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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벧전2: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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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정경일 형제 |
참고 : | http://www.saegilchurch.or.kr/150814 |
평신도의 모험
(베드로전서 2:9)
2013년 11월 3일 주일예배
정경일 형제
여러분은 택하심을 받은 족속이요, 왕과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민족이요, 하나님의 소유가 된 백성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을 어둠에서 불러내어 자기의 놀라운 빛 가운데로 인도하신 분의 업적을, 여러분이 선포하는 것입니다. - 베드로전서 2장 9절
평신도의 특권
저는 평신도입니다. 하지만 저를 목사로 알고 계신 분들이 많습니다. 오랫동안 신학을 공부했고 여러 교회에서 전도사로 일했으니 당연히 지금은 목사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목사가 아니라고 하면 의아해합니다. 그리고는 이제라도 어서 목사가 되라고 충고해 줍니다. 그래야 여러 면에서 편리하고 유리하다는 것입니다. 틀린 말은 아닙니다. 그리스도교나 이웃종교의 성직자들을 만날 때 평신도라고 하면 살짝 무시하는 것을 경험하곤 합니다. 조금 불편하고 불리하긴 해도, 저는 목사가 되지 않은 것을 후회하지 않고 앞으로도 목사가 될 생각이 없습니다. 목사가 될 때 얻는 편리함과 유리함이 도리어 유혹과 장애가 될 수도 있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성직자 권위주의’의 제도화와 내면화입니다.
1980년대에 마르크스주의자로 ‘계급철폐'를 위해 싸우다 1990년대에 신학생이 된 제가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것 중 하나는 ‘성직 계급’의 권위주의였습니다. 지난 주일 서진한 목사님께서도 언급하셨듯이, 성직자와 평신도의 관계를 목자와 양의 위계적 계급 관계로 보는 관점이 교회를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이십여 년이 지난 지금도 변함이 없습니다. 새파랗게 젊은 목사들이 인생의 한참 선배들을 평신도라는 이유만으로 ‘양떼’라고 부르거나 ‘영적 아이’ 취급합니다. 강단에서 대놓고 반말을 하는 목사들도 있습니다. 더 심각한 문제는 평신도들 스스로 순한 양처럼 성직자에게 자발적으로 순종한다는 사실입니다. 겨우 이십 대 중반의 목사후보생(전도사)이었던 저도 하나님과 목사님 다음의 ‘넘버 3’ 정도의 대접을 받곤 했습니다. 제가 결정적으로 목사의 길을 포기했던 것은 저도 성직자 권위주의의 제도와 문화에 점점 익숙해지고 있는 것을 자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목사가 되지 않은 것이 반드시 특권을 포기한 것만은 아닙니다. 성직자의 특권은 족쇄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성직자는 제도교회가 주는 편리하고 유리한 조건을 얻는 대가로 제도교회가 정해 놓은 틀 안에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해야 합니다. 그 틀을 벗어나게 되면 불이익과 제재를 받게 됩니다. 그뿐만 아니라 평소에는 양 같은 평신도들도 자기들이 기대하고 원하는 것을 목자인 성직자가 채워주지 못하면 가차없이 목자를 공격합니다. 위로는 교회 권력의 요구를 아래로는 평신도의 욕망을 모두 채워줘야 하니 성직자도 괴롭습니다.
사실 ‘성직자의 특권’을 포기하는 것보다 ‘평신도의 특권’을 포기하는 것이 제게는 더 어려웠습니다. 제가 포기하고 싶지 않았던 평신도의 특권은 영적 모험을 할 수 있는 자유였습니다. 성직자는 영적 모험가이기보다는 종교적 전통의 수호자입니다. 자신의 특권을 유지하고 강화하기 위해서라도 성직자는 전통적 교리, 의례, 규칙을 고수하려고 합니다. 자연히 전통에 도전하거나 전통 밖으로 나가는 영적 모험을 두려워하고 위험시합니다.
반면 전통이 주는 특권으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평신도는 영적 모험을 덜 두려워합니다. 역사적으로 급진적인 영적 모험을 감행했던 이들도 대부분 평신도였습니다. 불교와 그리스도교만 보더라도, 붓다는 사제 계급인 브라만이 아닌 전사 계급인 크샤트리아 출신의 수행자였고, 예수도 성전이나 회당의 사제가 아닌 평신도 예언자였습니다. 물론 역사적 불교와 그리스도교에서는 성직자와 평신도의 위계적 분리가 오랫동안 존재해왔습니다. 하지만 종교의 지배로부터 해방된 현대 사회에서 평신도의 영적 모험은 더 자유로워지고 풍요로워졌습니다. 평신도 모험가들이 세운 새길도 그런 현대적 종교성의 한 모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동안 새길교회와 새길기독사회문화원이 열어 온 신학강좌와 기획토론 제목 몇 개를 들어 보겠습니다. “이웃종교에서 보는 한국 기독교,” “종교다원주의와 영성,” “불교와 그리스도교,” “교회가 죽어야 예수가 산다,” “과학과 종교,” “기후붕괴 시대, 신학을 재구성하다,” “4대강 사업, 무엇을 살리고 무엇을 죽이는가?” “종북 논쟁의 허와 실,” “한반도 평화, 왜 이렇게 어려운가?” “한국교회와 성적 소수자,” “원자력 발전 대안은 없는가?” 모두 현대 사회가 직면한 문제들과 관련된 주제들입니다. 이런 현대적 문제들과 이토록 정직하고 치열하게 씨름할 수 있는 제도교회가 얼마나 될까요? 아마도 새길이 성직자 중심의 제도교회였다면 그런 영적 모험은 힘들었을 겁니다.
‘평신도 제도의 폐지’
물론 모든 평신도가 영적 모험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절대다수의 평신도는 영적 모험을 기피하고 제도교회 안에 머물며 자발적으로 성직자에게 순종합니다. 그것이 편리하고 안전하기 때문입니다. 순종의 대가로 그들은 성직자가 제공하는 영적 서비스를 받습니다. 목회적 돌봄이라 해서, 목자인 성직자가 양인 평신도의 사사로운 애경사까지 챙겨 주고, 고민도 상담해 주고, 상한 마음도 위로해 줍니다. 심지어 복잡한 현대사회에서의 윤리적, 정치적 삶의 방식까지도 애매한 것을 정해주는 ‘애정남’처럼 성직자가 정해줍니다. 자존심 상하긴 하지만 편리하고 안전합니다.
오늘의 평신도는 비판적 사유 능력과 주체적 행위 능력을 잃어버리고 성직자를 무조건 믿고 따릅니다. 성직자들이 횡령, 교회 세습, 성범죄, 폭행, 논문표절 등 온갖 사회적 물의를 일으켜도 ‘양들’은 흔들림 없이 ‘목자’를 옹호합니다. ‘평화의 도구'가 되어 사회와 민족의 화해를 선도해야 할 교회의 성직자들이 낡은 반공 이데올로기로 증오를 부추겨도 평신도들은 ‘아멘’ 하며 지지합니다. 성직자들이 과거의 독재자를 추모하며, 아니 숭배하며, “한국은 독재를 해야 한다”고 막말을 해도 평신도는 침묵합니다. 이처럼 세속적 욕망을 종교를 통해 채우려는 성직자의 교권주의와 개인의 영혼만 잘 되고 구원받으면 된다는 평신도의 영적 이기주의가 야합해 한국교회는 ‘막장 드라마’를 찍고 있습니다. 결국 교회의 윤리적 기준은 사회의 윤리적 기준과 상식에 오히려 못 미칩니다. 안타깝고 부끄럽게도 교회는 오늘의 ‘사회 문제’입니다. 그런데도 평신도는 제도교회의 ‘푸른 초장’에서 편안하게 단잠에 빠져 있습니다.
반면 깨어 있는 평신도는 성직자가 제공해주는 영적 서비스를 받으며 비주체적으로 사는 대신 불편하더라도 주체적으로 영적 모험을 하는 삶을 선택합니다. 영적 모험을 위해 ‘자발적 불편’을 감수합니다. 깨어 있는 평신도는 목자가 제공하는 푸른 초장에서 종교적 고객으로 편안하게 사는 것보다 자신의 지도와 나침반을 들고 광야에서 영적 모험가로 자유롭게 사는 것을 더 기뻐합니다. 새길은 그런 평신도 영적 모험가들의 공동체입니다.
새길의 주체적 모험 정신은 종교개혁의 ‘모든 신자가 사제’라는 사상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새길의 [제도와 운영규칙] 제2조는 다음과 같이 명시합니다. “본 교회는 '모든 신자가 사제'라는 종교개혁의 정신에 입각한 평신도 중심의 교회로서 조직, 운영과 활동에 있어서 민주적 교회를 지향한다.” 평신도 중심 공동체의 평등과 민주주의를 보여주는 핵심적 규칙입니다. 이는 초대교회의 정신을 회복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는 베드로의 첫째 편지 2장 9절을 '모든 신자가 사제'라는 사상의 성서적 기초로 사용했습니다. 사실 성서에는 평신도라는 말 자체가 없습니다. 평신도를 뜻하는 영어 단어 laity는 ‘백성’을 뜻하는 헬라어 laos에서 유래했습니다. 따라서 루터는 하느님의 백성인 ‘모든’ 그리스도인이 ‘하나의’ 공동체로서 하느님의 사제들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루터는 베드로의 이 말씀을 중세적 천주교의 교권을 반대하는 근거로 사용했습니다. 분명히 ‘모든 신자가 사제’라는 사상은 기존의 위계적 성직자/평신도 이분법에 대한 중대한 신학적 도전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신자가 사제’라는 이상은 개신교 교회사에서 실현되지 못했습니다. 안타깝게도 천주교 신부의 권위주의는 개신교 목사의 권위주의로 빠르게 대체되었습니다. 개신교는 ‘모든 신자가 사제’라는 종교개혁 정신이 무색하게 성직자 권위주의를 강화해왔습니다.
이런 교회 현실에서 평신도 공동체인 새길의 독특성은 종교개혁의 이상을 철저하게 실천으로 옮긴 데 있습니다. 제도교회가 규정하고 규제해 온 평신도의 삶의 방식과 역할을 새길은 단호하게 거부합니다. 평신도는 할 수 없고, 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해온 것을 새길은 용기 있게 실천합니다. 공동체의 운영만이 아니라 말씀증거(설교)를 비롯해서 성례전, 돌봄, 교육까지도 평신도 중심으로 하고 있습니다. 역설적으로 새길에는 평신도가 없습니다. 모두가 하느님의 사제이기 때문입니다. 엘튼 트루블러드의 표현을 빌려 말하자면, 새길이 폐지한 것은 ‘성직자 제도’가 아니라 ‘평신도 제도’입니다. 지금 ‘새길 2기’를 시작하며 하느님의 사제인 우리가 시도하고 있는 성찰과 실천의 키워드는 ‘서로’입니다. 성직자든 평신도든 권위주의적 리더에게 의존하지 않고 서로 돌보고, 서로 배우고, 서로 사귀면서 영적 모험가의 공동체를 수평적, 상호적으로 가꾸어 가려고 합니다.
모든 신자가 예언자
그런데 새길의 영적 모험가들이 잊지 않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새길의 의미와 목적이 단지 평등한 '평신도 공동체'를 이루는 데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성직자가 없고, 위계적 직분이 없고, 평등하다는 것이 독특할 수는 있겠지만, 그것만으로는 ‘평신도 사교클럽’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더욱이 다양한 형태의 평신도 교회와 단체들이 생겨나고 있는 오늘의 현실은 우리에게 근원적 물음을 던져 줍니다. 우리는 ‘어떤’ 평신도인가? 이 물음에 대한 탐구와 성찰 속에서 새길은 복음적이고, 현대적이고, 탈-제도적인 그리스도인의 한 전형을 체험적으로 깨달았습니다. ‘예수 따르미’가 바로 그것입니다. 새길의 평신도들은, 제도교회 안에서든 바깥에서든, 편하고 안전하게 예수를 믿기만 하는 ‘예수 믿으미’로 사는 것을 거부하고, 불편하고 위험하더라도 역사 속에서 ‘예수 따르미’로 사는 것을 선택합니다.
따라서 새길이 추구하는 예수 따르미의 삶은 ‘모든 신자가 사제’라는 사상만으로 설명될 수 없습니다. 평신도로서 말씀을 선포하고, 성사를 집례하고, 남을 돌보는 사제의 직능은 예수 믿으미도 충분히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물론 평신도가 사제의 직능을 하는 것은 ‘개혁적’이지만 충분히 ‘예언자적’이지는 못합니다. 많은 종교개혁자들이 중세적 종교권력의 억압에는 맞섰지만 근대적 정치권력의 억압에는 오히려 협력했던 것은 종교개혁의 정치적 한계를 보여 줍니다. 루터가 독일 농민들의 반란을 잔인한 폭력으로 진압하도록 고무하며 선동한 것도 그런 한계를 보여 주는 한 사례일 것입니다. 결국 종교개혁은 ‘교회개혁’이었을 뿐 (그것도 결과적으로는 철저하지 못했던) '사회변혁'은 아니었습니다. 바로 이 점이 종교개혁자들과 새길 예수 따르미들의 근본적 차이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비록 새길이 ‘평신도 교회’로 널리 알려져 있긴 하지만, 정작 <새길교회 창립취지문>은 평신도성을 그다지 강조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직업화된 교역자 중심의 교회에서 공동체적 평신도 중심 교회로... 발돋움”하겠다고 표현한 것이 전부입니다. 대신 <창립취지문>은 “가난하고 억눌린 사람들에게 해방의 소식을 선포”하는 “예언자적 사명과 사회적 책임”을 강조합니다.
우리는 복음의 뜻을 사회와 역사의 구체적 현실 한가운데서 항상 되새기고 증거해야 된다고 믿으며, 복음은 개인의 삶뿐만 아니라, 사회와 역사도 함께 변혁시키는 힘임을 굳게 믿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난하고 억눌린 사람들에게 해방의 소식을 선포하신 것이 바로 복음과 선교의 핵심이라고 믿기에 우리도 고통 당하는 이웃을 사랑하고 정의와 평화를 실현하는 하나님의 선교에 몸과 마음, 정성과 물질을 바치려고 합니다.
군부독재의 폭압 속에서 예수 따르미들이 새길을 창립한 목적은 평신도 공동체의 실현이 아니라 개인과 사회와 역사를 함께 변혁하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저는 새길을 특징짓는 예수 따르미의 정신적 기초는 ‘모든 신자가 사제’라는 종교개혁 사상이 아니라 ‘모든 신자가 예언자’라는 사회변혁 사상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 서로 사귀고, 돌보고, 배우며 ‘평신도 사제’의 역할을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하느님 나라의 정의와 평화를 이 땅에서 실현하기 위한 ‘평신도 예언자’의 역할을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종교개혁과 사회변혁을 분리하지 않는 예수 따르미의 모험입니다.
청년 모험가의 공동체
몇 주 전 청년회 헌신예배 때 박정재, 최균 형제님의 말씀증거를 들으면서 공감되는 게 많았습니다. 자유롭게 모험하는 삶, 그리고 그 삶을 비판적으로 성찰하는 정신에 제 가슴이 화답했습니다. 저보다 십여 년 젊은 분들의 모험심과 정신에 공명하면서, ‘아, 내 안에 아직 청년이 살아 있나 보다,’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지난 화요일에 저보다 나이가 십여 년 많은 분들과 렉시오 디비나를 하면서 비슷한 모험심과 자기성찰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공동체의 어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다음 주에 있을 한완상 선생님의 신간 북토크를 준비하면서 [한반도는 아프다]를 읽었는데, 젊은이 못지않은, 아니 젊은이보다 더한 모험심과 성찰적 정신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얼마 전 길희성 선생님과 대화를 나누었을 때도 ‘초종교적 영성’을 추구하는 구도적 모험가의 고투와 희열을 온전히 느낄 수 있었습니다. 최근 몽골에서 사막화 방지를 위한 나무 심는 활동으로 [한일 국제환경상]을 수상한 최현섭 선생님도 세상 속 새길 모험가의 한 본보기입니다. 그뿐인가요? 곧 있을 [서로 배움 세미나: 공동체의 사역과 영성]을 함께 준비하고 있는 자매형제들에게서도 모험가의 떨림과 설렘을 느낍니다. 2013년 가을, 새길은 모험가들의 캠프처럼 역동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지난 몇 달 동안 새길의 여러 세대 자매형제들을 만나면서 새길의 묘한 매력을 새삼스레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새길의 자매형제들에게는 생물학적 나이에 따른 차이보다 정신적 가치에 따른 공통점이 더 크다는 사실입니다. 그런 정신적 가치로 보면 새길은 동일한 한 세대입니다. 새길은 정신적, 영적으로 ‘청년’입니다.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즈는 말합니다. “늙어서 꿈을 잃는 게 아니다. 꿈을 잃어서 늙는 것이다.” 예수가 꿈꾸었던 하느님 나라를 향한 모험을 계속 하는 한 새길은 언제나 청춘입니다. 영적 모험가에게 시간의 흐름은 노화의 과정이 아니라 변화와 성숙의 과정입니다. 나날이 변화하고 성숙하면서도 언제나 청년으로 존재하는 삶, 그것이 모험가들이 누리는 특권입니다. 하느님의 사제로서, 예언자로서 그 특권을 함께 누리며 평신도의 모험을 계속하기를 마음 다해 바라고 다짐합니다.
평신도 열린공동체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사단법인 새길기독사회문화원, 도서출판 새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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