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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막4:26-2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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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경형 목사 |
참고 : | 궁극교회 주일예배 |
4장 26절-27절: 또 가라사대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이 씨를 땅에 뿌림과 같으니 저가 밤낮 자고 깨고 하는 중에 씨가 나서 자라되 그 어떻게 된 것을 알지 못하느니라.
본문 앞에 보면 헤아림이 있다. 어떤 마음을 가지고 헤아리느냐? 듣느냐? 하나님의 나라는 땅에 씨를 뿌림과 같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나라가 자기 마음 밭에 씨가 돼서 떨어지면 씨는 생명이 있는 거니까 자기 속에서 그 생명이 자라게 되는 거다.
우리는 씨 없는 말씀을 받으면 안 된다. 그러면 씨 있는 말씀이 뭐냐? 보편적으로 볼 때 주일마다 듣는 하나님의 말씀이 씨가 있는 말씀이 있고, 씨가 없는 말씀이 있다. 다시 말하면 생명이 있는 말씀이 있고, 생명이 없는 말씀이 있다.
그러면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 뜻’ 하면 하나님의 사상 정신 소원 목적이 우리의 신앙화로 되는 것인데, 우리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추구성 지향성, 우리에게 뭘 해 주고 싶어 하시는 하나님의 취미성, 인간도 누구에게 뭘 해 주는 취미성이 있는 것처럼 그런 것을 말하는데 이게 성경 속에 담겨져 있다. 그 사상 정신 이해타산 소원 목적 판단과 평가성이 하늘의 것으로 정확하기 들어가는 게 하늘의 씨요 생명이다. 쉽게 말하면 하늘의 정신이요 천국복음의 정신이 씨다. ‘예수님은 천국복음, 하늘나라를 말씀하시더라.’
예수님께서는 당시에 강대국 로마의 정치세계의 누구의 말이 어떻다거나 세계적인 유명한 사람의 말이 어떻다는 등의 말씀은 절대로 안 하셨다. 이 땅에서 선악과 따먹고 타락되고 저주받은 그 지식의 소원 목적으로 된 이 땅의 모든 사고방식을 말씀하신 것이 아니다.
우주만물의 산천초목 속에는 학적으로 말하면 과학적 법칙이라고 하겠지만 그러면 하나님께서 왜 그 물질이치 속에 그런 법칙을 심어놓은 것이냐? 영적 이치와 도리를 깨닫게 해 주려고 그렇게 해 놓은 것이다. 그래서 ‘지키고 다스리고 정복하라’ 하는 것이다. 생명과를 먹은 사람은 그 이치를 잘 활용하게 돼 있다.
하나님의 나라는 땅에 씨를 뿌림과 같다고 하는 건 비유적으로 말하면 자기 마음은 밭이니 하나님 나라의 생명의 말씀이 자기 마음 밭에 떨어지면 그 말씀은 생명이 있기 때문에 자기 속에서 그것이 자라게 돼 있다는 거다.
보면 식물도 씨가 땅에 떨어지면 그 뿌리가 땅속으로 내려가고, 내려가느니 만큼 위로 솟아 올라온다. 또 위로 솟아 올라오려면 뿌리가 땅으로 내려가야 한다. 뿌리가 내려가지는 않고 위로만 올라오면 바람이 살짝만 불어도 그냥 넘어진다. 그래서 이치적으로 가만 보면 세상은 다 넘어가도 자기는 안 넘어간다면 그 사람은 뿌리가 상당히 깊이 박힌 거다. 이런 사람은 온 세상에 와서 흔들어도 안 넘어진다.
산에서 나무할 때 산 소나무를 자른 후에 그 뿌리를 아무리 흔들어도 뽑히지를 않는다. 그 뿌리를 파내기 전에는 못 캔다. 그런데 그 뿌리가 썩으면 깊이 박혀있어도 발로 ‘탁’ 차면 썩은 것은 ‘툭’ 하고 날아간다. 그런데 겉으로 보기에 썩은 것 같아서 그 뿌리를 위에서 흔들면 흔들거리기는 하는데 아무리 흔들어도 안 뽑히는 것도 있다. 이건 완전히 썩지 않았거나 뿌리가 깊이 박혔다는 것이다. 뽕나무 뿌리는 노란 뿌리가 깊이 들어간다. 이건 정말 잘 안 뽑힌다. 성경에도 비유가 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으면서 교회에 일 년 이 년 십 년을 다녀도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이 즉,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이치로서 된 믿음으로 들어간 그것이 자기를 구원하는, 다시 말하면 그것이 하나님의 온전한 성품으로 되는 것인데, 더 쉽게 말하면 그것이 예수님처럼 닮아가는 건데 그게 없는 사람이 많다. 수십 년 예수를 믿었어도 그 사람 입에서 나오는 것이 예수 안 믿는 사람들이, 대중 무리들이 원하는 가치판단 평가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있다. 이건 예수 잘못 믿는 거다. 헛 믿은 거다.
그래서 교회에서 인도자들은 그런 교인들이 충성봉사를 하기 전에, 또는 충성봉사를 하는 것만큼 생명의 뿌리가, 말씀의 뿌리가 깊이 박히도록 마음을 기울여야 한다. 그런데 보통 보면 세상에 속한 기독교, 또는 세상에 속한 믿음, 또는 세상에 속한 교회들은 충성봉사 그 자체가 잣대가 돼서 그런 사람의 본을 자꾸 따르라고 한다.
그러면 이건 기준이 어디로 간 것이냐? 예수 믿는 기준이 어디로 가 버렸느냐? 예수님을 믿으면 예수님이 기준이 돼야 하는데 왜 돈 많고 부자로 살고 물질적 충성봉사를 하는 사람이 기준이 되느냐? 그런 것이 예수 믿는 기준이 될 것 같으면 예수님께서 부자청년을 데리고 와서 왜 그 청년을 기준으로 세우지 않고 재물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나를 따르라고 했느냐?
예수 믿으면 부자 된다? 그렇다면 안 믿는 사람이 부자 된 것은 믿어서 부자가 된 것이냐? 이치도 아닌 말을 하고 있다. 그런데 멍청한 교인들은 따지지를 못한다. 마귀가 예수님에게 와서 세상을 얼마나 자랑을 했느냐? 그런데 예수님이 그 세상을 욕심을 품었느냐? 도대체 예수님의 시험을 어떻게 보는 거냐?
예수 믿는 사람들이 왜 거짓 종들에게 넘어가고 이단자들에게 넘어가는 거냐? 믿는 이치가 틀려서다. 오늘날 신 천지가 이단이라고 그러는데 그래, 맞다. 너희들 말대로 맞다면 정신을 차리고 말씀의 이치를 교인들에게 바로 가르쳐주면 신 천지가 오던 구천지가 오던 무슨 상관이냐? 그들이 와서 들으면 사람이 바껴서 돌아가는 거고, 듣기 싫으면 갈 것인데. 우리교회에 신 천지가 들어오면 안 됩니다? 신 천지가 표딱지가 붙었느냐? 도둑놈이 명찰 붙이고 오느냐? 사기꾼이 명찰 붙이고 들어오느냐? 얼마나 웃기고 얼마나 저질인지?
성경을 보면 예수님 앞에는 별의 별 사람이 다 있다. 자기를 잡아 죽이려는 사람도 거기 앉아있다. 바리새교인들, 헤롯당원들 사두개인들 그게 다 이단자들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바로 가르쳐서 그들의 입을 다 막아버렸다.
예수님은 신앙이라고 하는 그 신앙의 중심을 보시고 ‘네가 신앙이 아니다, 신앙이다’ 하고 판단을 하신다. 예수님이 기준이다. 천국사상이 기준이다. 그런데 예수님 앞에 온 사람들은 세상이라고 하는 그 때 당시의 로마 강대국을 의지하고 있고 이방나라를 의지하고 있다. 오죽하면 제사장이 ‘우리의 왕은 가이사라’고 했겠느냐? 얼마나 썩어 빠졌느냐?
우리 기독자들은 자기의 왕이 누구냐? 다시 말하면 누가 자기를 통치하고 다스리는 것이냐?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이치이신 주님이시다. 주님이 바로 우리의 구원이시다. 구원의 주님의 다스림을 받는 자들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이치로 들어가 있다.
‘오, 주님을 사랑합니다’ 하면 주님이 올 것 같으냐? 인조사랑 썩어빠진 사랑인데? 믿는 사람들이 자기 뜻을 세워놓고 자기의 그 뜻을 들어달라고 하며 그런 말을 하고 있다. 주님은 만능의 능력자니까 세상적인 자기 뜻을 들어달라고 한다.
예수를 안 믿는 사람들이 나무 밑에서 비는 것도 다 자기 뜻대로 해 달라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를 믿는 사람이 그러는 것은 겉은 예수 믿는 자이지만 속은 안 믿는 자와 똑같은 것이다.
예수 믿는 사람이 운영하는 식당에 보면 ‘처음은 미약했으나 나중은 창대케 되리라’ 또는 ‘이 집의 주인이 예수님이시고’ 라는 성경구절을 붙여놓은 곳이 있다. 제가 주인이 돼 놓고 자기 뜻대로 해 달라고 하며, 예수님을 자기 뜻을 이뤄주는 종으로 삼고 있으면서 그렇게 하고 있다. 그러니 명찰은 예수 믿는 사람인데, 집사고 장로고 목사인데 속이 되기는 안 믿는 사람과 똑같다. 이 말을 들을 때 이단인지 삼단인지 백단인지 예수 믿는 자기를 좀 헤아려 봐라.
지금 현재 자기의 생각 사상, 사상에도 질이 있다. 비진리적 사상이 있고, 진리의 사상이 있다. 자기의 정신 사상 소원 목적이 자기 속에서 지금 분별이 되느냐? 뭘로 분별을 할 거냐? 주님이 척도요 기준이다. 하나님의 속성이 기준이다. 그런데 예수 믿는 사람이 하나님의 속성을 모른다면 이게 뭐냐? 그러니 예수 믿는 자기의 사고방식이 ‘이렇게 가다가 떨어져 나가겠구나. 새의 밥이 되겠구나, 짐승 밥이 되겠구나’ 하는 그걸 모르고 있다.
일반적으로도 사상적으로 검토하면 공산주의 사상과 민주주의 사상이 있는 것인데 예수 믿는 사람이 왜 천국사상과 세상사상을 모를까? 구하는 것을 보면, 기도를 들어보면 그 사람의 속에 뭐가 들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의 나라는 땅에 씨를 뿌림과 같다. 씨가 뿌려지면 그 씨는 살아서 올라온다. 성장되고 확장이 된다. 예수 믿은 지 얼마나 됐느냐? 그만큼 오래 믿었으면 영능의 기능 지능 면에서 성장이 되고, 하나님의 지혜지식과 도덕성적인 면에서, 하나님의 옳음 면에서 성장이 되고 그만큼 이치적으로 확장이 됐느냐? 안 됐으면 병들었다. 아니면 씨가 생명이 있는 씨가 아니었거나.
삶은 씨와 안 삶은 씨가 눈으로 구분이 되느냐? 심어봐야 한다. 그런데 시장에서 보면 나쁜 사람들은 햅 팥과 묵은 팥을 섞어놓고 판다. 그러나 모양새는 똑같다. 묵은 팥은 아무리 삶아도 안 퍼진다. 여기도 그런 사람이 많을 것 같다. 예수를 수십 년 믿어도 하나님의 입맛에 맞도록 즉, 입맛이란 하나님이 느낌의 기분에 그 말이다. 하나님이 입맛에 맞도록 바꿔져야 하는데 도무지 사람이 바꾸어지지 않고 빠글빠글 하다. 소다를 집어넣어도 소용이 없다. 예수 믿는 사람은 심성이 고와야 한다. 하나님은 그걸 다 보신다.
하나님의 말씀은 생명이 있어서 이 씨앗이 자기 마음 밭에 떨어지면 그것이 자꾸 역사를 한다. 양심을 찌르고, 다른 짓을 할 때 ‘내가 이런 짓을 하면 안 되지’ 하는 게 살아서 움직이는 거다. 살아있는 씨가 있으면 언제 뚫고 나와도 뚫고 나오게 돼 있다. 그러나 씨가 죽어있으면 그게 안 된다.
말씀의 씨앗이 사람의 마음 밭에 뿌려지는 것인데, 그 다음에는 밤낮 자고 깨고 하는 중에 씨가 자란다. 밤과 낮이 교체되는 것처럼 예수 믿으면서 삶의 형편이 올라갔다 내려갔다, 어려워졌다 좋아졌다 한다. 그게 밤낮이다. 낮은 활동을 할 수 있는 좋은 시절이 되겠고, 밤은 환난의 시절이다.
개인적으로 보면 자기 생활이 올라갔다 내려갔다, 돈이 있다가 없다가, 몸이 건강했다가 병들었다가, 어려워졌다 좋아졌다가 이렇게 하는 동안에 자기도 모르게 자기 속에서 씨가 자라는 것이다.
밤낮 자고 깨고 하는 이건 계시의 말씀이니 낮은 좋은 거고, 밤은 어려운 생활이나 예수 믿기 어려운 시기를 말하는 건데 어려운 시기일지라도 그러나 신앙심은 갖고 있는 거다. 가난해도 예수를 믿을 수 있는 거고, 부자여도 예수를 믿는 데는 상관이 없는 거다. 그러니까 자기에게 어떤 상황이 와도, 자기의 형편 좋았던 나빴던 그건 변하면 안 된다. 그러는 과정에서 자기의 신앙이 자라는 거다.
씨를 심어놓으면 햇볕이 났다 비가 왔다 바람이 불었다 한다. 우리가 신앙생활 할 때도 그런 것인데 그럴 때 늘 깨어 있어야 한다. 신앙 믿음의 이치적으로 깨어 있고, 영적 면에서 눈이 밝고 분별이 되어 들어가야 한다. 그러는 와중에 자기의 신앙이 얼마만큼 커지고 자랐는지 인간 자기는 잘 알지를 못한다는 것이다.
자기가 예수 믿은 지 얼마나 되었느냐? 자기 믿음이 얼마나 자랐는지 스스로 아느냐? 잘 모른다. 안 믿는 사람과 비교하면 내가 믿는다는 건 알겠는데 자기 속의 소원 목적이나 취미 추구 지향성 간구성 이것이 예수를 안 믿는 사람과 같으냐, 다르냐? 내가 예수 믿으면서 예수님의 소원 목적과 같은지 다른지는 자기가 생각을 할 수 있는 건데 그것마저도 분간을 못한다면 어떻게 되느냐?
하나님의 자녀라면 하나님의 말씀의 뜻을 갖고 있어야지 하나님의 자녀이면서 세상 사람들이 다 원하는 뜻을 갖고 있으면 이게 뭐냐? 그러니까 이건 마귀가 그 사람을 교회로 잡고 들어와서 교회에서 장난질을 하고 있는 것이다.
교회 목사님의 말씀은 의와 불법, 선과 악, 빛과 어두움, 세상과 천국, 임시적인 것과 영원한 것을 분명하게 쪼개는 것이다. 이게 솔로몬의 지혜다. 죽은 것과 산 것을 가려내는 게 솔로몬의 지혜다. 이건 솔로몬만 가질 수 있는 게 아니다.
솔로몬이 갖고 있는 지혜와 우리 주님이 갖고 있는 지혜와는 같은 거다. 솔로몬에게 그 지혜를 주님이 주신 것이다. 신앙사상 면의 사망과 생명을 갈라낼 수 있는 것은 주님이 주신 것이다. 우리교회 성도들은 그걸 알고 있어야 한다. 그렇게 하려면 하나님의 것이 기준이 돼야 한다. 인간의 사고방식과 인간의 기존지식을 가지고는 못 갈라낸다. 불가능이다. 수준적으로 말하면 땅의 수준과 하늘의 수준이다.
우리는 지식 면에 죽은 지식과 산 지식을 분별해 내고, 영적 면에서 누가 어떤 활동을 할 때 활동의 목적을 보고 ‘이건 악령이다. 이건 성령이다’ 하고 들어가는 거다. 옳은 진리지식을 바로 가져야 예수 믿기가 쉽고 편하고 하나님 쪽에서 인정이 된다. 자기 쪽에서 아무리 ‘오, 사랑. 주님이시여, 감사합니다. 좋으신 하나님’ 백 날 해도 그건 소용이 없다.
자기가 그만큼 하나님을 사랑하고 의지하느냐? 말씀의 옳은 이치를 자기 속에 기준으로 세워라. 그게 주님이 자기에게 왕이 되는 거고 주님의 치리를 받는 거다. 주님의 치리를 받는지의 여부는 그의 언행심사에서 나타나는 거다. 감정과 흥분이 아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흥분을 잘하면 귀신에게 홀리기 쉽다.
얼마나 커지고 자랐는지 인간 자기는 잘 알지 못한다. 그리고 자라는 이치가 자라는 나무는 땅과는 점점 멀어진다. 그러면 하늘을 향해 태양을 향해 자라는 거다. 쉽게 말하면 하나님을 향해서 속성적으로 자라고 있는 거다. 그건 느낄 수가 있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자랄 수 있는 신앙이란 영적 헤아림을 전제하고 말하는 거다. 그게 아닌 세상적 육적 비진리적 옛사람 부패성적 마귀적인 교회의 가르침에는 땅과 자꾸 같아진다. 위로는 못 자라고 자꾸 땅과 같아진다.
다시 말하면 예수 믿으면서 세상에 있는 소원 목적을 자기에게 이뤄달라고 하게 되면 땅의 것은 임시적이고 현상적인 것이고 불에 타고 시간 지나면 변질되고 변동되고 바람 불면 날아가고 지진 나면 가라앉는다. 지상에 있는 것은 안 그런 것은 하나도 없다. 말하자면 지상에 있는 동안 이용하고 활용하고 것 것뿐이지 그것을 신앙 목적적으로 갖겠다고 하면 그게 쓰러질 때 너도 쓰러진다. 그러니까 이걸 다른 말로 하면 그런 신앙은 땅에 붙은 앉은뱅이다. 앉은뱅이는 땅에 붙었구나. 땅을 놓지 못하는구나.
앉은뱅이 신앙은 환경의 지배를 받고 산다. 환경이 ‘이래라’ 하면 이러고, ‘저래라’ 하면 저런다. 더 쉽게 말하면 그의 신앙사상이 진리를 따라서 아브라함의 걸음걸이처럼 가는 게 아니라 돈을 따라서 돈의 지배하에 사는 게 땅에 붙은 신앙이라. 자라지 못한 신앙이라. 계:에 보면 독수리가 날아가며 땅에 거하는 자들에게 즉, 땅에 붙은 신앙자들에게 화가 있다고 했다. 재앙이라, 하나님의 형벌이라 그 말이다.
사람이 이치에 어두우면 미련해진다. 미련해지면 자기의 그 미련성이 어디를 가도 울게 되어 있다. 그 자체가 그렇다. 사람이 미련하게 되니 그 미련성이 어디를 가도 벗겨지지를 못한다. 그런 가르침에는 즉, 거짓 종들, 이단자들, 배로 하나님을 삼는 자들의 그런 가르침에는 자기의 신앙이 자라지 못한다.
자기가 어느 교회에 다녔는데 신앙이 못 자랐으면, 분별이 안 됐으면 구별 분별되는 생명의 말씀이 있는 교회를 빨리 찾아가라. 이단성적인 육적인 부패성적인 가르침에 있으면 너는 이용당하고 죽는 거다.
하나님을 바로 믿었느냐? 그러면 자기의 성격도 고쳐지고 자기의 성질도 고쳐지고 일반적으로도 고쳐져 나간다. 사람이 진리이치에 세밀적이 되고 과학적이 되고 사람이 아주 자상하게 되고 사랑이 풍부하게 되고 봉사적인 정신이 자원적으로 나온다. 헛 생활을 안 한다. 그러니 하나님의 사랑이 사람으로 통해서 자기에게 풍부하게 온다.
신앙 믿음이 자라지 못하면 현재 자기의 그 위치 그 수준 그 환경에서 자기가 얼마나 살 런지 모르나 그건 다 빼앗긴다. 생명적으로 자라는 쪽으로 되는 게 아니라 요단강에 쓸려서 사해바다로 내려가면 다 죽는 것처럼 사망 쪽으로 죽음 쪽으로 다 빼앗긴다.
나의 삶은 개인적으로 몇 살까지다? 아니다. 그건 네 계산이다. 실질적으로 자기가 언제 죽을지 모르는 거다. 죽음은 자기가 예측을 하면 안 된다. 살아있는 동안에 최대한으로 말씀에 의해 움직여야 한다. 안 그러면 다 빼앗긴다. 이미 사망성공으로 만들어 놓은 것도 문제지만 앞으로 산다는 것도 네 일생이 다 빼앗긴다. 이걸 다른 표현으로 하면 녹두나 콩 속을 바구미가 야금야금 파먹으면 껍데기는 그대로 있는 것 같으나 물이 담아놓으면 다 뜬다. 그러니 바구미들의 집이 된 것이다. 그건 먹을 수가 없다. 쓸모가 없다.
지금 ‘좀과 동록’ 하는 이게 비유다, 나이적으로 자기가 그만큼 먹었으면 자기 속이 그만큼 차 있어야 하는 건데, 뭔가 배우고 듣고 아는 면이 지혜로운 면이 차 있어야 하는 건데, 학생들 같으면 계속 오락으로 시간을 다 보내면 오락 바구미가 그 안을 다 파먹어서 속이 텅 비는 것처럼 세상성적인 사고방식과 그 정신이 너를 다 파먹는다.
인도자들은 이걸 볼 줄 알아야 한다. ‘이거 얼마 안 가면 못 쓰겠구나. 사람 꼴이 안 되겠구나’ 하는 것을 볼 줄 알아야 한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를 부르실 때 젊은이를 불렀다. 나이를 먹었어도 젊은이답게 말씀에 사로잡혀 있는 힘이 넘치면 그 사람은 젊은이다. 그래야 그 사람의 미래가 밝다. 사람이 건설적이고 확장이 들어있고 사랑이 들어있고 행복도 들어있고 영능의 실력도 들어있고 만백성을 가르칠 수 있는 왕권이 들어있다.
그러면 그런 사람이 굶겠느냐? 거지가 되겠느냐? 하나님의 전권대사가 되는 건데? 한국의 전권대사는 월급이 어디서 나오느냐? 국민이 국가를 통해 나온다. 세상의 만물의 이치가 그렇다. 인간사 이치가 그렇다. 하나님 앞에 일꾼은 하나님께서 책임을 지신다. (계속)
김경형목사님이 교역자 신학생을 대상으로 20여년 동안 매 주 정례적으로 진행하는 신학 및 성경연구 모임을 통해 영원 전에 하나님의 의지세계에서 인간구원을 설정하게 된 원인과 동기와 목적을 깨닫고 하나님의 본질의 신앙으로 나가는 주의 종들이 누룩처럼 퍼져나가고 있습니다.
참석하실 분은 031-207-5159, 또는 010-8886-5159로 문의해 주세요.(평신도도 참석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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