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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대상25: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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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황의봉 목사 |
참고 : | 2004.11.21 설교 평안교회 http://www.pyoungahnchurch.com/ |
거룩한 봉사
대상25장1-7
황의봉 목사 2004년
교회는 밖에 있는 세상 사람들이 볼 때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곳입니다. 매 주일(그들은 일요일이라 부르지만)마다 꼬박꼬박 빠짐없이 교회에 나가는 것이 이해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뿐 아니라 바로 집 앞에도 교회가 있는데 구태여 먼 곳까지 시간을 들이고 차비를 들여 찾아가는 것도 이해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들의 생각으로는 납득이 안 가는 헌금을 드리는 것도 이해가 안 될 테고, 예배만 끝나면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이런 저런 일들이 한결같이 이해될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는 영적 공동체입니다. 고향사람들이 모인 곳도 아니고 학교 친구들이 모인 곳도 아닙니다. 서로 은혜가 통해야 모일 수 있습니다. 교회를 통하여 위로부터 내려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기뻐하고, 또한 이렇게 받은 은혜를 서로 나누면서 기뻐하는 곳이 교회입니다. 따라서 아무리 가까운 친구가 다니는 교회가 있어도 몇 번은 친구를 따라 나가겠지만 은혜를 받지 못하면 결국 그 교회에 나가지 못합니다.
또한 교회는 봉사공동체입니다. 설교 말씀을 통해 은혜를 받고, 새벽에 기도하면서 은혜도 받고, 주일 저녁에 찬양시간에 뜨거운 은혜를 받기도 하지만 이런 은혜는 한계가 있습니다. 무엇인가 자신이 설 자리를 찾지 못하면 안 됩니다. 교회는 봉사공동체이기 때문에 내가 나가는 교회에서 무엇인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있어야 합니다. 봉사를 하면서 은혜의 깊이가 더하고, 봉사를 하면서 신앙생활의 보람을 찾게 됩니다.
따라서 우리가 그저 주일예배에 참석하는 것으로 만족한다면 그 신앙은 언젠가는 한계에 부딪히고 맙니다. 신앙에 갈등이 오고 슬럼프에 빠지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숙한 신앙은 주님과 교회를 위해 봉사하면서 나타나게 됩니다. 그래서 봉사하면서 더 깊은 은혜를 체험하게 되기 때문에 ‘거룩한 봉사’라 한 것입니다.
오늘 아침, 우리는 다윗이 하나님의 성전에서 신령한 노래를 연주할 사람들을 세운 내용을 읽어보았습니다. 이들의 직무는 하나님 앞에서 행해지는 거룩한 봉사였습니다. 이들의 모습을 자세히 살펴보십시오, 이 거룩한 봉사는 누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일까요?
1. 거룩한 봉사는 하나님이 구별하신 사람들 안에서 할 수 있습니다.
다윗은 30세 이상의 레위사람 38,000명 가운데 “이만 사천은 여호와의 전 사무를 보살피는 자요 육천은 유사와 재판관이요 사천은 문지기요 사천은 다윗의 찬송하기 위하여 지은 악기로 여호와를 찬송하는 자”로 세웠습니다(대상 23:4-5). 그리고 4천명의 레위인 찬양 대원을 제사장들과 레위인의 반차에 맞추어 24반차로 편성하였는데 이 찬양 대원들은 대개 아삽, 헤만, 여두둔의 자손들로 구성되었습니다.
그러니까 거룩한 봉사는 자기가 하고 싶다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불러 세워주신 사람만 할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이스라엘 12자파 중에 오직 레위지파만 할 수 있는 일이었고, 레위지파 중에서도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아삽, 헤만, 여두둔의 자손들만 할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직무를 구별하고 결정하는 일은 하나님이 하신 일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하나님 나라를 위해 일할 거룩한 봉사자는 하나님이 구별하여 세우십니다.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내가 너를 복중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태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구별하였고 너를 열방의 선지자로 세웠노라”(렘 1:5) 하셨습니다. 사도 바울도 자신이 사도가 된 것은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및 죽은 자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갈 1:1) 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오해하여서는 안 됩니다. 지금까지 성가대나 구역장, 주일학교 교사나, 여러 기관에서 봉사하시는 성도들이 일손을 놓기 위한 구실이나 핑계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나는 목사님이 시키니까 그게 하나님이 시키신 줄 알고 일 해왔는데 오늘 말씀을 들으니 내가 봉사하고 싶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세우셔야 하네요. 저는 그럼 하나님이 하라고 명령하실 때까지 쉬겠습니다.” 이 말이 맞는 말 같지만 얼마나 잘못된 말입니까? 그럼 하나님이 일을 맡기실 때 천사 가브리엘을 보내 임명장을 주어야 하는 것입니까? 우리 마음을 움직이셔서 주님과 교회를 위해 봉사하게 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목사님은 우리 교회를 위해 하나님이 세우신 사자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기도하는 목사님을 통해 우리에게 직임과 사역을 맡기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반대로 생각해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지금까지 해오던 거룩한 봉사는 바로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구별하여 맡기신 사역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두려운 마음으로 봉사에 임해야 합니다. 이에 대해 사도 베드로는 이렇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토록 있느니라. 아멘”(벧전 4:11).
2. 거룩한 봉사는 하나님이 주신 재능 안에서 할 수 있습니다.
아삽, 헤만, 여두둔의 자손들이 수금과 비파와 제금을 잡고 신령한 노래를 하고 있는데 각각 역할이 다릅니다. 그러니까 아삽의 아들들은 아름다운 목소리로 찬양을 하였습니다. 여두둔의 아들들은 수금을 잡고 신령한 노래를 하며 여호와께 감사하며 찬양을 하였고, 헤만의 아들들은 나팔을 불었습니다. 이렇게 각각 제금, 비파, 수금 등을 가지고 신령한 노래를 하며 여호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그러나 이런 사람들이 태어나면서부터 이런 악기들을 다루고 성악을 한 것은 아닙니다. 7절에 있는 대로 “여호와 찬송하기를 배워 익숙한”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기를 이런 재능이 선천적인가 아니면 후천적인가 하는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나 이 두 가지 요소가 함께 작용한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태어나면서부터 남다른 재능을 가지고 태어난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선천적 재능이라 해도 후천적인 요소가 더 많이 작용하고 있습니다. 선천적 재능이 없는 사람은 아무리 가르쳐도 능률이 오르지 않습니다. 또 반대로 선천적 재능을 가진 사람이라 해도 가르치는 사람이 없거나, 배울 기회를 놓쳐 버리고 나면 재능은 발휘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베드로는 말하기를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벧전4:10)고 하였습니다.
거룩한 봉사는 하나님이 주신 재능 안에서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누구나 성가대를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누구나 주일학교 교사를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식당 주방에서 음식을 만들고, 차량을 운전하고, 그림을 그리거나 행사기록용 사진을 찍고, 컴퓨터를 다루고 홈페이지를 관리하고, 강단의 꽃을 장식하고 하는 모든 것들은 각각 그 재능이 있는 사람만 할 수 있는 일입니다. 후천적인 요소도 있지만 선천적으로 재능을 가지고 태어나야 합니다. 또 배우고 훈련을 쌓아야 가능한 일들입니다. 따라서 이런 재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나에게 거룩한 봉사를 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셨구나” 생각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을 위해 봉사하기 위해 더욱 열심히 배우고 다듬어 익숙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3. 거룩한 봉사는 하나님이 세우신 질서 안에서 할 수 있습니다.
다시 6절과 7절을 읽어봅시다. “이들이 다 그 아비의 수하에 속하여 제금과 비파와 수금을 잡아 여호와 하나님의 전에서 노래하여 섬겼으며 아삽과 여두둔과 헤만은 왕의 수하에 속하였으니 저희와 모든 형제 곧 여호와 찬송하기를 배워 익숙한 자의 수효가 이백 팔십 팔인이라.”
“이들이 다 그 아비의 수하에 속하여” 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이들’이란 헤만의 아들들(4, 5절)만 가리키는 말이 아니고 2-5절에 소개된 아삽과 여두둔과 헤만의 아들들 모두를 가리키는 말로 이해하여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어지는 구절에서 아삽과 여두둔과 헤만이 함께 소개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아삽과 여두둔과 헤만은 왕의 수하에 속하였으니”라고 했지요? 이들 세 악사들은 다윗으로부터 성가대 대장이라는 공식 직함을 받고서는 철저하게 다윗 왕의 지시 하에 활동하였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저희와 모든 형제 곧 여호와 찬송하기를 배워 익숙한 자의 수효가 이백 팔십 팔인이라.”고 했습니다. 288이라는 숫자는 24반차에 12를 곱한 숫자가 됩니다. 우리는 여기서 아삽과 여두둔과 헤만의 아들들 24명(9-31절)이 각각 11명의 찬양 대원을 거느려 각 반차가 12명으로 구성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세 악사의 아들들을 포함한 288명은 여호와를 찬송하기 위해 뽑힌 다른 레위인들을 가르치는 선생들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들을 포함하여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해 다윗이 소집한 레위인의 총수는 모두 4천명이었습니다(23:5). 그러니까 다윗의 밑에 세 악사가, 그 밑에는 24아들들이, 그 밑에는 288명이, 그 밑에는 4,000명의 성가대원이 체계적으로 조직되어 있었습니다. 이렇게 철저한 질서 가운데 운영되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질서를 세워 효율적으로 성가대가 운영되게 하는 데 근본 목적이 있었지 다윗이 성가대를 통제하려는 데 목적이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교회는 조직공동체입니다. 따라서 그 안에는 질서가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라 질서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거룩한 봉사를 하는 사람들도 마땅히 교회의 질서를 유지하는 가운데 봉사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질서는 구체적으로 하나님이 세우신 권위에 대해 복종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찬양대원들은 철저하게 그들의 지도자들의 가르침에 복종하며 따라야 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할 때 그들이 드리는 찬송은 한 목소리로 하나님께 드려질 수 있었으며 아름다운 화음을 만들어낼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비단 성가대만의 일이 아닙니다. 교회의 모든 거룩한 봉사는 하나님이 세우신 질서 안에서 할 수 있는 것입니다.
4. 거룩한 봉사는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양하면서 할 수 있습니다.
3절에 “신령한 노래를 하며 여호와께 감사하며 찬양하며…”란 말씀에 주목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찬양과 감사, 감사와 봉사는 서로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입니다. 물론 오늘 본문은 38,000명 레위지파 가운데 여호와를 찬송하는 4,000명에 대한 직무를 말하고 있지만 나머지 여호와의 전 사무를 보는 24,000명 사람들이나, 유사와 재판관 6,000명이나 문지기 4,000명이나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맡겨주신 거룩한 직무로 인해 감사하고 찬송하며 봉사할 때 거룩한 봉사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봉사는 감사가 넘쳐야 하고 찬송 가운데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래야 봉사하는 사람도 힘이 넘치고, 하나님도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6.25동란 때에 일입니다. 미군이 북한군을 앞에 두고 대치한 그날 밤은 무척이나 조용한 밤이었습니다. 미 해병 5연대 F 중대에 윌리엄 셜츠라는 하사가 있었습니다. 신실한 크리스천이었고 그의 입에서는 항상 찬송이 그치지 않고 있었습니다. 아주 잘 부르는 노래는 아니었으나 언제나 찬송하며 감사하는 인물이었습니다. 그가 전방에 나가 보초를 서고 있었는데 갑자기 귀를 찢는 총성이 들려오고 셜츠 하사가 다리에 총을 맞고 쓰러졌습니다. 그 조용하던 밤이 단 몇 발의 총성에 깨어진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는 다시 조용해졌습니다. 적군의 몇 명이 침투해서 보초를 쏘고 그 다음에 어떻게 되나 보려고 잠시 기다리는 중이어서 총성 뒤에 조용한 적막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쓰러진 보초막 입구에서 조용하면서도 힘있는 찬송이 들려왔습니다.
“갈보리 산 위에 십자가 섰으니 주가 고난을 당한 표라 험한 십자가를 내가 사랑함은 주가 보혈을 흘림일세. 최후 승리를 얻기까지 주의 십자가 사랑하리 빛난 면류관 받기까지 험한 십자가 붙들겠네.”
135장 찬송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 찬송 소리가 끝나고도 적군은 조용했습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들은 유격활동을 포기하고 도망하기 시작했습니다. 도리어 습격을 당한 미군이 추격하여 그들 중 일부를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습니다. 당시 5연대 군목이 보초서는 사병들을 위하여 기도해 주려고 이곳에 가까이 왔다가 그 광경을 모두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전하면서 마지막에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정말로 신비롭고 놀라운 찬송의 힘이었습니다.”
(2004년 11월 21일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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