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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앞에 맹세하고 나를 괴롭게 마옵소서.

마가복음 궁극이............... 조회 수 388 추천 수 0 2015.09.27 17: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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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막5:1-7 
설교자 : 김경형 목사 
참고 : 궁극교회 주일예배 

5장 1절-7절: 예수께서 바다 건너편 거라사인의 지방에 이르러 배에서 나오시매 곧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무덤 사이에서 나와 예수를 만나다 그 사람은 무덤 사이에 거처하는데 이제는 아무나 쇠사슬로도 맬 수 없게 되었으니 이는 여러 번 고랑과 쇠사슬에 매였어도 쇠사슬을 끊고 고랑을 깨뜨렸음이러라 그리하여 아무도 저를 제어할 힘이 없는지라 밤낮 무덤 사이에서나 산에서나 늘 소리 지르며 돌로 제 몸을 상하고 있었더라 그가 멀리서 예수를 보고 달려와 절하며 큰 소리로 부르짖어 가로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나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원컨대 하나님 앞에 맹세하고 나를 괴롭게 마옵소서 하니.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게 가난하고 병들면 믿는 거냐, 부자 되고 편안해도 믿는 거냐? 모두 다 믿어야 한다. 전도서의 말씀처럼 인간의 본분은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다. 인간이라면 남녀노소 빈부귀천을 불문하고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할 줄 알아야 한다. 예수 믿고 안 믿고 그걸 따지는 게 아니라 네가 인간이란다면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는 존재다.


누가 그렇게 만들어 놨느냐? 하나님이. 인간을 당신의 모양과 형상대로 만들었다는 여기에는 창조주로부터 지음을 받은 우리 인간은 그 분과의 인격적 애정적 수수관계성이 있는 존재라는 것이다. 또한 인간을 당신의 모양과 형상대로 만들었다는 여기에는 ‘네가 나를 배우고 말씀에 순종을 하면 너는 나처럼 속성적으로 인격적으로 성품적으로 닮아지는 존재다’ 하는 것이다.


인간이란 인간은 가치판단 평가성을 받은 고로 하나님을 좋아하면 하나님을 닮게 되고,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을 좋아하고 그것을 따라가면 그것을 닮게 만들어진 존재이다. 우리 인간은 그 이치를 알아야 한다.


그래서 성경 전체는 인간 자기 창조의 원인과 동기와 목적을 가르쳐 주고 있다. 유교나 불교나 그 어떤 다른 종교에서도 인간창조의 원인과 동기와 목적을 가르쳐 주는 종교는 없다. 그러니까 예수 믿는 우리는 긍지를 가져야 하고, 이방종교적 선악과 따먹고 나온 사고방식의 이해타산을 가지면 안 되고, 그들의 소원 목적을 따라가서도 안 되고, 그런 학문 배워봐야 소용이 없다. 왜? 그것들에는 하나님 보시기에 인간이 바로 서는 기초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긍지를 가져라.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요는 예수, 예수는 구원이라. 이 구원의 사역은 하나님의 신, 성령의 역사로서만 되어지는 거다. 그게 기독교다. 그게 너의 신앙이 돼야 한다. 그렇게 바로 믿는 사람의 속성 인격성 성품성은 예수 그리스도처럼 만들어지는 거다.


하나님의 본질화로 만들어지는 이치가 성경에 있다. 성경은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려고 성령님의 감화 감동으로 쓰여졌다. 성령님의 감화 감동으로 쓰여진 이 말씀을 액면적으로만 말을 하게 되면 성령님의 감화는 없다. 왜? 액면 그 속에 하나님을 닮을 수 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따를 수 있는 그 성품성이 있는데 그걸 아는 게 성령님의 역사요, 이건 하나님의 본질로 들어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예수님을 믿는 기독교인들이 기독교를 하나의 이방종교와 같은 그런 차원으로 놓고 예수를 믿고 있으니 기독교 안에 사단 마귀 거짓 종들 이단자들이 얼마나 귀신장난을 치는지?


목사님들이 왜 이렇게 됐나? 기독교가 왜 이렇게 됐나? 교회를 가르치고 관할하고, 성도들의 영을 하나님의 속성적으로 온전으로 자라게 해야 할 하나님의 종들, 목사들의 책임이 정말 크다. 어찌되었건 망할 때는 다 같이 망한다. 그러니 교인들도 원통히 여기지 말아라. 이 말이 무슨 말이냐? 인도자를 잘 찾으라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의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그 이치로 가르치는 종이라면 어디에 있든 하나님께서 보내신 종이요 예수님이 보내신 종이다. 이게 아니란다면 사회적으로 교세적으로 세권적으로 교권적으로 아무리 훌륭하다고 해도 예수님께서 보내지 않은 것이다. 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없으니까.


성경을 글자적으로 읽었다고 해서 그게 곧 하나님의 말씀이냐? 아니다. 성경을 글자적으로 읽었다고 해도 그 성경을 세상으로 목적을 붙여서 해석하는 것은 성경이 아니다. 성경 속의 계시가 나오지 않으면 즉, 구원의 이치가 나오지 않으면 그건 세상적 해석일 뿐이다. 기독교가 이렇게 나간다면 이는 신앙인이 아니고 하나의 기독교 종교인일 뿐이다.


명칭상 호칭상 하나님의 자녀요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해도 그 사람 속에 들어있는 성격 성질 신앙의 성분이 세상성이라면 이것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아버지 하나님을 닮는 속성이 아니므로 이건 하나님의 재앙이요 하나님의 심판대에 놓여있는 거다.


기독교는 하나님의 본질이 성경에 이미 주어져 있기 때문에 성경에서 그 본질을 찾아서 내가 갖는 거다. 그런데 오늘날 기독교회는 자꾸 종교적인 행사로 기독교를 만들려고 한다. 종교적 행사로써 ‘이게 기독교다’ 하며 예수님 냄새를 풍기려고 한다. 그러나 이건 아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역사를 봐라. 예수님은 사람을 죄에서 구원, 이질에서 본질로 구원, 저질에서 하나님의 높은 차원으로 구원, 어리석음에서 지혜로움으로 구원하신다. 바로 사람 너를 구원해 주려고 왔다. 또한 마지막 시대에 너를 찾으러 다시 오실 거다. 다시 오심은 ‘네가 일한 것 좀 어디 보자’ 하고 그것 보러 오시는 것이 아니다. ‘네가 그동안 얼마나 예수를 믿었고 얼마나 날 닮았느냐? 네가 하나님의 지혜지식성적으로, 하나님의 도덕성적으로, 하나님의 능력성적으로, 하나님의 본질로 거짓 없이 얼마나 인격화 실상화 되었느냐?’ 하고 그것을 보러 오시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지옥 가고, 천국 가고’ 하는 이건 구태여 말할 필요가 없다. 그거는 예수님 당신이 책임을 지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인간 되어 오신 것이 당신께서 그 책임을 지고 있다는 그 증거이다. 그러니 예수님을 믿는 너는 그건 염려 걱정 말아라. 그건 예수님께서 인간 네가 태어나기 전에 영원 전 그리스도 안에서 나의 구원을 설정을 하셨다. 이게 기독교다. 이게 교회다.


영원 전 당신의 의지세계에서부터, 당신의 의중에서부터 인간 자기를 당신의 사랑의 제 1 대상자로 삼으셨다. 그래서 예수님과 나는 끊으려야 끓을 수가 없다. 자기가 자살을 해서 죽던, 어떤 죄를 지어서 죽던, 어떻게 죽던 예수님과는 끊을 수가 없다. 이게 기독교다. 이게 예수 믿는 거다. 이게 예수님과 나와의 관계성이다. 이 신앙의 기본이 바로 박혀져 있지 않으면 그건 흔들리는 신앙이고, 자칫 잘못하면 유혹 미혹을 당하고 감정과 흥분에 의해 넘어졌다 자빠졌다 하게 된다.


엄밀히 따지면 우리가 예수 믿는 그날로부터 바른 인도자를 만나서 바로 배워서 예수님의 옳은 진리를 가졌다면 이건 한 6년만 배웠다면 모르긴 해도 하나님의 큰 그릇이 될 것이라고 느껴진다. 그런데 그게 아닌 이질로 들어가 있기 때문에 수 년 수십 년을 믿었어도 도무지 자라지를 못하는 것이다. 성장하지를 못하는 것이다. 예수는 오래 믿었는데도, 시간은 많이 흘렀는데도 도무지 깨닫고 알아진 사상과 정신과 도덕성이 들어있지를 않은 것이다. 손해 난 이 세월을, 이 시간을 어디에 항의를 하고 손해배상을 할 수 있을까?


거라사인의 땅의 무덤 사이에 귀신들린 사람 한 사람이 살았다. 딴 데는 두 사람이라고 한 곳도 있다.


복음서에는 같은 사건을 놓고도 어느 복음서에는 그 사건이 없는 것도 있고, 다른 복음서에는 없는 게 또 다른 복음서에는 있기도 하고 그렇다. 그렇다고 해서 순서적으로 배열을 한다고 하며 그걸 이리저리 끼워 맞춰서는 안 된다.


자기가 이처럼 성경을 끼워 맞추지 말아라. ‘다른 곳에 있는 게 여기에는 없네. 다른 곳에 있는 걸 여기에 끼워 맞춰야지’ 하는 건 네가 성경을 만드는 거다. 각 성경이 같은 사건을 각기 다르게 기록하거나 빼먹거나 한 것은 그렇게 해야 만이 계시적 교훈이 되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이기 때문이다. 계시적 차이 또는 계시적 강조점이 다르기 때문에 그렇게 되어 있는 것이다.


계시의 강조점이 똑같은 것인데도 어느 성경에서는 빼먹고 어느 성경에는 들어있고 하는 것이라면 그렇게 기록한 성령님이 정신이 없었던 것인가? 만일 이렇게 말한다면 이는 성경이 성령의 감화로 기록된 성경이 안 되고, 성령님도 하나님도 불완전한 분이 되는 거고, 이렇게 된다면 우리가 예수를 믿을 필요가 없게 된다.


성경을 이리 저리 끼워 맞추지 말고 어떤 성경구절을 본다고 해도 하나님의 인간을 향한 계시적인 뜻이 나와야 한다. 인간이 오각의 오감성이 있듯이, 희로애락이 있듯이 자기가 그 하나님의 뜻에서 영감적으로 인격적 느낌성에서 그 뜻이 발산이 돼 나와야 한다. 표현 자체가 다가 아니고 그 표현 속에서 느껴지는 것을 찾아야 한다.


사랑은 뭐냐? 말로만 ‘사랑’ 그러면 사랑이 되는 거냐, 사람 속에는 느낌성이 있어서 그게 여러 가지 표현으로 나오는 게 사랑이냐? 후자다. 하나님의 말씀을 배울 때 계시의 느낌성이 없으면 이건 영감적으로 둔감해지고, 화인 맞아지고, 사람이 인격의 사람이 되지를 않는다.


이들이 무덤 사이에 왜 살았느냐? 사람이 무덤 사이에 산다는 것은 죽은 사람을 뜯어먹고 사는 사상이 나오는 거다. 무덤은 사람이 영원히 살 수 없는 곳이다. 이는 비유컨대 ‘이 세상은 영원히 살지 못하는 곳이라’는 뜻으로 성경에 무덤이라는 비유를 갖고 오는 거다.


이 세상 모든 인간은 선악과 따먹고 하나님 앞에서 영이 죽었다. 따라서 모든 인간은 무덤 즉, 죽는 곳, 죽은 곳, 사망권, 사망계 안에서 사는구나. 이 원칙을 깨뜨리면 안 된다. 이걸 말해주는 거다.


무덤에서 살고 있으니 무덤에는 비석이 있다. 무덤에는 각자 해놓고 남겨놓은 기념이 있다. 그러니까 무덤에 사는 그 사람이 그 기념비를 보며 자기도 그렇게 살겠다고 소원 목적을 하고 있는 거다. 그게 세상이다. 세상에서 부르짖는 소리가 다 그거다. 다 세상에서 기념비를 남기려고 한다. 그러나 이건 천국의 기념비가 아니다. 모든 인간이 선악과 따먹고 보암직 먹음직 탐스럽게 한 그 정신 사상을 삼키고 먹었는데 그것이 신령천국에 해당이 되는 것들이냐? 아니다.


성경은 특별계시로써 다 비유 비사로 들어가 있다. 그 비유와 비사에서 상징적 모형적 계시 등등을 다 보여준다. 현재 자기가 기견적인 이 세상에 살면서 가견적인 이 세상에서 되어지는 일들을 성경의 특별계시에 갖고 와서 깨달아 봐라.


세상의 법칙과 이치는 모두 임시성적이다. 이건 뭘 가르치려고 하는 것이냐? 영원히 가는 이치와 법칙, 인간이 사는 도리, 인간이 하나님 앞에 바로 사는 길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다. 이 세상 만물 속에 그게 다 들어있다. 그냥 만들어 놓은 것이 아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만물을 만드실 적마다 ‘보시기에 좋아더라’ 라고 하신 것이다. ‘당신의 자녀들이 당신이 만든 이 세상에 살면서 만물을 잘 이용 활용 응용하면서 이룰구원 성화구원을 잘 이룰 수 있겠구나. 자타를 위한 구원을 잘 이룰 수 있겠구나’ 하는 그걸 염두 두고 ‘보시기에 좋았더라’ 라고 하신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뱀을 봐도 보기가 좋고, 구더기를 봐도 보기가 좋다. 왜? 그것들이 사는 이치를 가만 보면 눈으로 보이는 것을 통해서 예수 잘 믿게 하는 지혜를 주고 있구나. 다시 말하면 나 예수 잘 믿고 잘 만들어지라고 날고 기고 땅에 파고 들고 솟고 물에서 나는 걸 다 만들었다.


그런데 처음에 생명과를 안 먹고 선악과를 먹었기 때문에 영이 죽었지만 예수를 믿는 사람은 생명과 먹고 지키고 다스리고 통치하고 지배하는 그게 나오는 거다. 즉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이제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이치를 먹는 거다. 이렇게 해서 말씀에서 이치를 바로 깨달아 나가면 자기가 다스려지고 남이 다스려지고 주위를 다스려지게 되니 이게 왕이요 이게 선지자요 이게 제사장이다.


예수 믿는 사람의 목적이 일 크게 해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겠다? 그거야 돈만 있으면 사람이 안 돼도 할 수 있는 거다. 어느 단체를 봐도, 어느 교회에 가도, 무엇을 보더라도 이치가 틀려지면 너의 가치 판단 평가는 틀렸다. 기독교 안에서 이치를 찾되 영원히 가는 이치를 찾아라. 그 이치는 신령천국에 가서도 네가 효력을 보는 바로 네 거다. 말씀이 깨달아져서 연관되어서 활용되고 사용되어서 실력화 된 그게 바로 네 거다. 예수를 믿어도 내 것으로 될, 내가 효험을 볼 수 있는 그 예수를 믿어라. 이용당하지 말고.


무덤에서 사는, 사망권 안에 사는 이 자들이 예수님을 보고 땅에 넙죽 엎드렸다. 그러고서는 ‘나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나를 떠나소서’ 라고 했다. 그러니까 이들이 예수를 아는 거냐, 모르는 거냐? 예수를 알기는 아는 거다. 그런데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한다. 그럼 뭐냐? 알기는 아는데 상관이 없다는 이게 뭐냐? 이게 딴 사람이 아니라 바로 교인을 말해주는 것이다. 교회는 다니는데, 예수는 믿는다고 하는데, 예수님 앞에 엎드리기는 하는데, 누가 이걸 멀리서 보면 ‘아, 저 사람 예수를 잘 아나 보다’ 하는데 그런데 가까이 가서 대화를 가만히 들어보니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한다.


예수 믿는 사람이 예수이름으로 기도를 하는데 일 크게만 해 달라고 하는 것뿐이지 인격적 애정적 결합적으로는 관계가 없는 기도가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하는 거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기도할 적마다 ‘고마우신 하나님 아버지, 사랑하신 하나님 아버지, 감사한 하나님’ 하며 극진히 예수를 사랑한다고 한다. 그러면 무엇을 해 주어서, 또는 무엇을 해 주기를 원해서 그런 말을 하는 거냐?


성경에 보면 빌립보 도상에서 예수님께서 ‘내가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죽는다. 그리고 삼일 만이 살아난다’ 하니까 베드로가 ‘그리하지 마옵소서’ 했다. 즉 죽지 말라고 했다.


그러면 예수님은 이걸 놓고 하늘로부터 오신 거고, 이걸 놓고 33년을 사신 건데 베드로 말대로 그걸 안 한다면 어떻게 되는 거냐? 우리의 구원이 없어지는 거다. 성경이 없어지는 거다. 하나님도 없어지는 거다. 예수 당신도 없어지는 거다. 한 마디로 다 없는 거다.


그래서 베드로의 그 말에 예수님이 뭐라고 하시느냐?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않는도다.’ 하나님의 일은 구원이다. ‘지금 나는 구원을 놓고 사역을 하고 있는데 너는 사람의 일로 생각하는도다. 너는 그렇게 하지 말아라.’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무엇을 구원이라고 생각을 하느냐? 구원이 뭔지 아느냐? 현재의 구원이 뭔지? 자기가 예수를 믿으면서 이루어 가야 할 구원이 뭔지? 일 크게 많이 하라는 그 말인지, 어느 사건 환경 속에 있더라도 당신처럼 만들어지라는 이 구원인지?


어떤 사건 환경이던, 각자가 부요한 사건이던 가난한 사건이던 어떤 사건이 있어도 그 사건 속에는 예수 그리스도로 만들어져 나오는 이치가 들어있는 거다. 이치가 있는 곳에서 자기가 그걸 잘 알면 응용 활용을 하겠는데 자기가 모르니 응용 활용을 할 수가 없다. 할 수가 없으니 그 상황이 괴롭고, 나는 그 밑에 들어가서 죽겠다고 하니 평생 살기가 힘들다. 안 믿는 게 아니라 믿기는 믿는데 그렇게 믿으니 기도가 뭘로 나오겠느냐? 내 형편을 천국처럼 만들어 달라고 하게 된다.


그러나 세상은 그런 곳이 아니다. 선악과 따먹고 타락된 세상이다. 한국은행의 자리라도 그게 천국인가? 그건 선악과 먹은 자리다. 거기는 병이 없느냐? 안 늙어 죽느냐?


돈이 한 푼도 없는 아주 가난한 사람의 마음속에 돈 욕심이 들어있다. 그러면 누가 그 마음을 좋아하느냐? 성경에 보니까 ‘부요하려 하는 자는, 부자가 되고자 하는 욕심을 품은 자는’ 한 그게 다 돈이다. 돈을 놓고 하는 소리다.


그러면 거지에게만 마귀시험이 있고, 세계적인 은행장이라고 하는 그 장자리는 돈이 필요가 없는 곳이냐? 늘 돈 주고 보고 만지고 해도 데도 마귀는 거기서도 역사를 한다.


그러면 마귀가 역사하지 않는 곳이 어디냐? 있다. 사람 속에 무엇이 가득한 사람? 하나님의 생명의 물이 가득한 사람, 하나님의 생명이 충만한 사람에게는 마귀가 덤벼들지를 못한다. 귀신장난이 오지를 못한다. 늘 말씀을 드렸지만 이놈의 귀신은 사람의 바꿔지지 못한 성격 성질 성분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그걸 알아야 한다.


우리는 선악과 따먹고 늘 세상정신과 사상으로 산 사람들이었지만 언제 믿었던 간 예수를 믿었으니 그때부터 생명과를 먹어라. 안 그러면 스스로 시험이다. 남은 아무렇지도 않은데 자기는 야단법석이다. 그런 사람이 돼서는 안 된다.


무덤 사이에 사는 사람은 주님과 인격적 애정적 결합적 수수관계가 없다. 그런데 어느 곳에 보니까 회당 안에서도 그런 사람이 있다.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다윗의 자손 예수여’ 한다. 이게 다른 사람이 아닌 예수 믿는 사람이다.


예수님께서는 인간 자기를 십자가의 구속으로 구원을 해 주셨는데 자기는 예수 믿으면서 깨닫지를 못해서, 안 가르쳐줘서, 자기 스스로도 알지 못해서 주님과 인격적 관계없이 살았다면 어떻게 될까?


인격적인 세계에서는 어디를 가든 아가페라는 큰 틀 속에 스톨게 필레아 에로스가 다 있는 건데, 또한 사람은 인인관계성으로 살면서 서로 사랑을 주고 받으며 사는 존재인데, 어디를 가든 그런 관계가 있는 건데 그걸 모르니 인격적인 면에서 깨닫는 면에서 미달이 되고 결여가 될 수밖에 없고, 따라서 그런 자기의 존재성을 인격적으로 생각을 해 보면 얼마나 부족하고 없고 구부러지고 비뚤어졌는지? 그러니 누가 그런 자기를 좋아하겠느냐? 네가 다른 사람을 싫어하는 것만큼 다른 사람이 너를 그만큼 싫어한다.


그런데 자기 부족성의 원인을 어떻게 찾는 거냐? 자기 부족성의 원인은 항상 하나님을 두고 자기를 하나님께 비추어 보고 하나님 것을 자기 자체화 시켜라. 학교에서도 자기 실력의 점수가 안 나오면 그 면에 실력 있는 선생을 찾아가서 자기의 실력의 메워나가지 않느냐? 세상 이치도 그런 것인데 예수 믿는 사람이 뭘 어떻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거냐? 자기가 어떤 면에 부족이 있는지는 생각하지도 않고서 세상을 구하고 있다면 이걸 부정적으로 말한다면 ‘너는 다 만들어졌다고 하고 있구나’ 이게 된다.


다 만들어졌다면 예수 믿을 필요가 없다. 성경을 볼 필요가 없다. 그러나 부족한 사람은 그만큼 ‘나는 어린 아이입니다’ 하는 게 들어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어린 아이를 데려다가 말씀하신 비유가 있지 않느냐?


오늘날 예수 믿는 자기의 소원 목적하는 기도가 세상을 구하고 있다면 이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하는 기도다. 오늘날 기독교 안에 대 집회, 교파를 초월한 집회, 전도지 등을 보면 예수님과 인격적인 관계는 없고 맨 ‘병 고쳤다. 부자 됐다. 어떻게 됐다’ 맨 그 간증들이다.


아니, 얻어맞아 병들었다가 나은 게 자랑하며 간증하러 다닐 일이냐, 부끄러운 일이냐? 그런 자랑은 자기 미련한 거다. 그게 예수자랑이 나오느냐? 남은 얻어맞지 않고도 예수 잘 믿는데 왜 자기는 얻어맞고 믿어놓고는 그게 무슨 자랑이냐? 참 어리석다.


그런 간증을 들은 사람은 또 자기도 그 사람처럼 그래봤으면 한다. 그래서 ‘그러면 너도 실컷 얻어맞고 뼈도 부서지고 예수 믿어라’ 하면 그건 싫다고 한다. 이치에 맞는 소리를 해야 한다.


예수님께서 이에 땅에 오신 목적은 우리를 신령한 천국으로 데려가기 위해서 오신 것이고, 선악과 따먹고 타락되고 저주 받고 영이 죽은 우리를 십자가의 구속으로 죽은 영을 살리고 예수 믿게 해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영인성장과 영능의 실력자로 만들어서 신령천국을 유업으로 주어서 영원히 누리게 하려 하심이다.


하지만 우리가 예수를 믿긴 하지만 아직까지 우리 속에 하나님의 성품으로 거듭나지 못한 악성 악습이 들어있다. 완전하지 못하다. 하나님의 것 즉, 하나님의 지혜지식성과 하나님의 도덕성과 하나님의 능력성과 단일 되지 못한 것이 내 속에 많이 들어있다.


그러면 하나님의 것과 내 것을 합의를 보면 단일이 되는 거냐? 아니다. 내 것은 아무리 좋아도 내버리고 하나님의 것으로 채워 넣어서 하나님의 것으로 된 거기서 열심도 나오고 자원적 순종도 나오는 이게 옳은 거다.


오늘날 이렇게 바꾸어지지 않은 채 나오는 신념적 신앙이 참 많다. 바꾸어져서 신념도 나오고 신뢰도 나와야 하는데 안 바뀐 채 자기 주관성에서 신념도 나오고 신뢰도 나오고 있으니 이거는 그 뿌리가 하나님이 아니다. 이건 쉽게 통째로 말하면 사람이 안 바꿔진 것이다. 사람이 안 바뀐 상태에서 예수를 믿고 있는 거다. 안 바꿔진 상태로 예수 믿고, 안 바꿔진 상태에서 설교하고, 자기 주관을 가지고 성경을 보고, 자기 이성적 주관에서 나온 이걸 가지고 설교하고 있는 거다. 이건 다 죽는다.


구약성경을 보면 어느 기도원인지 어느 신학교인지 모르겠지만 엘리사가 어느 생도에게 죽을 끓이라고 하니까 따르는 학생이 집에서 끓이는 게 아니라 나가서 참외과인지 넝쿨열매인지를 갖고 와서 그게 먹는 것인 줄 알고 솥에다 집어넣고 죽을 끓었는데 국을 끓이니 맛이 썼다. 독이 있었다. 그래서 엘리사가 밀가루인지를 갖고 오라고 해서 그걸 솥에 넣으니까 독이 풀려서 먹었다.


이걸 보고 식물선생이나 한약사들은 그럴 때 뭘 넣으면 독이 없어진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 입장에서 그게 한약과 공부를 하라는 것이냐? 이치적으로 바로 보라는 것이다.


그러면 이걸 그대로 갖고 와서 오늘날 자기가 영적 차원에서 이룰구원 차원에서 이치적으로 보면 엘리사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있다. 그러니까 명령을 하는 그 분을 주님자리에 세워놓고, 그 말씀을 들은 생도가 넝쿨을 갖고 와서 끓일 때는 자기만 먹으려는 게 아니라 생도들과 같이 먹으려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것을 가만히 보면 그 성격이 주님이 ‘아무개 목사야, 너 설교하라’ 했더니 그 목사가 자기 주관성에 나온 설교 즉, 그 넝쿨을 딸 때 보기 좋은 걸 따서 끓여서 생도들에게 먹였으나 그것이 쓰고 독이 있었듯이 목사가 자기 보기 좋은 대로 이성적 생각으로 좋은 말로 설교를 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이건 쓰다. 독이다.


끓인 국에 독이 있으니 엘리사가 가루를 가져오라고 한다. 덩어리가 아닌 가루라면 뭘 하든지 반죽도 잘 되고 뭐든지 해 먹을 수 있다. 어쨌든 덩어리가 아니고 잘 빻아진 가루를 넣으니 독이 중화돼서 먹게 됐다. 하나님의 말씀에 우리의 자아가 잘 찧어지고 빻아지면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열매를 맺는 사람이 되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게 이방 불신자들에게 주시는 말씀이 아니고 오늘날 우리 교회에 주는 말씀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래야 여기서 우리의 구원도리가 나오는 거다. 깨닫는 이치의 구원이 나오는 거다.


목사가 설교할 때 쌩뚱이 이성적 무슨 철학을 먹이면 교인이 사는 거냐, 죽는 거냐? 죽는 거다. 독이다. 이렇게 보면 벌써 정신 사상적 목적적 이치가 나오는 거다. 과거 현재 미래의 사상이 나온다. ‘아이고, 이거 죽었구나.’ 그러나 가루를 집어넣으니 독이 없어진 것처럼 내가 말씀에 잘 빻아져서 하나님 앞에 쓰시기 좋은 가루처럼 되면 당신의 생각대로 내가 사는 것으로 나오는구나. 사람을 살리는 역사가 나오는구나. 엘리사의 그 사건 속에 이게 들어있다.


네가 살고 싶으냐? 하나님 앞에 가루가 되라. 너를 부인하고 네 십자가를 지고 네 주관성을 말씀에 부숴라. 깨져라. 밀가루처럼 되라. 밀가루처럼 되면 제사장이 잘 반죽을 해서 하나님의 성소에 놓여진다. 하나님 앞에 바침이 된다. 존귀한 인간이 된다. 그게 들어있다. 인간의 가치를 알아라. 예수 믿는 가치를 알아라. 교훈의 가치를 알아라.


자기 집에서 존귀함을 받고 싶으냐? 깨져라. 사회에서 존귀히 여김을 받고 싶으냐? 깨져라. 교회에서도 마찬가지다. 깨지지 않아서 자기 욕심만 부리고, 자기 기도만 하면 안 된다. 교회 안에 안 깨진 기도가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목사님들 세계에도 하나도 안 깨진 채 어쨌든 자기 계획대로 목회를 하려고 한다. 그건 네 교회이지 주님의 교회가 아니다.


명칭상 호칭상 교회인데, 목사인데 교회 밖의 교회가 있다. 교회 밖의 교회이면서 건물만 크게 지으면 뭐하고, 많이 모이면 뭐하느냐? 그건 심판 때 성문 밖에서 밟히는 것이다.


성경에서 구원이치 구원도리를 모르면 자기는 헛 믿게 되고, 헛 살게 되고, 헛 시간 투자하게 되고, 헛 노력하게 되고, 자기의 전 인격 전 생애가 깡그리 사망계로 사망권으로 날아가 버린다.


예수님의 33년의 생을 두고 부활을 봐라. 그 33년의 삶 동안에 무엇이 살고 무엇이 죽었느냐를 봐라. 우리교회에 왔으면 예수 똑바로 믿어라. 가치판단이 분명하고, 자기 의지가 진리로써 분명해야 순교의 신앙이 돼 나오는 거지 안 그러면 자기 존재가치는 그만큼 흐리고 그만큼 어둡다. 그러면 살았다는 뚜렷한 뭐가 있느냐? 안 믿는 사람과 똑같은 수준으로 살다가 죽는 것뿐이다. 그렇게 예수 믿지 말아라.


예수 존재는 그런 분이 아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 것은 일반사회에서 누가 세상을 천국처럼 편안하게 만들어 놓으면 거기 가서 사는 그런 자들이 아니다. 우리교회에서 예수 믿는 사람은 생산이 있어야 한다. 정복이 있어야 한다. 전투가 있어야 한다. 살아있어야 한다. (계속)


김경형목사님이 교역자 신학생을 대상으로 20여년 동안 매 주 정례적으로 진행하는 신학 및 성경연구 모임을 통해 영원 전에 하나님의 의지세계에서 인간구원을 설정하게 된 원인과 동기와 목적을 깨닫고 하나님의 본질의 신앙으로 나가는 주의 종들이 누룩처럼 퍼져나가고 있습니다.
참석하실 분은 031-207-5159, 또는 010-8886-5159로 문의해 주세요.(평신도도 참석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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