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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름은 군대니 우리가 많음이니이다.

마가복음 궁극이............... 조회 수 323 추천 수 0 2015.10.04 15:3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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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막5:9-13 
설교자 : 김경형 목사 
참고 : 궁극교회 주일예배 

5장 9절-13절: 이에 물으시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가로되 내 이름은 군대니 우리가 많음이니이다 하고 자기를 이 지방에서 내어보내지 마시기를 간절히 구하더니 마침 거기 돼지의 큰 떼가 산 곁에서 먹고 있는지라 이에 간구하여 가로되 우리를 돼지에게로 보내어 들어가게 하소서 하니 허락하신대 더러운 귀신들이 나와서 돼지에게로 들어가니 거의 이천 마리 되는 떼가 바다를 향하여 비탈로 내리달아 바다에서 몰사하거늘.


예수님께서 말씀을 하실 때 한 마디를 하던 열 마디를 하던, 또한 예수님의 행동 활동, 예수님의 정신 생각 소원 목적 언행심사, 예수님의 속성 가치판단 평가성 이해타산 전부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으로 돼 있다. 예수님께서 안수하신다고 할 때 손만 갖다 대는 것으로 생각을 하는데 손이던 발이던 예수님의 행동 활동에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요 이게 다 들어있다.


예수님이 가신다는 거기에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그 성격 그 성질 그 가치판단 그 평가성 그 이해타산 그 속성 그 기능 지능이 가는 것이요, 이것들 전부는 우리의 구원이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내가 예수님의 진리이치를 받아들이면 자기 속의 모든 성정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으로 나오게 된다.


우리가 갈 하늘나라에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으로 실상화 된 것 외에는 없다. 그래서 우리가 현세에서 예수를 믿는 것도, 메시지를 듣는 판단도 그게 다 나와야 한다. 그게 아니면 아닌 거다. 왜? 자체화가 안 되니까. 우리는 본질에서 이탈되면 안 된다.


우리의 생애 전부가 사람 보기에는 생계유지로 살고, 활동이 다 다르지만 속에 든 사상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요, 하늘나라에 가지고 가는 것으로 소원 목적을 가지고 그 사람으로 만들어지는 것이다.


이렇게 만들어지는 것은 성령의 역사로써만이 된다. 그래서 우리가 말씀을 들을 때나 무슨 활동을 하는 것도 함부로는 안 된다. 말씀을 들으면서 먼저 분별이 나와야 한다. 정신 사상 영분별이 다 나와야 한다. ‘소원 목적이 바로 된 거냐’ 하는 게 이치에서 판단이 나오는 거고, 성령님의 역사인지 아닌지 그 목적에서 다 판단이 나는 거다.


그걸 우리는 현세에서 가져야 한다. 성경은 그걸 다 가르쳐 준다. 감정과 흥분으로, 자기 듣기 좋다고, 어렵다고, 이런 식으로 들어가는 게 아니다. 항상 이치를 캐려고 해야 한다.


땅속의 바위틈에서 금맥을 찾는 게 쉽게 되는 게 아니다. 목숨을 걸고 피땀을 흘려서 파고들어야 만이 찾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목숨을 걸고 성경을 보느냐? 보다가 잠이 오면 ‘음냐 음냐’ 하면서 잔다.


여기(성경)에 우리 생의 보물이 다 들어있다. 자기의 존귀 영광성이 다 들어있다. 세계적인 머리가 될 수 있는 이치가 여기에 다 들어있다. 그래서 스승목사님 살아계실 때 내 기도가 ‘하나님, 내가 잠자는 거 아까워서 안되겠습니다. 나로 잠재우지 말고 이거(성경) 좀 캐게 도와주십시오’ 하는 기도를 많이 했다.


그리고 내 자랑이 될 런지 모르겠지만 해미에 살면서 요한계시록을 본 거다. ‘야, 이게 밧모섬이다.’ 얼마나 감사한지! 내 신앙수입은 거기서 다 봤다. 그 때 그 어려운 살림살이에 마늘 까는 부업을 하면서 전국적으로 신학 보냈지, 성경문제 내가지고 전국적으로 보냈지. 집사람도 그 때 고생 많이 했다.


이런 거는 들어봐야 ‘누구는 그런 고생 안 했나?’ 할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나는 그 수입 그 영감이 오늘날까지 가고 있다. 얼마나 감사한지!


그러니까 그런 고생 속에서도 말씀에 깊이 들어가고자 하는 사람도 있는데 먹고 마시고 좋은 집에서 편안하게 있다면 그때가 성경보기에 얼마나 좋은 기회냐? 그런데 그게 그렇게 안 되는 모양이다.


어쨌든 우리교회 교인들은 다 생명의 맛을 보고 한 이치라도 트여져야 한다. 그래야 예수 믿는 맛이 생긴다. 그 맛은 죽을 때까지 잊지를 못한다. 그 맛을 자꾸 보려는 것이 성경연구요, 인격적으로 주님을 만나는 것이다.


꿈에서 음성을 듣고 뭘 보고 하는 그거는 집어치워라. 그거 못 쓴다. 성경 속에서 인격적으로 주님과 만나야 한다. 이건 주님과 만난 바 된 거다. 모세가 하나님과 만난 바 되고 한 그거는 인격적으로 주님과 만난 바를 의미하는 거다. 안 그러면 사람이 기도하다 몸에 무슨 이상증이 생기고 벌벌 떨고 하는 그런 걸 쫓게 된다. 그런 건 주님을 만나는 게 아니다. 성령을 받았다고 그러면서 오늘날 기독교의 흐름을 못 보고 있다면 그건 악령을 받은 거다.


빛의 자녀들은 하나님의 자녀들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교훈을 들으면 이치가 밝은 그 말씀 앞으로 마음과 정신이 나오게 된다. 밝은 쪽으로 자꾸 나오고 귀를 기울이고 마음의 운동이 정신이 이치가 밝은 앞으로 자꾸 나온다. 그게 빛의 자녀다. 그러나 어두움의 자녀들은 밝은 이치가 나오면 자기 마음과 정신과 언행심사가 그 이치 앞에 다 드러나기 때문에 변명을 하거나 도망을 가게 된다. 그걸 꼭 알아야 한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자기 목숨이 위험하다고 하면 열 일 다 버리고 밥을 굶고라도 어디로 가느냐? 살리려고 병원으로 간다. 예수 믿는 것은 그보다도 더 초를 다투는 것이다. 영적 면에서는 즉시 즉시다. ‘선악과 먹으면 정령 죽으리라’ 했듯이 따먹는 그 즉시 영이 죽는 거다.


육신이 죽는 것은 눈에 보이지만 영이 죽는 이것은 눈에 안 보인다. 그러면 육신이 죽는 것은 왜 보여주느냐? 영이 선악과 따먹고 죽었다는 그 때를 깨닫게 해주는 것이다.


사람의 마음이 가치판단 평가를 하는 면에서 어두우면 그 사람의 육신의 행동도 어두운 짓을 하게 돼 있다. 그래서 사람 마음속의 정신작용이 중요한 것이다.


그러면 말씀을 들으면서 졸음이 오는 것은 정신에서 비롯되는 거냐, 정신은 말짱한데 눈만 자꾸 제가 내려오는 거냐? 눈만 제가 내려오는 게 아니다. 사람의 몸이 외부에서 상처가 나지 않는 한 모든 작용은 정신에서 한다. 정신이 건강하면 웬만한 육체적 고통은 이겨나간다. 그만큼 정신력이 강한 것이다. 말씀에 재미가 있으면 졸음이 안 온다. 재미가 없으면 졸게 된다.


설교를 하다보면 누구를 지칭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에 의해서 설교를 하는 건데 듣는 사람은 ‘저건 내 말이다, 누가 가서 목사님에게 찔렀지?’ 하는 게 있다. 그렇게 받아들이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피해서 도망가는 거다.


누가 찔렀던 어쨌든 말씀을 들을 때 자기 속에서 부딪히면 이건 쇼크다. 아픈 곳을 살짝 건드리면 더 아프다. 아프다고 해서 그냥 두면 고통이 더 커지기 때문에 아프더라도 치료를 해야 한다. 그런 것처럼 우리가 말씀을 들을 때 자기가 잘못된 것이 발견이 되면 회개해야 한다. 그래야 복된 사람이 된다. 하나님 앞에서까지 자기 잘못을 시인을 안 한다면 인간 앞에서는 시인할 리가 없다. 그러면 이게 어찌 되겠느냐?


변명을 하고 도망을 가는 사람들의 속을 보면 ‘나는 나대로 믿을 테니 나 간섭하지 말고 내버려둬라’ 이런 식이다. 이건 더러운 귀신들린 자가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한 그 말과 똑같다.


사람이 옳은 소리를 듣고도 생각을 못하면 미련한 사람이다.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옳은 진리이치가 나오는데도 은연중에 자기 속에서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하는 식으로 살아오지는 않았는지?


그런다고 해서 그러는 그 사람이 자기 정신과 생각이 없는 거냐?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한다고 해서 네가 너를 만드신 창조주와 상관이 없는 거냐? 너의 목숨 건강 미래 장래 이 모든 것을 그 분이 다 갖고 있는 건데, 다시 말하면 나의 존귀 영광 미래성은 이 말씀 안에, 그 분의 가슴속에 들어있는데 그 분이 너와 상관이 없는 것이냐? 모르고 못 깨달으니 그런 식으로 살아온 것이 아니냐? 그래서 오늘 이 나이가 먹었어도 이 차원밖에 안 되는 것이 아니냐? 그래서 오늘 내가 이 수준밖에 안 되는 것이 아니냐?


더러운 귀신은 사람을 깨끗케 만들겠느냐, 더럽게 만들겠느냐? 더럽게 만든다. 교회 안에서 아무리 성령을 받았다고 해도 가만 보면 정말 추하고 더러운 것이 많다. 생활 정신이 바로 나오나, 지혜가 나오나, 속에 욕심은 그대로 들어있고, 자기 소원 들어달라는 거고. 군대처럼 더러운 귀신이 많으니 그런 사람이 얼마나 많은 사람을 더럽게 하겠느냐?


목사님들의 세계도 더러운 귀신들린 걸 볼 줄 알아야 한다. 더러운 성격 성질이 들어있는 채 아무리 성경구절 들고 말을 해도 그건 그 인격 자체의 성질상 질이 더러운 거다. 거룩한 게 아니다.


더러운 귀신이 자기에게 있다는 것은 알고 보면 자기의 더러운 성격 성질과 같이 붙어서 들어있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그래서 보면 ‘저게 귀신들린 건가, 저게 정상인가’ 할 정도로 이상하게 보이기도 하고, 어떻게 보면 정상 같이 보이기도 하고, 어떻게 보면 귀신들린 것 같기도 한 짓이 막 나오는 거다.


사람이 연탄가스를 마시면 그 연탄가스가 사람의 어디에 들어가서 사람을 그렇게 멍하게 만들거나 죽게 만드는 거냐? 연탄가스 마신 사람을 보면 꼭 귀신들린 사람 비슷하게 보인다. 그러나 맑은 공기를 마시면 그게 살살 빠져나간다. 그런데 끝내는 좋지 않더라. 연탄가스를 마신 후에 몸 관리도 잘하고 정신 관리도 잘하는 그것이 아니면 귀신들린 사람처럼 사람이 멍해지듯이 예수를 믿어도 여전히 세상을 구하고 성격 성질도 못 고치니 사는 게 일반인과 똑같다. 그러다가 죽으면 ‘남이 죽었으니 나도 죽는구나’ 그냥 그런 거다. 이런 사람은 깨닫고 고쳐지고는 하는 게 없다.


비진리적, 육적, 세상적, 옛사람 부패성적, 마귀적인 그런 가르침이 인본주의적인 것이고, 그런 세상적인 교회는 사람을 더럽게 만들고 있다. 그런 교회에서 가르치는 것을 그냥 들을 때는 ‘착하게 살아라. 선하게 살아라’ 한다. 그러나 그 가르침의 근원을 살펴보면 일반 도덕적 개념으로 그렇게 말하는 것이다.


교회는 일반 도덕성을 가르치는 곳이 아니다. 우리의 도덕성은 신적 도덕성이다. 이 신적 도덕성의 교훈은 사람의 지식과 사람의 성격 성질을 천국의 것으로, 주님의 성품으로 바꾸는 것이다. 예수를 믿으면서 이게 안 되면 일반인과 똑같아진다. 그러면서 아무리 성경을 봐봐야 일반적인 개념으로 해석을 하게 된다. 이렇게 되니 성령님에 감화 감동된 하나님의 뜻은 없어진다. 말씀성이 없어진다. 오늘날 교회에 이런 게 참 많다.


‘말세에 세상에 믿음을 보겠느냐? 말세 때는 노아 홍수 때와 같고 소돔 고모라 때와 같으리라.’ 오늘날 영의 눈으로 교회들의 신앙사상을 보면 이 장면이 수없이 연출되고 있다. 그래서 ‘너희들이 전도를 해서 가르치는 것이 몇 배나 더 마귀자식으로 악하게 만들고 있구나’ 라고 예수님께서 말씀을 했다.


이 군대귀신 들린 자가 ‘우리가 많으니이다’ 라고 했다. ‘우리가 많다’ 라는 말은 사망권 안에서 세상에 속한 것을 구하는 자가 대단히 많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군대를 이루고 있다고 하는 것이다.


이 말속에는 오늘날의 교회까지 포함된 말이다. 교회라고 하면 세상 것을 구하는 오늘날 자기도 들어갈 수가 있다. ‘너도 그와 같구나’ 이게 들어가는 거다. 한 사람을 구별 분별이 된다면 열 사람 백 사람 천 사람 만 사람도 다 구별이 되는 것이다.


세상에 속한 것을 구하는 자들, 거짓된 것을 가르치는 자들, 거짓 종들, 이단자들, 적그리스도 등등 전부는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고, 이들이 성령을 받았다고 하지만 전부는 더러운 귀신들린 자들이라고 볼 수 있다.


영의 눈으로 보면 현재적으로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소원 목적을 통해 그 사람들이 활동하는 그 배후에서 무엇이 그들을 조종을 하는지 그냥 다 나온다. 그게 안 보이는 예수라면 예수님이 천국에서 오실 필요가 없는 거다. 이치가 그렇게 된다.


10절-13절: 더러운 귀신이 나가는 것도 예수님의 허락에 의해 되는 거다. 그러면 더러운 귀신이 언제 예수님의 허락을 받고 들어왔느냐? 또 허락을 받고 나갔다면 언제 허락을 받고 들어왔느냐?


허락을 받고 들어왔다는 말은 없으나 추측컨대 마귀의 꾀임에 빠져 선악과 따먹고 저주 받고 타락된 자기의 성격 성질로 살아갈 때 어떤 사건에서 심하게 타격을 받았을 때 더러운 귀신 악한 귀신이 들어갈 수 있는 계기가 된 것이다.


이걸 쉽게 말하면 사람이 죽으면 미라처럼 그대로 있는 게 아니라 병균이, 썩는 것이 죽은 그 몸에 침투가 돼 들어간다. 생명이 없으면 그게 침투가 되도록 돼 있는 것이 하나님의 창조의 법칙이다. 그런 것처럼 우리가 예수를 믿어도 자기 속에 살아있는 정신이 돌게 해야 하는데 그게 아닌 예수를 믿으면서도 죽은 정신, 세상을 소원 목적한 정신을 가지고 있으면 여기에는 그냥 시험이 들어가게 돼 있는 거다.


내 속에 더러운 생각이 들고 난다는 것은 그 사람은 울타리 없는 집과 같아서 그런 것들이 들쑥날쑥 하는 거다. 이런 상태에서는 쇼크를 받을 수 있는 어떤 사건이 안 왔다 뿐이지 그런 사건이 오면 그만 헥가닥 할 수 있는 가능성이 많다.


그래서 그런 존재가 되지 않게 하려고 하나님보다 세상에 있는 것을 더 사랑치 말라는 것이다. 하나님보다 세상을 더 사랑하면 그 자는 시험을 안 받는다가 아니라 그냥 빠져 들어가게 된다.


우리는 언제나 제일 첫째가 하나님, 제일 먼저가 하나님, 제일 중요한 게 하나님이어야 하다. 이래야 만이 자기에게 시대적인 어떤 바람이 불어와도 그 바람에 움직이지 않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이건 진리이치 생명이치 도덕이치로만이 된다. 이러면 이 사람은 반듯한 거다. 자칫 잘못하면 사랑에 속고 돈에 운다. 눈으로 보는 기준을 따라가면 그렇게 된다. (계속)


김경형목사님이 교역자 신학생을 대상으로 20여년 동안 매 주 정례적으로 진행하는 신학 및 성경연구 모임을 통해 영원 전에 하나님의 의지세계에서 인간구원을 설정하게 된 원인과 동기와 목적을 깨닫고 하나님의 본질의 신앙으로 나가는 주의 종들이 누룩처럼 퍼져나가고 있습니다.
참석하실 분은 031-207-5159, 또는 010-8886-5159로 문의해 주세요.(평신도도 참석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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