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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마7: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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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조혜자 자매 |
참고 : | http://www.saegilchurch.or.kr/249950 |
빠른 생각, 느린 생각(마태복음 7:21, 5:3-10)
2014년 1월 12일 주일예배
조혜자 자매(새길교회 교우)
1. 들어가는 말
안녕하십니까? 2014년 신년을 맞이하여 계획하신 일들을 모두 이루시기 바랍니다. 우리 새길 교우들이 한 해 동안 가슴에 품고 살아갈 단어들로 만들어진 새길 꽃밭을 홈페이지에서 보았습니다. 저도 가슴에 “하나님의 뜻”이란 단어를 써 넣었는데, 이미 두 분이나 ‘주님의 뜻’이란 꽃을 심으셨더군요.
그런데, 이런 목표, 특히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행하고 싶다는 다짐은 얼마나 지속될 수 있나요? 처음 얼마간은 그 마음이 유지되지만, 시간이 갈수록 그런 마음을 품은 적이 있었는지조차 잊어버리고, 이전과 똑같이 살게 되지는 않는지요? 오늘은 이런 현상이 습관화되고 자동적인 생각의 틀을 따르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서, 빠른 생각, 느린 생각과 관련하여, 우리의 신앙을 점검해 보는 시간을 가지고 싶습니다.
2. 빠른 생각
우리교회 이정모 교수님이 여러 번 교회 홈페이지에 소개하셨던 다니엘 카네먼이라는 심리학자는 여러 가지 인지심리학 실험들과 이론들을 통합해서 우리에게 두가지 양식의 생각, 즉 빠른 생각과 느린 생각이 있다고 정리합니다(카네먼, 2012). 이것을 시스템 1, 시스템 2라고 하고, 철학자들은 직관적 사고와 반성적 사고라고도 합니다.
산수 문제를 낼 테니 잘 듣고 풀어보셔요.
“시장에서 김밥 한 줄과 족발을 합쳐 11,000원에 삽니다. 김밥이 얼마냐고 물으니, 주인은 족발과의 차이가 10,000원이라고만 말합니다. 그러면 김밥은 얼마인가요?”
1,000원이라고 쉽게 답이 나올지 모르겠습니다. 이것은 아주 자명해 보입니다. 아마도 11,000원은 10,000원과 1,000원으로 쉽게 나누어지고, 또 11,000에서 10,000을 빼면 1,000원이 나오기 때문이겠지요? 그러나 10,000원과 1,000원의 차이는 9,000원이니, 그 답은 틀립니다. 정답은 500원이 맞지요.
이런 오류는 빠른 생각으로 계산하기 때문에 벌어지고, 똑똑한 사람일수록 더 많이 범한다고 합니다. 지능이 편향을 줄일 수 있는 완충제 역할을 한다고 하지만, 오히려 자신을 믿는 사람들이 부주의하게 오류를 범한다는 것입니다.
빠른 생각, 즉 시스템 1은 이렇게 직관적이고 빠르고, 자동적이며, 빈번하게 일어납니다. 빠른 생각은 여러 이유에서 발생할 수 있는데, 그것을 몇 가지로 저 나름대로 정리해 보았습니다. 그 하나는 우리의 생존에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고, 진화된 것입니다. 우리의 선조들이 사냥을 나갔을 때, 호랑이나 곰을 만났다면, 자동적으로 피하는 반응을 했어야 했겠지요. 으슥한 골목길을 지나가는 젊은 여성이 무섭게 생긴 남자를 만나면 자동적으로 발걸음을 빨리 하던가 다른 길로 돌아갑니다. 우리에게는 살아남기 위해서 친구와 적을 구별할 수 있는 능력이 발달했다는데, 이것은 우리와 다른 사람을 가르고, 끼리끼리 모이게 합니다. 이러한 생존적인 반응은 정서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매우 즉각적입니다. 무섭다고 느끼면 즉시 피하게 되고, 상대방이 싫다는 느낌이 먼저 생기면, 그 사람이 아무리 좋은 일을 해도 그것은 보이지 않고, 실수나 잘못하는 일만 보일 수 있습니다. 빠른 생각은 다양성을 관용하기가 힘들게 만듭니다.
또한 우리는 매우 자기중심적이어서, 그것이 빠른 반응을 유발합니다. 칵테일파티 현상이라는 것이 있는데요, 사람들은 아주 시끄러운 상태에서 마주한 사람의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듣다가도 누군가 자기 이름을 말하면서 험담을 하면 그 소리를 알아챌 수 있습니다. 또 우리의 자기중심성은 자기를 보호하려고 하고, 자기에게 유리한 쪽으로 이유를 찾게 만듭니다. 자기가 시험을 잘못 보았을 때에는 시험문제가 이상해서, 또는 운이 나빠서이고, 남이 시험을 잘못 본 경우는 그 사람이 능력이나 실력이 없어서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자기는 아주 도덕적인 줄 압니다. 한 연구에서는 1000명의 일반인에게 죽어서 천국에 갈 것같은 사람은 누구인지를 물었습니다. 마더 테레사가 천국에 갈거라고 답한 사람은 79%, 마이클 조던은 65%, 다이애나 비는 60%인데, 자신은 87%라는 것입니다(Leary, 2004). 이렇게 자기를 도덕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우리는 빠르고 쉽게 다른 사람들의 잘못을 비난하고 흉볼 수 있습니다.
한편 뇌의 용량이 제한된 우리들은 복잡한 사회적 상황, 사건들을 효율적으로 처리하기 위해 보다 단순하게 머릿속에 저장하는데, 그것이 구조화된 지식틀, 도식(schema)입니다. 도식의 대표적인 것이 고정관념이지요. 도식은 거의 자동적으로 의식적인 노력없이 부족한 정보를 보충해 가며 정보를 처리하게 해 줍니다. “부활절에 교회에 다녀온 영수는 달걀을 3개나 먹었다.” 라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영수는 어떤 달걀을 먹었다고 생각하시나요? 달걀프라이? 삶은 달걀? 아마도 우리들은 영수가 교회에서 받아온 삶은 달걀을 먹었을 것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교회에 대한 도식이 없는 사람은 이런 추론을 하지 못하겠지요. 이런 식으로 우리는 빠르게 듣지 않은 내용까지도 첨가해서 일관된 이야기로 만들고, 내가 생각해 온 방식, 또는 고정관념을 가지고 세상을 이해합니다.
이런 도식이나 고정관념은 반복학습을 통해 구성됩니다. 어릴 때부터 가정에서, 학교에서, 또는 친구나 이웃들을 통해 반복적으로 들은 이야기들, 언론을 통해 끊임없이 되풀이되는 이미지들, SNS를 통해 매일 접하는 정보는 우리들에게 자동적인 반응을 일으키게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부모님의 양육태도, 어떤 선생님에게 교육을 받았는지, 어느 신문을 구독하는지, 얼마나 TV나 드라마를 많이 보는지, 누구와 SNS를 하는지, 어느 교회를 다니는지가 우리의 도식을 강화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구성된 도식이나 고정관념에는 좋다, 나쁘다라는 평가나, 싫다, 좋다라는 감정이 연합되어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기독교인이 불상을 우상이라고 파괴하고, 사찰을 방화하는 일들이 빈번히 일어났었지요. 미국에서는 경찰이 무고한 흑인을 범인으로 오인해 총을 쏘는 일들이 종종 벌어지고 있습니다. 이런 일들은 고정관념에 나쁘다는 평가나 싫다는 감정이 연합되어 있기 때문에 일어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게다가 우리는 듣는 대로, 보이는 대로 빠르게 판단하고 행동하기 쉽습니다. 우리는 인지적으로 무척 게을러서 깊이 생각하지 않고, 눈에 보이는 대로, 들리는 대로 판단한다는 것이지요. 누군가가 자신을 도와주려다가 아끼는 그릇을 10개나 깼다면, 우리는 그의 의도보다는 깨진 그릇만 보고 화를 내기 쉽습니다. 여러분이 암수술을 하려고 하는데, “실패율이 10%입니다”라는 말을 들었을 때, 어떤 결정을 내리시겠습니까? 인간은 얻는 것에 대한 가치보다는 잃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큰데, 실패율을 강조할 때, 90%의 성공률을 무시하고 자동적으로 잘못된 결정을 내리기 쉽습니다. 더 나쁜 것은 우리가 깊이 생각해 보지도 않고 잘못된 권위에 기계적으로 복종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유태인 학살이나 월남이나 우리나라에서 자행된 양민학살 등, 수많은 인종학살이 번민이나 의문을 제기하는 일 없이, 상부 명령을 얼마나 잘 수행하느냐에만 관심을 쏟으면서 자행되었다고 밝혀지고 있습니다.
물론 빠른 생각으로 정확한 판단을 내릴 수도 있습니다. 특히 소방대장이나 능숙한 의사와 같은 전문가들의 정확한 직관은 경이로울 때가 많습니다. TV에 나오는 달인들처럼 경험으로 습득한 기술도 빠르고 정확할 수 있습니다. 우리도 상대방 이야기의 빠진 부분을 추론해 이해하는 등, 빠른 생각은 매우 유용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전문가가 아닌 우리는 빠른 속도로 생각하면서 쉴새 없이 잘못된 추측을 하고, 오류를 저지르면서도, 잘못이란 생각도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빠른 생각, 시스템 1이 만드는 머릿속의 세상은 실제 세계보다 단순한데, 이것은 제한된 증거를 중심으로, 또는 자기 눈에 보이는 것에만 의지해 습관적인 생각의 틀로 여러 사건 사이에 인과관계를 추측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빠른 생각은 이 세상을 단순하고 예측 가능한 것으로 보고, 새로운 문제를 과거의 틀, 낡은 생각으로만 해결하려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빠른 생각에만 우리를 내맡길 때, 새로운 생각을 하기 어렵습니다. 아마도 우리는 의식하지도 못한 채 매일 빠른 생각으로 제멋대로 오해하고, 잘못 판단하고, 남을 아프게 만들었을 수도 있습니다.
3. 느린 생각
다행히 이렇게 빠르고 자동적인 생각의 오류는 시스템 2, 느린 생각으로 막을 수 있다고 합니다. 느린 생각은 빠르게 떠오르는 수많은 바보같은 생각과 부적절한 충둥이 표현되지 않도록 막아주는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심리학 실험에서도 자동적인 생각을 하는 경우에, “전문가처럼 생각하라”는 지시를 받으면 느린 생각, 시스템 2가 활성화된다고 합니다. 다른 사람에 대한 이해도, 빠른 생각으로는 상대의 표정이나 말, 몸짓, 행동같은 신호를 있는 그대로 보고 듣는데 그치지만, 시스템 2는 상대방의 마음을 의식적으로 읽고 추리하며 그의 입장에 서보도록 합니다.
자동적이고 즉각적인 판단이나 내 생각의 틀을 넘어서는 방법은 한번 더 생각하는 것입니다. 상대방의 말에 반사적으로 화를 내고 쏘아주고 난 후에 돌이키기는 매우 어렵습니다. 그러나 화가 났지만, 한번 더 생각하고, 상대방의 입장에서 왜 그런 반응을 했는지를 곰곰이 따져보고, 내 생각이 과연 옳은지를 물으면 화를 잠재울 수 있습니다. 자식과의 관계에서도 즉각적으로 분노에 차서 매를 든다든가, 야단을 치면 별 효과가 없습니다. 화를 삭이고 분노를 줄인 뒤에 차분하게 아이가 왜 그런 행동을 했을까를 자녀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이해를 해 주고 문제의 실마리를 함께 풀어갈 수 있는 것 같아요.
사실 느린 생각이라고 모두 성찰적인 것은 아닙니다. 자신의 반사적이고 직관적인 생각을 정당화시키느라 머리를 굴리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게다가 우리들은 자동적으로 떠오르는 생각에 지속적으로 의문을 제기하기 어려울 뿐 아니라 시스템 2는 너무 느리다는 것이지요. 특히 사람들은 인지적으로 바쁠 때, 의지가 약할 때, 자제력이 없을 때, 자아가 고갈되었을 때에는 시스템 2를 쓰기가 어렵습니다. 머릿속이 복잡할 때에는 친구의 말을 느리게 이해하면서 그의 편이 되어주기 어렵지요. 부부갈등으로 위기에 처해 마음이 피폐해진 어머니들은 자녀의 요구에 쉽게 짜증이 날 수 있습니다.
예수님조차도 십자가 사건을 앞두시고 두려움에 쌓여 “내 마음이 근심에 쌓여 죽을 지경이다”하시며, “나의 아버지 하실 수만 있으면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해 주십시오”라고 기도하십니다. 이전부터 제자들에게 예고하셔 놓고도 말입니다. 예수님의 인간적인 두려움이 전해지지요. 그러나 곧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느린 생각, 시스템 2로 수정하십니다. 예수님 잡히시던 그날 밤, 두려움에 떨던 베드로 역시 예수님이 경고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세 번이나 반사적으로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했습니다. 이후 닭이 울자 통곡하던 그는 교회의 반석이 되었지요.
4. 생각의 전환
미술가 마르셀 듀샹의 ‘샘’이라는 작품은 남성변기에 붙여진 제목입니다. 이 작품은 우리의 생각을 뒤집어야 이해가 됩니다. 공장에서 찍어낸 공산품이 미술작품이 될 수도 있고, 변기가 샘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지요. 그렇지만, 여러분은 목이 마른데, 물을 찾을 수 없는 곳에서 변기에서만 물이 나온다면, 그 물을 마시겠습니까? 변기는 목마른 자에게 샘이 될 수도 있는데, 우리의 빠른 반응은 변기는 변기로 고정되어 있어, 샘의 역할을 방해하고 있습니다.
미국에서 자라는 제 손주는 입에 음식물이 너무 많이 묻어있어, 냅킨은 안보이고, 그래서 제가 화장실에서 두루말이 휴지를 뜯어다 입을 닦아 주려 하니, 펄쩍 뛰면서, “할머니, 그건 toilet paper 인데 어떻게 입을 닦을 수 있어요?”하면서 기겁을 했습니다. 제 입은 더 더러운데 말이지요. 아마도 영어의 toilet 이란 단어 때문에 그건 입 닦으면 큰 일 나는 줄 아는 것 같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화장실과 연결된 것은 더러운 것 이라는 생각에 고착되어 있습니다.
샘이나, 두루마리 휴지는 다른 문화권(아프리카나 우리나라)에서는 쉽게 수용될 수 있는 것인데, 그런 생각의 전환이 쉽게 일어나지 않나 봅니다. 우리는 자기가 속한 사회 속에서 사람들의 인정을 받으려고, 세상 사람들이, 주변의 사람들이 생각하고 행동하는 방식을 따릅니다. 자기만 다르게 생각하고 행동하면 이상하게 보일테니까 동조하겠지요. 그것이 반복되다 보니 우리는 자동적으로 세상의 잣대로 평가하고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의 머릿속에는 깨끗한 것은 도덕적인 것과 연합되어 있고, 불결한 것은 부도덕한 것과 연합되어 있다고 합니다(로랑 베그, 2013). 인도의 카스트제도는 이런 심리기제를 반영하고 있는 것이지요. 가장 순결한 인간으로 여겨지는 ‘브라만’은 온갖 특권을 누리지만, ‘달리트’라는 불가촉천민은 정신적으로 타락한 자로 여겨져 비천한 일에 종사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깨끗한 집에서 깨끗하게 옷입고, 잘 살고, 피부도 곱고,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인정하시고 축복받은 사람인 것처럼 빠르게 생각하기 쉽습니다. 더럽고, 누추하고, 힘든 상황은 저절로 피하고 싶습니다. 그러다보니, 우리가 드리는 기도도 자동적으로 이런 세상적인 기준에서 드리게 될 수 있습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말구유에서 태어나시고, 광야에서 시험받으실 때 물질과 권력의 유혹, 종교적인 유혹들을 물리치셨는데, 그리고 직장을 다니신 것 같지도 않고, 총각으로 자식도 없이 33세에 온갖 치욕을 당하시며 십자가를 지셨는데, 우리는 그분을 따르겠다고 하면서도, 죄송하게도 그분에게 잘 살게 해 달라고, 좋은 학교에 붙게 해 달라고, 좋은 직장을 달라고, 좋은 배우자를 허락해 달라고, 자녀를 달라고, 억울함을 풀어달라고, 또 오래 살게 해 달라고 조르며 기도합니다. 저는 우리의 이런 습관적이고 자동적인 기도도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삶의 우연적인 이런 요소들이 우리의 운명이 되어 버리기 쉬우니까요. 게다가 우리 삶이 팍팍하고 힘들 때, 하나님마저 들어주시지 않는다면, 우리는 어디에 대고 소원을 빌고, 하소연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이렇게 습관적으로 기도하다가, 점점 기도 내용이 달라져가겠지요.
그러나 오늘 본문 말씀에서는 주님, 주님 하는 사람이라고 다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고 하십니다. 사람들은 87%나 자기가 천국에 갈 거라고 믿고 있다는데 말이지요. 그러시면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 하늘나라에 갈 수 있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빠른 속도로 세상을 살면서, 자기중심적이고, 세상적인 가치에 생각이 고착되어 빠른 생각을 할 때에는 알아챌 수 없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것들은, 우리의 일상적인 생각을 뒤엎는 것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마태복음 5장의 복 있는 사람은 마음이 가난한 사람, 슬퍼하는 사람, 온유한 사람,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 자비한 사람, 마음이 깨끗한 사람, 평화를 이루는 사람,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사람이고, 이들이 하늘나라에 갈 수 있고,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고 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자기중심적으로, 세상적인 가치로 사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이들은 권력을 갈구하는 사람이 아니라, 욕심 없이 정의를 추구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마음을 비우고, 다른 사람과 함께 하는 사람, 남의 입장에 서서 생각하고 함께 아파하는 사람입니다. 한나 아렌트는 “생각 없이 사는 일상적 삶이 악의 근원이 될 수도 있고, 다른 사람의 입장에 서 보지 않는 것이 악이 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위기가 기회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우리들의 삶에서 힘든 시기, 어려운 시기에는 여지껏 당연하게 여겼던 것들을 당연하지 않은 것으로 보게 되고, 가장 기본적인 것들을 돌아보게 됩니다. 빠른 삶의 속도에서 벗어나, 느린 시간을 보내며, 새로운 관점으로 인생을 바라볼 수 있는 것이지요. 아파서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때, 직장을 잃었을 때, 외로울 때, 어쩌면 그런 때 우리는 세상에서 벗어나 자기 인생을 성찰하고, 진정한 자기를 발견하며, 나머지 인생을 더 자유롭게 살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시간이 하나님을 만나고, 초월적 위로를 받는 귀한 은혜의 시간이 될 수도 있습니다.
교회나 나라도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지난해 힘든 시기를 거치면서, 우리는 모두 아팠지만, 새길교회가 우리 자신과 한국사회, 한국 교회에 어떤 의미를 갖는지 깊이 생각해 보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지난 연말 “안녕들 하십니까?”라는 대자보는 우리들로 하여금 주변을 돌아보게 하고, 우리가 이렇게 방관자처럼 살고 있는 게 올바른 일인지를 성찰하게 해 주었던 것 같습니다. 철학자들은 여유가 있을 때에는 세상을 이해하고 관조하지만, 혼란기 때에 즉 가장 힘든 시기에 인생과 세계를 성찰하고, 보편적 진리나 불변의 진리를 찾으려 하면서 새로운 위대한 이론이 꽃피운다고 합니다. 그리고 한 시대가 저물어 갈 때 시대정신이 나타난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생각을 바꿔보겠다고 일부러 위기를 겪을 수는 없는 노릇이지요. 카렌 암스트롱은 우리는 스스로를 정신적으로 높은 산의 정상에 올려놓아야 한다고 제안합니다. 그러면 한걸음 물러서서 세상을 전혀 다른 관점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지요. 지난번 장윤재 교수님께서 광야에 대해 설교하실 때에도 우리가 자기 밖으로 나가서 변방, 탈중심적으로 삶의 주변에 갔을 때 세상을 잘 볼 수 있고, 시대와 삶을 읽어낼 수 있다고 하신 말씀이 생각납니다. 그러나 세상 속에 매일의 일상을 지지고 볶으며 살면서, 이렇게 한걸음 떨어져 생각을 한다는 게 쉽지만은 않지요.
5. 공동체
우리의 빠른 생각에 근거한 착각이나 오류는 인식하기 힘듭니다. 올바른 목소리는 느릴 뿐 아니라 잘못된 직관의 목소리보다 훨씬 희미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신앙이나 기도도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예수님이 가르치신 팔복보다는 세상적인 복을 갈구하는 내면의 목소리가 훨씬 강하게 우리를 휘두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오류는 개인보다는 공동체의 조직이 더 잘 피할 수 있다고 합니다. 공동체는 여기 개인들이 모여 만들어진 것이지만, 개인의 총합 이상의 힘이 있습니다.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특성이나 역량 이상의 알파가 존재하는 것이지요. 공동체 조직에서는 나와 다른 생각들을 들으면서 다양성을 수용하며, 자기중심성에서 벗어날 수 있고, 서로 잘못된 고정관념을 수정해 갈 수 있으며, 잘못된 정보나 명령에 따르는 것을 비판적으로 바라보게 될 수 있습니다. 비슷한 가치를 목표로 하는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는 그래서 중요합니다.
올 한해 우리는 새길을 통해 조급하지 않게, 서로 사귀고, 서로 돌보고 격려하면서, 그리고 서로 배우고 나누면서, 우리들 가슴에 품은 단어들이 시들지 않고, 아름다운 새길의 꽃밭으로 유지되도록 가꾸기를 바랍니다. 그러면서 빠르게 변화하는 이 시대와 이 상황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뜻이 무엇인지를 식별해 내고 실천해 가기를 기대해 봅니다. 이러한 식별과 실천을 반복하다 보면, 이런 영적 반복 훈련이 우리들의 생각 틀이 되어, 영적 전문가처럼, 자동적이고 빠른 생각조차도, 그리고 우리의 욕망조차도 하나님의 뜻을 살피는 것이 되리라고 믿습니다.
<기도>
하나님, 쉴 새 없이 변화하는 어지러운 세상을 살면서,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빠른 생각에 휩싸여 잘못을 분별해 내지도 못하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도 생각하기 어려웠습니다. 주님,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올해는 새길을 통해 영적 훈련을 쌓고, 하나님의 뜻을 구하게 하옵소서.
평신도 열린공동체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사단법인 새길기독사회문화원, 도서출판 새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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