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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의 선지자 예레미야

예레미야 정용섭 목사............... 조회 수 547 추천 수 0 2015.10.03 19:5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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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렘11:18-20 
설교자 : 정용섭 목사 
참고 : http://dabia.net/xe/8402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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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의 선지자 예레미야

렘11:18-20, 창조절 셋째 주일,

2015년 9월20일

 

18 여호와께서 내게 알게 하셨으므로 내가 그것을 알았나이다 그 때에 주께서 그들의 행위를 내게 보이셨나이다 19 나는 끌려서 도살 당하러 가는 순한 어린 양과 같으므로 그들이 나를 해하려고 꾀하기를 우리가 그 나무와 열매를 함께 박멸하자 그를 살아 있는 자의 땅에서 끊어서 그의 이름이 다시 기억되지 못하게 하자 함을 내가 알지 못하였나이다 20 공의로 판단하시며 사람의 마음을 감찰하시는 만군의 여호와여 나의 원통함을 주께 아뢰었사오니 그들에게 대한 주의 보복을 내가 보리이다 하였더니 ...

 

대한민국은 유엔에 가입한 주권 국가입니다. 우리나라의 운명을 우리가 결정할 수 있는 권리와 책임이 있다는 뜻입니다. 이런 주권 국가에 외국 군대인 미군이 65년 동안 주둔하고 있다는 것은 비정상적인 현상임에 틀림없습니다. 더구나 그런 상황을 국민들이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더 이상합니다. 이런 상태로 가면 100년을 채울지도 모릅니다. 호전적이고 불량하고, 더구나 핵무기를 갖고 있는 북한과 우리가 대치하고 있는 한 미군주둔은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서로 생각이 다를 수 있긴 하지만, 이런 상황을 저는 부끄럽게 생각합니다.

 

그런 것은 정치 문제이니 목사가 말할 게 못 된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건 잘못된 생각입니다. 목사는 신자들의 삶과 민족 역사와 세계 역사를 꿰뚫고 있어야 합니다. 20세기 최고의 개신교 신학자라 할 수 있는 칼 바르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목사는 한 손에 성경을, 다른 한 손에 신문을 들어야 한다고 말입니다. 우리 삶에서 정치적이지 않은 건 없습니다. 교육, 노동, 주택, 생태 문제 등이 다 정치적입니다. 한 가지만 예를 들겠습니다. 이명박 정부 때 4대강 살리기에 20조원 이상의 국가 예산을 썼습니다. 그 돈을 젊은이들의 일자리나 장애인 기금으로 썼다면 사회가 많이 변했을 겁니다. 이런 예는 수도 없이 많습니다. 사실 목회도 정치적입니다. 담임 목사가 어떤 목회철학을 갖고 있느냐에 따라서 신자들의 신앙행태가 달라집니다. 교회의 모든 역량을 교회성장에 투입하는 목사가 있다면 그 교회 신자들은 그런 방식으로 신앙생활을 한 겁니다.

 

정치적인 문제를 목사가 언급하면 안 된다는 주장이 잘못인 또 하나의 근거는 구약 선지자들의 전통에서 나옵니다.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아모스 등의 설교를 읽어보십시오. 종교적인 말만이 아니라 정치 경제 사회에 대한 전반적인 문제가 다루어집니다. 모세의 출애굽 사건도 정치적인 사건이었고, 다윗의 행위도 다 정치적인 행위였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로마의 정치법에 의해 벌어진 세기의 비극이었습니다. 오해는 마십시오. 목사가 실제 정치 현장에 나가서 투쟁하거나 정치에 훈수를 놓듯이 설교해야 한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저는 그런 정치적인 변혁으로 세상이 늘 바람직하게 바뀐다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다만 정치적인 것을 배제해야만 순수한 복음을 전하는 것이라는 주장이 전혀 성서적이지 않다는 점을 말씀드리는 겁니다.

 

혼합주의와 우상숭배

오늘 제 1독서는 예레미야 선지자의 외침입니다. 그의 외침을 이해하려면 그가 처했던 당시의 국내외 정치적 상황을 알아야 합니다. 구약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은 기원전 587년에 벌어진 예루살렘 함락입니다. 예레미야는 이 사건이 벌어지기 40년 전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때가 유대의 역사에서 가장 격동적인 시기였습니다. 유대와 형제 나라였던 북이스라엘은 이미 백여 년 전에 아시리아에 의해서 멸망당했습니다. 남유대도 당연히 아시리아에 먹힐 수밖에 없는 처지였는데, 아시리아의 봉신이 된다는 조건으로 멸망만은 면했지만 신세는 비참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아시리아에 조공을 바치는 것은 물론이고 모든 점에서 아시리아의 눈치를 살펴야만 했습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아시리아 제국은 쇠퇴하기 시작했고, 바벨론이 신흥제국으로 부상하기 시작했습니다. 두 제국이 힘겨루기를 하다가 결국 아시리아는 기원전 610년에 멸망하고, 그 뒤로 바벨론이 근동의 패권을 한 손에 넣었습니다. 유대는 이제 아시리아 대신에 바벨론의 눈치를 보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유대는 지정학적으로 이런 상황을 벗어나기 힘들었습니다. 주변에 제국들이 득세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중국과 일본, 그리고 미국의 틈바구니에 끼인 우리나라와 실정이 비슷합니다. 유대는 남쪽의 이집트와 북쪽의 바벨론 사이에서, 마치 고래싸움에 새우등 터지는 듯한 처지를 면하기 어려웠습니다. 큰 나라의 눈치를 보는 일이 반복되면서 국력이 약해졌습니다.

 

유대 왕과 백성들은 이런 어려움 가운데서 어떤 태도를 취했을까요? 여러분 개인의 입장으로 바꿔놓고 생각해보십시오. 집안에 큰 우환이 닥쳤다고 합시다. 가족이 사고나 병으로 죽을 수도 있고, 사업이 망할 수도 있습니다. 대개는 그런 재난으로 인해서 정신을 차리지 못합니다.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서 무조건적으로 매달릴 뿐이지 신앙적으로 접근하지 못합니다. 물론 겉으로는 하나님의 뜻 운운할 수 있지만 실제로는 자기의 생각에 머물러 있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이런 재난의 경우만이 아니라 일상에서도 발등의 불이라는 말이 있듯이 하나님은 멀고 희로애락을 불러오는 사건들은 가깝고 절실하게 느껴집니다. 유대 왕과 백성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자기들의 지혜와 능력으로 그 상황을 타개해보려고 무진 애를 썼습니다. 그게 좋게 말해서 지혜이지 실제로는 잔꾀에 불과합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인간의 모든 계획들이 잔꾀에 불과합니다. 예레미야를 비롯해서 유대의 여러 선지자들은 유대 왕과 백성들을 향해서 잔꾀 부리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라고, 하나님을 찾으라고 외쳤습니다.

 

유대 왕과 백성들은 선지자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기울일 수가 없었습니다. 선지자들의 말은 어려움을 헤쳐 가는데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 문제를 실제적으로 생각해보십시오. 그들의 심정이 이해될 겁니다. 바벨론은 당시 근동의 패권을 주름잡고 있던 제국이었습니다. 제국의 힘은 무소불위입니다. 그들의 힘은 구체적으로 경제와 군사와 문화 전반에서 행사됩니다. 지금 미국이 세계에 미치는 영향력을 생각하면 바벨론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영어를 사용하지 않고서는 국제무대에서 활동하기 어렵고, 달러가 없으면 수출입 활동도 어렵습니다. 인류 역사에서 이런 제국은 한 번도 없을 정도로 미국은 초강대국입니다. 어쨌든지 아시리아, 바벨론, 그리고 이집트 등의 제국 틈바구니에서 이스라엘과 유대는 끊임없이 시달림을 받았습니다. 그들이 생존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제국의 비위를 맞추는 겁니다. 비위를 맞추려면 제국의 정치 경제 문화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억지로 비위를 맞추는 것만이 아니라 제국의 체제와 문화가 경쟁력이 있으니까 저절로 따라가게 됩니다. 그런데 제국은 본질적으로 그 속성상 성서의 하나님과 충돌하기 때문에 제국의 영향을 받으면 받을수록 유대의 하나님 신앙의 본질은 퇴색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현상을 가리켜 종교 혼합주의라고 합니다. 유대의 선지자들이 늘 경계했던 현상입니다. 혼합주의는 매력적인 요소가 많습니다. 전통적으로 내려온 여호와 하나님 신앙도 지키고, 오늘날 세력을 떨치는 제국의 시대정신도 겸해서 따라가는 겁니다.

 

이런 혼합주의는 뿌리가 깊습니다. 원래 유대인들의 신앙은 출애굽 이후 40년 간 지속된 광야시절에 토대가 잡혔고, 이때 율법 전통이 시작되었습니다. 생존이 가장 위태로웠던 그 시절에 신앙의 정수를 발견한 것입니다. 가나안에 들어가서 먹고 살기가 나아지면서 신앙의 중심이 흔들리게 되었습니다. 이건 매우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가나안에서 잘 사는 사람들을 부러워하면서 하나님 말씀만 의지하는 걸 부끄럽고 불편하게 생각하게 된 겁니다. 유대인들은 시나브로 가나안 사람들의 신인 바알에게 관심을 두기 시작했습니다. 바알은 풍요의 신입니다. 우리의 경우도 비슷합니다. 경제적으로 풍요로워지면서 신앙을 멀리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아도 사는데 아무런 지장이 없다고, 오히려 더 편하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가나안보다 더 강력한 제국이 등장하면서 유대는 그런 나라의 영향을 더 많이 받게 되었습니다. 아주 심한 경우에는 예루살렘 성전 안에 제국이 섬기는 신의 형상을 안치하기도 했습니다. 솔로몬 왕이 앞장서서 그런 일을 자행하기도 했습니다. 선지자들은 이런 혼합주의를 하나님 앞에서 가장 악한 것으로 비판하면서 고집스럽다 할 정도로 여호와 하나님만을 신뢰하고 순종하라고 주장했습니다.

 

당시 유대 왕과 백성들은 선지자들의 이런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선지자의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도 못했습니다. 자신들은 안식일을 지키고 여러 종교의식을 행하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잘 섬긴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여호와만 섬기라는 선지자들의 말은 그런 것을 가리키는 게 아닙니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현안에 휩쓸리지 않고 하나님의 통치에 영혼의 무게를 두라는 겁니다. 지금 바벨론에게 평화 사절단을 보낼 것인가, 이집트에게 원군을 청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만 머리를 쓰지 말고 하나님이 역사를 어떻게 통치하시는지에 대해 관심을 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지자들은 출애굽과 가나안 정복 이야기를 반복했습니다. 하나님이 그런 일을 행하셨다는 사실에 마음을 두라는 의미였습니다. 그게 안 되면 어쩔 수 없이 혼합주의에, 즉 하나님도 섬기고 재물도 더불어 섬기는 우상숭배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예레미야의 고난

예레미야도 유대 왕과 백성들에게 이 문제를 반복해서 지적했습니다. 렘 2:8절 말씀은 공동번역으로 이렇습니다. “사제라는 것들은 ‘야훼께서 어디에 계시냐?’ 고 찾지도 않았다. 법 전문가라는 것들은 나의 뜻은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백성의 목자라는 것들은 나를 거역하기만 하였다. 예언자라는 것들은 바알의 말이나 전하며 아무 데에도 쓸모없는 것들만 따라 다녔다.” 여기서 ‘바알의 말’은 기복신앙을 가리킵니다. 이걸 일상적인 말로 바꾸면 소비문화입니다. 많은 생산, 많은 소유, 많은 소비, 많은 연봉이 지배하는 문화입니다. 지금 대한민국은 총체적으로 이런 문화에 빠져들었습니다. 쇼핑을 통해서 인생을 확인하려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납니다. 예레미야는 이런 것을 가리켜 ‘아무 데에도 쓸모없는 것들’이라고 했습니다. 이런 데에 마음을 뺐기면 결국 하나님에게 관심을 기울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에게 마음을 두지 않으면 결국 세상과 삶의 중심을 뚫어볼 수 없고, 모든 사태와 사안을 아전인수 식으로 판단하고 처리합니다. 정치적인 판단도 정확하게 내릴 수가 없습니다. 누가 대통령이 되든지 잘살게만 해주면 된다는 욕망에 떨어진 사람들이 어떻게 바른 선택을 할 수 있겠습니까. 기독교인들도 이런 욕망을 자극하는 설교에 솔깃해합니다.

 

당시 유대 왕과 백성들이 예레미야의 말에 귀를 기울였을까요? 당연히 귀를 기울일 수가 없었습니다. 제국들이 제공하는 화려한 삶에 마음을 뺏긴 사람들이 그것을 초월하는 하나님의 말씀에 마음이 갈 리가 없습니다. 그들이 볼 때 예레미야가 오히려 쓸 데 없고 공허한 말만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자기들이 듣기에 불편한 말만 골라서 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이 옆에 있으면 자신들이 숨기고 싶었던 불편한 진실이 드러납니다. 그들은 예레미야가 없어져 주었으면 했습니다. 같은 선지자 동료들도 그를 따돌렸습니다. 가족들도 거기에 가세했습니다. 예레미야는 감옥에 갇히지도 했고, 급기야 살해의 위기도 겪었습니다. 이런 식으로 죽은 선지자들이 유대 역사에서 한 둘이 아닙니다. 이런 일들은 지금도 반복됩니다. 사람들은 제 살기에 바빠서 이런 일에 관심을 두지도 못합니다.

 

그런 상황에 빠진 예레미야의 심정이 어땠을지 상상해보십시오. 하나님으로부터 소명을 받은 선지자였으니 그 어떤 압력과 고난 앞에서도 전혀 흔들리지 않고 말씀을 계속해서 선포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는 이런 상황을 몹시 힘들어 했습니다. 의기소침해지기도 하고, 극한의 경우에는 자살 충동까지 느꼈습니다. 그 상황을 본문 19절이 이렇게 묘사합니다.

 

나는 끌려서 도살당하러 가는 순한 어린양과 같으므로 그들이 나를 해하려고 꾀하기를 우리가 그 나무와 열매를 함께 박멸하자 그를 살아 있는 자의 땅에서 끊어서 그의 이름이 다시 기억되지 못하게 하자 함을 내가 알지 못하였나이다.

 

예레미야 선지자가 당시 사람들에게서 배척받았다는 사실이 오늘 우리의 눈에는 이상하게 보일 겁니다. 그는 유대의 역사에 등장한 선지자들 중에서 손가락에 꼽을 정도로 종교적 감수성과 세계를 뚫어보는 통찰력과 말의 능력에서 뛰어난 선지자였습니다. 예레미야의 예언은 그동안 수많은 사람들에게 거룩한 영감을 불러일으켰습니다. 많은 화가들이 그를 초상화로 그리기도 했습니다. 많은 설교자들이 그의 말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선포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당시에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양과 같다고 토로할 정도로 극도의 좌절감에 빠졌습니다.

 

예레미야가 당한 고난이 애처롭기는 하지만 그게 오늘 나와 무슨 상관이 있냐, 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을 겁니다. 사실 고난 문제는 생각하기 귀찮은 소재입니다. 그런 문제를 거론하면 뭔가 마음이 불편해집니다. 구약의 욥기를 읽기 불편해하는 것도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을 성실하게 믿는 사람들에게 닥친 고난과 불행을 어떻게 받아들여야할지 난감하기 그지없습니다. 현대인들은 고난과 불행을 아예 입 밖에 내기도 싫어합니다. 고난과는 아무 관계가 없는 것처럼 살아갑니다. 그런 일을 당한 이들은 무슨 잘못을 했거나 운이 없었겠지, 생각하고 자신이 그런 일을 당하지 않은 것으로 안도할 뿐입니다. 잊지 마십시오. 이런 선지자들의 고난이 있었기 때문에 역사가 조금씩이나마 앞으로 나갈 수 있었습니다. 이런 고난의 역사에 마음을 두는 사람들이 늘어날수록 역사는 좀더 전향적으로 열리게 될 겁니다. 거꾸로 그런 사람들이 줄어들수록 세상과 역사는 동물의 왕국처럼 세속적인 힘이 지배하는 세상으로 변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고난 문제에 마음을 두어야 할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고난의 극치인 십자가 처형을 당한 이를 그리스도로 믿는다는 데에 있습니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예수의 고난을 예레미야의 고난에 비유해서 이해했습니다. 요 1:29, 36절에서는 예수님을 가리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했고, 행 8:32절에서는 사 53:7절을 인용해서 ‘도살자에게로 가는 양과 같이 끌려갔다.’고 했습니다. 십자가 처형보다 더 비참한 운명은 없습니다. 그러나 그에게 일어난 이 사건으로 인해서 인간의 죄와 죽음이 극복되었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믿는 근거는 고난의 극치에 떨어졌던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께서 부활 생명으로 이끌어내셨다는 데에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고난과 버림받음과 십자가가 바로 구원의 단초라는 사실은 기독교 신앙이 말하는 구원의 핵심이자 구원의 신비입니다. 이런 신앙으로 살고 있으니 여러분은 주변에 고난당하는 이들을 힘닿는 데까지 돌아보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이 혹시라도 고난당할까, 불행해질까 너무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죽음까지 극복되었는데 더 이상의 무엇을 두려워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그런 두려움은 허상에 불과합니다. 그런 허상에 빠지면 하나님에게 마음을 둘 수가 없습니다. 역설적으로, 하나님을 옳게 믿는 사람들에게는 그 고난의 자리마저 구원의 자리가 될 것이라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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