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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가 확실한 설교만 올릴 수 있습니다. |
| 성경본문 : | 눅2:38-5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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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자 : | 최만자 자매 |
| 참고 : | http://www.saegilchurch.or.kr/172359 |
마리아의 영성-순명과 저항, 공감과 연대, 비전과 실천
(누가복음 2장 38-56절)
2013년 12월 1일 주일예배
최만자 자매
(새길교회 신학위원)
어느새 마른가지에 쓸쓸히 남아 붙어 있는 잎사귀 하나처럼 2013년도 달력이 달랑 한 장을 남겨놓고 있습니다. 지난 시간들을 되돌아보면 늘 그렇듯 참으로 다사다난했던 한해를 보냈다고 말하게 됩니다. 새길의 지난 한해도 그 어느 때보다 다사다난한 시간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제 모든 부족함과 아쉬움들을 뒤로하고 희망차고 의미 깊은 새해를 맞이하기 위해 남은 한 달 정성으로 생활을 해야겠구나 생각됩니다. 오늘 주일은 대강절 두 번째 주일입니다. 아기 예수의 오심을 간절히 기다리는 기간을 지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왜 예수의 오심을 기다릴까요? 아마도 예수를 통하여 오게 될 정의, 평화, 생명, 사랑의 세상을 기다림이 아닐까요? 그것이 아니면 다른 무엇을 기다리는 것일까요? 며칠 전 명동성당 앞을 가게 됐는데 마침 보수층의 천주교인들이 ‘정의구현 사제단’을 교회에서 내쫓아야 한다는 주장을 세상이 떠나갈 듯 마이크소리 높여 외치며 온 길을 메우고 있었습니다. 각 종교들 내의 양극화, 한 공간 안에 있으면서도 서론 다른 성서해석과 기도를 하는 서로 갈라진 우리 사회와 교회의 현실을 보면서 예수는 누구인가? 성서는 예수를 누구라고 말하고 있는가? 아기 예수는 왜? 어찌하여 오셨는가? 등등의 생각을 더 깊이 하게 되었습니다. 매년 맞이하는 이 계절에 이미 오신 예수, 다시 오실 예수와의 만남을 위해 성탄의 진정한 의미를 같이 생각해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크리스마스의 주인공은 당연히 아기 예수가 맞지만, 지금 이 대강절의 주인공은 마리아라고 생각합니다. 예수 오심에 결정적 역할을 한 사람, 동시에 인류 구원 사건의 핵심인물이 마리아이기 때문입니다. 대강절에 아직 예수는 세상에 오지 않았지만, 마리아는 이미 예수와 함께하고 있었고 예수를 양육하고 보호하고 지킨 인물이므로 오늘 성서에 기록된 마리아의 이야기를 통하여 원래 성서가 전해주고자한 예수를 기다린다는 그 참 의미가 무엇인지 여러분과 함께 생각을 나누고 싶습니다.
일반적으로 마리아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순종의 모범’으로 공경되고 있습니다. 순종의 모범의 근거는 오늘 읽은 성서 본문 중 1장 38절 “보십시오, 나는 주님의 여종입니다. 당신의 말씀대로 나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라고 천사에게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겠다고 말한 것에서 찾습니다. 이외에도 마리아는 거룩하고 자애롭고 다정하고 온화하여 모두를 다 품어주는 ‘성모’이며, 십자가에서 죽기 까지 한 아들 때문에 창자가 아플 정도의 고통과 비탄에 젖은 ‘피에타’ 상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다른 한편 지중해 연안 민중들에서부터 널리 퍼진 질병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을 치유, 회복시켜주며 사람들의 고통과 어려움을 해결해 주는 ‘하늘의 여신’으로 숭배되는 신앙의 대상으로도 나타납니다. 가톨릭에서는 예수를 신성화하는 신학이 발달하면서 그와 함께 마리아도 계속 고양되었습니다. 네 가지 마리아론 곧 영원한 동정녀(?ειπ?ρθενο?), 무염시태(無染始胎), 하느님의 어머니(Θεοτ?κο?), 몽소승천(蒙召昇天) 등의 교리를 발전시켰습니다. 얼마 전 제주도 여행 중에 현재 가톨릭 성당 안에 있는 마리아 상을 우연히 만나게 되었습니다. 이중섭 기념관 근처에 있는 ‘하논’ 성당에 있는 마리아 상이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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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똑 같은 성화도 찾았는데 지금 현재 우리들에게 (천주교인은 물론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인지되어진 마리아 상은 이와 같은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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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오래전 ‘새로운 기조의 신학’(Theology in a New Key- Responding to Liberation Themes)이라는 로버트 M. 브라운이 쓴 책을 읽었는데 이 성화를 놓고 토론하는 내용이 있었습니다. 당시 라틴 아메리카 나라들이 처참한 가난과 자국 정권자들에 의한 무지한 고문, 억압을 당하였는데, 그들의 가난과 고통이 미국이 그 나라들의 정권과 공모하여 경제적, 정치적, 군사적으로 민중을 착취했음을 알고 브라운은 해방신학에 관심하였습니다. 해방신학은 가난한 자의 성서를 회복하며 저변으로부터, 고통으로부터의 신학적 관찰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가난한 자와 눌린 자의 하나님, 그들을 편들고 그들에게 참여하시며 그들과 하나가 되시는 하나님이시고, 땅의 가난한 백성, 낮은 계급, 노동계급의 가난한 사람들과 운명을 같이한 사람 속에 몸을 입고 오셨다고 말합니다. 가난한 자가 세계를 보는 방법이 부자가 보는 것보다 세계의 현실에 더 가깝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 브라질의 아스만은 ‘가난한 자의 인식론적 특권’이란 표현을 썼는데 그는 이를 차용 합니다.
그는 말하기를 부유하고 안정된 삶을 사는 자에게 성서는 일반적으로 안정적 생활방식을 지지하고 강화시켜주는 책일지 모르지만,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에게는 성서가 기존의 가치들에 도전하며 혁명적 변화의 정열을 불어넣는 책이라고 합니다. 같은 성서이지만 읽는 이의 상황에 따라 성서의 영향은 아주 다르게 나타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성서는 가난한 자들, 눌린 자들의 책이다.” 라고 확언하며 니카라콰의 한 교회에서 일어난 실제적 대화 내용을 소개하는데 바로 ‘마리아 이야기’ 입니다.
교회 지도자들이 가난하고 힘없는 민중의 편에 섰기 때문에 교회 지도자들에게 엄청난 박해가 가해져 왔던 중앙아메리카에서 일단의 사제들이 자기들 몫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대도시 빈민가에 살면서 음식과 방세를 벌기 위해 직업(거리 청소, 집 칠하기 등)에 종사하는 한편, 비정규적 주일 예배를 드렸다고 합니다. 이 집회에서는 주민들이 그 주간에 일어난 사건들을 서로 나누고 사제들은 이 사건들을 적절한 성구와 관련시키며 대화를 진행했습니다.
사제 : 9월 12일이 우리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나요?
반응 : 3년 전 칠레에서 아옌데가 암살 되어 국민들이 지도자를 잃었고 억압에 고통스러워하고 있습니다. 이는 마틴 루터 킹의 죽음 기억케 합니다.
사제 : 왜 두 사람의 죽음을 묶어서 생각하나요?
반응 : 두 사람은 억압받는 이들에게 관심했기 때문입니다.
사제 : 그 외에 다른 의미는 없나요?
반응 : 오늘은 또 마리아의 성명축제일이기도 합니다. 마리아에 대해 생각하게 하지요.
사제 : 아옌데, 마틴 루터 킹, 그리고 마리아 사이에 어떤 연관성이 있나요?
반응 : 그건 마리아가 억압받는 민중에게 관심 두었느냐에 달렸지요.
사제 : 누가복음 초두에 ‘마리아 찬가’ 중 일부를 보아요.
- 하나님께서 마음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다. 권세 있는 자들을 그 자리에서 내치시고, 보잘 것 없는 이들을 높이셨고 배고프고 굶주린 자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요한 사람은 빈손으로 돌려보내셨습니다.
반응 : 부라보! 신부님, 그건 우리가 교회에서 들은 마리아와는 전혀 같은 점이 없는 것 같은데요. 우리가 보고 있는 화려한 성화 속의 마리아는 그렇게 할 사람으로 보이지는 않는데요.
사제 : 성화 속의 마리아를 말해 줄래요.
반응 : 초승달 위에 서 있고, 왕관을 쓰고, 반지를 끼고, 금으로 수놓은 겉옷을 입었어요.
사제 : 찬가 속 마리아와는 다른 마리아군요. 찬가 속 마리아를 생각해 보죠.
반응 : 보잘것없는 이들을 높이셨다고 한 마리아는 친구들을 땅에 남겨두지 않겠죠. 마리아를 달에서 내려놓아요.
반응 : 권세 있는 자들을 그 자리에서 내치셨다고 한 마리아는 왕관을 쓸 리 없지요. 왕관을 벗겨요. 부유한 사람을 빈손으로 돌려보내셨다고 한 마리아가 손에 반지를 낄 리 없어요. 반지를 벗겨요
반응 : 배고픈 사람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다고 한 마리아는 배고픈 사람 두고 금으로 수놓은 겉옷을 걸칠 리가 없죠. 겉옷을 벗겨요.
반응 : 우리가 성처녀 마리아를 벗기고 있어요.
사제 : 그러면 찬가 속의 마리아로 생각 해 보아요.
반응 : 달 위에 있지 않고 우리처럼 흙먼지 위에 있을 겁니다.
- 왕관 대신 헌 모자를 쓰고 있겠죠.
- 우리처럼 거친 두 손을 가졌을 거예요
- 비단 옷 아닌 낡은 옷을 걸쳤을 거예요.
- 아, 당황스럽게도 마리아가 나처럼 보인다고 말한 것 같네요. 내 발은 더럽고, 내 양 손은 거칠고, 내 옷은 찢어졌네요.
사제 : 그렇게 말하는 것을 두려워 마세요. 여러분이 말하는 마리아가 교회나 성화 속의 마리아보다 훨씬 더 성서의 마리아와 가깝다고 생각해요.
반응 : 마리아의 메시지는 우리에게 더 희망을 준다고 느껴져요. 권세있고 부요한 자들의 마리아는 성화 속의 마리아이고, 성서의 마리아는 권세자들을 그 왕좌에서 몰아내고, 부자들을 빈손으로 돌려보내신다 했어요.
- 우리는 밑에 깔려 있고 매우 배고파요. 마리아는 보잘것없는 이들을 높이시고 배고픈 사람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신다고 말하는 군요.
사제 : 하나님께서 이 모든 일들을 실행하시는데, 우리가 어떻게 도와야 할지 생각해 봅시다.
이 이야기를 듣고 깜짝 놀라게 됩니다. 우리가 알고, 생각하고, 믿는 마리아와 성서의 마리아가 너무 다르기 때문이지요. 이 이야기는 우리가 성서를 어떻게 읽고 있는지를 다시 돌아보게 합니다. 원래 성서의 이야기에 얼마나 수많은 것들이 덧씌워졌고, 나 또한 내가 읽고 싶은 방향으로만 성서를 읽었던 모양입니다. 남미의 어느 다른 교회에서도 이 본문을 읽고 마리아가 헤롯에게 그 찬가를 불렀다면 헤롯이 뭐라 했겠느냐고 물었더니, 한 청년은 ‘너 미쳤구나.’ 라고 했을 거라는 거에요. 또 다른 청년은 ‘너 공산주의자구나.’ 라고 했을 것 같다고 답했네요. 종북몰이에 바로 걸리는 것이죠. 만약 ‘마리아 찬가’가 성서기록이 아니고 운동권에서 불렀다면 사회주의 혁명가라고 금지곡이 됐을 거예요. 철저한 반공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힌 그리스도인들이 크게 비난 할 노래가 됐을 것입니다. 위 교회 교우들이 자신들이 새롭게 찾아낸 마리아를 상상해봤더니, 그들 마을의 평범한 한 시골처녀의 모습이었다고 합니다. 저도 그들과 같은 상상으로 한국의 유관순을 떠 올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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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챠드 A. 호슬리 라는 분이 ‘크리스마스의 해방 ― 사회적 맥락에서의 예수의 유아기 읽기’(The Liberation of Christmas - The Infancy Narratives in Social Context) 라는 책을 썼습니다. 이 책의 요지는 우리가 종교적 축제로 생각하는 크리스마스는 실제로는 기독교와도 아무 상관이 없는 상업주의에 매몰되어 오히려 경제적 목적을 합법화시키고 소비경제의 동력으로 작용하는 도구가 되었기 때문에 이런 자본주의적 가치들로부터 벗어나 원래의 크리스마스 역사와 의미를 제대로 찾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원래적 역사와 의미를 호슬리는 예수의 유아기 설화들을 사회 정치적 맥락에서 다시 읽어야 찾을 수 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이 유아기 이야기가 교회전통, 교리, 관습 안에서 종교적, 영적 해석들로 덧씌워져 있어서 그 본래 이야기의 원형적 모습을 흐트러트리고 왜곡해왔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저는 이 부분에서 예수님의 유아기 설화로부터 탈상업주의, 탈종교화, 탈교리화를 해야만 크리스마스의 진정한 해방이 있겠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호슬리는 예수 탄생 이야기가 그동안 행복한 목자들, 온순한 나귀와 양들에 둘러싸여 경배 받는 마리아와 아기 예수 모습에서 평화와 행복이 넘치지만, 실제로 이 사건은 당시 유대의 정치적, 종교적, 경제적 갈등이 짙게 깔려 있음을 빼버리거나 외면하면서 이야기 되어 왔다고 지적합니다. 그는 이 이야기가 당시 유대사회의 정치적 갈등구조를 짙게 배경하고 있음을 여러 가지로 증명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몇 가지만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헤롯과 로마제국에 저항하는 유대인들 간의 정치적 갈등이 있었습니다.
새로운 유대인의 왕으로 아기 예수의 탄생을 예고하는데, 아기 예수는 현재의 포악한 왕과 제국으로부터 백성을 구할 자라는 갈등과 대결구도가 확실하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에서는 헤롯의 영아학살까지 전개되어 이 갈등이 생생히 드러나며, 누가복음에서도 예수는 이스라엘에 다윗 왕권을 되찾아 줄 인물로 언급됩니다. (누가복음 1:32-33) 호슬리는 이점을 일반적으로 종말론적 사건으로 해석해 온 것에 반대합니다. 종말에 로마를 타도하고 하나님의 새날을 이룰 것이라는 식으로 해석 되는 것에 반대하는 것이지요. 당시 헤롯은 로마의 봉신왕으로 로마 권력을 입고 왕이 되어 온갖 충성을 바치는데, (그는 로마황제의 숭배자라는 호칭까지도 있었던 사람입니다.) 유대 백성들 특히 소작농들에게 혈세를 부담시키고 고혈을 짜내어 자신의 부와 로마의 충성을 위해 썼습니다. 결국 유대인들의 저항운동에 부딪혀 암살의 위협까지 받으면서도 권력유지를 위해 온갖 독재를 하고, 자신을 메시아라 칭하며, 마지막엔 아들까지 의심하여 두 아들을 모두 죽입니다. 죽기 직전 유대 여러 지역의 뛰어난 이들을 감금하고 자기 죽을 때 저들을 다 죽여 울게 하여 자기 죽음에 우는 자들을 만들게 하기까지 폭정을 했으므로 다윗 왕권을 갖고 태어나는 예수는 헤롯과 로마제국에 정면으로 대결하는 자로 태어나는 것이라고 합니다.
(2) 세금징수에 관련된 정치, 경제, 종교적 갈등이 있었습니다.
누가복음 2장 1-20절에 나오는 로마황제 아우구스투스로부터의 호적등록과 인구조사 명령 및 이를 위한 이동에 관한 기록은 지금까지 메시야가 베들레헴에서 탄생할 것이라는 구약의 예언을 이루기 위한 배경이라고 해석해왔지만, 호슬리에 의하면 이 인구조사는 철저히 로마의 세금징수와 연결되는 제국의 유대착취를 드러내는 것이라고 합니다. 제국주의 구조는 최대의 세금징수에 있고, 그것을 위한 인구조사는 절대 중요한 행정적 절차입니다. 그런데 이 세금징수가 백성의 시달림의 가장 큰 요인이었고 세금거부를 위한 반란과 저항운동이 수시로 발생한 사건의 핵심이지요. 누가복음 2장에 나오는 목자들과 천사들의 합창을 우리는 평화의 극치로 생각해 ‘하늘엔 영광, 땅엔 평화’라 했지만, 호슬리에 의하면 실제로는 제국의 이념들에 정면 도전하는 고통당하는 민중을 위한 하늘 군대의 합창이을 성서가 전승하고 있다고 합니다. 시리아 총독 구례뇨 때 호적을 등록했었는데 실제로 그 연대가 예수탄생과 일치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인구조사와 관련한 이야기 구조는 조세억압과 예수탄생을 관련시키고자 한 저자의 치밀한 의도로 볼 수 있습니다. 기원전 6년 조세부과에 대한 심각한 저항운동이 있습니다. 광범위한 조직으로 퍼졌고 ‘로마에 조세를 바치지 말며, 언젠가 망할 지배자를 따르지 말지니, 하나님만이 이 백성의 주님’이라고 지도자 유다스와 바리새파 사독이 민중을 설득합니다. 종교지도자들이 마을과 촌락을 다니며 세금 거두기를 했고, 로마는 세금미납을 반란과 동일시하면서 ‘불행을 막는 방법은 복종 밖에 없다’고 했습니다. 유대 팔레스타인 소작농들의 세금은 안식년을 제외하고는 매년 12.5%의 로마세와 십일조 성전세 그리고 그 이외에 제물을 바치는 등등 30%이상의 세금을 내야하는 처지였기에 당시 농민들의 삶은 피폐하기 그지없었습니다. 로마제국의 협조자였던 유대의 지배계층과 유대의 민중 사이에는 바로 이 ‘세금 징수’에서 핵심적 갈등의 요소가 있었습니다.
(3) 귀족 대제사장과 일반 제사장 사이의 갈등이 있었습니다.
세례 요한의 집안이 제사장 가문인데 제사장 가문이 굳이 여기에 등장했는가에 대한 호슬리의 분석도 흥미롭습니다. 사도행전 6장 7절에 보면 제사장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예수 믿음을 받아들였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초기 그리스도교 운동은 예루살렘의 대제사장 정권과 갈등이 심했습니다. 귀족 관료, 대제사장 권력들이 친 로마로 유대 백성 착취와 억압에 동조하고, 앞장서며, 협조하는 등의 태도는 물론, 그들은 권력과 부를 누렸으나 일반 레위인과 지역의 제사장들은 백성의 편에 서있었습니다. 양자 간 갈등은 심각했습니다. 지역 제사장들이 예루살렘 성전의 직무를 수행할 때 보면, 그들이 그곳에서 목격했던 것이 사치스런 삶, 헤롯 궁전의 이방적 분위기와 그럼에도 불구한 그들의 당당함, 로마에 정복당한 뒤 하루 두 번 로마와 시저를 위해 제사를 바치는 장면은 혐오스러웠다고 할 정도였습니다. 종교는 권력체계를 가졌고 대 제사장은 사회 전체를 정치, 경제적으로 지배했습니다. 대다수의 제사장 가문은 ‘귀족적인’ 제사장들에 의해 지배당하고 혹사당했는데 대제사장은 십일조, 제물관리를 하면서, 불량배들을 동원한 폭력으로 테러를 일삼아 농민들의 소출을 강제로 빼앗았습니다. 일반 제사장들과 지방에 거주한 제사장들 그리고 농민들은 굶어 죽는 상황에까지 이르렀습니다. 엘리야의 영성으로 태어난 세례 요한, 아버지 사가랴, 어머니 엘리사벳은 대제사장들에 반대하는 백성의 편에 서있었습니다. 그는 로마의 지배아래에 있는 유대-팔레스타인 내부의 근본적 갈등에 민감했고, 그래서 특별한 역할 담당했습니다. 주후 66년 로마인과 대제사장 세력에 대한 대규모 항쟁이 있었습니다. 변혁을 요구하는 제사장들이 로마의 제사를 거부하고 전쟁을 준비하였던 것입니다.
종교, 경제, 정치는 이렇게 하나로 얽혀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세례자 요한의 부모가 제사장 가문이라는 사실은 민중과 요한을 갈라놓지 못하고 특수한 예언자적 사명을 띤, 헤롯에 대한 백성의 저항을 선도한 카리스마적 지도자를 연상케 합니다. 이것이 유대 구릉지역의 제사장 가문 출신의 배경입니다. 호슬리는 이런 정치, 경제적 갈등, 곧 권력의 지배, 종교권력의 횡포에 정면으로 대결하는 아기 예수의 오심의 의미를 되찾아 원래의 크리스마스 메시지를 오늘날 다시 회복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면 마리아는 어떤 여성인가요?
(1) 마리아는 저항적 성향의 여성입니다.
성서는 마리아가 어떤 인물인지에 대해서는 침묵합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순종의 모범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저항적 성향의 여성입니다. 그는 하나님명령이니까 ‘그 뜻대로 아이를 갖겠습니다.’, ‘어머니가 되겠습니다.’ 라고 천사의 말에 단순히 동의한 것은 아닌 것으로 보입니다. 우선 가브리엘의 전언에 신중하게 자기를 살피며 깊이 생각합니다. 누가복음 1장 29절에 가브리엘의 말이 ‘무슨 뜻일까 궁금히 여겼다.’고 합니다. 가브리엘은 마리아의 일이 민족 구원의 막중한 임무임을 알려줍니다. (누가복음 1:28, 32) 또한 엘리사벳이 마리아의 막중한 역할을 알립니다. (누가복음 1:42-45) 마리아의 순명은 그 임무에 대한 응답이지, 무조건적인 순종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뜻 없이 무릎 꿇는 복종이 아닙니다. ‘마리아 찬가’는 이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마리아는 정치운동의 대열에 서기로 작정하고 순명합니다. 예수의 메시아 운동이 저항, 혁명 운동임을 알아듣고 그것을 자신이 시작하기로 작정하지요. 생각해 보십시오. 막강한 권력의 헤롯과 갓난아기인 예수와의 대결은 어불성설 아닌가요? 아기로 오는데 언제 그 운동을 시작할 지 미래는 전혀 예측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마리아는 그 막연하고 불확실한 상황에서 자신이 그 일을 시작할 것을 작정한 것입니다. 우리가 정치운동이라고 말하고 그것을 비난하여 정경분리를 내세우지만, 사실 그것은 정치운동이 아니라 정의의 운동입니다. 온 이스라엘을 불의와 폭력으로 뒤덮고 있는 불의한 세력에 대한 저항운동이며 하나님의 정의를 따르는 일이고 예언자의 전통에 서는 일임을 마리아는 확실하게 알았습니다. 마리아는 돌에 맞아 죽을 수도 있는 매우 위험한 결정임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사람들의 고통을 외면할 수 없다는 연민과 정의의 감수성으로 예수의 일을 시작하고 있는 것입니다.
당시 유대는 2세기에 걸쳐 네 차례의 대학살 사건을 겪습니다. 1차는 주전 63년 폼페이가 팔레스타인을 점령한 때부터 37년 헤롯이 완전 점령할 때까지로 12,000명이 죽었습니다. 2차는 주전 4년 예수 탄생 즈음부터 헤롯이 사망할 때쯤까지로 이때 거대한 메시아운동이 일어났고 로마가 이를 대대적으로 진압하면서였습니다. 이 사건은 예수와 추종자들이 활동하던 지역 세포리스라는 곳에서 발생하였기 때문에 학자들은 예수와 관련여부에 관심을 가집니다. 아무튼 그때 세포리스는 불바다, 피바다가 되었고, 2,000명이 십자가형에 처형당합니다. 3차는 66-70년 대항쟁의 때로 유대인 폭동이 일어나 로마인들이 쫓겨났다가 팔레스타인을 재점령하면서 무자비한 만행을 저지른 사건입니다. 15,000명을 살육하고 2,130명이 잡혀갔습니다. 초토화 정책을 펼쳤는데, 그야말로 초토화 되었습니다. 4차는 132-135년 경 대 반란운동이 또 한 번 일어났고 이에 대한 로마의 만행으로 저질러졌습니다.
이 같은 민족의 비극을 경험하면서 민족 구원에 대한 간절함이 모든 국민들의 마음 아니었겠습니까. 마리아 또한 같은 마음이었습니다. 그는 그 임무에 장엄하게 순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민족 비극에 대한 예민함과 구원에 대한 간절함, 이것이 하늘을 향하게 했고 하늘의 뜻을 받아들이게 된 것 아니겠습니까.
‘주님의 종’이라 스스로를 일컬음은 복종의 의미가 아니라 이스라엘 전통에서 하나님이 특별하고 중요한 임무를 맡기는 자를 소명하실 때 ‘응답하는 자신의 호칭’입니다. 구원자로서의 소명, 백성의 구원을 위해 특별한 임무를 위임받은 자임을 말합니다. 이렇게 볼 때 마리아는 민족의 고통을 알고 그에 민감한 사람이었음이 분명합니다. 고통의 현실을 바라보면서 무엇이 정의인지에 대한 식별력이 확실하고 그것이 정치적, 경제적 사건임을 인지하면서 그것들에 저항할 영성을 가진 자로 보입니다. 이는 뒤에 나오는 마리아 찬가에서 분명해 집니다.
(2) 마리아는 공감을 나누고 연대한 여인입니다.
수태고지를 받은 마리아가 황급히 찾아간 사람은 사가랴의 아내 엘리사벳이었습니다. 우선 이 두 여인은 똑같이 아기를 잉태하였다는 생물학적 상태에서의 공감을 나눕니다. 그러나 그들의 입장은 너무나 달랐죠. 한 사람은 아기를 갖지 못해 가부장적 관습과 문화에 의해 비난받고 따돌림 당하고 경멸당한 고통을 경험하던 중 태아를 갖게 되어 기쁨과 쑥스러움으로 가득한 상태였고, 다른 한 사람은 혼전수임으로 가부장적 질서에 의해 돌로 쳐 죽임을 당할 수도 있는 공포와 위협과 극도의 불안상태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명을 잉태한 기쁨을 가지고 둘은 만났습니다. 둘은 상호 이해와 위로, 협력의 나눔을 가지고 앞으로 어떤 경우에도 함께 할 것을 약속했을 것입니다. 마리아의 이 태도는 그가 얼마나 관계적인 삶을 살았고 지혜로운 여성이었는가를 보여줍니다.
또한 마리아와 엘리사벳은 특별히 함께 공유한 의식이 있어 보입니다. 제사장의 아내로서 엘리사벳은 귀족 제사장들과 백성들 간의 심각한 갈등을 보았고 로마제국과 대제사장들과 헤롯의 불의를 뼈져리게 느꼈고, 민족 해방과 하나님의 정의가 실현될 날을 갈망하는 의식을 가졌음은 불가지론입니다. 마리아 또한 평소에 엘리사벳과 같은 의식을 가지고 사물을 판단하고 행동한 지혜의 여인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두 사람은 민족의 미래, 인간다운 삶에 대한 비전, 정의, 평화세상에 대한 갈망을 공유하였을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두 사람의 만남 중에 각각 부른 노래에는 이런 공유의식이 담겨있습니다. 이런 특별한 의식의 공유와 함께 힘을 합하는 연대의 관계가 두 사람 사이에 있는 것입니다.
(3) 마리아는 저항의 여인이며 민족을 해방시켜 온 역사의 여 예언자 전통에 서 있습니다.
마리아가 엘리자벳을 방문했을 때 ‘그대는 여자들 가운데 복 받은 여자’ 라는 인사를 받습니다. ’복 받은 여자‘ 라는 말은 구약에서 민족의 위기에 남자 장로들도 모두 속수무책으로 외세를 물리칠 수 없었을 때 홀연히 나타나 적장의 목을 베어 오거나 적군을 물리친 민족구원의 여성들 곧 야엘, 유딧, 드보라 같은 여인들을 ’복 받은 여인‘으로 칭송하고 있는데, 이 전통의 연장선에서 마리아는 그 대열에 함께 선 것입니다.
이는 곧 마리아가 민족을 구원할 여성으로의 정체성을 가졌음을 의미합니다. 민족을 구원한 여성들의 전승은 여 예언자적이거나 여 장수 같은 전승만 아니라, 절대 권력자 파라오의 눈을 피해 히브리의 남자 아이들을 살려 이집트를 탈출하게 한 동력을 만든 히브리 산파 시브라와 부아, 파라오의 무서운 엄명을 어기며 모세를 몰래 키우고 양육의 방법을 꾀한 모세의 어머니와 미리암, 그리고 애굽 공주와 같은 지혜와 명철의 여성 전통에도 함께 서있음을 봅니다. 또한 이스라엘의 마지막 사사이며 예언자인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의 해방 의식을 전승한 민족 미래를 위해 특별한 소명을 받은 구원자로서도 서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이제 우리가 성서를 원래대로 새롭게 읽는 힘을 가지고, 크리스마스와 마리아의 해방을 이룰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민족 구원을 위해 혁명가를 부른 마리아의 모습에 덧 씌워진 순종 이데올로기나 정경분리론 같은 것들은 과감히 걷어내고 성서의 원래 모습 찾고 마리아의 영성 또한 제대로 회복시켰으면 좋겠습니다. 대림절, 아기 예수님의 오심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는 우리들, 왜? 무엇을 기다리는지 곰곰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분단된 민족의 고통이 아직도 종북몰이로 나타나는 정치적 권력의 불의에 민감하지도 못하고, 종교는 정치에 관여하면 안 된다는, 그래서 사회적 불의도 정치적 일이라고 눈감고 살고, 무엇이 정의인지, 불의인지 분별하려는 노력도 하지 않으면서 분단 민족의 내일에 대한 염려와 소망도 제대로 갖고 있지 않으면서 이 대림절에 도대체 우리는 무엇을 기다리는 것일까요? 오직 아기 예수의 성화가 갖다 주는 그 평안과 행복, 나의 안녕과 복을 위해 크리스마스의 예수를 기다리고 있나요? 북한을 간접적으로 돕는 것도 중요하지만 분단의 사슬을 끊을 수 있는 정치의식, 경제의식이 더 근원적 실천임을 깨달아야 하지 않을까요?
오늘은, 16-7세 된 소녀 마리아로부터 민족의 고통에 예민한 감수성을 가지고 민족의 구원을 간절함으로 바라면서 불의한 세력에 대한 저항의식으로 두려운 소명에 순명하고 지혜롭게 공감자를 찾아 연대하고 이를 통해 민족의 미래에 대한 희망과 그것을 이루기 위한 실천의 삶을 선택한 성서가 원래 전하려고 했던 ‘마리아의 영성’을 배워 그녀를 닮고 싶은 대림절의 두 번째 주일이면 좋겠습니다.
평신도 열린공동체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사단법인 새길기독사회문화원, 도서출판 새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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