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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막6: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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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경형 목사 |
참고 : | 궁극교회 주일예배 |
6장 1절-6절: 예수께서 거기를 떠나사 고향으로 가시니 제자들도 좇으니라 안식일이 되어 회당에서 가르치시니 많은 사람이 듣고 놀라 가로되 이 사람이 어디서 이런 것을 얻었느뇨 이 사람의 받은 지혜와 그 손으로 이루어지는 이런 권능이 어찌됨이뇨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제가 아니냐 그 누이들이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하냐 하고 예수를 배척한지라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친척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않음이 없느니라 하시며 거기서는 아무 권능도 행하실 수 없어 다만 소수의 병인에게 안수하여 고치실뿐이었고 저희의 믿지 않음을 이상히 여기셨더라 이에 모든 촌에 두루 다니시며 가르치시더라.
여기서 고향이라 할 때 선악과 따먹고 나온 혈통적 혈육적으로 세상 인정정실로 된 육에 속한 성질을 말한다. ‘영에 속한 성질이냐, 육에 속한 성질이냐’ 할 때 육에 속한 성질을 말한다.
‘육에 속했다’ 그럴 때는 시간 안에 속한 것이다. 시간 안에 속한 것은 전부는 변질 변동 변색이 된다. 잠깐 있다가 없어지고 상황과 환경에 따라서 자꾸 움직인다. 그러니까 정함이 안 되는 것에 기준을 세워놓으면 안 된다. 그거는 100% 속는다. 그런 자기는 속고 사는 거다. 하루 세 끼 밥 먹고 살 런지는 모르나 이건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에서 빗나간 채 속고 사는 거다.
영에 속한 성질로 되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이치로 사는 거다. 다시 말하면 인간 자기를 만든 창조의 목적대로의 인인연관 관계가 들어가는 거다. 그래서 성경에 ‘주 안에서 네 부모를 공경하라. 주 안에서 네 자녀를 노엽게 말라’ 했는데 부모공경도, 자녀교육도 길과 진리와 생명의 이치로 할 때 창조의 목적대로 들어가는 거다. 거기서 이탈이 되는 것은 상황 따라, 세상의 바람 따라, 세계 정세에 따라, 인정정실에 따라 변하게 돼 있다. 이건 다 못 쓰는 거다.
이걸 지금 세계적으로 많이 본다. 일반적 개념으로 봐도 부부 자녀 친구 남이고 말할 것 없이 죄짓는 사람들은 전부가 시간 속에 매여진 사고방식을 가지고 죄를 짓는 거다. 혹 이런 사회 윤리적 도덕적인 죄를 안 지어도 일반사람들의 그 사상은 창조의 목적에서 벗어난 사상들이다. 그러니까 시간과 환경이 조성되면 다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성질이니 이것은 육에 속한 성질들이다.
그러므로 사회 윤리적 도덕적 개념으로 하는 것은 일반적으로 선한 일이건 악한 일이건 다 육적인 조건이니 성경을 가지고 그 육적인 조건으로 복음처럼 말을 한다거나, 말씀을 들을 때 자기가 육적인 조건으로 말씀을 받아들인다든지 하는 건 말씀이 받아지는 게 아니고 자기 주관성에서 제 좋도록 하려는 것이다.
인간에 속한 것은 다 자기 주관으로 들어간다. 나를 위한 것이 아닌 다른 사람을 위한 것은 공적이 아니냐? 아니다. 하나님만이 공적이고 지공법이다. 그 외에 나에게 맞추지 않더라도 어떤 인간에게 맞추거나 세상 인간기준에 맞추는 것은 하나님 앞에 전부는 사적이요 사행이요 불법이요 불의다. 예수를 믿으면 그 사고의 기준이 예수가 돼야지 왜 세상이 되느냐?
그러니까 육에 속한 것으로, 세상에 속한 것으로, 물질적 개념으로 소원 목적하여 종교적으로 업적을 쌓거나 사업적으로 업적을 쌓아도 그건 전부 육에 속한 거고, 세상에 속한 거고, 시간 속에 속한 거고, 변질되고 변색되고 진동되고 불에 타고 날아갈 것들이다. 그런 교회의 메시지는 천국복음이 아니다. 천국의 질이 아니다. 영의 질이 아니다.
그런데 신문에 보니까 각 종교마다 영성을 말한다. 불교나 기독교나 천주교 등 종교를 가졌다면 다 영성이라고 한다. 이게 참으로 정신없는 미친 소리다. 왜냐? ‘하나님은 영이시니’ 라고 하셨는데 귀신은 본질적으로 들어가는 하나님의 영의 개념이 아니다. 귀신의 영을 악령 시 하거나 성령 시 하거나 하나님 시 하면 안 된다. 이건 본질적으로 다른 거다. 물이면 다 똑같으냐?
기독자는 성령과 결합되어 동행하면 속에서 영원히 사는 것으로 역사가 되지만 악령류, 귀신 사단 마귀 이런 영물들로 자기 속에서 역사되게 하면, 움직이게 하면 이건 이미 하나님의 심판에 망하는 거다. 이미 찍히고 들어간다.
각 종교에서 ‘영성’이라고 하듯이 기독교 안에서도 의례히 ‘영성 영성’ 하는 게 있다. 그런데 기독교의 영성은 진리이치로 불변성으로 들어가 있는 하나님의 본질적인 사상의 영의 성질을 말하는 거다. 하나님의 본질과 똑같은 질이 성령님이 역사하는 영성인데 이 영성을 많은 교회가 선악과 먹고 타락되고 저주 받은 데서 나온 그 지식을 가지고 이성적으로 자기의 신비로운 체험에서 나오는 것을 영성이라고 하고 있다. 이게 정말 착각을 하는구나.
그런데 기독교회 목사가 ‘하나님은 영이시니’ 하는 그 영하고, 이방종교는 다 귀신을 믿는 자들인데 이 귀신을 영처럼 생각하고 영성이라고 한다면 이게 말이 되는 거냐? 안 되는 거다. 그렇게 말하는 그 자가 귀신이 들린 거다. 영성이 뭔지도 모르면서 말을 하는 거다. 이게 오늘날 기독교의 현주소다.
그러니까 그런 메시지 속에는, 그런 정신과 사상 속에는 천국복음은 들어가지 않는다. 그런 사상에는 딴 것으로 가득 차 있어서 진리이치 생명이치 구원도리는 안 들어간다. 하나님의 인간창조의 목적성은 그 속에 안 들어간다. 이건 복음 배척상태다. 그러니까 우리가 들을 때는 비교를 하고 분별을 해서 선택을 해야 한다.
예를 들면 목사나 장로나 집사의 가정이라고 해도 그 집 어른들의 정신 사상 소원 목적이 혈육적으로 되어 있다면 그 가정의 식구들에게 참 본질의 신앙이 먹히느냐? 안 먹힌다. 그래서 참 본질과 대립되고 마찰되고 충돌되는 그게 참 불행한 거다.
왜냐? 옳은 진리이치의 말씀을 듣고 주님께로 의사단일성을 만들어 가야 되겠는데 한 집안이고 친구고 자식이다 보니 가족들이 집안 어른의 행동을 보고 있기 때문이다. 눈에 보이는 게 기준이 돼 있으니 안 들어간다. 이건 ‘네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 하는 이게 안 되는 사상들이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큰 축복의 약속을 주셨는데, 그게 다 우리들에게도 향한 약속인데 이런 사상에서는 그게 안 된다. 그만 인정정실에 끌려가게 된다. 추석 때도 끌려가고 설 때도 끌려가고 주일은 까먹고. 이게 다 신28:에서 말씀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걸 모르고 있다.
왜 모를까? 하루 세 끼 밥 먹고 든든하니 하나님 없이도 사는 것 같으니까 모르고 있다. 그러면 인간이 하나님 없이도 사는 거냐? 온 우주만물은 하나님의 창조물인데 인간이 하나님 없이 어떻게 사느냐? 모든 성질이 육적 혈통 육성 육에 속한 것에는 복음 배척상태라서 절대로 진리말씀이 안 들어간다.
공자의 가르침, 삼강오륜 이런 게 전부 육성이다. 공자의 부모공경과 십계명의 부모공경이 같으냐? 선악과 따먹고 타락된 지식을 기준적 지식으로 삼아서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는 것과, 성경에서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는 것은 그 뜻이 그 근원이 다르고 질이 다르다.
‘주 안에서 네 부모를 공경하라. 네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라.’ 예수 믿는 사람이 구원도리를 떠나서 부모를 섬기고 자녀를 교육하면 어떻게 되겠느냐? 이건 창조의 목적에서 이탈되는 거다. 그러니 이렇게 되면 부모자식 간에 전부가 돈으로 이해타산을 따진다. 이러면 사람이 죽어도 왜 죽는지를 모른다. 왜? 그만한 지혜가 없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이 사람을 바로 사랑하겠느냐? 깨우쳐라. 깨우치면 날아갈듯이 기쁘고 편안하고 그 짐은 가벼운 거다. 사는 것이 가볍게 살아간다.
예수 믿는 사람이 육적 육성적인 그런 것을 하나 못 벗어나서 그런 게 짐이 돼가지고 있으면 그 사람에게 어떻게 복음이 들어가느냐? 이런 사람은 축복의 사람이 아니고, 영성의 사람이 아니고 타종교인과 같은 하나의 기독교 종교인이다. 사고방식이 그렇다. 사람이 안 바뀐다. 예수를 믿으면 예수를 따르고 그 교훈을 받고, 그 교훈을 받을 때는 예수님의 성품이 하나님 쪽으로 닮아가는 건데 주일은 지키고 헌금은 내고 찬송은 하는데 그게 없다.
성경말씀은 누누이 자기에게 약속을 하는 거다. 여호와의 이름을 걸고 약속을 하는 건데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사람이 그 약속을 안 믿는다. 그러면서 하나님을 떠난 자기의 기준을 가지고 세상을 살아보고자 하고 있다. 그러면 세상이 누구 건데? 심지어 예수 믿는 자기 몸도 누구 건데? 이런 사람은 알고 보면 자연법칙을 본능적으로 지키는 짐승만도 못한 거다.
예수님께서 나사렛에서 자랐는데, 베들레헴이 고향이 되기도 한다. 고향에 가면 아는 사람도 많다. 그러면 예수 믿는 자가 복음을 들고 고향의 안 믿는 일가친척 부모형제에게 가면 그 고향사람들은 안 믿는 일반사람들의 지식의 기준을 가고 있는데 자기가 전하는 그 복음을 받아들이겠느냐? 절대로 안 받아들인다. 여기는 이미 정신 사상적 소원 목적적으로 소속과 입장이 다른 것이다. 하늘과 땅이다. 그러니 대화가 안 된다.
이들과 대화를 하려면 믿는 자기가 안 믿는 사람으로 떨어져서 ‘어떻게 먹고 마시고 사느냐? 월급은 얼마나 받느냐? 돈은 얼마나 저축을 해 놨느냐? 집은 샀느냐?’ 그런 얘기를 해야 하고, 그 다음에 맨 놀러 다니는 그런 거 빼놓으면 할 게 없다.
그럼에도 이들에게 예수 믿는 것을 중심으로 대화를 하면 안 믿는 부모형제들은 몸살이 나고 귀에 안 들어오고 지루한 거다. 그리고 정말 옳은 복음의 말을 하면 ‘네 말은 옳지만 세상에서 어떻게 그렇게 사느냐? 네 말대로 하면 돈도 못 벌고 거지가 되겠다’ 한다.
그러면 인간을 만드신 창조주 하나님께서 성경에 말한 것이 다 거짓말이냐? 그리고 아무리 타락된 세상이지만 하나님을 믿는 그 나라를 봐라. 하물며 바로 믿고자 하는 그 가정은 성경에서도 그 후손들이 거지되는 것을 봤느냐고 한다. 하도 안 믿으니까 이런 말씀을 하는 거다.
어쨌든 ‘아예 예수를 안 믿는다’ 그 표현 이전에 육적인 육성적으로 기준을 삼고 사는 사람은, 육적인 인정정실로 들어가 있다면 여기는 성질적으로 복음이 안 먹힌다. 진리의 밝은 이치로 깨달음이 안 된다.
육적 육성은 항상 눈에 보이는 현실을 기준 삼아서 말을 한다. 그러니 사람이 무슨 미래가 있겠으며, 이거는 창조의 목적에서 빗나간 거고, 성경에서는 이런 사람을 멸망당할 짐승 같다고 한다. 인간을 만드신 하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신다. 멸망당할 짐승 같다는 것은 사람이 미래도 없이 임시성적으로 즉흥적으로 산다면 그는 피부와 골각은 사람인데 속성적으로 보니까 짐승이구나.
이런 이치를 가지고 각 교회의 설교를 듣고 자기가 판단을 할 줄 알아야 한다. 창조의 목적에 맞는 소리냐? ‘목사다 장로다’ 그게 문제가 아니고, ‘사람이 많이 모인다’ 그게 문제가 아니고 복음은 본질을 가지고 따지는 거다. 부피와 양을 따지는 게 아니라 지식의 척도 기준을 가지고 따지는 거다.
신앙이라고 한다면 하나님의 본질, 지식의 본질, 지혜의 본질, 지식의 본질, 선의 본질, 사랑의 본질, 거룩의 본질을 가져야 한다. 그 본질은 전부 옳고 절대적이요 공의다. 그 옳음으로 갖고 있다면 그 사람의 신앙은 능력이 있다. 옳은 것이 큰소리치는 거다.
하나님의 옳은 것을 뭉개버리면 그 자는 앙화다. 하나님의 본질을 가지고 모든 사람들의 질을 볼 때, 특히 기독교 안에서 신앙의 질을 볼 때 육적 육성으로 가면 그 미래는 캄캄한 거다. 자기를 아직까지 죽이지 않고 살리고 있는 것은 깨닫게 하는 시간이다.
예수님께서 고향에 내려가서 천국복음을 전하는데 배척을 당했다. 쉽게 말하면 쫓겨났다. 그러면 안 믿는 사람들의 기준을 가지고 볼 때 고향사람들이 손해냐, 예수님이 손해냐? 예수님이 손해다. 안 믿는 사람들 입장에서 봤을 때 고향사람들이 손해가 아니라 예수님이 손해다. 그러면 우리가 제 삼자로서 고향사람들의 그런 행동을 믿음의 눈으로 볼 때 예수님이 손해냐, 동네사람들이 손해냐? 동네사람들이 손해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은 참 사람의 기준인데, 그런데 한 동네에 진리의 교회가 안 세워지고 무당 점쟁이가 들어가면 무당 점쟁이가 손해냐, 동네사람들이 손해냐? 또 누가 이익이냐?
‘저희의 믿지 않음을 이상히 여겼다’ 하는 이 말은 고향사람들이 믿지 않는 이유를 예수님께서 이해를 못하셨다 뜻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흑백을 분명히 알 수 있게 해 주셨는데도 불구하고, 영과 육, 임시성과 영원성을 분명히 알게 해 주었는데도 불구하고 고향사람들이 육신 육성에 속한 조건을 가지고, 세상에 속한 조건을 가지고 변명을 하며 구원의 가치성을 버린 그들이 참 이상한 사람들이라는 의미이다. 다른 말로 하면 참 미련하다.
욥기에 보면 욥이 너무 고난을 많이 받으니까 자기 생일을 저주했다. 이게 무슨 뜻이냐? ‘내가 왜 태어났던고. 안 태어났으면 좋을 걸’ 이런 말을 하는데 생일이라 할 때 뭘 알아야 하는 거냐? 물론 아기가 뭘 알겠느냐마는 그러나 인간으로서 태어났다면 자기 생일날 뭘 알아야 되겠느냐? ‘밥 차려라. 미역국 먹자’ 그거냐? 목사님들의 세계에서도 생일이나 또 나이 들면 회갑 진갑 칠순잔치를 하는데 이게 다 뭐 하자는 거냐?
사람이 어린아이로 태어났더라도 일단 인간으로 태어났다면 먼저 인간 자기의 창조의 목적을 알아라. 내가 왜 인간으로 태어났는지? 하나님께서 왜 나를 인간으로 태어나게 했는지? 나그네로 이 세상에 살 동안에, 재세기간 동안에 내가 뭘 하고 가야 될 런지? 다른 것은 다 못하더라도 내가 뭘 하고 가야 될 런지? 이런 목적이 인간 나에게 딱 붙어있는 거다.
그런데 욥이 고난 앞에서 자기의 생일을 저주하고 있는 것은 한 인간으로 태어났다면 창조의 목적을 알고 가야 할 텐데 욥이 이것을 모르고 있기 때문에 몸부림치는 것이다. 그게 안타까운 거다.
인간으로 태어났으면 그 다음에 성경을 깨닫고 창조의 목적대로 하나님의 온전한 성품을 입어야 한다. 이게 참 사람이다. 이게 인자다. 예수님께서 당신이 ‘인자’라고 하셨는데, 당신이 참 사람이라는 의미이다. 신학에서는 이 ‘인자’를 예수님의 인성을 의미한다고 말을 하는 것이지만 우리가 관계성으로 짓고 가야 할 것은 참 사람, 창조의 목적에 딱 들어맞는 진짜 사람을 말한다.
오늘날 자기의 몸부림이 뭔지? 목사님의 몸부림이 뭔지? 뭘 몰라서 몸부림을 하고 있는 건지?
고향사람들이 세상문벌을 기준 삼아서 예수님을 배척해 버렸다. 안 믿는 사람들은 문벌 따지고 학벌 따지고 재산 따지고 인물을 따진다. 그게 세상이요 육성이요 육에 속한 것이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육에 속한 조건이 뭐가 있느냐? 재산을 물려받았느냐? 장가를 갔느냐? 고운 옷을 입고 호화로이 지냈느냐? 우리가 믿는 예수님에게 세상적으로 돋볼 게 뭐냐? 돋볼 게 있어서 예수를 믿는 거냐? 예수님의 능력을 이용하려고 믿는 거냐? 세상에서 부자로 살고 천국에 들어가서 왕 자리 앉으려고 믿는 거냐?
우리교회 교인들은 궁극적 신앙이다. 그리고 궁극적 사상을 전하는 것이다. 시간 속에 세월이 흘러가도 변함이 없는 그 궁극적 사상을 갖고자 하는 게 우리교회 교훈이다. 이 교훈은 창세 때의 교인을 만다더라도 질적으로 똑같고, 마지막 시대의 교인을 만나더라도 질적으로 똑같은 거다.
변화산상에서 시대적으로 몇 백 년이 차이가 나는 모세와 엘리야와 예수님이 만났지만 만나자 마자 척 하고 대화가 된다. 질이 똑같기 때문이다. 신앙이라고 하는 사상의 질이 똑같기 때문이다. 질이 똑같은 여기는 시간이나 외모는 안 따진다. 대화가 그만 된다. 물론 역사적으로 보면 선재적 그리스도께서 이들을 보내신 거다. 예수님께서 말을 안 듣는 이상한 종교인을 보내겠느냐?
예수 믿는 사람이 세상에 속한 여러 가지 문벌을 가지고 따지기 시작하면 이건 예수님을 배척하는구나. 세상의 여러 조건성을 가지고 말을 하니 아무리 믿는 사람이라지만 이 사람은 예수를 안 믿는 사람이다. 그러면 이런 사람이 왜 예수를 믿느냐? 자기 소원 들어달라고 예수를 믿는 거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더하시리라’ 했는데 여기에서 세상의 그 모든 것을 받기 위해서 그의 나라를 부지런히 구는 것과,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다 보니 하나님께서 세상의 것을 더하시는 것 이 둘이 같으냐, 다르냐? 앞의 것은 누구의 주관이 안 보이게 들어 있느냐? 자기가 세워놓은 계획이 들어있다.
신앙인이라도 신앙이 아닌 자기의 인적인 주격, 세상주격이 자기 속에 들어있으면 여기는 성령님께서 역사를 안 한다. 깨달음의 역사를 안 한다. 그렇게 돼 있으면 모든 세상만사를 자기의 기준을 가지고, 자기 기준은 결국 ‘이 시대에는 이 바람을 타야 되겠구나. 이 환경에서는 이렇게 해야 되겠구나’ 하는 현세에 바람을 잘 타는 것이다.
그러나 진리의 사람은 진리기준을 놓고 ‘상황이 이러니 하나님의 뜻을 내가 어떻게 행해야겠구나. 환경이 이러니 내가 하나님이 뜻을 붙잡고 어떻게 살아야 되겠구나’ 이게 나온다. 이런 사람은 부하던 가난하던 고난이던 어떤 환경과 처소를 만나던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사형통으로 만들어져서 나온다. 이런 사람은 변함이 없는 신앙자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들어서 높이 올린다. 이게 약속이다. 성경은 너에게 약속이다.
고향사람들은 예수님을 배척해 버렸다. 이 고향사람들은 세상에 속한 이해타산을 가지고 예수를 평가를 하는 거다. 이런 사람은 세상의 이해타산을 앞세워서 복음을 배척해 버린다. 그런데 사실 알고 보면 그 말씀이 자기의 양심을 찌르는 거다. 육적 육성을 찌르니 되게 싫은 거다.
‘말씀은 좋은데’ 하면서도 세상의 조건을 앞세워서 복음을 배척하는데, 이것은 ‘아무리 세상을 창조한 하나님이라도 세상에서 알아주는 최고의 학벌을 가져야 인정해 주겠다. 아무리 예수님이라도 세상으로부터 허락을 받고 전해야 인정해 주겠다’ 하는 태도이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어디의 허락을 받아서 전하는 거냐? 천국복음이 누구의 허락을 받아야 전하는 거냐? 총회의 허락을 받았느냐? 노회의 허락을 받았느냐? 천국의 사람이 되면, 천국의 성질과 지식이 들어있으면 속에서 성령의 불이 붙는다. 이런 사람이 하나님께서 잡고 쓰시는 능력자다.
그런데 목사안수를 받지 않아도 천국의 성질로 가득 차 있으면 힘 있는 역사가 나올 텐데 오늘날 목사가 그런 정신을 가지고 있느냐? 외국의 학박사증이 있다고 할지라도 천국복음의 정신이 없다면 이게 목사냐? 오늘날 길거리에 밟히는 게 목사다. 그런데 복음이라야지.
구약에 보면 선지자들이 누구의 허락을 받아서 전하더냐? 하나님으로부터 말씀을 넣어서 보내는 거다. 말씀이 들어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아 외치는 거다. 누구의 허락이 아니다. 그런데 오늘날 기독교의 세계가 ‘어디 나왔느냐? 누구의 허락을 받았느냐’ 한다.
그러면서도 한 편으로는 ‘기독교 안에서 누가 영발이 세다. 예언 방언을 잘 한다’ 하면 신학을 안 나오고 무식쟁이라도 그 사람을 단에 세우고 말을 하게 한다. 귀신의 말을 하는데도 강단에 세워서 간증하게 하고 돈을 주고 한다.
그러면 그 사람이 누구의 허락을 받은 거냐? 신학박사요 목사인데도 귀신의 허락을 받아서 말을 하는 사람임에도 세상에서 유명하다고 하면, 자기 교회 부흥시켜준다고 하면 그를 세운다. 그게 신앙이냐? 이게 오늘날 교회의 현주소다. 자기 속의 신앙의 기준은 뭐냐?
예수님께서 왜 고향에서 천대를 받는지? 그러면 오늘날 자기가 진리의 성도란다면 설이고 추석이고 고향에 가서 뭐하고 오느냐? 전도하러 간다? 똑바로 하고 올라와라.
사람은 자기가 갖고 있는 신앙이 옳은 신앙인지 아닌지 모르나 그 신앙사상을 가지고 자기 길을 가는 것이다. 그게 자기 일생이다.
그러나 자기에게는 인간 자기를 만드신 하나님의 인간창조의 원인과 동기와 목적이 있는 거다. 그래서 나를 짐승처럼 만들지 않고, 굴러다니는 돌로 만들지 않고 이성이 있고 자유성이 있고 후에 심판성이 있는 인간으로 만들어 놨다. 따라서 창세 이후 모든 인간은 그 심판성을 못 피한다. 우리가 일반적인 이치를 갖고 볼 때도 인간까지 포함해서 모든 삼라만상이 하나님께서 만들어 놓은 자연의 우주법칙을 떠나면 못 살고 죽는다. (계속)
김경형목사님이 교역자 신학생을 대상으로 20여년 동안 매 주 정례적으로 진행하는 신학 및 성경연구 모임을 통해 영원 전에 하나님의 의지세계에서 인간구원을 설정하게 된 원인과 동기와 목적을 깨닫고 하나님의 본질의 신앙으로 나가는 주의 종들이 누룩처럼 퍼져나가고 있습니다.
참석하실 분은 031-207-5159, 또는 010-8886-5159로 문의해 주세요.(평신도도 참석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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