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쉐마 이스라엘!

신명기 정용섭 목사............... 조회 수 809 추천 수 0 2015.11.06 23:4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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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신6:1-9 
설교자 : 정용섭 목사 
참고 : http://dabia.net/xe/8452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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쉐마 이스라엘!

신6:1-9, 창조절 아홉 번째 주일, 2015년 11월1일

 

1 이는 곧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가르치라고 명하신 명령과 규례와 법도라 너희가 건너가서 차지할 땅에서 행할 것이니 2 곧 너와 네 아들과 네 손자들이 평생에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 내가 너희에게 명한 그 모든 규례와 명령을 지키게 하기 위한 것이며 또 네 날을 장구하게 하기 위한 것이라 3 이스라엘아 듣고 삼가 그것을 행하라 그리하면 네가 복을 받고 네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허락하심 같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네가 크게 번성하리라 4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5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6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7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8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로 삼고 9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 문에 기록할지니라.

 

신명기 6:4절을 개역개정 성경으로 읽겠습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공동번역은 다음과 같습니다. “너, 이스라엘아 들어라. 우리의 하나님은 야훼시다. 야훼 한분뿐이시다.” 이 문장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자신들의 신앙을 가장 간략하고도 정확하게 요약한 신앙고백입니다. 이스라엘 아이들이 제일 처음 배우는 문장이 바로 이것입니다. 그들은 매일 아침과 저녁에 ‘쉐마 이스라엘’이 포함된 오늘 설교 본문 신 6:4-9절을 암송하면서 자신들의 정체성을 확인합니다. 이게 왜 그들에게 그처럼 중요한 것일까요?

 

‘쉐마 이스라엘’은 신 6:4절만이 아니라 5:1, 9:1, 20:3, 27:9절에도 나옵니다. 쉐마라는 히브리어는 ‘들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그 무엇보다도 중요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삶의 기준을, 즉 삶의 방향을 제시해주기 때문입니다. 삶의 기준과 방향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이 어떻게 다른지는 긴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로 분명합니다. 여기 어떤 사람이 작은 배를 타고 망망대해에 나갔다고 상상해보십시오. 또는 사람이 살지 않는 밀림 속으로 들어갔다고 상상해보십시오. 방향을 알려주는 나침반이 있으면 거기서 방향을 잡을 수 있지만 없으면 방향을 잡을 수 없습니다.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이 처한 상황도 망망대해나 밀림 속과 같았습니다. 이집트, 아시리아, 바벨론 같은 제국들이 자신들을 삶의 기준으로 내세웠습니다. 작은 나라는 큰 나라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습니다. 자신들도 큰 나라처럼 힘을 키우려면 큰 나라 방식으로 살아야 한다는 생각을 하는 겁니다. 현대인들이 생각하는 삶의 방식도 대개는 이렇습니다. 연봉 높은 일자리를 찾는 일에 몰입하거나, 그럴 능력이 되지 않는 경우에는 우왕좌왕, 이리 기웃 저리 기웃합니다. 이런 처지에 놓여 있던 고대 이스라엘을 향해서 신명기 기자는 ‘쉐마 이스라엘’이라고 목소리를 높입니다.

 

한 분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이 삶의 방향을 제시하는 기준인 이유는 하나님이 한 분 여호와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은 ‘주’라는 뜻입니다. 이스라엘의 주인은 이집트, 아시리아, 바벨론 제국의 왕이 아니라 여호와 한분이라는 뜻입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가 자신의 주인이라고 생각합니다. 자기가 자기를 구원할 수 있는 것처럼 살아갑니다. 어떤 사람은 돈을 주인으로 섬기거나 정치 지도자를 주인으로 생각합니다. 인간은 찬바람이 불면 땅에 떨어질 수밖에 없는 나뭇잎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거나 외면하는 삶의 태도입니다. 성경은 여호와만이 주인이라고 가르칩니다. 그 여호와는 이스라엘을 찾아와서 부르신 바로 그분입니다. 아브라함을 찾아왔고, 모세를 찾아와서 출애굽 소명을 주신 그분입니다.

 

그런데 그분은 유일하신 분이십니다. 여호와만이 참된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고대 이스라엘 시대에 모든 나라는 각자 섬기는 신들이 있었습니다. 헬라 로마 신화에 나오는 신들을 생각하면 됩니다. 가나안 원주민들은 바알을 섬겼습니다. 바알은 농사와 목축을 주관하는 신입니다. 바알을 잘 섬기면 풍년과 다산이 보장됩니다. 이스라엘은 바알을 거부했습니다. 가나안 종족이 섬기는 신이기 때문만이 아니라 풍년과 다산을 목적으로 하는 신은 참된 신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은 주변의 다신교적 전통, 인간 욕망을 종교 이데올로기로 삼는 전통과 투쟁했습니다. 그런 전통들은 인간에 의해서 만들어진 신을 섬기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과 모세를 찾아오시어 말씀을 주신 바로 그 여호와만이 유일한 하나님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우리의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라는 문장에는 이런 역사적 배경이 담겨 있습니다. 그런 역사는 지금 진행 중입니다. 여호와 하나님만이 유일하고 참된 신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세상에 선포할 뿐만 아니라 그걸 변증해내야 합니다.

 

이런 말이 어떤 분들에게는 막연하게 들릴 겁니다. 그런 일이 중요하다고 하더라도 그건 신학자나 목사들이 해야 할 일이지 일반 신자들과는 거리가 먼 이야기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대개의 기독교인들은 형식적인 교회 생활에 머물거나, 또는 세속적인 차원에서의 복을 받는 일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세상살이에서 감당해야 할 것들이 많아 이런 일에 시간을 내기도 어렵고, 더 근본적으로는 마음이 가지 않는 상황을 제가 이해는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멀게 느끼는 것에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유일하신 여호와가 우리의 하나님, 즉 우리의 주님이라는 사실이 우리의 삶에 직접 관계되기 때문입니다. 고대 이스라엘이 바알 숭배와 투쟁할 수 있었던 힘을 이 말씀에서 공급받은 거와 같습니다.

 

비유적으로 다음과 같이 생각해보십시오. 한 무리의 어린아이들이 동네 놀이터에 모여서 딱지치기를 하고 있습니다. 요즘 그런 아이들을 보기 힘들지만 제가 자라던 시절은 물론이고, 2천년 어간까지도 그런 풍경을 자주 볼 수 있었습니다. 아이들은 딱지를 따고 잃는 것으로 치고 박고, 싸웁니다. 철이 일찍 든 아이라고 한다면 딱지치기 시절이 곧 끝난다는 사실을 알고 거기에 매달리지는 않을 겁니다. 한분 여호와가 우리의 주님이라는 사실을 깊이 인식하는 사람은 철이 일찍 든 어린아이와 비슷한 삶의 태도로 살아갑니다. 그에게는 딱지보다 더 본질적인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 현실에서 살다보니 어쩔 수 없이 서로 경쟁하기도 하고, 돈을 벌려고 땀을 흘리지만 이런 것들이 우리의 본래적 삶을 결정하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뚫어본다면 새로운 차원의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신명기 기자는 ‘쉐마 이스라엘’을, 즉 ‘들어라 이스라엘아’를 반복해서 외쳤습니다.

 

하나님 사랑

유일한 존재이신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이스라엘이 취해야 할 구체적인 태도를 본문 5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자주 들었던 말씀이지요? 오늘 제3독서인 막 12:28절 이하에 따르면 계명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게 무엇이냐는 서기관의 질문을 받고 예수님은 신명기의 바로 이 구절을 그대로 인용하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첫째라 말씀하셨습니다. 이어서 이웃을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는 레 19:18절을 인용하시면서, 이것이 둘째라 하셨습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가장 중요하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고, 그렇게 살고 싶지 않은 사람도 없습니다. 문제는 사랑하기가 쉽지 않다는 데에 있습니다. 더 근본적으로는 무엇이 사랑인지를 판단하는 것 자체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스스로에게 질문해보십시오. 나는 하나님을 사랑하는가? 무엇으로 그것을 확인할 수 있을까요? 가장 초보적인 대답은 교회생활을 열심히 하는 겁니다. 일 년 열두 달 52주일을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주일공동예배에 참석할 수 있습니다. 한국교회는 이 성수주일을 신앙의 척도로 받아들여집니다. 다음은 십일조 헌금입니다. 이것도 역시 절대적인 척도가 되었습니다. 여러분은 이런 것을 하나님 사랑의 증거로 받아들이시나요? 아닌가요? 대답은 그렇다고도 할 수 있고 아니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신앙의 진정성이 그렇게 나타날 수도 있고, 다르게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다만 분명한 것은 겉으로 나타나는 신앙생활만으로 하나님 사랑을 확인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실제로는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으면서 흉내만 내고, 사이비 이단을 추종하는 사람들에게서 보듯이 하나님을 오해한 채 그런 열정을 보일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 사랑의 가장 확실한 증거는 도대체 무엇일까요? 목사나 선교사가 되는 걸까요? 장로가 되는 걸까요? 기도와 전도와 봉사에 전념하는 걸까요? 이런 것들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걸까요? 순전히 영적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길이 따로 있는 걸까요?

 

하나님 사랑이 무엇인지를 직접 말씀드리기 전에 본문의 뒷부분을 먼저 설명하겠습니다. 이런 설명을 통해서 답이 주어질 것으로 기대합니다. 6절에서 말씀을 마음에 새기라고 했습니다. 이어서 7절에서는 자녀들에게 부지런히 가르치고 앉았을 때나 길을 갈 때나 누웠을 때에나 일어났을 때를 불문하고 말씀을 전하라고 했고, 8절에서 그 말씀을 손목과 미간과 문설주와 문에 걸어놓거나 기록하라고 했습니다. 신명기 기자가 21세기에 활동했다면 스마트 폰에 저장하라고 말했을 겁니다. 우리 눈에 괴상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이 명령은 일상을 말씀과 늘 함께 하라는 것입니다. 이게 이스라엘의 종교 전통입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과 제사장들과 랍비들은 전업으로 이런 일에 종사하는 사람들이고, 일반 사람들 중에서 비교적 종교적으로 살아보려는 사람들은 이 말씀을 따르려고 노력했고, 그리고 이스라엘 민족이 총체적으로 이런 방식으로 삶을 영위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본문에 묘사된 것들을 냉소적으로 대합니다. 두 가지 점에서 그렇게 봅니다. 1) 이런 경건생활은 산업화와 정보화 이후 시대인 21세기에는 맞지 않는다는 겁니다. 현대인들은 철저하게 세속적인 방식으로 삽니다. 기독교인들도 여기서 예외가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어도 영혼은 오히려 세속적인 것에 익숙합니다. 기도와 말씀과 예배와 찬송 등등의 삶이 비현실적인 것으로 느껴집니다. 2) 형식주의의 위험성이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에게서 우리는 그런 위험성을 많이 보았습니다. 경건한 삶이 오히려 본질을 놓치게 됩니다. 이런 비판은 다 일리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신명기를 비롯해서 성경이 가르치고 있는 경건생활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왜냐하면 그런 경건생활이 하나님 사랑이라는 신앙의 본질을 목표로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사랑을 원치 않는다면 모를까, 그걸 원한다면 오늘 본문이 묘사하고 있는 종교적 행위들을 외면할 수 없습니다. 외면해서도 안 됩니다.  

 

우리 교우들 중에서 시인이 되고 싶었던 분들이 있었을 겁니다. 문학 소년소녀로 중고등학교 시절을 보낸 분들도 있겠지요. 시인이 되고 싶은 청소년들은 늘 손에 좋은 시집을 들고 다니면서 읽습니다. 외우기도 합니다. 노트를 갖고 다니면서 떠오르는 시상을 적기도 합니다. 자기의 일상 전체를 시로 채우는 겁니다. 이런 태도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손목에도 매어 기호로 삼고, 미간에도 붙여 표로 삼으라는 신명기의 가르침입니다. 시인이 되기 위해서, 또는 소설가가 되기 위해서, 화가나 작곡가가 되기 위해서 모든 일상을 거기에 투자하는 게 옳다면 하나님을 사랑하기 위해서 당연히 일상을 하나님 말씀에 투자해야 합니다. 시와 함께 보내는 시간이 턱없이 부족하면 시인이 될 수 없는 것처럼 말씀을 대하는 시간이 적으면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 말씀과 함께 하는 일에 어느 정도의 시간을 투자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객관적인 수치로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개인에 따라서 다르기도 합니다. 분명한 것은 그 일에 최선을 다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신명기 기자가 손목과 미간과 문설주를 언급한 이유가 다 거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가요? 사랑하다가 사랑이 식은 연인들처럼 더 이상 만나고 싶은 마음이 없어진 거는 아닐까요? 습관에 젖어 어쩔 수 없이 의무적으로 교회에 나오는 것은 아닐까요? 그건 불행한 일입니다.

 

하나님 사랑을 단순히 종교적 의무로만 여기면 곤란합니다. 그런 의무는 무거운 짐이 됩니다. 억지로 지키면 그것이 율법이 되고 맙니다. 여기서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기 전에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다는 사실을 아는 게 중요합니다. 자신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걸 모르는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말은 하나님이 먼저 우리들을 사랑하셨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는 말과 똑같은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알기 때문에, 그리고 그것을 알기 위해서 자녀들에게 말씀을 가르치고 손목에도 달고 미간에도 붙이고 문에도 기록해야 합니다. 하나님 말씀에 집중하는 겁니다. 고대 이스라엘은 다른 이들이 볼 때 과도할 정도로 이런 일에 몰두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향한 저들의 진정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저도 그런 이들처럼 내 눈이 가는 곳마다, 내 마음이 가는 곳마다, 내 손이 가는 곳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붙여두고 싶습니다. 하나님의 사랑만이, 그리고 하나님을 향한 사랑만이 나를 구원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완성-예수 그리스도

오늘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의 사랑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전해졌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요 3:16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사랑인 이유는 우리가 그를 통해서 영생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단순히 따뜻한 감정이나 보살핌에 한정되는 게 아니라 영원한 생명에 관계된 하나님의 사건입니다. 그 놀라운 사건이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완성되었습니다. 우리는 모두 그 사실을 이해하고 동의하고 믿는 사람들입니다. 이 놀라운 사실에 영혼의 공명을 경험하지 않는 사람은 기독교인으로 살아갈 수 없습니다. 지금 여러분은 어떤가요?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신명기의 가르침처럼 이 사실을 마음에 새기고 자녀들에게 부지런히 가르치고,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고 미간에 붙여 표를 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말씀들을 일상의 토대로 삼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혹시라도 세상살이가 너무 바쁘고, 거기에 지치고, 다른 할 일도 많아서 그렇게 살기 힘들다고 말씀하고 싶으신가요? 이는 마치 세상살이가 바쁘다고 해서 숨을 쉬지 않겠다거나, 죽음을 생각하지 않겠다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아무리 바빠도 숨을 쉬고, 죽을 준비를 해야 하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영생이 여러분의 영혼을 화염처럼 감싸고 있어야 합니다. 우리 삶의 절대적이고 최종적인 목표가 그것입니다. 신명기 기자가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쉐마 이스라엘’, 즉 ‘들어라, 이스라엘아’ 하고 외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은 그냥 들리는 게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눅 8:8)는 말씀을 반복해서 하신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클래식 음악도 그 음악을 자주 듣고 아는 게 늘어나야 잘 들리는 것처럼 하나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귀도 마찬가지입니다. 지식이 많아야 한다는 게 아닙니다. 지식이 오히려 말씀을 가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최고 지식인들인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고 오히려 세리와 죄인과 어린아이 같은 사람들이 더 잘 알아들었습니다. 지식을 포함한 세상일에 마음이 분산된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관심이 가지 않고, 그 말씀을 들어도 영혼의 떨림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안타깝게도 영혼이 잠을 자는 겁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쉐마 이스라엘’이라는 명령에 진심으로 귀를 기울이십시오. 그리고 그 명령에 순종하십시오. 그게 여러분이 생명을 얻는 유일한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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