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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을 항해하면서 발견한 다시 읽고 싶은 글을 스크랩했습니다. 인터넷 공간이 워낙 넓다보니 전에 봐 두었던 글을 다시 찾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닙니다. 그래서 스크랩할만한 글을 갈무리합니다. (출처 표시를 하지 않으면 글이 게시가 안됩니다.) |
출처 : | 김학현 목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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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 통치 쉽게 하려 가족을 미화한다?
[책 뒤안길] 시모주 아키코의 <가족이라는 병> 비판적 읽기
김학현(연서교회목사) 2015.08.19 04:06
책 <가족이라는 병> 표지
<가족이라는 병>(시모주 아키코 지음 / 김난주 옮김 / 살림 펴냄 / 2015. 7 / 235쪽 / 1만3800 원)
이화에 월백하고 은한은 삼경인데
일지춘심을 자규야 알랴마는
다정도 병인 양하여 잠 못 들어 하노라(<이화에 월백하고> 전문)
여보! 마지막 구절에서 사랑하는 이 때문에 앓는 병에 잠 못 이루는 시인의 마음이 절절히 애틋함으로 가슴에 와 닿지 않소? 고려 말 문장가 이조년(1268-1343)의 시조로 <병와가곡집>에 실린 글인데 이후 많은 사랑가의 원본이 되지 않았나 생각하오. 사랑으로 들끓는 마음이 병이 되는 것이 상사병이라고 에둘러 잘라 말하는 것으로는 모자란, 더 많은 사연이 올올이 밴 글귀임에 틀림없소.
위의 시처럼 우리는 ‘사랑이 병’이라는 말은 들어왔소. ‘가족이 병’이라는 말은 아마 거의 들어본 사람이 없을 거요. 그런데 이번에 읽은 책은 ‘가족이 병’이라고 말하고 있소. 시모주 아키코의 <가족이라는 병>(살림 펴냄)이 바로 그 책이오. 제목 자체가 충격적이지 않소. 위로와 쉼의 안식처인 집에서 함께 생활하는 가족이 병이라니?
가족을 연기한다고?
여보, 저자의 배타적 가족 이해는 좀은 낯선 것이오. 심지어는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나면서부터 가족을 연기하게 된다고 말하오. ‘인생은 단막극’, ‘인생은 연극’이란 말은 들어봤어도 가족을 연기한다는 말은 못 들어 봤소. 그러나 저자는 자신의 가족사를 송두리째 들고 나와 털어놓으며 가족은 연기하는 거라고 잘라 말하고 있소.
우리는 가족을 선택해서 태어나는 것이 아니다. 으앙, 으앙 첫울음을 울었을 때 이미 틀은 정해져 있다. 그 틀 안에서 가족을 연기하는 것이다. 아버지, 어머니, 자식이라는 역할을. 무엇이든 용서되는 아름다운 공간에서. 그러나 그 안에서 개인은 매몰되고, 가족이라는 거대한 생물이 숨을 쉰다.(본문 13쪽)
여보, 우리가 부부를 연기하는 것이오? 저자의 말대로라면 그런 건데. 이런 말 들으니 가슴 속으로 서늘한 바람이 지나가는구려. 저자는 “나는 가족이라는 단위를 싫어한다. 그러니 가족 구성원 각자를 한 사람의 개인으로 간주하고 생각을 전개해 나가려 한다”(8쪽)고 책의 전개 방향을 쓰고 있소. 물론 개인이란 단위가 쌓여 가족을 이루는 건 맞소. 하지만 가족에 개인이 매몰되다니? 차라리 가족 때문에 개인이 살아나는 것이 아닐까요.
‘단란하고 화목한 가정이라는 환상’이란 표현은 그 환상의 즐거움과 쾌락을 모르는 이의 자기고백은 아닌지 모르겠소. 가족으로부터의 해방, 가족으로부터 개인의 인격을 되찾는 데 자신의 정열을 몰두하는 듯한 저자의 발버둥은 ‘가족이 무엇인지 아는 지름길’이 아니라 가족을 해체하려는 의도의 성공하지 못할 몸부림으로 읽히오.
저자는 군인이었던 아버지의 변절과 어머니 위에 군림하는 태도를 싫어했고, 어머니의 무조건적인 굴종을 싫어했소. 유일한 형제인 이복 오빠와도 정이 없었소. 결손가정이라고까지는 할 수 없지만, 저자가 느끼는 감정만은 그 이상이었소. 그러는 사이 움튼 생각인지 저자가 보는 가족은 그리 평범한 것이 아니요. ‘가족 해체만이 내가 살길이다’고 외치는 것 같소.
아버지를 용서하지 못한다고?
아버지에게 쓰는 편지 형식으로 반감을 이리 말하고 있소. “‘무사는 얼어 죽는 한이 있어도 곁불을 쬐지 않는다’는 말이 있지 않던가요. 비록 공직에서 추방되었지만, 당신이 의연하기를 바랐습니다”(201쪽)라고. 또 이어 이렇게 속내를 드러내고 있소.
당신이 흔들리고 굽히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어요. 전후에 그 혹독한 상황 속에서도 의연했던 당신 모습이 제게는 마음의 기둥이었으니까요. 그런데 당신은 여리고 상처 입기 쉬운 마음을 드러내고 말았죠. 그런 모습을 용서할 수 없었어요.(본문 203쪽)
여보! 이런 말은 자신만의 아버지상을 고정시켜 놓고 맘에 안 드니 인정할 수 없다는 뜻 아니오. 나 또한 한 아버지로서 조금은 무섭기까지 하오. 아버지가 의연한 모습이어야만 하겠소? 딸이 아버지의 마초 콤플렉스를 조장하는 꼴 아니오. 때로 무너지고, 때로 아픈 것이 인간이거늘. 아버지라고 예외가 아니겠소? 그런데 소위 딸이 이러고 있으니.
여보, 우리가 한참 어려움을 당할 때 딸아이가 “아빠, 이젠 제가 취직하여 집안 돌볼게요. 걱정하지 마세요”라고 했던 거 기억하오? 실제로 그렇게까지는 안 되었지만 그때 난 ‘아 이게 바로 가족이구나’ 하고 생각했었소. 그런데 저자는 아버지를 가족으로 볼 수 없는 특별한 눈을 가진 모양새구려.
일본 패전 이후 군인의 삶을 접고 공직에 나섰지만 그것도 쉽지 않게 되자 아버지는 자신의 평소 취미였던 그림을 그려 가족을 부양했소. 그런데 그게 나중에 발견된 유품을 통하여 춘화라는 걸 알게 되었소. 딸로서는 충격이었소. 그러나 여기서 읽히는 것은 아버지의 가족을 향한 사랑이 아니겠소. 어찌하든 가족을 부양하려는 의지가 들어있지요.
그러나 저자에게 아버지는 자신이 원하는 이미지가 아니기에 처절하게 응징되고 마는구려. 아버지와는 일생을 단절하고 살았으니 말이오. 평소 ‘전쟁에 패하면 살아 있을 수 없다’고 말하던 아버지가 패전 후 죽음을 선택하지 않았다고 용서할 수 없다고 하오. 자신은 ‘군인의 딸’인데 아버지는 더 이상 ‘군인’이 아닌 것을 분노하고 있소. 가족이 무언지 곱씹게 만드는구려.
배우자는 반려(파트너)일 뿐?
여보! 저자는 또 남편을 ‘반려(파트너)’라고 부르고 있소. 가족이라는 단어가 철저히 배재된 단어가 아니겠소. 그래서 그런지 둘은 똑같은 생각을 가졌다 하오. 서로 따로 벌어 독립채산제로 살고, 아이는 안 낳고, 호칭은 ‘반려’라고 부르고. 서로에 대하여는 터치하지 않고, 궁금해 하거나 관심을 갖는 것조차 하지 않는다고 하오. 결혼했지만 서로 결혼 안 한 것처럼 산다 하오.
나는 반려와 함께 살기 시작했을 때, 가능하면 타인인 채로 살자고 제안했다. 어차피 타인이니까 상대의 영역은 침범하지 말자고 생각했다. 내게도 저쪽이 침범해서는 곤란한 부분이 있다. 반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본문 62쪽)
내가 지금까지 쉬지 않고 일할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의 선택으로 출산과 육아를 거부하기도 했거니와, 집안일 중 취사는 거의 남편이 취미 삼아 도맡아 했고, 일주일에 한 번은 도우미가 와서 청소와 빨래를 해준 덕분이다.(본문102쪽)
여보, 남녀의 일을 구분하는 것에는 나도 반대하는 것 알지 않소. 그러나 이 가정의 취미 삼아 취사를 담당했다는 남편은 도대체 어떤 사람인지 만나보고 싶은 생각이 드오. 그의 표현대로 남편은 남편의 연기를, 아내는 아내의 연기를 해야 하는데 그들이 정말 그러고 있는 건지 묻고 싶소.
심지어는 “화젯거리가 가족밖에 없는 사람은 재미없다”(69쪽)고 선언하오. 가족이 스트레스 쌓이게 할 때가 있는 것을 부인하지 않소. 그러나 가족사 때문에 개인이 참고 양보하는 것이 전혀 가치 없는 것으로 치부하는 솜씨에는 가슴이 서늘하기까지 하오. 더 나아가 저자는 부모나 자식은 전혀 기대할 게 못된다고 선언하오. 과한 기대는 아닐지라도 관심을 기울이고 다독이는 것은 필요하지 않겠소.
여보, 가족은 폭력이다. 가족만큼 까다로운 것도 없다. 가족을 기대하지 마라. 아이 낳는 것은 잔인한 짓이다. 고독사는 불행이 아니다. 가족이 행복을 강매한다. 가족을 용서할 수 없다 등등 그의 가족에 대한 배타적 언어들은 그 수위가 너무 높은 것 같소. 가족을 아주 소중히 여기는 우린 이 책의 저자에 의하면 국가에 충성하도록 길들여진 개 정도일 뿐이오. 그는 이렇게 쓰고 있소.
국가도 나서서 가족을 예찬한다. 전시 중에 그랬던 것처럼, 가족이 화목하고 단합이 잘되면 통치하기가 쉽다. ‘내 고장 살리기’ 캠페인은 다름 아닌, 관리하기 쉬운 가족을 각지에 만들자는 운동이다. 그런 의미에서 가족은 작은 국가라 할 수 있다.(본문 146쪽)
국가 통치뿐이겠소. 그 어느 분야도 가족의 단란함을 기초로 한다 해도 과언이 아니오. 문제는 이런 시각의 사람에게 어찌 가족이 병이 아니겠소? 현대 사회는 가족 해체의 환경으로 치닫고 있는 게 사실이오. 이 책은 시대의 반영물인지도 모르오. 하지만 가족이 병이 될 정도면 그 무엇이 병이 아닌 게 있겠소. 여보! 이럴 때일수록 가족의 매몰을 두려워해야 하지 않을까요?
※뒤안길은 뒤쪽으로 나 있는 오롯한 오솔길입니다. 책을 읽으며 떠오르는 생각의 오솔길을 걷고 싶습니다. 함께 걸어 보지 않으시겠어요. 이 글에서 말하는 ‘여보’는 내 아내만이 아닙니다. ‘너’요 ‘나’요 ‘우리’입니다.
김학현(연서교회목사) nazunja@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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