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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시1: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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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조용기 목사 |
참고 : | 2015.10. 25 여의도순복음교회 |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야훼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악인들은 그렇지 아니함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그러므로 악인들은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들이 의인들의 모임에 들지 못하리로다 무릇 의인들의 길은 야훼께서 인정하시나 악인들의 길은 망하리로다” 시편 1편 1∼6절
죄악의 길에 서면 복 받을 수 없으나
주실 복을 꿈꾸며 믿음의 삶 살아가면
기쁨과 감사로 복된 승리의 삶 살 수 있어
복은 사람을 따라 갑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갈대아 우르에서 가나안으로 보내시면서 복을 주시고, 그 후손들에게도 복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갈라디아서 3장 7절에서 8절에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알지어다 또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 모든 이방인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엄청난 복을 주셨고, 우리들이 예수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어 그 모든 복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어 10절에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에 있나니 기록된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모든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고 저주 받을 자는 우리인데 죄 없으신 예수님이 우리의 저주를 대신 짊어지고 십자가에서 모두 청산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11절에 “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도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라”고 말씀하였기 때문에 율법은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니라 행위에서 난 것이므로 율법을 지킴으로 복을 받는다고 하지 않고 믿음으로 아브라함의 복을 받는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13절에서 14절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의 복이 우리에게 넘쳐나게 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우리가 아브라함의 복을 받는다고 성경이 약속했으므로 우리는 마음에 ‘나는 복 받은 사람이다’라는 생각을 늘 해야 합니다. 천국의 영생의 복 뿐만 아니라 아브라함에게 주셨던 물질적인 복도 다 누리게 되었기에 우리는 스스로를 바라보면서 ‘나는 복 받은 사람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매달려서 저주를 다 청산했으므로 나는 저주아래 있지 않고 아브라함의 복 안에 있다’라고 말로써 자기를 격려해야 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설교들을 때는 하나님이 반드시 복을 주실 것 같은데 사업을 해도 안 되고, 장사를 해도 신통치 않고, 어려움이 왜 이렇게 많으냐?”라고 질문합니다. 그러나 어려움이 많은 이유가 있습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영광을 주시기 전에 반드시 고난을 통과해 든든한 반석 같은 믿음을 한 번 더 확인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전에 광야를 거쳐야 했습니다. 요셉은 애굽의 국무총리가 되기 전에 종살이와 감옥살이를 해야 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은총을 받기 전에 반드시 고난을 통해서 신앙을 한 번 더 다짐하고 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고난을 통할 때 ‘나는 예수 믿고 복 받은 사람이다. 이 고난은 얼마 있지 않아 떠나간다. 고난 뒤에 나는 하나님의 영광을 누리게 된다’라고 자기를 자꾸 축복하면 결국에는 놀라운 주님의 복이 임하게 될 것입니다.
1. 악인의 꾀를 따르면 복이 없다
복 받은 사람이 악인의 꾀를 따르면 복이 없어지게 됩니다. 악인은 마귀의 종자들을 말하는데, 마귀를 따라 하나님을 미워하고, 저항하고, 인본주의를 주장하고, 바벨탑을 쌓는 노아의 후손과 같은 악인은 복이 없습니다. 악은 죄보다도 더 무서운 것입니다. 하나님의 율법을 어기는 자를 죄인이라고 하지만 악인은 그 성격 자체가 부패하고 패륜한 것입니다.
스탈린이나 공산주의 국가에서 공산주의를 이끌어 가는 사람들은 굉장히 사람을 많이 죽였고, 자기의 영화를 도모했습니다. 바로 이것이 악인이 모습입니다. 죄인은 그 근처에도 가지 못합니다. 또한 악인은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타락한 이후로 악한 자들은 하나님을 무시하거나 하나님과 동등하게 되겠다고 합니다. 창세기 11장 4절에 “또 말하되 자,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라고 했습니다. 노아의 후손들은 모여서 농사를 지어 큰 부자들이 되었습니다. 그러자 그들 마음 가운데 “우리가 하나님을 이제 섬길 필요가 어디 있냐? 우리가 탑을 쌓아서 하늘에 닿게 하고, 홍수가 와도 우리를 건드리지 못하게 높은 탑을 만들자”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우리하고 무슨 상관이 있냐? 우리도 하나님처럼 되면 될 것 아니냐?”라고 했던 것입니다. 노아의 후손들이 바벨탑을 쌓아 하나님처럼 되겠다고 한 것은 그냥 죄가 아니라 악인 것입니다. 요한복음 10장 10절에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악한 자는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는 마귀를 쫓아서 악을 행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와같은 악인들에게는 복을 절대로 주지 않습니다.
2. 죄인들의 길에 서면 복이 없다
그 다음에 복 받으려면 죄인의 길에 서지 말아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법을 어기는 것이 죄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오늘 세상을 떠나더라도 죄를 물을 수 없습니다. 왜냐면 우리를 죄인으로 붙잡을 법을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영원히 청산해 버리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죄가 우리를 심판하려 할 때 예수님이 우리 옆에 서서 “내가 다 책임졌습니다. 저 갈보리를 보십시오. 내가 피투성이가 되어서 죄를 다 갚았습니다”라고 해 주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죄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이라는 것이 보통 구원이 아닙니다. 말로 다 할 수 없는 크신 은혜인 것입니다. 로마서 7장 7절에서 8절을 보면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라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 그러나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내 속에서 온갖 탐심을 이루었나니 이는 율법이 없으면 죄가 죽은 것임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일평생의 죄가 청산되었고, 성령으로 말미암아 거룩하게 되어가는 과정에 있는 것입니다.
십계명을 보면 하나님 앞에서 지켜야 될 것과 사람 앞에서 지켜야 될 법이 있습니다. 출애굽기 20장 3절에서 17절에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네 하나님 야훼는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너는 네 하나님 야훼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말라 야훼는 그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는 자를 죄 없다 하지 아니하리라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일곱째 날은 네 하나님 야훼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가축이나 네 문안에 머무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야훼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일곱째 날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야훼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야훼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라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 네 이웃의 아내나 그의 남종이나 그의 여종이나 그의 소나 그의 나귀나 무릇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라”고 했습니다. 1계명에서 4계명까지는 하나님 앞에서 지켜야 할 것들이었고, 5계명부터 10계명까지는 사람과의 관계에서 지켜야 할 것들이었습니다. 이 구약의 십계명이 오랜 시간 우리가 죄인이냐, 죄인이 아니냐를 결정하는 도구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십계명이 오늘날 우리 예수 믿는 사람에게는 더 이상 죄인을 결정하는 조건이 되지 못합니다. 예수님이 제물이 되셔서 우리의 모든 죄를 청산했기 때문에 이 십계명이 우리를 정죄해서 지옥으로 보내지 못하는 것입니다.
아담 이후 태어난 인간은 모두 심성이 부패한 죄의 종이었는데, 주님께서 우리를 의인으로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평생에 죄를 한 번도 짓지 않은 상태의 의인으로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믿으며 의롭게 된다는 것은 죄를 한 번도 짓지 않은 사람처럼 만들어 주셨을 뿐 아니라 하나님 앞에 부끄럼 없이 설 수 있는 자격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우리 힘으로 결코 예수님 앞에 설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가지고, 주님을 의지하고 아버지 앞에 나가면 죄로 인해 더 이상 움츠릴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당당하게 설 수 있는 의로움의 자격이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마귀는 우리의 과거 잘못을 자꾸 들추어내서 의롭지 못하게 만들려고 하나 예수의 피가 우리를 덮음으로 아무리 정죄를 해도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피로 말미암아 우리가 살고, 아버지를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고, 원수마귀를 물리칠 수 있는 능력이 되는 것입니다.
3.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으면 복이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의 앞에서 악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고, 그 다음엔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오만하다는 것은 교만을 말합니다. 그 교만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과 동등 되려고 하는 것을 말합니다. 마귀가 아담과 하와를 유혹할 때 “선악과를 따먹는 날에는 너도 하나님처럼 된다!”고 했습니다.
선악과의 의미가 뭡니까? ‘선하다, 악하다’하는 것은 언제나 어른이 결정을 하지 애들이 결정을 안 합니다. 집에서도 ‘선하냐, 악하냐’는 아버지, 어머니가 결정할 일이지 애들이 결정할 일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우주에 주권은 하나님에게 있으므로 하나님이 ‘좋다, 나쁘다’ 결정할 권한을 가지고 있지 우리의 마음대로 선악을 분별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절대주권자이신 하나님이 정해놓은 것을 “나는 그렇게 생각 안 합니다”라고 다른 소리를 하면 하나님과 경쟁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제일 미워하는 것은 주권에 대해 침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렇다’하면 그런 줄 알아야 되는데, 그렇지 않다고 하나님 주권에 도전하는 것을 우리는 ‘원죄’라고 합니다. 그러나 ‘원죄’를 해결하시고자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의 절대주권에 한 마디도 불평하지 않고 따르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으면 사탄이 되는 것입니다. 원래 천국에는 하나님을 섬기는 최고 천사장이 있었습니다. 그 최고의 천사장이 하나님과 동등하게 되려고 하다가 심판을 받고 쫓겨나서 사탄이 된 것입니다.(사 14:13∼14) 그 타락한 천사장이 자기 부하 천사들과 더불어서 반역해서 공중의 권세를 잡고 오늘날 우리를 꾀고 타락시키는 것입니다. 사탄은 자기가 하나님과 동등하게 되려다 타락하자 아담과 하와에게도 “하나님과 동등하게 될 수 있는데 하나님께 순종하고만 살겠냐? 선악과를 따먹어라! 그러면 눈이 밝아져서 선악을 아는 지혜를 얻어 네가 하나님과 동등하게 된다”라고 유혹했던 것입니다.
또 교만하다는 것은 자기를 과대평가하는 마음인 것입니다. 시편 31편 23절에 “너희 모든 성도들아 야훼를 사랑하라 야훼께서 진실한 자를 보호하시고 교만하게 행하는 자에게 엄중히 갚으시느니라”고 했고, 시편 40편 4절에 “야훼를 의지하고 교만한 자와 거짓에 치우치는 자를 돌아보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라고 했습니다. 자기를 과대평가하면 교만하게 됩니다. 자신을 과대평가하여 교만하게 되면 어깨에 힘을 주면 하나님도 미워하시고 사람들도 미워하게 됩니다. 사람들에게는 겸손이 제일 좋은 지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혜 주시는 성령을 인격적으로 인정하고, 환영하고, 모셔들이고, 의지하고 순종해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교만해서 “나는 성령 없어도 할 수 있다”라고 하면 그 교만은 패망의 선구자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겸손한 자를 기뻐하십니다. 교만은 가장 근본적이고 위험한 죄입니다. 왜냐하면 교만은 인간이 최초로 지은 죄요, 하나님과 동등하게 되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교만은 사람에게 가장 먼저 찾아와 가장 늦게 떠나는 끈질긴 죄”라고 말했습니다. C.S.루이스도 “근본적인 죄악은 바로 교만”이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또한 교만이라는 것은 다른 사람과 비교할 때 생겨나는 것입니다. C.S.루이스는 “교만은 무엇을 가지고 있다는 데서 쾌감을 얻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보다 더 가지고 있다는데 대해서 쾌감을 느끼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나는 너보다 낫다”라고 비교하는데서 교만이 생기는 것입니다. 자기를 과대평가하거나 이웃을 무시하는 것은 모두 비교에서 시작됩니다. 가인이 아벨을 왜 쳐 죽였습니까? 가인은 하나님이 편파적으로 아벨의 제사만 받으셨다고 생각했고, 아벨이 자기보다 나은 대접을 받는다는 비교의식이 생겨나니 화가 나서 동생을 쳐 죽였던 것입니다. 우리는 비교할 때에 불행이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비교하지 말아야 합니다. ‘너는 너고, 나는 나다. 너의 특성대로 하고, 나의 특성대로 하면 된다’라고 생각하며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남은 정죄하고 자기는 잘났다고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두 사람이 하나님 성전에 예배하러 올라가는데, 한 사람은 바리새인이고 한 사람은 세리입니다. 바리새인은 율법을 철저히 지키며 살았으나 세리는 돈을 도둑질 해 먹고, 남의 사업을 무너뜨리는 짓을 하는 아주 나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바리새인과 세리 이 두사람이 성전에 기도하러 갔는데 바리새인은 한 쪽에 서서 “하나님 아버지여 내가 왔나이다. 보시옵소서. 나는 이레에 꼭 한 번씩 금식기도 하고, 십일조 꼭 드리고, 저쪽에 있는 저 세리처럼 허랑방탕하고 방종하고 육체적인 생활에 침전되어서 사는 그런 나쁜 놈이 아닙니다. 나는 훌륭한 사람입니다”라고 기도했습니다. 반면 세리는 하나님 앞에 고개를 못 들고 가슴을 치면서 “하나님이여 나는 죽을 죄인입니다. 하나님 나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나를 살려 주십시오. 나는 나쁜 놈입니다”라고 기도했습니다. 예수님이 물으셨습니다. “두 사람 중에 누가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함을 받았겠느냐?” 우리가 생각해봐도 바리새인이 삶에서도, 율법적으로 훨씬 잘했단 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말씀하기를 “두 사람이 기도를 하고 나가는데 이 바리새인은 용서를 받지 못하였으나 세리는 용서를 받고 인정을 받고 나갔다”고 하셨습니다. 자기가 죄인인 것을 고백하면 하나님은 용서해 주시나 자기가 다른 사람보다 낫다고 자랑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더럽게 여기십니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가 되기 때문입니다.
4. 믿음으로 살라
우리는 믿음으로 살아야지 인본주의로 살면 부정적인 생각과 말을 할 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첫째도 믿음, 둘째도 믿음, 셋째도 믿음을 중하게 여기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에게는 믿음이 율법이고, 생명이고, 모든 것 중에 모든 것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최고의 하나님의 법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우리는 엄청나게 복을 받았습니다. 그 십자가 보혈로 말미암아 평생의 죄가 다 청산되고, 그 피로 인하여 성령을 받게 되고, 저주에서 해방되고, 질병에서 고침 받고, 사망과 음부를 극복하고 천국에 올라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해서 구원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이 세리와 같이 주님께 나아와 회개를 자꾸 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주님을 의지하고 살면 주님은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라고 하시면서 믿음의 사람을 품에 품어 주십니다. 이 세상에 살면서 온전히 죄를 짓지 않고 살아가는 의인은 단 한명도 없습니다. 베드로가 주님께 “주님 하루에 죄인을 몇 번 용서해 줘야 됩니까? 일곱 번만 용서해 주면 됩니까?”라고 질문했습니다. 그러자 주님께서 베드로의 얼굴을 가만히 보시며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회개만 하면 용서해 주라”고 답해 주셨습니다. 회개 안하는 것이 제일 나쁘지 회개만 하면 일흔 번씩 일곱 번 즉, 사백 구십번 이상 죄를 지어도 다 용서해 주라고 하신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일부러 죄를 지어서는 안 되지만 실수로라도 죄를 짓게 되면 몇 번을 짓든지 진심을 다해 회개하면 하나님은 용서해 줄 마음이 계시고,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의 믿음을 귀하게 여기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갈 때에 악한 꾀를 가지고 있으면 복이 없고, 죄를 짓고 회개 하지 않으면 복이 없고, 믿음으로 살지 아니하면 복이 없습니다. 그러나 복 있는 사람은 가는 곳마다 형통합니다. 복이 없는 사람은 항상 실패하고, 복이 있는 사람은 복을 바라보고, 꿈꾸며 믿음으로 복을 받아들이고, 복을 선언하고 감사드립니다. 우리는 항상 자신을 꿈꿀 때 복 받아서 머리가 되고 꼬리가 되지 않는 자신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복을 바라보고 복을 꿈꾸고 믿음으로 “나는 복을 받은 사람이다”라고 입으로 시인하고 하나님께 감사하고 나가면 우리에게 주시기로 작정하고 있는 복이 우리의 것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모두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넘치는 아브라함의 자손으로서의 복을 반드시 주실 것입니다.
-기도-
오늘도 살아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좋으신 아버지 하나님! 우리에게 약속하신 아브라함의 복을 놓치지 않는 자들 되게 하시고, 복 받은 것을 꿈꾸고, 믿음으로 기뻐하고 감사하는 삶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모든 말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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