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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막4:28-3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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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경형 목사 |
참고 : | 궁극교회 주일예배 |
4장 28절-32절: 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되 처음에는 싹이요 다음에는 이삭이요 그 다음에는 이삭에 충실한 곡식이라 열매가 익으면 곧 낫을 대나니 이는 추수 때가 이르렀음이니라 또 가라사대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어떻게 비하며 또 무슨 비유로 나타낼꼬 겨자씨 한 알과 같으니 땅에 심길 때에는 땅위의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심긴 후에는 자라서 모든 나물보다 커지며 큰 가지를 내니 공중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만큼 되느니라.
식물이 스스로 열매 맺지 땅이 어떻게 스스로 열매를 맺느냐? 그런데 본문은 ‘땅이 스스로 열매 맺되’ 라고 했다. 그러니 말이 안 맞는다. 그러면 주님이 모르고 이 말씀을 하신 거냐? ‘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되’ 한 이걸 계시적으로 어떻게 생각을 해야 하느냐?
그러면 ‘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되’ 했는데 이건 말이 안 되니까 땅이 아니라 ‘식물이 스스로 열매를 맺되’ 라고 고치면 어떻게 되느냐? 그렇게 되면 계시가 안 나온다. 여기서 땅은 사람의 마음을 염두에 두고 비유적으로 하는 말씀이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싹이요’: 노랗게 싹이 나오면 참 신성하게 보인다. 행여나 벌레가 와서 먹을까, 행여나 들짐승이 와서 짓밟을까 얼마나 걱정이 되는지?
보통 꽃씨는 심을 때 살짝 묻는다. (씨 두께보다 세 배 깊이로 묻는다) 씨를 심고서 보통 며칠이 되면 싹이 나오는 거냐? (일주일 정도다) 그런데 그 흙덩어리는 씨의 무게보다 몇 배가 무겁다. 그 작은 씨가 돌을 이고 올라오는 것을 보면 생명력이 참 강하다.
어떤 식물은 자기 위에 있는 돌이 워낙 크면 그 씨가 돌을 들 수는 없으니까 옆으로 삐져서 올라온다. 새싹이 그렇게 힘이 있다. 다시 말하면 생명력이라는 게 이렇게 힘이 있구나. 생명을 가졌으면 힘이 있구나.
그 작은 씨가 빗물을 먹고 자란다는 게 참 신기하다. 씨는 입도 없는데 어떻게 숟가락도 없이 빗물을 먹느냐? 죽은 씨는 나지도 않고 크지도 않는다.
또 ‘다음에는 이삭이요’ 그랬다. 그러니까 언제 그렇게 잘 자랐는지 낮이 가고 밤이 가고 비 맞고 눈 맞고 바람 맞고 햇빛 쬐이고 하는 사이에 죽지 않고 잘 이겨내서 어느 새 이삭으로 여물어서 고개를 숙이고 있다.
곡식은 여물어지면 고개를 숙인다. 나무의 열매도 밑으로 열린다. 그러나 알곡이 덜 여물어졌거나 하면 가라지와 함께 고개를 쳐들고 있다. 피라고 하는 가라지는 추수 때가 되어서 익었어도 고개를 빳빳이 쳐들고 있다. 그리고 바람이 불면 고개를 쳐들고 있는 곡식은 먼저 흔들거린다. 우리를 깨닫게 해 주려고 이렇게 잘 가르쳐 놓았다.
알곡으로 되어지는 자는 세월이 흐를수록, 예수를 믿어갈수록 더욱 더 충실한 알곡이 된다. 이렇게 되니 사람을 많이 깨닫고 자기 자신을 알고 하니까 일반적으로도 사람이 겸손해진다. 신앙의 겸손은 말씀에 순종을 잘하는 자가 겸손한 자다. 커지는 자는 겸손으로 커진다. 교만하면 하나님의 은혜가 없어진다. 말씀에 순종을 하는 자는 세월이 흐를수록 겸손해지고, 가라지는 세월이 흐를수록 고개를 쳐들고 까불거린다.
29절: 충실하게 잘 여문 곡식에 낫을 대어 추수를 해서 창고에 넣는 것처럼 잘 여문 신앙의 사람의 마지막은 천국으로 들어간다. 이걸 현재로 보면 신앙이 잘 여문 성도를 하나님께서 당신의 가슴 속에 넣는구나. 사랑의 극치의 대상으로서 귀하고 아끼고 싶고 해서 하나님의 품 안으로 들인다. 하나님 당신이 생각할 때도 그 사람이 참 좋다 그 말이다. 현재에도 그 애정권 생명권 진리권 안에 있도록 해야 한다. 그러나 그게 아니면 그런 정신적 사상적 신앙의 세계의 라인 밖으로 나가게 된다. 이거는 안 된다.
성경에 ‘우리, 너희, 저희, 그들’이 있는데 예수님의 애정권 사랑권 치리권 생명권 안에서 자라는 사람들을 예수님은 ‘우리’ 라고 한다. 신앙의 세계에서 질적 본질을 놓고 볼 때 이질적 신앙사상들이 있으므로, 세상적인 사상들이 있으므로 이걸 분명히 알아야 한다.
교회 전체가 세상적으로 나갔다면 그 교회는 하나님의 사랑과 애정과 진리생명의 통치권 밖에 있는 교회다. 그런 경우 아무리 예수이름을 부르고 충성봉사를 열심히 해도 그것은 예수님과는 관계가 없다. 이룰구원적으로 말하자면 영능의 실력적으로 자라는 건 아무 것도 없다. 이건 세상이 기준으로 돼 있는 거다.
우리는 속성적으로 주님으로 기준이 돼 있어야 한다. 그래야 어느 시대 어느 환경 어느 처소에서 어떤 일을 당해도 그걸 이기는 사람이 된다. 이런 사람은 그 속의 신앙정신이 지혜롭게 들어있어서 옳은 것으로 이겨나간다. 이 사람이 참 무서운 거다. 그 안에 생명이 들어있다. 사람이 그렇게 돼야 한다.
그런데 세상에 속한 교회는 자기 좋도록 자꾸 천국처럼 만들어 달라고 한다. 자기 주위를 천국처럼 만들어 줄 것 같으면 예수 안 믿을 사람이 어디 있느냐? 쉽게 말하면 하나님이 돈 주고 밥 주고 입는 거 다 주면 안 믿을 사람이 어디 있느냐? 그러면 그렇게 해서 믿는 그게 믿음이냐? 믿음에는 시련 연단 훈련을 통해 영능의 실력이 있는 건데, 그걸 통해서 ‘천국에서 누가 크니이까’ 이게 있는 건데, 영능의 실력을 위해 선택하고 노력하라고 인간에게 자유를 준 건데.
충실하게 잘 여문 곡식에 낫을 대어 추수를 해서 창고에 넣는 것처럼 잘 여문 신앙사상의 그 질 자체는 천국으로 합격이다. 현재 이 땅에 있어도 내가 가진 신앙의 질이 그렇다면 그 신앙은 천국의 성질에 합격이 되는 것이다. 잘 여문 신앙의 열매, 성령의 열매는 질적으로 천국으로 합격이 되는 것이다. 그런 신앙이다. 곡식의 추수를 사람이 하듯이 성도의 추수는 하나님께서 하신다. 역사의 주관자가 하시는 거다.
하나님께서 일 년 열두 달 사계절을 왜 만드셨을까? 농사짓는 것으로 말을 하자면 봄에는 씨를 뿌리고 움이 돋고 새싹이 나고, 여름에는 가지가 뻗쳐서 무성해지고, 가을에는 열매를 맺고 추수하고, 겨울에는 혹한의 추위가 오니 쉬도록 되어 있다. 이것은 사람의 일대기, 개인의 일대기, 혹은 인간사를 깨닫게 해 주시는 것이다.
사람 사는 것이 항상 봄만 있는 거냐? 항상 여름만 있는 거냐? 항상 봄만 있는 곳에 살던 사람은 겨울만 있는 곳에서는 못 산다. 그 사람이 겨울이 있는 곳에 가면 방에 처박혀 있어야 한다.
일 년 열두 달 사계절은 끊임없이 되돌아온다. 몸이 아프던 건강하던, 부자든 가난하던, 사람이 태어나던 죽던 일 년 열두 달은 어김없이 돌아온다. 이건 하나님의 주권섭리다. 그러니 내가 하나님의 이 주권섭리에 대처를 잘 해야 하겠느냐, 아니면 ‘하나님, 나는 몸이 약하니 여름만 주십시오’ 해야 하겠느냐?
여름인데도 추위를 타는 사람은 어디 가서 살아야 하느냐? 추운 겨울인데도 더운 사람은 어디 가서 살아야 하느냐? 이게 정상은 아닌 거다. 그러니까 자기 몸을, 자기의 감정을, 자기의 생각 마음을 다스려야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일반적으로 볼 때 인간이 자연법칙에 순응되어 살면 번성하고, 자연법칙을 거스르고 살면 자멸이 되는 것이니 인간이라면 지켜야 할 법이 있는 것이다. 자기 몸이 그렇게 들어가 있는 거다. 인간이 육신은 하나님의 법칙에 의해서 돌아가게 돼 있다. 따라서 인간은 육신을 가진 고로 음식을 안 먹으면 자기는 약해지고 병들고 죽는 거다. 반면에 몸에 기운이 없을 때 영양가 있는 음식을 먹으면 기운이 빨리 돋는다. 이게 이치다.
육적인 이것은 비유요 이건 곧 영적인 면을 깨닫게 해 주는 비유이니 우리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하신 뜻을 거스르면 영과 육이 다 고통을 받게 되고 멸망을 당하게 된다. 인간의 주격은 영이요, 몸은 의의 병기로 쓰여질 소유성이다. 활용성이다.
30절-32절: 바르게만 깨닫고 바로만 알면 하나님의 인간창조의 목적에서 볼 때 세상에서 성공 안 할 사람이 없다. 못 깨닫고 모르니만큼 안 믿는 사람처럼 일반으로 살다가 그냥 죽게 되는 거다.
하나님의 나라가 어떤 곳이냐? 시간의 흐름이 없는 곳이다. 그렇다면 현재 내가 하나님의 나라를 안다고 그러면 시간 속에 흐르는 것을 목적적으로 붙잡아야 하느냐, 아니면 시간 속에 흐르는 건 흐르도록 내버려두고 영원히 가는 것을 붙잡아야 하겠느냐?
예를 들어서 사람을 사귄다고 할 때 상대를 표면 껍데기만 알아야 될 런지, 아니면 변치 않는 그 사람의 마음을 내가 가져야 하는 건지? 눈에 보이는 것으로 기준해서 사귀고 시집장가 가서 산다고 하면 너는 죽었다. 너는 망했다. 왜? 사람의 몸은 껍데기요 자꾸 변질이 되는 거니까 상대의 눈에 내가 보기 싫으면 그냥 버릴 것이 아니냐? 그러니 사람의 모양은 어떻게 변해도 변치 않는 사람의 마음 정신의 사귐이 되어야 한다.
인간끼리는 마음이 멀면 서로 멀어진다. 사람을 사귈 때는 서로가 마음이 멀어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 특히 우리 기독자들은 주님과 마음이 멀어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
천국은 신령세계요 거룩한 곳이니 거룩한 곳은 구별되고 더러운 것 없는 곳이요, 사랑과 진실만 있는 곳이요, 하나님의 아가페로 된 진리 지혜지식으로 된 세계요, 영원히 가는 진실성의 세계요, 늙지도 않고 죽지도 않는 곳이요, 병도 고통도 없는 곳이요, 기쁨과 즐거움과 존귀 영광과 행복의 누림만 있는 곳이요, 창조주 하나님과 영원히 같이 사는 곳이요, 예수 믿는 자기는 그곳에 가서 누리며 살 자기이니 정신과 사상과 소원 목적이 그 세계에 적응할 수 있도록 신령성으로 만들어져야 한다.
그러니까 말만 그럴 것이 아니라 그러한 실효성을 거둘 수 있는 이치를 교회에서 깨닫고 사람이 그렇게 만들어져야 한다. 이론만 말할 것 같으면 머리 좋고 영리한 사람은 믿음 좋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믿음 좋은 사람이란 아는 것도 아는 거지만 거기에서 더 올라가 그렇게 만들어진 사람이 효력 있게 믿는 사람이다. 사람이 그렇게 된 사람.
아무리 대학교 대학원 국회의원 재판장이라 해도 사람 못된 사람은 그 공부한 게 가치가 없다. 돈 들여서 배운 게 가치가 없다. 그런데 성경을 통해 보면 신령성의 사람으로 만들어진 사람을 참 가치가 있다고 한다. 이런 사람을 하나님께서 가치가 있다고 여기니 하나님께서 모든 좋은 것을 다 쏟아 부어주신다. 성경에 에스더 요셉 등등이 있다.
우리는 예수를 믿으면서 효력이 있는 예수를 믿어야 한다. 효력이 있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 자기가 이치적으로 써먹을 수 있는 것을 가져야 한다. 써먹을 수 있는데도, 할 수 있는데도 안 써먹으면 너 축소다. 너 쪼그랑 망태기 되는 거다.
예수는 안 믿어도 세상에서 일반적 보편적으로 보면 부지런한 사람이 부자로 산다. 그런데 예수 믿는 사람이 부지런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해서 진리이치에 명확한 것도 아니라면 믿는다고 하는 이게 뭐냐? 그러니 사람이 안 고쳐지는구나. 그런 너에게는 부자 돈 이런 게 문제가 아니라 네가 안 고쳐지는구나.
일반적으로도 사람 못된 사람에게 물질을 주면 안 된다. 돈을 주면 안 된다. 못된 사람에게 그런 게 있으면 죄 짓는 일에 허랑 방탕이 된다. 하나님도 그렇다. 한국의 은행, 세계적인 은행을 나에게 다 주고 싶어도 주면 그것가지고 하루도 못 살기 때문에 안 주는 거다. 그날로 죽으니 그런 사람에게는 안 주는 게 좋다. 성경에 ‘네가 온 천하를 다 가져도 오늘밤 네 목숨을 데려가면 누구 것이 되겠느냐’ 라고 하셨다.
이 땅은 시간이 흐르는 곳, 이 땅의 모든 물질적 존재는 임시적이고 순간적이고 요동되고 변질되고 불타지고 썩고 없어질 것이니 그런 것을 목적적으로 취하려고 하지 말아라. 사람이던 재산이던 뭐든 그렇다. 특히 우리 부모님들은 ‘저걸 키워서 내가 덕을 봐야 되겠는데. 저 놈이 크면 내가 편해지겠는데’ 하고 절대로 자식들에게 목적적으로 등 기대지 말라. 그러다가 자식이 죽으면 어떻게 할 참이냐? 그렇게 되면 기대던 게 없어지니 시험 들고 미쳐버린다.
이 세상은 부모형제든 일가친척이든 다 늙고 죽고 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런 인간을 하나님처럼 믿으면 안 된다. 인간을 하나님처럼 믿으면 그 사람은 그만큼 상처가 크고 헤어나기가 힘이 드는 거다.
세상에 있는 것은 다 지나간다. 지나가는 것을 붙잡고 질질 눈물 흘리지 말라. 그것 때문에 주님 놓치고 교훈 놓치고 하면 자기가 비참해진다. 가까운 사람이 죽으면 ‘죽은 그 사람은 구원이 그만큼 됐구나’ 하며 좋은 신앙의 본은 보고 그 좋은 신앙을 내가 갖고 가면 된다. 어쨌든 주님을 놓치면 끝난 것이다.
세상에서도 보면 환경이 어렵더라도 정신적인 면이 강하면 그 사람은 그걸 뚫고 올라온다. 그러나 세상이 돌봐주지도 못하고, 약해서 스스로 뚫고 나올 수도 없는 사람은 그 정신에서 또는 그 환경에서 뚫고 올라오지를 못하고 점점 쪼그라지고 만다. 그런 사람을 볼 때 그렇게 안 되도록 무거운 짐을 지고 있으면 데리고 와서 짐을 부리고 마음에 안식을 주고 신앙에 힘을 주고 주 안에서 창조의 목적대로 힘 있게 살아가게 해 주는 이게 복음이다. 주님은 그 일을 하셨다.
그런 사람을 뱀에게 통째로 집어 삼켜질 수 있도록 내버려두면 안 된다. 우리는 할 수 있는 대로 믿음의 사람으로 들이고, 예수를 안 믿는다고 할지라도 할 수 있는 대로 인간의 세계에 유익을 주고 갈 수 있는 사람으로 만들어야 한다. 교회가 이 일을 해야 한다.
교회의 인도자들이 성경을 가지고 성도들의 속성품이 참 사람, 주님의 사람, 하나님의 사람이 되도록 해야지 단체만 만들어 놓고 자기 식대로 하는 건 교회가 아니다. 교회에서 사람이 못 만들어지면 어디서 만들어질 것이냐? 종교생활로 사람이 만들어지지 않는다. 신앙생활에서 사람이 바로 만들어져 들어가고 실력적으로 만들어져 들어가는 거다.
꼬리가 안 되고 머리가 될 사람들이 일반사람들과 같은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으면 안 된다. 그건 성경이 용납이 안 된다. 이건 창조의 목적에서 이탈된 것이다. 우리는 세상적으로 믿는 교인들과는 다른 것이다. 우리교회 교인들은 일반적인 사고방식이나 종교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믿지 말아라.
자기가 이 땅에서 존재하는 시간은 자기 존재밖에 없다. 그런 귀중한 시간 속에 살면서 변질되고 썩어지고 없어질 것을 주생활 목적으로 삼지 말라. 그건 다 이용물이다. 방편적으로 이용물로 쓰여질 것을 목적물로 삼으면 어리석은 사람이다.
이 땅의 것을 가지고 신령한 천국의 것을 어떻게 비유할 수 있을까? 실은 창조주 하나님께서 우주만물과 인류의 역사와 인간의 마음과 정신과 사건을 말씀하시는 속에는 인간을 창조하신 영원 궁극적인 목적을 깨닫게 하심이 들어있는 거다. 인류의 역사와 인간의 마음과 정신 사건 등 이 전부가 돌아가는 것이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을 가르쳐 주고 있다. 우리는 그 목적을 깨달아야 한다.
인간창조의 영원 궁극적인 목적의 깨달음을 버리면 인간 자기는 영원히 처절한 자가 되고 만다. 하나님의 인간창조의 목적관에서 볼 때 그렇다. 그냥 껍데기 표면으로 보면 우리보다 더 잘 사는 사람이 있고, 그 면만 보면 세상에 부러워할 자가 많다. 그런데 성경은 그런 것을 부러워하라고 그러지 않고 당신을 따르라고 하셨으니 당신을 따르라는 건 당신처럼 만들어지는 그걸 염두에 두고 하신 말씀이다.
하나님의 나라를 어떻게 비하여 또 무슨 비유로 나타낼꼬? 뭣과 같다고 했느냐? 겨자씨 한 알과 같다고 했다. 겨자씨를 보면 채송화 씨만하다. 모든 씨보다 작은 이 겨자씨 한 알, 그러니까 모든 씨보다 작다 하는 건 있기는 있는데 신경을 써서 봐야 보이지 그냥 쉽게 보려고 하면 ‘저게 먼지인가’ 할 정도로 잘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진리이치도 생각을 하고 신경을 써야 보이지 눈에 보이는 식으로 생각을 하고, 그런 사고방식을 가지면 못 잡는다.
모래알 같기도 하고 부스러기 먼지 같기도 하고 너무 작으면 줍기도 힘들고 하므로 버리기 쉽지 아깝다고 기어코 줍는 사람은 별로 없다. 씨가 너무 작으면 키로 까불러도 그 씨가 안으로 들어오지 않고 그냥 날아가 버린다. 이 작은 씨는 돌보다도 줍기가 더 힘이 드니까 먼지처럼 버리기 쉽다.
그러나 이 겨자씨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좋은 땅에만 심겨졌다면 그 후에는 커지는 속도가 얼마나 빠른지? 그 생명력이 놀랍다. 결국은 큰 나무가 되어서 공중의 모든 새들이 날아와서 거처지를 삼고 삶의 혜택을 받는다는 것이다. 즉 이래도 예수를 바로 안 믿겠느냐는 것이다. 이래도 안 믿어지느냐 그 말이다.
진리생명의 하나님의 말씀의 한 이치는 사람의 육신의 눈에는, 육신적인 세상적인 생각에는 안 보인다. 그래서 사람들이 무관심하고 지나치기 쉽다. 그러나 생명의 말씀 한 이치가 사람의 마음 밭에 심겨지기만 하면 성장이 되고 확장이 되기 시작을 하는데 심히 커져서 결국에는 세상의 모든 인간 나그네들이 그 가르침에서 삶의 지혜를 얻는다는 것이다.
솔로몬의 지혜를 들으려고 어디서 누가 왔느냐? 스바에서? 솔로몬이 다스리는 나라에서 몇 만 리나 떨어져 있느냐? 100리도 안 되는 곳에서 이곳(주-궁극교회)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러 오는 것도 귀찮아 죽겠는데 스바여왕은 솔로몬에게 하나님의 지혜지식을 배우기 위해서 그 먼 곳에서 보물을 잔뜩 싣고 왔다.
모르긴 해도 미국의 개척자들이 그 당시에 솔로몬이 있었더라면 솔로몬의 지혜를 얻으러 갈까, 아니면 미국의 동쪽 로키산맥으로 금광을 캐러 갈까? 시대는 차이가 있으나 사람의 가치적 선택적인 면을 봐라. 잠:에 보면 지혜를 얻는 것이 금을 얻는 것보다 낫다고 했다. 지혜를 얻으면 미래가 있다. 임시적으로 볼 때는 자기가 배가 고프고 손해가 날 것 같으나 지혜안에는 모든 보물이 다 들어있다.
자녀들도 하나님의 말씀의 지혜로 크면 그 안에는 보물이 다 들어있다. 그런데 세상에서 일등? 일등하면 딴 보물이 있을 것 같으냐? 고작 해봐야 세상 물질적으로 먹고 마시는 것뿐이다. 그런 것을 얻어 봐야 세상 존귀 영광성밖에 더 있겠느냐? 하기야 희미하게 예수를 믿을 바에야 그렇게라도 살다 가야지 어쩌겠느냐?
그런데 자녀를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관에 맞게 정말 가치 있게 교육시키는 부모가 쉽지 않을 것 같다. 그것을 버리고 세상 입맛에 맞게 가르친다고 해도 부모의 그 소원대로 이뤄질지, 아니면 하나님께서 몇 살 때 이렇게 틀어버리고, 몇 살 때 저렇게 틀어버리고 하면 어떻게 할 거냐? 세상은 움직이는 세상인데.
진리이치의 교훈은 세상의 모든 인간 나그네들이 그 가르침에서 삶을 교훈을 얻는다는 것. 큰 나무에 새가 깃들고 한다는 게 그 혜택을 받는 걸 말하는 거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진리이치의 말씀으로 성장되어지는 것, 커지는 것, 능력이 되는 것, 확장이 되는 것, 영원히 효력이 있는 것, 날마다 죽지 않고 사는 것, 날마다 창조의 목적대로 깨닫게 해 주신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그 자기에게는 죽는 게 없다. ‘육신은 후패하나 속사람은 날마다 새롭도다.’
그런데 어떤 사람을 보면 겉도 늙어서 쪼그라져 들어가고, 배운 것도 없으니 그 속의 인격도 쪼그라지고. 이거 참 심각하다. 그러니 영육이 깡그리 망한다. 우리는 그래서는 안 된다. 예수를 믿어갈수록 하나님의 말씀의 이치가 풍부하게 나와야 한다. 그 교육이 주님 오실 때까지 계속 되어야 한다. 이게 성경의 족보적으로 보면 복음의 생명계대다. 자기 집이 그래야 한다. 자기 후손으로 그래야 한다. 그렇게 되게 하려고 어릴 적부터 창조의 목적에 걸맞게 말씀으로 키우라는 것이다. 이런 자기의 영원한 효력을 볼 수 있는 말씀을 헛되이 여기고 무시한다면 그 사람의 일생은 헛된 인생이 되고 만다.
살아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 일생의 부분이 아닌 자기의 전 인격으로 여기고 살면 그 사람은 하나님 보시기에 큰 자가 된다. 사람이라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사람으로 커지는 것이 참 사람이다. 물질적 정신으로 커지는 게 참 사람이 아니다. 사람이 커지는 것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으로 커진다. 그게 사람이 커지는 거다. 이런 사람을 하나님께서 존귀영광자로 인정해 주는 것이다. 사람은 그렇게 커져야 한다. 세상에서 커지는 방식과는 정 반대다. (계속).
김경형목사님이 교역자 신학생을 대상으로 20여년 동안 매 주 정례적으로 진행하는 신학 및 성경연구 모임을 통해 영원 전에 하나님의 의지세계에서 인간구원을 설정하게 된 원인과 동기와 목적을 깨닫고 하나님의 본질의 신앙으로 나가는 주의 종들이 누룩처럼 퍼져나가고 있습니다.
참석하실 분은 031-207-5159, 또는 010-8886-5159로 문의해 주세요.(평신도도 참석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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