶의 형식을 배운다. 함석헌은 우찌무라 간조에게서 무교회주의를, 디오게네스에게서 야인정신을, 신재효에게서 아나키스트 기질을, 샤르뎅에게서 진화론적 기독론을 배운다.
간디와 함석헌은 선배와 후배처럼 연결되어 있다. 인도에 간디가 있다면 한국에 함석헌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둘이 모든 면에서 같지는 않다. 종교가 다르고 살아낸 나라가 다르다. 책은 “왜 지금 우리에게 함석헌과 간디가 문제인가?”라는 질문을 통해 그들의 삶을 분석하고 생애와 사상의 형성 과정, 가르침, 세상과의 만 남, 각 분야에 대한 관점 등을 짚어준다.
셸리는 파괴자로서의 ‘서풍’을 낡은 독재나 악습을 파괴할 수 있는 혁명의 힘으로 묘사하며, 비폭력 혁명을 통해 정의와 선이 넘치는 이상국가가 가능하다는 것을 노래했다. 파괴자가 곧 보존자가 되는 것이다. 이는 헤겔의 정반합 이론처럼 서로 상호보완적이다. 마찬가지로 함석헌이 ‘고난의 역사’를 ‘하나님의 섭리’로 이해하면서도 <뜻으로 본 한국 역사>나 <씨알의 소리>를 통해 민중운동을 외친 것도 같은 원리다.
“왕조나 일제나 독재나 모두 고난의 역사이긴 매한가지다. 그러니 당연히 반항해야 했다. 함석헌처럼 불타는 반항정신을 소유한 자들은 지극히 당연히 반항해야 했다. 물론 함석헌도 반항했다. 그러나 다수는 반항하지 않았다. 특히 그것을 신의 섭리라고 믿는 기독교인, 종교인들은 반항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과 마찬가지로 역사를 신의 섭리라고 믿었던 함석헌은 반항했다.”- <함석헌과 간디> 20쪽
책을 읽으며 지금이야말로 함석헌의 비폭력 저항운동이 필요한 시대란 생각을 했다. 송평인 논설위원 같은 이는 문창극과 같은 맥락으로 함석헌을 싸잡는다. 김종필은 5·16 비판에 발끈하여 ‘정신분열증 걸린 노인’으로 비하했다. 함석헌이 기독교에 근거한 민주주의나 전체주의 혹은 미국이나 일본을 두둔하는 듯한 ‘하나님 섭리론’ 등으로 격하될 수도 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가 주장한 비폭력 저항운동이다. 저항하지 않는 우민 국가는 망한다. 지금 가장 필요한 것은 일방통행 박근혜 정부를 향한 비폭력 저항이다. 민주주의나 의회주의로 포장된 국민 우롱 독재를 향해 국민이 들어야 할 깃발은 셸리가, 간디가, 함석헌이 치켜들었던 저항의 깃발이다. ‘겨울이 오면 어찌 봄이 멀겠는가’
※뒤안길은 뒤쪽으로 나 있는 오롯한 오솔길입니다. 책을 읽으며 떠오르는 생각의 오솔길을 걷고 싶습니다. 그냥 지나치면 안 되는 길일 것 같아 그 길을 걸으려고요. 함께 걸어 보지 않으시겠어요.
김학현(연서교회목사) nazunja@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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