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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을 항해하면서 발견한 다시 읽고 싶은 글을 스크랩했습니다. 인터넷 공간이 워낙 넓다보니 전에 봐 두었던 글을 다시 찾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닙니다. 그래서 스크랩할만한 글을 갈무리합니다. (출처 표시를 하지 않으면 글이 게시가 안됩니다.) |
출처 : | 월간 <기독교사상>2015.10월호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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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원의 낮과 밤
본문
들어가며
오늘날 교계 여기저기에서 개념조차 모호한 단어인 영성이란 말이 폭발적으로 소비되고 있다. 거의 모든 출판물, 강좌, 집회, 커리큘럼에 영성이란 말이 가득해져서 어떤 이들은 영성이란 말 자체에 식상함을 느끼기도 한다. 그야말로 영성의 세기를 실감하게 되는 이때에 개신교회가 수도자와 수도원에 관심을 갖는 것은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것인지 모른다. 아마도 우리는 수도원과 영성이 그 어떤 긴밀한 관계를 갖고 있다고 전제하고 있는지 모른다. 어찌 되었건 개신교회의 지속적인 추락이 세계의 종교 중에서 유일하게 수도자와 수도원을 갖고 있지 않은 우리 개신교의 현실과 모종의 연관관계를 갖고 있는 건 아닌지 추론하게 된다. 이러한 낌새를 차린 개신교인들은 우리 문제의 해답을 수도원에서 찾으려고 시도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 개신교인들은 역사 속 수도원의 모습에서 우리 문제의 해법을 찾을 수 있을까?
그리스도교 수도원의 기원과 역할
그리스도교 수도원의 기원이 무엇이었는지에 관해서는 견해가 분분하다. 어떤 이는 나실인(민 6:2-8))이나 레갑인(왕하 10: 15-24) 혹은 예언자 전통을 들며 유대적 뿌리를 강조하는가 하면, 또 다른 학자들은 에세네와 쿰란 공동체들을 그 기원으로 삼기도 한다. 또 다른 학자들은 당시 그리스, 이집트, 아시아 등에서 발견되는 금욕주의적 경향을 그리스도교 수도원의 탄생근거로 삼는다. 그리고 이들과 그리스도교 수도원이 공유하고 있는 ‘금욕적’ 경향의 강조가 초대교회의 순교를 대치했다고 보기도 한다. 그러나 이렇게 다양한 그리스도교 수도원의 기원에 관한 고찰들을 넘어서서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 되는 하나의 사실이 있다. 그것은 어느 시대, 어느 곳에서나 세상을 전적으로 포기하고 신적이고 성스러운 영역에 속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그리스도교 수도원의 정체를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세상의 삶을 포기하고 절대자 하나님의 신적 질서 속으로 들어가 진정한 평안을 찾고자 하는 자들, 혹은 그 공동체라고 할 수 있겠다.
수도원의 긍정적 역할
1) 그리스도교 영성을 위하여
이러한 그리스도교 수도원들은 종교의 영역 뿐 아니라 정치, 경제, 사회, 군사의 영역에서 커다란 영향을 미치며 서구사회를 구성해왔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수도원의 종교적 역할이 가장 중요할 터, 첫 번째 검토해야 할 수도원의 긍정적인 역할은 수도원들이 그리스도교의 영성을 형성, 발전, 계승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감당했다는 점이다. 필자는 여러 곳에서 영성은 마음의 문제라기보다 몸의 문제임을 지적해왔다. 하나님만을 사랑하기 위하여 우리가 갖고 있는 육체적 욕망들을 제어하고 절욕하는 수도원적 삶의 형태는 그리스도교 영성의 원형이 되었다. 수도자들의 규칙적인 하루는 신자들의 삶의 모델이 되었으며 수도원의 성무일과는 교회에 적용되었다. 베네딕트 수도회는 노동이 또 다른 형태의 기도임을 가르쳐주었고, 마음의 가난인 침묵과 물질적인 청빈은 교회가 지향하는 표상이 되었다. 수도원의 담벼락 안은 지상에 건설된 낙원으로 여겨졌고 수도원은 세상 한가운데 자리 잡은 사막으로 여기게 됐다. 번잡한 세상에서 내면으로 침잠하고 외적으로 침묵하는 기도는 무엇보다 수도원의 깊은 영성에서 나온 결실이었다.
그렇다고 수도원이 마냥 높은 담벼락 안에 안주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매우 순진한 생각이다.
2) 시대의 요청에 대한 응답과 예언자적 역할
두 번째 수도원의 긍정적인 역할은 시대가 어려울 때마다 시대의 요청에 응답했고 예언자적 역할을 감당해왔다는 점이다. 수도원들은 스스로를 개혁했으며 그러한 수도원의 개혁은 전체 교회와 사회로 전이되었다. 수도원이 기득권자들의 투자대상으로 전락해갈 때, 성직의 매매가 관례화되어 갈 때, 수도자들이 사사건건 세속권력에 개입하는 것을 자랑으로 여길 때, 수도원의 재산이 공공연히 거래되고 상속될 때, 일부 수도원들은 자기 자신을 정화하기 시작하였다. 무엇보다 10세기 전후로 나타났던 클루니(Cluny)의 개혁은 새로운 수도원 운동의 초석이 되었다. 여느 수도원과는 달리 클루니의 개혁은 수도원을 수도자들에게 돌려주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다시 말하면 설립자의 권리는 전적으로 포기한 채 수도원의 운영을 수도자들에게 일임함으로써 수도원의 독자적 발전을 담보하게 된 것이다. 11세기 추기경이었던 페트루스 다미아니(Petrus Damiani)의 개혁운동은 한 개인의 활동이 전 교회로 파급된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었다. 성직매매와 성적방종에 물든 수도원과 교회에 그는 초심을 회복할 것을 요구했다. 엄격한 고행과 은둔적 삶이라는 초기의 이상이 다시금 그가 설립한 수도원을 통해 재건되고 있었다. 그보다 먼저 브르노(Bruno of Cologne)의 카르투지오(Cartusian Order)회와 성 로무알도(St. Romualdo)의 카말돌리(Camaldolian Order)회는 봉쇄적 삶을 통해 은둔이라는 초창기 이상을 다시 회복하고자 했다. 클레르보의 성 베르나르(St. Berhnard)는 휘황찬란한 휘장과 금·은으로 치장된 교회의 장식을 걷어내고 수도사들을 밭으로 내몰면서 청빈과 노동의 이상을 재건하고 있었고, 12세기 성 프란시스코와 성 도미닉은 청빈의 이상을 극한으로 실현함으로써 비대해져만 가는 교회에 정화제가 되었다.
2) 문화에 관한 기여
수도원이 교회와 서구사회에 공헌했던 것 중에 결코 가볍게 여길 수 없는 세 번째 역할은 이들이 문화의 계승, 전달, 발전, 창조자들이었다는 점이다. 서방수도원의 창시자라고 알려진 누시아의 베네딕트는 모든 수도원에 도서관을 마련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에 따라 중세의 수도원들은 도서관을 갖추고 있었고 책을 생산하기 위하여 필사 전용실인 스크립토리움(scriptorium)을 갖추었다. 이곳에서 수도사들은 양피지나 종이 위에 소뿔, 갈대붓, 깃털펜 등으로 필사 작업에 전념했다.
중세 초기, 웬만한 책 한권에 열다섯 마리의 양가죽이 소요되었던 어마어마한 제작비를 감당할 수 있는 곳 역시 수도원 밖에 없었다. 이들의 손에 의하여 성서는 물론, 주석서들, 성인전들, 교부들의 작품들, 그리고 그리스와 로마의 고전들이 고스란히 후세에 전해지게 됐다. 그러나 이들이 계승하고 후세에 전달한 것은 단지 책뿐만이 아니었다. 수도원에서 생산된 책들 안에는 과거의 보물 같은 전승들이 고스란히 간직되어 있는데 중세수도사들은 이를 확대 발전시키는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대표적인 것을 하나 들어보자면 오리게네스(Origenes)의 아가서 주석(Cantica canticorum)을 들 수 있다. 오리게네스의 아가서 주석은 수도원의 도서관을 통해 읽혔고, 이 주석은 베르나르의 주석으로 새롭게 탄생한다. 물론 이러한 주석서들을 통해 성서해석방법의 전통 역시 계승될 수 있게 된 것이다.
서방에서 최초의 큰 도서관들이 중세 초 수도원에서 생겨나기 시작했다는 사실은 중세 초기까지만 해도 독서란 거의 전적으로 수도원에서 이루어지는 행위였다는 점을 시사한다. 이러한 사실은 변변한 교육기관이 발달하지 못하던 시기에 문자의 습득과 전수는 수도원을 통해 이루어졌다는 점을 알려준다. 수도원은 소위 수도원학교를 통해 문화의 전달자로서 약 천년 가까이 공식적으로 그 역할을 담당해왔다. 동서방이 결별한 후 서방의 교육은 거의 공백상태였다. 이 때문에 800년 프랑크 왕국을 확정한 샤를마뉴(Charlemagne)는 교육제도를 확립하기 위해 제국 내의 모든 수도원에 초등교육을 위한 학교를 설립할 것을 지시했다. 물론 이 명령이 제대로 시행되었는지는 의문이지만 6세기에서 11세기까지 당시 수도원은 교육기관으로서 유일한 역할을 하고 있었던 것으로 확인된다. 교육기관으로서의 수도원의 역할은 12세기 성당학교와 대학이 생겨나면서 수도원 스스로 교육기관으로서의 역할을 포기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감리교의 창시자인 존 웨슬리가 카르투지오 수도원 학교에서 초등교육을 받았다는 사실은 수도원의 교육이 19세기 말까지 지속되었음을 말해 준다.
그렇다고 수도원이 단지 과거의 전승을 간직하고 계승한 것만은 아니다. 수도원에서 생산된 새로운 문학적 형태는 두 가지로 볼 수 있는데 하나는 규칙서(rules)이며 또 다른 하나는 성인들의 삶(vita)의 기록이다. 11세기 사순절 기간에 수도사들에게 지급된 책의 목록은 서방 수도원들이 베네딕트 수도규칙 외엔 성 아우구스티누스, 성 카시아누스, 성 히에로니무스, 그레고리우스 대종의 규칙서나 저서들을 중세 수도생활의 기본서로서 채택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문학 뿐 아니라 회화나 디자인의 측면에서도 수도원은 새로운 문화를 발전시켰다. 적어도 12세기까지 책을 생산할 때 동원되었던 채식장식은 수도원 내부에서 행해졌다. 이 때문에 책 속의 채식과 삽화는 프레스코 벽화와 함께 중세 전기의 회화예술이 융성하는 데 근원적인 기회를 제공해주었다. 물론 옹시알(uncial)체는 중세에 더욱 발달하였으며 고딕체이나 샤를마뉴체 같은 여러 형태의 새로운 서체 역시 수도원 안에서 나왔다.
수도원이 창조한 또 다른 문화는 아마도 건축의 형태일 것이다. 사실 수많은 수도원 건축물의 통일성을 찾기는 쉽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도원 건축은 하나의 이념을 담고 있었는데 그것은 낙원에 있는 것과 그대로 닮은 거처를 지상에 건설하겠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벽으로 둘러싸여 폐쇄된 도성의 모습, 천상의 위계질서를 구현한 공간의 배치, 낙원에 들어가기 전까지 대기하는 죽음의 공간, 객들을 대접하기 위한 봉사의 자리 등이 수도원 건축의 공통적 특징으로 자리 잡게 된다. 이러한 이념에 따라서 수도원 건축은 서로 다른 네 구역으로 구분되었는데 수련 수도자들의 구역, 병자들의 구역, 묘지 구역, 그리고 수도원 영내의 회랑으로 둘러싸인 클로이스터(cloister) 구역으로 각각 격리되어 건축되었다.
수도원이 기여한 문화 가운데 가장 이론이 분분한 분야는 아마도 신학일 것이다. 오랫동안 수도원신학은 논쟁의 중심이 되었다. 논쟁의 초점은 ‘수도원신학’이라고 구별하여 칭할 수 있는 그 어떤 지적 체계가 과연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더불어 다른 것도 아니고 ‘수도원적’ 이라는 표현이 가능한지가 논란이 되었다. 수도원신학이 다른 신학과 확연하게 구별된다는 주장을 하는 학자들은 우선 중세의 스콜라 신학과 수도원 신학은 그 청자(廳者)들이 상이하다고 지적한다. 다시 말하면 스콜라 신학은 독자들이 사제들이나 학자들이었던 반면 수도원신학은 수도사들을 독자로 전개했다는 점이 다르다는 것이다. 또한 스콜라신학이 사변적, 이성적, 합리적 측면이 강한 반면 수도원신학은 육체적 수행과 그 체험, 그리고 신비적인 방법론을 사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구별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러한 기준에 합당한 수도원신학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가령, 성찬에 관한 베링가리우스와 랑프랑의 작품들, 은둔생활에 관한 페트루스 다미아니의 『주님과 함께』(Dominus vobiscum), 수도사들의 순종과 교만을 다룬 성 베르나르의 『겸손에 관하여』(De gradibus humilitatis et superbiae) 등은 명백히 수도원에서 창조된 수도원신학인 것이다.
4) 사회적 복지
네 번째 짚고 넘어가야 하는 수도원의 순기능은 대사회적인 것인데 요즘의 개념으로 보면 복지라고 말하는 것이 적합할 것 같다. 라트베르투스가 세운 코르비(Corbie) 수도원은 852년 경 약 150명 정도의 수도사가 거주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이 수도원이 매일 부양하는 과부가 수도사의 숫자와 거의 같은 150명 정도 되었고 매일 300명의 나그네들을 객사에서 대접했다. 사회적 극빈층이나 경제적 활동이 불가능한 사람들을 부양하고 나그네를 대접하는 것은 대부분 수도원의 과제였다. 중세 말과 근대 초에 발달했던 수도공동체인 베긴공동체들은 병자들을 돌보는 것에 주력하였다. 이들이 돌보는 병자들이 얼마나 많았는지는 이 여성들을 정죄했던 비엔나 공의회조차 환자들을 돌보는 일은 계속해도 좋다고 허락할 정도였다. 비록 특별한 계층에 국한되어 있었지만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수도원은 중세 내내 초등교육기관으로서 역할을 감당했다. 수도원의 이러한 대 사회적 활동은 현재까지도 지속되고 있는 것을 우리는 주변에서 쉽게 목도할 수 있다.
수도원의 그늘
1) 수도원의 설립자와 기부자들의 목적
클루니를 기부했던 아퀴테느의 윌리암(William of Aquitaine)의 승인장엔 이 수도원이 봉토를 소유하지 않을 것, 수도원장의 선출권을 수도사들이 가질 것, 고위성직자의 간섭을 받지 않을 것, 그리고 나태를 추방하고, 필사, 노동, 공동예배에 보다 많은 시간을 할당할 것 등이 명시되어 있다. 이 승인장은 수도원이 갖고 있는 태생적 문제점을 대충 짐작하게 한다.
수도원의 설립은 철저히 개인의 몫이었다. 그렇지만 수도원을 설립하는 개인들의 목적은 제각각 달랐다. 다시 말하면 수도원의 설립자들이나 기부자들은 단지 종교적인 열망을 채우거나 소수를 위해서 수도원 설립에 막대한 재산을 투자한 것은 아니었다. 이들의 의도엔 정치, 사회, 종교적 목적들이 혼재해 있었다.
설립자나 기부자들의 첫 번째 목적은 종교적인 데 있었다. 이들은 수도사들을 검은 옷을 입은 전사들로 보았다. 다시 말하면 수도사들은 영주와 왕의 영혼을 책임지는 기도의 전사들, 영주와 영지를 위하여 영적 전투를 치루는 전사들로 인식되었다. 따라서 수도원은 소수의 개인에게 봉사하였고, 그 개인의 손에 좌지우지 되는 일이 다반사였다. 심지어 수도원의 수사들이 개인의 보속을 대리하는 경우도 일반적인 현상이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기부자들은 사회적인 요인에 의하여 거액을 수도원에 투자하였다.
둘째, 이들은 자신들의 복지를 위해 수도원에 거액을 헌납했다. 가령 기사계급들은 수도원에 재산을 기부하고 노후 거처와 수도원 안에 묻힐 수 있는 특권을 부여받았다. 셋째 수도원은 귀족들의 잉여자손들의 저장소 역할을 톡톡히 감당하였다. 중세의 결혼은 완벽하게 정략적으로 시행되었는데 항상 남녀의 비율이 맞거나 동일한 신분의 신랑과 신부를 구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또한 상속의 권리를 갖지 못한 귀족의 자녀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리 많지 않았다. 따라서 결혼할 기회를 얻지 못하는 딸과 상속에서 제외되는 아들들이 수도원에 맡겨졌다. 여성 수도원에서 화장과 사치가 유행하여 흰 드레스 착용과 화장을 금지했던 점, 왕족이나 귀족의 자녀들만을 위한 수도원이 존재했던 점 등은 결코 수도원이 영적인 공간이 아니었음을 반증하는 사례들이다.
2) 권력과 부의 집중
무엇보다 수도원이 우리가 상상하는 아름다운 이상과 한참 빗나간 모습을 보여줬던 가장 큰 이유는 수도원에 권력과 부가 집중되었다는 점이다. 우리가 성인으로 존경하고 있는 베르나르는 수도원장으로서 평생을 한곳에 머무르지 않고 여행을 다녔다. 그가 다닌 여행이란 결국 그의 수도원 건립과 정치적 행위를 위한 것이었다. 베르나르가 그의 제자를 교황으로 만들고, 십자군을 동원하고, 공의회에서 설교했던 역사적 사실만으로도 우리는 그가 얼마나 큰 권력을 가지고 있었는지 쉽게 알 수 있다. 수도원은 이렇게 지나치게 세상사에 개입하면서 급격히 세속화되어 갔는데 정치권력에 개입하는 것 외에 수도원의 세속화는 또 다른 원인이 있었다. 그것은 부의 집중이다.
왕족이나 귀족의 기부금을 주 수입원으로 했던 수도원의 행복한 기부금 접수는 대부분 토지였다. 따라서 대규모 봉토를 소유한 수도원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런데 수도원의 봉토들은 한곳에 몰려 있는 것이 아니었다. 봉토를 가지고 있는 왕과 귀족들이 봉토 가운데 일부를 떼어 기부했기 때문에 수도원의 토지는 기부자들의 거주 지역에 따라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그러다보니 재산관리를 위해 더 많은 인원이 필요했고, 그러자 골방에서 침묵하고 기도하는 일보다는 광활한 지역을 여행하면서 토지관리를 하는 것이 수도사의 주임무가 되어 버렸다. 이러한 악순환의 결과는 오래지 않아 발생했다. 수도원으로 부의 집중은 수도자들에 대한 사회적 대우가 계속 상승하는 결과를 낳았다. 따라서 수도원에는 수도자들보다 그들을 위해 고용된 자들의 수가 더 많아지는 기현상이 생겨났다. 이처럼 비대해진 수도원은 막대한 운영비용이 필요했고 이 때문에 쉽게 유통되지 못하는 현물을 기반으로 하는 중세 경제 하에서 수도원은 더 이상 경제적인 부를 유지할 수 없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부의 집중이 부를 거둬가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발생한 것이다.
나가며
중세수도원을 한번 되짚어 보면서 필자는 중세수도원 전통을 배워야 한다는 우리의 생각을 한번 점검해볼 시기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물론 우리가 중세 수도원 전통에서 배워야할 것은 너무도 많다. 그러나 현대사회는 중세사회와 전혀 다른 세계관, 경제와 사회구조를 갖고 있다. 따라서 중세수도원을 무조건 그대로 현 시대에 옮겨 놓고자 하는 시도는 마치 신석기시대의 토기를 박물관 진열장에서 꺼내 우리의 주방에서 사용하려는 시도와 같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최근 수도원에서조차 오늘날 수도생활은 혼돈에 처해있다고 진단하며 새 시대에 맞는 갱신된 새로운 모델의 수도생활이 고대하고 있다는 데 굳이 이제 첫 걸음을 딛으려는 개신교계가 그 모습을 그대로 적용할 수는 없을 것이다. 시대정신은 배우되 그것의 적용은 전적으로 우리 자신의 몫이어야만 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이충범 | 교수는 연세대학교 철학과, 감리교신학대학교 신학과를 거쳐 미국 드류(Drew) 신학부에서 신학석사를 대학원에서 중세신비주의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협성대학교 신학과 역사신학 교수이며 도서관장으로 재직 중이다. 저서로는 『노래로 듣는 설교』 『중세신비주의와 여성』 『중세여성과 현대영성』 『종교인의 연애(공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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