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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막5: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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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경형 목사 |
참고 : | 궁극교회 주일예배 |
5장 1절-7절: 예수께서 바다 건너편 거라사인의 지방에 이르러 배에서 나오시매 곧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무덤 사이에서 나와 예수를 만나다 그 사람은 무덤 사이에 거처하는데 이제는 아무나 쇠사슬로도 맬 수 없게 되었으니 이는 여러 번 고랑과 쇠사슬에 매였어도 쇠사슬을 끊고 고랑을 깨뜨렸음이러라 그리하여 아무도 저를 제어할 힘이 없는지라 밤낮 무덤 사이에서나 산에서나 늘 소리 지르며 돌로 제 몸을 상하고 있었더라 그가 멀리서 예수를 보고 달려와 절하며 큰 소리로 부르짖어 가로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나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원컨대 하나님 앞에 맹세하고 나를 괴롭게 마옵소서 하니.
이 세상의 인간이라면 남녀노소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예수 믿는 사람과 안 믿는 사람이 있다. 예수님은 하늘로부터 오신 분, 이 예수님을 믿는 사람과 안 믿는 사람이 있다.
그리고 이 세상에는 어디서 어떤 공부를 했던 어떤 지식을 가졌던 지식에는 두 가지 지식밖에 없다. 지식의 근원이 두 가지다. 하나는 에덴동산에서 인류의 조상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고 나온 지식이 있고, 그 다음에 자기가 예수님을 언제 믿었던 교회 다니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배우는 하나님의 지식을 자기의 지식으로 삼는 생명과 먹은 지식이 있다. 이 세상에는 생명과 먹은 지식과 선악과 먹은 지식, 이 두 가지 지식밖에 없다.
우리가 이 지식의 근원을 알면 어떤 철학자이던 어떤 학박사이던 그 사람이 가진 지식의 판단은 금방 나온다. 들으면 ‘아, 저거는 선악과 먹은 지식이구나. 아, 저것은 생명과 먹은 지식이구나’ 하고 알게 된다.
이 세상에서 지식의 기준은 두 가지밖에 없으니 생명과 먹은 지식과 선악과 먹은 지식이 있는데, 선악과 먹은 지식은 창:에 있듯이 인간 자기 눈에 보이는 기준이요, 사물을 보는 기준이 ‘아름답다. 밉다. 크다. 작다’ 하는 것을 눈으로 봐서 기준을 삼는 게 선악과 먹은 지식이다. 이걸 다른 말로 하면 보암직 먹음직 탐스러운 것을 취하는 것이다. 이건 눈으로 보이는 것을 기준으로 삼는 것이다. 보이는 그 자체가 나쁘다가 아니라 보이는 그것을 가지고 기준을 삼는 것이 선악과 먹은 지식의 기준이다.
그런데 인간의 눈에 보이는 것을 기준으로 하는 것 전부는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이니 눈에 보이는 것은 모두가 가견적 임시적인 것이다. 왜 그런가 하니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은 그 결과는 불에 다 타버리니까. 불에 타지고 없어지는 썩고 변동되고 변질되고 변화되고 불붙고 바람 불면 날려가고 하는 것으로 기준을 삼는 지식이 선악과 먹은 지식이다.
성경은 우리에게 주는 생명과 생명수다. 성경의 가르침은 우리를 하나님 당신처럼 만드시려는 것이고, 만물을 만드신 것 역시도 우리를 하나님 당신처럼 만드는데 이용 활용물이다. 그리고 하나님 당신이 세상을 만들었고 주권섭리를 하고 있으니까 내가 하나님의 속성을 닮느니 만큼 그 지혜지식을 가지고, 그 도덕성 능력성을 가지고 세상을 활용하고 사용하고 이용하며 지키고 다스리고 하는 이게 된다. 또한 나와 다른 사람이 하나님을 닮는 일에 활용성 사용성이 된다.
예수님을 잘 믿는 사람의 지식은 앞에서 말한 그런 지식, 그런 정신, 그런 소원 목적을 가지고 있지만 그러나 현재적으로 안 믿는 사람은 ‘지옥 갈 사람이라’ 그렇게만 보는 게 아니라 그 지식이 선악과 따먹은 지식인고로 자기의 소원과 목적이 전부는 세상의 부귀 명예 존귀 영광성으로 들어가 있다. 그러니까 자기의 소원 목적이 세상 부귀 존귀 영광으로 들어가 있으면 그 사람의 지식은 선악과 먹은 지식이다.
그런데 가슴 아프고 불행스러운 일은 예수님을 믿는 교회가 생명과 먹는 지식으로 바껴야 할 텐데 그러지 못하고 ‘예수 믿으면 세상에서 부자 되고 뭐든지 잘 된다’ 하고 있으니 이것은 아무리 성경구절을 써도 그 지식의 질이 선악과 먹은 지식의 질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뜻, 하늘나라, 하나님을 가르치고, 사람이 그렇게 만들어지게 하는데 거짓 종, 거짓 목사, 이단자들, 모든 적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을 전부 땅으로 소원 목적을 갖게 해석을 한다. 이들은 성경구절 그대로 갖다 대고 말을 하지만 그 목적이 세상이니 계시의 뜻은 없어지고 세상이 돼버린다. 무슨 세상이 되느냐? 종교적 세상이 되고 만다. 성경을 통해 생명과를 먹으면 종교적 세상이 되는 게 아니고 주님처럼 만들어진다.
하늘나라가 원형이라면 교회는 모형이니 교회 교인들을 보고 ‘하늘나라가 저렇구나’ 하고 하나님이 보아져야 할 텐데 교인을 보면 왜 마귀로 보이느냐? 그러니까 이건 교인들의 신앙이 근본적으로 잘못 놓여졌기 때문이다. 그냥 ‘나쁘다’가 아니고 이거는 근본적으로 신앙의 질이 잘못 놓여졌다. 아무리 예수를 믿어도 잘못 놓여졌다.
신앙의 질이 바로 놓이면 자기가 하나님의 속성적으로 만들어지겠금 신의 역사로써 들어가는 건데 예수를 믿는다고는 하지만, 그리고 입으로는 성경구절을 읽고 하는데 이게 안 돼 있다는 자체가 성경구절을 보면서 그 소원 목적이 세상으로 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근본이 바로 될 리가 없는 것이다. 안 되는 거다. 이런 상태에서는 힘을 쓸수록 더 힘들고, 시간이 갈수록 회개는 더 안 되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예수 믿는 자체가 회개가 안 돼 있는 것이다.
회개라고 하는 것은 땅의 소원 목적으로 가는 사람이 하늘나라의 소원 목적으로 되돌아서야 회개라고 하는 건데 신앙의 속성이 그게 안 되고 예수 믿으면서 세상으로 나가고 있으니 그게 어떻게 회개냐? 회개가 안 된다. 그러니까 이건 종교적 사람이요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자이다. 이게 계:의 짐승의 떼들이다.
마지막 교회가 짐승이 돼버렸다. 짐승은 미래 없이 인격 없이 사는데 성도들이 하나님의 인격과 성품이 되어져야 할 텐데 그게 없이 본능적으로 살고 있으니 짐승과 다름이 없는 것이다. 교회가 선악과 따먹은 일반인격으로 돼버렸다. 이게 짐승이라. 하나님은 그런 자를 짐승이라고 한다. 인간을 만드신 하나님께서 그런 사람을 멸망당할 짐승 같다고 하신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사람을 찾는 거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사람을 부르는 거다. 당신처럼 만들어서 당신 같은 사람을 내보내는 것이다. 이 일을 하는 게 하나님의 종들이다.
사람이 신앙의 질이 바로 놓여지지 않으면 예수 바로 못 믿는다. 기독교는 질을 말하는 것이다. 본질. ‘금이다’ 할 때는 그냥 덩어리를 말하는 거냐, 질을 말하는 거냐? 질을 말한다. 기독교라 하면 기독교의 본질, 하나님 속 성품을 말하는 거다. 그런데 오늘날 기독교가 ‘크게, 사람 숫자, 헌금’ 어쩌고 한다. 성경은 그렇게 가르치지 않는다.
세상에 속한 거짓 종들이 사람 숫자 따지고, 건물 큰 거 따지고, 세상에 속한 존귀 명예 영광성을 가지고 직분을 주고 하는 거지만 교회는 그런 곳이 아니다. 교회는 어떤 사람이 교회에 왔던 주님과 같은 속성을 입는 사람으로 만드는 곳이다.
하나님은 그 사람에게 점수를 주고, 그 사람에게 은혜를 주고, 그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 당신이 역사를 하신다. 하나님은 그 사람을 통해서 당신의 일을 해 나가신다. 그런데 마귀는 유형교회 안에서 세상 존귀 명예 영광 부귀성을 가지고 그런 사람들을 세우고 기준을 해서 믿음 좋다고 하고 광고를 하고 그런다.
교회는 사람이 아무리 존귀 영광스러워도 그 사람을 기준을 세우면 안 된다. 교회의 기준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뿐이다. 예수 그리스도께 가까이 가까이 많이 닮은 사람이 있다고 해도 그 사람을 기준을 세울 수는 없다. 기준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 뿐이다. 그러니까 우리 모두 자기의 기준은 누구냐? 예수 그리스도다. ‘누구 목사’ 그게 아니다. ‘누구 학박사’ 그게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다.
예수님께서 어린아이를 불러다가 당신 옆에 세웠다. 이것은 인간의 기준은, 그리고 인간이 자라는 기준은 예수님이라는 것이다. 이치를 바로 알아야 된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어도 아직까지 우리 속에 선악과 따먹은 임시적인 정신 사상이 많이 들어있다. 이게 다 죄요 사망성인데 사망은 전부 죽은 거, 죽는 거, 죽어가는 것이요 결국은 심판 받을 성격이요 성질들이다. 예수 믿는 것은 이 속성을 바꾸는 것이다. 명칭 호칭만이 아니고 내 속에 있는 속성을 성품을 하나님의 것으로 바꾸는 것이다.
인간의 이해타산은 임시성에 있다. 세상에 속해있다. 안 믿는 사람이 아무리 공부를 잘해도, 아무리 정치인이라도, 아무리 세상 대통령이라도 소원 목적은 세상 임시성이다. 세상에 있는 거다. 세상에 있는 것은 임시성이다. 그러나 세상에서 볼품없는 자라도 예수 바로 믿는 사람은 그 사람의 소원 목적은 임시성이 아니고 신령천국의 영원히 가는 것에 있다. 이 말은 단순히 ‘죽으면 영원히 산다’ 그게 아니고 이 땅에서 예수 믿으면서 영원히 살 것으로 내가 만들어지고 가져간다 그 말이다. 내가 그렇게 돼 버린다 그 말이다.
이게 부활의 능력이요 부활의 미모성이다. 이게 이 땅에 살면서 천국을 누릴 실력으로 만들어지는 영능의 실력이다. 이렇게 나오는 거다. 예수 믿으면 이게 있어야 한다. 없으면 안 된다. 하루 믿고 이틀 믿고 믿어갈수록 그 이치가 내 속에 충만해야 한다. 그래야 성령님께서 잡고 쓰신다.
말하자면 이 땅에서도 대통령이 불러서 ‘너 내 심부름 좀 가라’ 하는 게 존귀 명예스러운 일인지, 아니면 깡패 우두머리가 불러서 ‘너 내 심부름 좀 해라’ 하는 게 좋은 일인지? 어느 쪽이 자기의 존귀 명예가 올라가겠느냐? 예수를 믿으면서 하나님을 가까이 하고 예수님처럼 닮고 하나님처럼 닮아 가면 그런 존귀 영광성이 어디에 있겠느냐?
성경을 가만히 보면 예수님께서 전도하시며 예수님의 이름이 나가니 소문이 나가니 많은 사람이 예수님께 몰려온다. 그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왕을 삼겠다고 하니 예수님은 거기서 왕이 되지 않고 그 자리를 피해서 산으로 올라간다. 산으로 올라가니 많은 사람이 따라 올라가기가 쉽겠느냐, ‘아이고, 다리 아프다. 아이고, 힘없다. 뭐 하러 올라가나’ 하기가 쉽겠느냐? 그런데 힘이 들지만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이치를 따라서 올라가는 그 자들이 제자가 되고 사도가 되고 하나님 앞에 쓰임이 되는 인물이 되더라.
사람은 하나님을 가까이 할수록 하나님을 많이 닮는다. 수학선생 영어선생을 가까이 하면 할수록 자기가 그 실력을 닮듯이 하나님의 진리이치를 가까이 할수록 자기는 하나님을 더 많이 닮는다. 이 이치를 어기면 안 된다. 하나님을 멀리하고 하나님을 따르는 일을 게으르게 하면 할수록 수십 년을 믿어봐라. 너는 헛 예수 믿는구나. 헛 사는구나. 그래서야 되겠느냐?
같이 교회 오고, 같은 시간에 같이 앉아서 듣는데 왜 어떤 사람은 귀담아 들어서 이치가 열리고, 왜 어떤 사람은 아무 의미 없이 그냥 앉았다가 가느냐? 그냥 앉았다가만 가면 나중에 하나님의 추궁이 안 오겠느냐? 책임추궁이 온다. 그 때 뭐라고 할 거냐? 사건적으로도 오는 거고, 마지막 심판적으로 오는 건데 어떻게 할 거냐?
인간 너는 지음을 받은 존재다. 네가 창조주가 아니다. 너를 지은 이는 하나님이라고 하는 조물주시다. 너에게 자유가 있느냐? 자유성 뒤에는 심판이 따르는 거다. 너에게 도덕성이 있느냐? 도덕성 뒤에는 심판이 있다. 너에게 가치판단 평가성이 있느냐? 그 뒤에는 심판이 있다. 그 점을 몰라서는 안 된다. 인간이라는 존재에게는 책임추궁이 있고 심판이 있고 그렇다. 자기라고 하는 자기는 그런 존재임을 몰라서는 안 된다.
일반세상에서도 자기가 부지런히 한 것만큼 사는 것을 보지 않느냐? 그게 세상이다. 그게 인격자의 세계다. 너도 인격자냐? 정신 바싹 차려라. 너에게도 책임추궁이 온다.
하나님의 것인지, 타락된 인간들의 것인지가 분별이 안 된 상태로 거짓 종들에게 빠져서 세상의 소원 목적을 가지고 그 밑에서 충성봉사 하느라고 배나 지옥이 자식이 되어서 신앙한다고 하는 그 정신이 대단히 불결하고 더러운 귀신들린 상태다.
옛날에는 ‘점쟁이 집. 굿하는 집’이라고 했는데 요즘은 ‘철학관’이라고 한다. 그들 말대로 철학이란다면 그게 귀신들린 사람이 하는 것이냐, 안 들린 사람이 하는 거냐? 귀신들린 사람이 하는 거다. 그 귀신이 진하게 많이 들면 그 사람은 유명해진다. 점쟁이인데도 귀신이 안 들려놓으면 누가 그 점쟁이에게 점치러 가느냐? 이런 사람은 유명하지도 않고 밥도 못 먹는다.
귀신이 여러 마리, 그것도 힘 센 귀신이 많이 들수록 그 사람은 활동이 많아지겠느냐, 없어지겠느냐? 많아진다. 여기저기서 점 쳐 달라고 부른다. 이걸 성령님의 눈으로 보면 귀신이 많이 들어있는 사람일수록 유명하구나.
기독교 안에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의 말씀이 많이 충만해서 유명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께서 인정해 주는 유명세가 아니라 세상이 알아주는 유명. 그러면 이건 뭐냐? 이건 돈 많이 벌고, 많이 먹고, 많이 돌아다니고, 많이 불려 다니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은 가는 곳곳마다 사람이 바로 놓여지고 세워지고 사람이 영육 간에 바로 고쳐지고 하나님의 온전의 사람으로 만들어진다. 성경에 보니 그렇다.
일반적으로 세상이치도 많이 알고 바로 알고 있으면 그 사람은 자꾸 불려 다닌다. 실력이 있을수록 활동이 크다. 실력이 없을수록 자기 활동은 쪼그라진다. 하나님의 활동은 하나님의 집에서 쓰임이 되는 거지 이방 불신자에게 쓰임이 되는 게 아니다. 그래서 원래가 사람이 바로 놓여지는 것은 생명과 따먹고 지키고 통치하고 지배하고 다스리고 땅에 편만하게 되는 것이고, 그 다음에 일반과도 먹어야 한다. 이 일반과는 언행심사로 나타나는 선행 의행이다.
그런데 그 생명과를 따먹지 않고 선악과를 따먹음으로 해서 하나님의 기준이 아닌 인간 기준이 생기게 되었고, 지키고 통치하고 지배하고 다스리고 땅에 편만하게 되는 일을 하지 못하게 되었고 에덴동산에서 쫓겨났다. 하나님의 허락이 안 된다. 용납이 안 된다. 그러니까 자기 들통 났고, 자기 못 다스리고, 살인이 일어나고, 전쟁이 난다. 인간기준은 그렇게 돼 나가게 되어 있다. 원리가 그렇다. 세상기준은 그렇다.
일반적인 눈을 가지고 보면 ‘아이고, 사람을 늘 죽이고 나쁜 짓만 하니 저 놈은 나쁜 놈이다’ 하는 거지만 그런데 인간을 만드신 하나님의 눈으로 보면 단순히 그렇게 보는 게 아니라 ‘생명과는 안 따먹고 선악과 따먹고 그 행동 그 활동이 나왔으니 저 놈이 미쳤다’ 그렇게 보는 거다.
하나님의 진리본질에서 이탈이 돼서 세상위주로 나가면 그 사람의 정신 사상은 혼음이요 구별 분별이 없다. 또 혼란이요 혼잡이다. 진리를 버렸으니 음란이요 음탕하고 난잡한 거다. 그걸 알아야 한다.
예수 믿는 신앙정신에도 난잡성이 들어있는 걸 볼 수 있고, 혼란하고 혼잡하고 혼돈스러운 것도 있다. 이런 사람의 말을 들어보면 그 속에는 분별은 없다. 이건 사람 죽는 거다. 정신면을 다 죽여간다. 영능의 실력 면을 다 죽여간다. 사는 게 없다. 날마다 자기를 잘 들여다보고 살아야 되겠는데, 나무가 크듯이 사는 것으로 성장되고 확장되고 커져야 하는데 그게 없다.
우리는 눈으로 보이는 활동 배후의 정신면 소원 목적적인 면을 구별 분별할 줄 알아야 한다. 몸의 활동만 보는 것이 아니고 사람은 정신 속에서 어떤 활동을 활발하게 하고 있는데 그걸 봐라. 성경은 그걸 보는 교육이 들어가는 거다.
우리가 불타질 세상의 것 썩을 것을 찾고, 그걸 영웅적으로 이루기 위해서 산과 광야의 기도원에서 목이 쉬도록 악을 쓰고 있는 것을 많이 볼 수 있다. 그게 무덤 사이에서 자기 기도 들어달라고, 자기 기념비 세우겠다고 악을 쓰는 기도다. 세상 소원 목적을 두고 무덤 사이(세상)로 열심히 뛰어다니는 것은 생명의 활동이 아니고 사망적인 활동이다. 예수님을 잘 믿다보면 그런 거는 다스려져 나간다.
예수를 믿다보면 부자가 되겠다고 안 그래도 부자가 되기도 하고 가난하게 되기도 한다. 그거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위해서 영능의 실력을 위해서 대국적으로 잡아 돌리는 섭리성이다.
일 년 열두 달 하늘에서 우주에서 되는 일을 가만히 보면서 역시 이 땅에서도 그게 반영이 돼서 사건이 일어나는 건데 그 중에 태풍이나 강풍이 일어나는 것은 하나님께서 바다를 청소하는 거다. 또 땅이 하도 더러우니까 그것도 청소하는 거다. 또 지상 위의 각 회사마다 높은 빌딩을 지어서 ‘내가 제일이다’ 할 때 하나님께서 지진으로 지구를 한 번 흔드니까 땅이 갈라지고 그런 것들이 넘어지고 한다. 이건 땅에 붙은 것은 언젠가고 반드시 무너질 날이 온다는 것을 말해준다.
우리는 그런 것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줄 알아야 한다. 대 자연의 섭리 속에서 창조주 하나님의 의사성을 들을 줄 알아야 한다. 다시 말하면 자기에게 오는 크고 작은 사건 환경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줄 알아라. 이 사람이 총명하고 지혜로운 사람이다. 하나님의 음성이라고 할 때 사람소리처럼 들린다는 게 아니고 사건이 말해주는 그것을 깨닫는 것이 지금 하나님의 음성으로 오는 거다.
‘나이가 드니 몸이 여기저기 쑤시는구나’ 그렇게만 보지 말고 ‘너에게 건강을 주었더니 그 건강을 어디에다 썼느냐’ 하는 건강에 대한 하나님의 책임추궁의 소리를 들을 줄 알아라. 인생에 대한 깨달음이 전도서에 많이 있지 않느냐? 하나님께서 만물을 가지고 우리에게 깨닫게 하는 역사가 있으니 그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줄 알아라. 그게 성경이다. 들을 줄을 모르면 세월 다 보내고 지나간 세월을 되 돌이킬 수가 없다. 어떻게 하겠느냐?
무덤 앞에 세운 비석은 세상에 소원 목적을 두고 사망권 안에서 열심히 무덤 사이를 뛰어다니던 자들의 이력과 업적을 남긴 것이다. 그게 비석이다. 교회 안에서도 보면 나도 예수이름으로 그런 큰 업적을 남기겠다고 큰소리로 부르짖더라. 교회 안을 볼 줄 알면 안 믿는 세상도 그냥 다 보이는 거다.
귀신들린 자가 돌로 자기의 몸에 고통을 주고 자학을 하는데 자기 기도 빨리 안 들어준다고 금식으로 철야로 하나님께 협박을 하는 자들도 이런 식의 믿음을 가진 것이다. 어린 애들이 자기 소원을 안 들어주면 벽에 가서 자기 머리를 찧는다. 그거와 같다. 길 가다가 장난감을 보고 그거 사달라고 하는데 엄마가 안 사주면 그만 그 자리에서 엄마 손을 놓고 길바닥에 드러누워서 몸부림을 친다. 이건 엄마한테 데모를 하는 거다. 그런 식으로 데모하는 것과 질이 똑같다.
오늘날 기독교회가 하나님께 공갈 협박하는 짓들을 많이 하고 있다. ‘세상 축복 달라. 예수님과 같은 능력 달라. 세상 사람들이 깜짝 놀라게 이적을 일으켜 달라.’ 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겠다고. 어떤 사람은 기도할 적마다 먹은 것을 토한다고 한다. 토하면 옷 다 젖고 방석 다 젖고, 그러면 냄새가 난다. 그러면 그게 성령이 들어서 그렇게 기도하는 것이냐? 이게 제 정신이냐? 그게 성령이냐, 악령이냐, 귀신장난이냐? 참말로 더러운 귀신이다. 자기 몸을 치고 고행을 하는 것이 성령의 짓이냐? 이 산 저 산, 이 기도원 저 기도원에서 안수 받고 방언 예언하는 게 성령이냐? 악령이다.
이방 종교인들은 자기 몸을 고행을 한다. 기독교 안에서는 고행하는 거 절대로 인정해 주지 말라. 기독교는 고행이 아니다. 제 때 밥 먹고, 제 때 잠자고 맑은 정신으로 하나님 말씀 바로 깨닫고 사람이 하나님 앞에 바로 놓여지는 것이다.
무덤과 그 무덤 사이에서 선악과 먹고 죽은 사망적인 속에서 신앙을 갖는 것이 더러운 귀신들린 신앙이다. 더러운 귀신들린 신앙이 많이 있다. 그렇게 되면 그 사람이 뭐가 되겠느냐? 그 가정이 어떻게 되겠느냐? 왜 그렇게 됐느냐? 가족이 하나는 절간에 가고 하나는 예수 믿어서 그런 거냐, 아니면 성질이 안 맞아서 그렇게 된 거냐? 지식에서 그렇게 된 것이다. 사람이 잘못된 지식을 받으면 자기가 망한다. 가정이 망한다. 하나님 앞에서 사람이 망한다. ‘사업이 망한다’ 그게 아니고 사람이 망해버린다.
하나님은 물질세상과 신령세계를 다 만들었고, 인간 자기보고 그걸 다스리라고 머리 같은 앞선 사람으로 만들어 나가는데 왜 자기는 예수 믿으면서도 머리를 모르느냐? 자기 자신을 돌아보고 오늘날 교회의 상태도 봐라. 그리고 자기가 예수 믿는 것을 바로 잡아라. ‘축복 축복’만 하지 말고.
자기에게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을 들어서 나를 바로 세우려고 하는데 나는 바로 안 세워졌다. 모든 사고방식과 이해타산의 지식이 바로 안 세워졌다. 안 세워지는 가운데 세월만 흘러갔다. 그러면서 몸은 망가져 들어간다. 그러니 어떻게 할 거냐?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자기의 속사람이 참 사람으로 바로 서라. 주님 같은 사람으로 바로 서라.
‘겉 사람은(몸) 후패하나 속사람은 날로 새롭도다.’ 예수 믿는 것은 속사람을 젊고 힘 있게 다시 만들 수 있는 거다. 그런 가운데 육신의 모든 생활에서 하나님 당신이 좋아하시는 대로 역사가 나타난다면 그 맛을 보고 가는 것도 덤으로 온다. (계속)
김경형목사님이 교역자 신학생을 대상으로 20여년 동안 매 주 정례적으로 진행하는 신학 및 성경연구 모임을 통해 영원 전에 하나님의 의지세계에서 인간구원을 설정하게 된 원인과 동기와 목적을 깨닫고 하나님의 본질의 신앙으로 나가는 주의 종들이 누룩처럼 퍼져나가고 있습니다.
참석하실 분은 031-207-5159, 또는 010-8886-5159로 문의해 주세요.(평신도도 참석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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