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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막5: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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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경형 목사 |
참고 : | 궁극교회 주일예배 |
5장 1절-9절: 예수께서 바다 건너편 거라사인의 지방에 이르러 배에서 나오시매 곧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무덤 사이에서 나와 예수를 만나다 그 사람은 무덤 사이에 거처하는데 이제는 아무나 쇠사슬로도 맬 수 없게 되었으니 이는 여러 번 고랑과 쇠사슬에 매였어도 쇠사슬을 끊고 고랑을 깨뜨렸음이러라 그리하여 아무도 저를 제어할 힘이 없는지라 밤낮 무덤 사이에서나 산에서나 늘 소리 지르며 돌로 제 몸을 상하고 있었더라 그가 멀리서 예수를 보고 달려와 절하며 큰 소리로 부르짖어 가로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나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원컨대 하나님 앞에 맹세하고 나를 괴롭게 마옵소서 하니 이는 예수께서 이미 저에게 이르시기를 더러운 귀신아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셨음이라 이에 물으시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가로되 내 이름은 군대니 우리가 많음이니이다 하고.
한 마디로 하면 이게 지금 교회에 주시는 말씀이고 나에게 주시는 말씀이다. 그러면 누가 더러운 귀신이 들린 사람이냐? 무덤은 죽은 자들이 가는 곳, 무덤은 죽은 자들이 썩는 일을 하는 곳, 무덤은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이다. 이게 지금 비유다. 이 세상은 사람이 영원히 살 수 없는 곳이다.
지금부터 종말 때까지 이 세상은 예수님을 믿고 만들어지는 시간이다. 그래서 구약시대에 애굽을 출발해서 광야를 거쳐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는 이스라엘을 보고 광야교회라고 했다. 이치는 똑같다. 사상은 똑같다. 나타난 방편만, 활동만, 사람 이름만 달랐다 뿐이지 그 속에 든 사상은 그 때나 지금이나 똑같다. 이게 계시적으로 보는 거다.
그런데 또 한 면으로 보면 이 세상 자체가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이다. 이 세상은 광야 같은 세상이다. 세상은 훈련장소다. 훈련장소에 살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그런데 이런 세상에서 자기의 업적과 이름을 명예롭게 남겨보고자 하는 사람들이 기독교 안에 참 많다. 예수를 믿어도 사망계 사망권 안에서 땅의 정신을 가지고 사망성으로 살면서 이름을 남겨놓는 기독교 인사들이 많다. 그 이름, 그 비석, 그 기념 그 말이다.
예수 믿는 사람이 세상을 소원 목적하고 살면 이 사람은 공동묘지에 사는구나. 그러니까 이런 사람은 살아나는 게 없다. 자기는 산다고 해도 죽는 것뿐이요 썩는 것밖에 없다. 살아생전에 뭘 해도 전부는 마치 사해바다로 다 빠져 들어가는 것처럼 사망계로 다 빠져나가는 거다. 사는 것은 없고 다 죽는 것뿐이다. 그런데 하늘로부터 오신 예수님께서는 사망적인 사상과 정신으로 살고 있던 나에게 언젠가 찾아오셨다.
또 교회 전체가 사망권 안에 살고 있는 교회도 참 많다. ‘말세에 믿음을 보겠느냐?’ 하신 것은 말세에는 신앙본질이 없이 예수 믿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은 불바다에 녹아질 사람들이다. 이 말은 지옥 간다는 게 아니라 기본구원이 돼 있으면 예수 덕으로 천국에 가기는 가는데 이룰구원 면에서 이루어지는 구원이 없다는 말이다.
세상은 자기 눈앞에서 언제 없어져도 없어진다. 또 자기가 세상에 백 살 이백 살 살라는 법도 없다. 또 자기가 세상 앞에서 없어질 날도 있다. 누가 없어져도 없어진다. 그런데 왜 거기에 기준을 맞추느냐? 거기에 기준을 맞춰봐야 별 볼 일이 없다.
나는 이걸 절실히 느낀다. 뭘 느끼느냐? 독재자 또는 이 세계 정상들을 내가 실지로는 못 봤지만 옛날 왕들에게는 최고로 좋은 것을 다 갖다 바친다.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정상들이 몸이 아프면 최고의 좋은 병원, 최고의 좋은 의술, 최고의 좋은 음식을 과학적으로 분해하고 DNA를 검사하고 먹는데 왜 나보다 빨리 죽을까? 왜 죽을까?
세상에 최고급 불토초가 있는지 없는지 모르겠으나 그런 것을 먹었다면 그만큼 오래 살고 그만큼 건강해야 할 텐데 왜 그런 사람이 빨리 죽고 왜 병이 나고 하는 것이냐? 그 이유가 뭘까? 그런 걸 안 먹었다면 안 먹어서 빨리 죽는다고 생각할 수 있겠는데 그 사람들은 그런 걸 다 먹었는데 왜 빨리 죽었을까?
그들의 마음이 어떻게 된 거냐? 모든 병은 마음에서 난다고 했으니 그 마음이 하나님 앞에 죄다 비뚤어져 있었구나. 창조의 목적에서 전부 다 이탈이 돼 있었구나. 사람의 생사화복을 다 주관하는 하나님이신데 우리가 그 면을 염두에 두고 보면 그들이 하나님을 의지했나? 하나님을 믿었나? 우리로 말하면 자타의 구원을 이루기 위해서 정치를 했나? 그게 아니다.
성경에 보면 잔뜩 쌓아놓고 ‘내 영혼아, 편히 먹고 마시라’ 했다. 그런데 하나님은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하신다. 왜 찾는 거냐? 먹을 게 없어서 찾는 거냐, 너무 많아서 찾는 거냐, 그 정신 이해타산 평가하는 마음이 비뚤어져서 그 모양이냐? 그 중심이 문제다.
아무리 예수를 믿어도 네 심성이 고약하면 너는 살아가도 재앙이고 앙화다. 인간 너를 만드신 하나님께서 그렇게 말씀을 한다. 그러니까 쉬운 표현으로 세상을 소원 목적하고 예수를 믿었다면 이 사람은 어디에 사는 것이냐? 본문으로 보면 무덤에서 사는 사람이구나. 이 사람이 살지 못할 곳에 살고 있구나. 그런데 이런 자에게 예수님께서 찾아오셨다.
무덤 사이에 사는 사람이 자기를 찾아오신 주님 앞에 넙죽 엎드려서 뭐라고 기도를 하느냐? ‘주님, 나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한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하는 것이다.
이걸 보면 예수 믿는 사람이 세상을 소원 목적하고 아무리 기도를 해도 그 내용은 세상 것을 달라는 것이다. 물건을 달라는 것이요, 돈을 달라는 것이요, 눈에 보이는 큰 것을 달라는 것이다. 세상 좋은 것은 다 갖다 달라는 것이다.
그러면 이는 그 말이 표명을 하듯이 예수님과 인격적 관계가 없는 말이다.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하는 것이다. 세상을 소원 목적하는 사람은 예수님과 인격적인 관계가 없다 그 말이다. ‘말세가 됨을 볼수록 믿음을 보겠느냐’ 하는 것은 말세에는 주님과 인격적 관계가 없이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다.
집에서 자녀들이 부모님 애만 먹이고 부모님 말은 안 듣고 하면서 맨 날 뭘 달란다고 해서 그게 인격적 관계가 있는 말이냐? 부모를 공경하면 부모님 말씀에 순종이 들어간다. 순종이 없이 뭘 달라고만 하면 그게 인격적 관계냐? 얻어맞기 일쑤다. 예수를 믿어도 왜 얻어맞을 짓을 하며 믿느냐?
자기가 아무리 좋은 것을 찾아다녀도 하루만 지나면 그게 자기의 앙화고 원수가 되기도 한다. 누가 그렇게 하느냐? 자기 속에서 그렇게 된다. 예수 믿으면 고칠 줄 알아야 한다.
사람이라면 사랑을 받을 줄 알고 사랑을 줄 줄도 알아야 한다. 예수를 믿어도 사람 관계가 물질로만 돼 있다면 그건 안 되는 일이다. 남의 것을 뺏으려 하면 여기는 강도가 되고 시험이 일어나고 부작용이 일어난다.
그리고 무덤에 사는 사람을 성령의 눈으로 보면 옷을 안 입었다. 계:의 일곱 교회 중에 마지막 라오디게아 교회가 자기들 보기에는 옷 잘 입고 부자라고 하고 있었으나 예수님께서 보시니 헐벗었다. 바리새인들이 눈을 떴다고 하나 소경이다. 예수님께서 그걸 다 지적해 냈다. 우리도 예수 바로 믿는다면 그걸 볼 줄 알아야 한다.
기독교 안에서 금식기도 하면서 자기 몸이 해되게 하는 거 전부 고행이다. 이방종교에서나 하는 일이다. 어느 부모가 자기 자식 밥 굶고 있는 꼴을 보겠느냐? 고행을 하는 게 성령의 일이냐? 아니다. 이 산 저 산, 이 기도원 저 기도원에서 안수 받고 방언 예언하는 게 성령이냐? 아니다. 성령님의 역사는 사람을 바로 세운다. 창조주 하나님 앞에 창조의 목적적인 면에서 사람을 바로 세운다. 사람이 바로 안 선 채 무슨 짓을 한들 그게 무슨 소용이 있느냐?
무덤과 무덤 사이에서, 선악과 먹고 죽은 사망적인 그 속에서 신앙을 갖는 것이 더러운 귀신들린 신앙이다. 예수님의 성품의 옷, 의의 옷을 입지 않고 벗고 있는 것이 정상적인 신앙이냐? 예수 믿으면서 먼저 말씀의 이치에서 자기부터 심사하라.
‘말세에 믿음을 보겠느냐’ 라고 하셨듯이 지금 예수 그리스도와 인격적 결합적인 관계가 없는 기도, 예수 그리스도와 인격적 결합적 관계가 없는 성경공부, 예수 그리스도와 인격적 결합적 관계가 없는 설교, 예수 그리스도와 인격적 결합적 관계가 없는 종교활동이 얼마든지 많이 있다.
그래서 목사님들에게 내가 하는 말은 “‘오늘은 선을 베풀었습니까? 기도했습니까? 뭘 했습니까?’ 하는 큐티 보지 말아라. 그거는 종교인으로서 행동을 말하는 거다. 성경은 사람의 정신을 개조하는 것이다. 정신 사상 소원 목적 자기의 이해타산이 개조가 되려면 옳은 진리지식의 이해타산이 들어가기 전에는 안 된다.”
예수 믿으면서도 마귀가 예수님께 한 세 가지 종류의 시험에 빠져서 예수 믿는 자들이 많고, 예수님은 그 시험에서 이겼는데 이기는 정신 사상을 몰라서 여전히 빠졌고 넘어진 자들이 많다. 역시 예수님께 한 세 가지의 시험에 빠진 교회들이 수도 없이 많다. 교회가 빠졌으면 목사도 빠진 거다. 목사도 교회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사망권 안에서 즉, 더러운 귀신이 들려서 무덤 사이에서 옷을 벗은 채 세상을 달라고 소리를 지르며 살고 있는 세상의 모든 자들을 구원하러 오신 것이다.
이치는 한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온 교회에 해당되는 것이 이치다. 그리고 안 믿는 사람에게도 주님의 진리이치는 해당이 된다. 주님의 말씀은 온 세계 사람들을 다 판단하고도 서 있는 말씀이다. 그 말씀은 영원 전서부터 세상 끝까지도 영원히 변함없는 말씀이다. 잡으려면 변한 없는 것을 잡아라. 변함없는 그 신앙사상 정신을 가져라. 그게 성령님의 역사요, 신의 사람이요, 하나님과 같이 하는 사람이다.
‘나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로 살고 있는 더러운 귀신들린 그 자를 예수님이 그냥 내버려 뒀느냐? 귀신을 쫓아내 주셨다. 예수님은 누굴 찾으러 공동묘지에 오신 것이냐? 이 죄악 세상에 누굴 찾으러 오신 것이냐?
성경을 계시로 보는 눈과 문자적으로 보는 눈과는 천지차이가 있는 것이다. 문자적으로만 보게 되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느냐? 귀신들린 사람을 잡아다가 귀신 내쫓는다고 하게 된다. 그러나 계시적으로 보면 현재 사람이 겉으로는 멀쩡하지만 속에 들어있는 정신 사상이 여러 가지 형태로 마귀가 들렸고 귀신이 들렸고 악령이 들린 것을 볼 수 있다. 교회 안에 앉아있어도 그 정신이 교회권, 그 라인 안에 있지 않고 세상권에 나가있는 상태의 사람이 많다.
예수님께서 ‘더러운 귀신아, 그 사람에게 나오라’ 했다. 더러운 귀신이 예수님의 그 명령에 쫓겨나갔다. 더러운 귀신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말씀의 이치에 쫓겨나간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그걸 분별 구별하는 눈을 가지신 것이다. 이걸 이치적으로 보면 진리이치가 자기 속에 들어오면 그 이치라는 저울 잣대 그 신적인 척도를 가지고 자기 정신 사상을 구별하면 그게 나온다. 그러면 ‘아, 이거 내가 고쳐야겠구나. 아, 나의 성격 성질이 이런 지식으로 되어있구나. 이걸 바꿔야겠구나’ 하는 이게 나온다.
사람은 태어나면서 가지고 나온 성격 성질도 있고, 감염성을 가진 고로 살아오면서 환경에 의해 성격 성질이 만들어진 것도 있다. 그래서 학생들은 욕 잘하는 친구들과 다니면 안 된다. 반드시 옮는다. 안 옮는다가 아니라 반드시 옮는다. 인간은 감염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목사도 감염성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육신이 편한 데로 가려고 한다.
무언가를 옮아왔다는 건 그만큼 자신을 잃어버렸다는 말이 된다. 자기가 담배를 안 피워도 담배 피는 사람 곁에 늘 있으면 그게 옮아온다. 그러면 자기가 죽는 거다.
예수 믿는 이치에 명확하게 바로 서야 한다. 하나의 종교생활이 아니다. 옳은 진리지식을 분명하게 가져야 한다. 그리고 생활터전에서, 자기 삶의 영역에서 개척하고 정복하고 다스릴 줄 알아야 하다.
‘더러운 귀신아,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사람을 보면 ‘아이고, 저거 가졌다간 시험 타겠구나. 저 성격 성질은 환경에 의해서 시험을 쉽게 타겠구나’ 하는 게 있다. 안 타려야 안 탈 수가 없다. 그래서 자식을 ‘오냐 오냐’ 하고 키우면 안 된다. 그건 자식을 미워하는 것이다. 마귀의 시험에 제멋대로 살게 만드는 것이다. 하나님의 기준을 두고 하나님 앞에 세상을 바로 사는 것을 깨닫게 해줘야 한다.
자식을 사랑해서 아무 것도 안 시키니 시집가서 뭘 할 줄 알아야지! 가르쳐도 안 하려고 하는 판에 안 가르쳐 놓으면 어찌될 거냐? 그러니 돈이 그냥 빠져나간다. 사랑에는 봉사성이 있어서 봉사성으로 인한 사람의 관계성이 아름다워지는 거다.
기독교 안에서, 특히 우리교회에서 실상적인 사람으로 만들어지지 못하면 나중에 버림받는다. 세상에 살면서 얼마나 잘 먹고 잘 살 런지 모르지만 사람 됨됨이에서 이건 하나님 앞에 쫓겨난 거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찾는 거지 집을 찾는 거냐? 차를 찾는 거냐? 잘 사는 걸 찾는 거냐? 예수님께서 마지막 때 다시 오심도 누구를 찾으러 오시는 거냐? 다 자기를 찾으러 오시는 것이다. 찾아서 세상은 다 녹여버리고 하늘나라에 데리고 올라가려고 오시는 것이다. 사람 너를 찾으러 오시는 것이다.
‘더러운 귀신아,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우리 주님은 하나님의 신령한 본질에서 이탈되어 사는 것, 하나님으로부터 심판 받을 정신으로 사는 것. 소원 목적이 세상으로 돌아간 신앙으로 사는 것을 원치를 않는다. 우리교회에서도 그렇게 사는 걸 원치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마귀 짓을 하는 더러운 영이므로.
그런 정신과 마음은 다 자기에게서 나가야 한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보는 정상적인 사람으로 돼야 한다. 세상이 보는 기준에서 정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에서 정상적인 사람으로 서고 만들어져야 한다. 그런 사람에게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다 주고 싶어 하신다. 빼앗길 자로 살지 말라.
9절: 이름이 군대다. ‘군대니 우리가 많음이니이다.’ 이게 무슨 소리냐? 영웅 같은 소리를 하는구다. 사명 같은 소리를 하는구다.
군대라는 이름을 부모가 지어줬을까? 군대는 전쟁으로 사람을 죽이는 것이 군대다. 로마군단의 숫자가 6천 명이다. 그러니까 조직도 크고 세력도 강하다. 이 말속에는 어떤 뜻이 포함돼 있는가 하면 교파자랑, 교단자랑, 조직적 확장 자랑, 교세자랑, 건물자랑, 교인숫자 자랑 등등 모두 영웅성이 다 들어있구나. 그러니까 거기에는 천국의 성질이 없다. 하나님의 진리본질이 없다. 그 정신도 없다. 전부 세상에 속한 기준을 가졌다.
더러운 귀신들린 자가 큰소리로 예수이름을 불렀으나 예수님과 인격적 결합은 없다. 예수님과 상관이 없다. 마찬가지로 교회가 세상과 세상 것을 구하고 있다면 하나님의 온전한 속성적 성품과 관계없이 살고 있는 것이고, 거룩한 하나님 앞에 썩고 불타질 것을 구하는 더러운 정신으로 사는 것이 분명하다. 그렇게 예수 믿는 것은 거룩한 정신으로 믿는 게 아니다. 세상에 속화된 것이다. 신앙믿음이 썩었다. 세상냄새가 풀풀 난다.
노름방에 갖다 오면 자기는 안 피워도 자기 몸에서 담배냄새가 난다. 깨끗하고 맑은 공기 있는 곳에 갖다 오면 꽃향기가 난다. 인간은 감염성을 가졌다. 어느 곳에서 일을 하던 인간은 옮아오게 돼 있다. 감염성이 있다. 그래서 교회를 보더라도 특히 말세 때에 어느 교회 다니던 뭐가 옮아온다. 교회 인도자는 그걸 생각해야 한다.
잘못된 것이 옮아왔으면 씻겨야 한다. 진리이치로 깨닫게 해서 그걸 빨리 씻도록 해야 한다. 버리도록 해야 한다. 안 그러면 믿음신앙이 성장도 안 되고 확장도 안 되고, 다시 말하면 네가 우스꽝스러운 사람이 돼버린다. 사람이 진리이치에 정확히 놓여지지를 않는다. 성경에 보면 사람들이 그림자 같이 다닌다고 했다. 실상이 없다. 생명이 없다. 세상이 부르면 ‘예’ 하고 그리로 가버리고, 환경 따라 그리로 가버린다.
‘나를 부끄러워 하면 하나님 아버지 앞과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 너를 부끄럽게 하겠다’ 했는데 어떤 식으로 부끄럽게 할까? 부끄럽게 하겠다는 말속에는 정말 수치스럽고 말로 다할 수 없는 장면이 들어있는 것이다.
세상을 거머잡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불심판을 해버리면 그 불속에서 나올 때는 사람의 얼굴이 그슬린다. 머리도 다 타고 얼굴껍질도 벗겨지고 한다. 그걸 한 번 생각해 봐라. 얼굴이 괴물처럼 돼버린다. 그냥 말이 아니라 부끄럽게 한다는 거기에는 사건이 들어있다. 다 나보고 하는 말이다. 그런 정신으로 사는 자들이 얼마나 어리석고 분별을 하지 못하겠는가? 그러니 그런 교인들을 전쟁하는 군대처럼 사냥을 하겠냐 그 말이다.
사회주의 군대, 구국주의 군대, 구복주의 군대, 초절주의 군대, 극기주의 군대, 현세주의 군대 등등 전부는 무덤 사망권 안으로 끌려 들어가는 사망적인 군대인 줄을 알아라. 전부는 멸망 받고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는 세상에 속한 것들이다. 그게 다 믿는 사람들을 두고 하는 말이다.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 복음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예수이름을 빙자한 마귀운동들이 마지막 시대에 참 많다. 그런데 그런 교회에 다니는 사람은 이걸 모른다.
지금은 목회자들이 가정을 찢어놓고 있다. 이건 하나님 앞에 몹쓸 짓이다. 결과가 어찌 될까? 이단자들이 가정을 찢어놓고 거짓된 종들이 가정을 찢어놓는다. 그러고서는 제 사람으로 만든다. 주님께 밀착을 시켜서 주님의 사람으로 주님처럼 만들어지게 하는 게 아니다.
세상은 세상대로 자꾸 자기 쪽으로 자기 사람으로 만들려고 데려가려고 한다. 세상 것을 가지고 와서 ‘보기 좋지? 예쁘지? 돈 많지? 차 좋지? 아파트 좋지?’ 하면서 세상은 세상대로 끌고 가려고 하고, 교회는 교회대로 그런 것을 내세워서 끌고 가려고 한다. 이게 뭐냐? 나라와 족속끼리 싸우고 전쟁하는 것이다. 그 안에 그 뜻이 다 들어있다.
한 집에 같이 살면서도 부자지간에 모녀지간에 싸움이 붙는다. 같이 앉아서 같이 밥을 먹으면서도, 한 이불 밑에서 같이 잠을 자면서도 마음은 따로따로다. 그러니 믿는 집안에서 어떻게 믿는 일이 잘 되겠느냐? 어떻게 화합이 되겠느냐? 어떻게 의사단일이 되겠느냐? 예수를 믿어도 어떻게 나중에 한 곳으로 가겠느냐? 고생과 고통을 만들어가며 사는구나.
우리 모두 나부터 하나님 의사에 단일, 그 소원 목적에 단일, 그 교육에 단일, 그 정신 그 인격에 단일이 되어야 한다. 그게 예수 믿는 거다. 그게 옳다. 우리교회에서는 교인들 집마다 하나님과 의사단일이 돼서 하나님의 보호를 입고 죄에 쓸려가지 않고 주님 보시기에 창조목적에 합당한 가정이 돼야 한다. (계속)
김경형목사님이 교역자 신학생을 대상으로 20여년 동안 매 주 정례적으로 진행하는 신학 및 성경연구 모임을 통해 영원 전에 하나님의 의지세계에서 인간구원을 설정하게 된 원인과 동기와 목적을 깨닫고 하나님의 본질의 신앙으로 나가는 주의 종들이 누룩처럼 퍼져나가고 있습니다.
참석하실 분은 031-207-5159, 또는 010-8886-5159로 문의해 주세요.(평신도도 참석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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