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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신19:1-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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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이한규 목사 |
참고 : | 실시간 온라인 새벽기도(1668) 2015.8.10 |
은혜를 남용하지 마십시오 (신명기 19장 1-13절)
< 차가운
공의도 필요합니다 >
어느 날, 한 청소년이 부모님께 불만을 품고 가출했습니다. 그런데 가출 넷째 날에 아빠가 수소문해
찾아와서 사정하듯이 말했습니다. “얘야! 이제 집으로 들어가자.” 그는 안 들어가겠다고 했습니다. 아빠는 “네가 어디서 살려고 하니? 네 심정을
알았으니 이제 집에 가자!”라고 하며 사정하듯이 말했습니다. 결국 그는 고개를 빳빳이 쳐들고 개선장군처럼 귀가했습니다. 그렇게 대접받으며
귀가했기에 가출 과정에서 배운 것도 없이 ‘아빠의 은혜’를 ‘아빠의 사정’으로 여기고 은혜를 남용해서 오히려 마음이 높아졌습니다.
그런 상태에서 가정 내의 스트레스를 이기지 못하고 얼마 후에 두 번째 가출을 감행했습니다. 아들의 두 번째 가출을 맞아 부모는
생각을 달리했습니다. 아들을 찾아 사정해서 집에 가자고 하면 자녀의 정신이 더 오염될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마음은 아파도 스스로 깨닫고 돌아올
때까지 외면해야 하겠다고 결심하고 가출한 아들을 더 이상 찾지 않았습니다. 겉으로 보면 냉정한 행동이었지만 부모는 아들의 성숙함을 위해 그런
냉정함을 감수했습니다. 그리고 아들을 찾는 대신 하나님을 매일 찾아서 가출한 아들을 위해 눈물로 기도했습니다.
재가출 첫째 날,
아들은 다시 신나는 기분을 만끽했습니다. 둘째 날, 신나는 기분이 조금 줄었습니다. 셋째 날이 지나고 넷째 날부터는 부모님이 자기를 찾지 않는
것 같아서 왠지 불안했습니다. 10일째가 넘어서면서 가까운 친구들도 자기를 부담스럽게 생각하는 눈치였습니다. 20일째가 넘어서면서 매일 잘 곳
구하는 것도 힘들어졌습니다. 30일째가 넘어서면서 극심한 생활고가 시작되었습니다. 50일째가 넘어서면서는 잡일 도와주는 일터를 전전하며 쪽방에서
지내야 했습니다. 그래도 부모님은 자기를 찾지 않았습니다.
처음에는 부모님이 자기를 찾지 않는 것이 오히려 편했지만 조금 더
지나자 자기를 찾지 않는 부모님이 원망스러웠습니다. 원망의 단계가 지나자 부모님께 왠지 죄송했습니다. 더 시간이 지나자 부모님에 대한 아련한
그리움이 생기면서 마음이 크게 가난해졌습니다. 마침내 그는 가출 80일 만에 집으로 돌아오면서 마음을 낮추고 부모님께 머리를 숙였습니다. 그
뒤로 아들은 부쩍 성숙해졌고 부자관계도 멋지게 회복되었습니다. 가출한 아들의 정신적 오염을 염려해서 잠시 ‘따뜻한 사랑’을 유보하고 ‘차가운
공의’를 실천한 부모의 전략이 성공한 것입니다.
따뜻한 사랑과 더불어 때로는 차가운 공의도 필요합니다. 사랑과 공의를 지혜롭게
분별하는 삶은 큰 인물이 되기 위해 꼭 필요한 삶입니다. 넘치게 퍼주되 무조건 퍼주면 안 됩니다. ‘넘치게 퍼주는 것’과 ‘무조건 퍼주는 것’은
아주 다른 것입니다. 사랑은 공의와 함께 가야 합니다. 사랑과 은혜는 남용되면 안 됩니다. 본문에 나오는 도피성 제도는 그 사실을 잘
교훈합니다.
< 도피성이 무엇입니까? >
본문은 도피성 제도에 관한 몇 가지 사실을 알려줍니다. 첫째,
도피성은 도피하기에 너무 먼 곳에 있지 말아야 했습니다. 가나안 땅 전체를 세 구역으로 나누어 길을 닦고 모든 살인자를 그 성읍으로 도피하게
했습니다(3절). 왜 땅 전체를 세 구역으로 나누어 길을 닦게 했습니까? 각 구역의 중심에 도피성을 설치해 어디서든지 하루 이내에 쉽게 도착할
수 있는 거리에 두기 위해서였습니다. 도피성이 너무 멀리 떨어져 있으면 도피자가 도피성으로 들어가기 전에 피의 복수자에게 잡힐 수 있기
때문입니다(6절).
둘째, 도피성은 부지중에 살인한 사람을 위한 성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도끼로 벌목하다가 도끼가 자루에서 빠져
이웃을 죽게 했으면 도피성으로 피해 생명을 보존할 수 있었습니다(4-5절). 보복이 인정되던 고대에 실수로 살인한 자에 대한 무분별한 피의
보복을 막으려고 도피성 제도를 세웠다는 점에서 도피성 제도는 성역 제도와는 다른 것입니다. 고대 국가 중에는 신전과 같은 성역이 있어서 거기로
도피하면 무조건 생명을 보호받았습니다. 그러나 도피성은 미움과 고의성이 없이 실수로 살인한 사람만 보호하도록 수혜대상자를
제한했습니다.
셋째, 도피성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한 성이었습니다. 본문 2절과 7절에는 하나님은 반복해서 “세 성읍을 너를
위하여 구별하라.”고 명령했습니다. 도피성은 부지중에 살인한 자를 보호하려는 제도였지만 누구든지 그런 살인자가 될 수 있기에 궁극적으로 도피성
제도는 모든 백성들을 위한 제도였습니다.
특히 도피성은 2가지 조건이 충족될 때 세우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약속한 대로 가나안
땅을 주실 때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명령을 지킴으로 하나님을 사랑할 때입니다(8-9절). 그처럼 하나님의 주시는 땅에서 무죄한 피를
흘리지 말아야 그 피가 자신에게 돌아가지 않는다고 했습니다(10절). 결국 도피성 제도는 무죄한 피를 흘리지 않게 해서 자신도 무죄한 피의
희생자가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한 제도였습니다.
< 성도에게 절망이란 없습니다 >
부지중에 사람을 죽여 평생
쫓겨 다닌다면 얼마나 비참한 일입니까? 그런 절망적인 인생들을 위해 도피성이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안심이 됩니까? 지금도 절망적인 사람이 달려가
피할 영원한 도피성이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입니다. 길이 다 막혀서 희망이 없을 때 예수님을 찾으면 예수님이 길이 되어주실 것입니다. 결국
도피성 제도가 가르쳐주는 중요한 교훈 중의 하나는 성도는 어떤 경우에도 절망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위기가 닥칠 때 침착하게
믿음으로 반응하고 주님께 더욱 가까이 가면 위기는 기회가 됩니다. 그러므로 문제가 생기면 이렇게 기도하십시오. “하나님! 이 문제를 믿음으로 잘
극복하면 축복도 뒤따라올 줄 믿습니다. 앞으로 어떤 축복을 주실지 정말 기대가 됩니다. 살면서 어떤 문제를 만나도 감사를 잃지 않게 하시고 더욱
주님을 사랑하고 교회를 더욱 사랑함으로 문제를 축복의 발판으로 삼게 하소서!”
살면서 넘어지는 것은 잘못이 아닙니다. 그러나
넘어진 후에 깨닫지 못하고 다시 일어나지 못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현재의 시련은 큰 인물이 되기 위해 작은 것을 희생하는 과정이라고 여기십시오.
하나님 안에 있기만 하면 고난과 시련과 두려운 일조차 인생 역전의 재료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아는 것 외에
다른 어떤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 굳건한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이단 종교의 제일 특징은 종말론, 귀신론, 신비론 등으로 두려움을
확대재생산 하는 것입니다. 무서운 생각과 영상과 얘기를 통해 사람의 심령을 약화시키는 것은 이단이 쓰는 아주 유용한 자기 세력 확대 방법입니다.
시대와 현상을 분별하고 종말의식을 가지는 것은 좋지만 종말에 대한 지나친 두려움은 없어야 합니다. 성도는 종말에 대한 경각심은 가지되 “예수님
안에서는 언제나 길이 있다.”는 것을 믿고 평안과 감사를 잃지 말아야 합니다.
일전에 모스크바의 남쪽 하늘에 신비한 하얀 손이
나타나서 이런 글을 썼다고 합니다. “이제 곧 말세가 온다.” 그 글이 하늘에 3시간 동안 있어서 시민들이 크게 두려워했다고 합니다. 성경에도
곧 종말이 온다는 여러 말씀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미혹되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성경 말씀보다 하늘에 나타난 신비한 하얀 손의 글에 더 마음을
빼앗길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이단들은 그런 신기한 얘기들만 수집해서 자주 언급합니다. 그런 얘기를 통해 사람들을 불안하게 하고 심령을
약화시켜야 이단 장사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 얘기들이 귀에 들리고 그런 영상이 눈에 보이고 그런 생각이 머리에 파고들어도 너무
불안해하지 마십시오. 그런 얘기들을 듣고 두려움에 빠진다면 믿음을 가진 성도의 최소한의 자존심마저 잃게 됩니다. 하나님도 그런 모습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아무개야! 왜 그렇게 두려워하느냐? 네 믿음이 겨우 그 정도였느냐?” 하나님을 가까이 하고 하나님 안에 있으면 그의
내일은 하나님이 반드시 보증해주십니다. 혹시 이 땅에서의 보상이 없으면 천국의 더욱 찬란한 보상이 기다리고 있음을 잊지
마십시오.
< 공의를 무력화시키지 마십시오 >
도피성 제도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넘치게 나타난
제도입니다. 그러나 공의를 무력화시키는 제도는 아닙니다. 본문 11-12절 말씀을 보십시오. “그러나 만일 어떤 사람이 그의 이웃을 미워하여
엎드려 그를 기다리다가 일어나 상처를 입혀 죽게 하고 이 한 성읍으로 도피하면/ 그 본 성읍 장로들이 사람을 보내어 그를 거기서 잡아다가
보복자의 손에 넘겨 죽이게 할 것이라.”
만약 어떤 사람이 이웃을 미워해서 고의로 살인한 후 도피성으로 도망치면 살인이 벌어진
성읍 장로들이 사람을 파송해 그 살인자를 체포합니다. 그리고 피살자의 친족들에게 넘겨 죽이기 전에 성문 앞에서 성읍 장로들의 주관으로 공개재판을
엽니다. 그때 살인의 고의성이 인정되면 그는 피살자의 친족에게 넘겨 죽이게 했고 살인이 실수로 인정되면 그는 다시 도피성으로 보내져 당시
대제사장이 죽을 때까지 그곳에 머물러야 했습니다(민 35:22-25).
그처럼 당시 대제사장이 죽으면 도피성에 도피한 자들이 대
사면을 받고 자유를 얻는데 대사장의 수명에 따라 자유를 얻는 원리는 어떻게 보면 부당해 보입니다. 대제사장이 죽으면 도피성으로 30년 전에 피한
자나 3개월 전에 피한 자나 모두 함께 자유를 얻기 때문입니다. 언뜻 보면 부당한 것 같지만 그 계명에는 인류 구원의 역사와 관련된 복선적인
메시지가 숨어 있습니다. 어떤 메시지입니까? 지극히 높으신 대제사장인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면 모든 사람은 죄로부터 자유를 얻는 길이 열린다는
메시지입니다.
왜 당시 도피성으로 피신한 사람들에 대해 그 살인의 고의성 여부를 판단하는 재판을 열었습니까? 도피성이 고의적인
살인자들의 은신처가 되지 않게 하기 위한 조치입니다. 하나님은 고의적으로 무죄한 피를 흘린 사람을 긍휼히 여기지 말고 이스라엘 공동체에서
제거해야 복이 있다고 말씀했습니다(13절). 결국 도피성 제도는 사랑과 은혜를 시현하면서도 사랑과 은혜를 남용하지 말고 공의를 무력화시키지
말아야 한다는 교훈도 함께 줍니다.
은혜를 내세워 멋대로 행동하거나 공의를 무력화시키면 안 됩니다. 또한 헌신도 없이 은혜를
요구하기만 해도 안 됩니다. 헌신하고 은혜가 주어지면 감사하게 받지만 헌신하고 은혜가 안 주어져도 감사하겠다고 하십시오. 살면서 손에 물을
묻히지 않으려고 하고 더 나아가 손에 피를 전혀 안 묻히려고 하면서 그저 착하다는 소리만 듣고 자기책임을 등한시하면 그것은 좋은 착함이
아닙니다. 착함이 무책임이나 무능함이 되면 안 됩니다.
< 은혜를 남용하지 마십시오 >
어느 회사에 한
착한 과장이 있었습니다. 그는 과장이 된지 15년째 차장으로 승진하지 못했습니다. 그 착한 만년과장은 아침에 출근하면 오전 내내 책상에서 멍
하고 앉아있을 때가 많았습니다. 할 일이 없이 자리만 차지하고 있는 그 착한 과장 때문에 직속상관인 부장은 늘 속이 터졌습니다. 손에 물을 안
묻히고 피를 안 묻히려는 착한 부하는 상사에게 그리 환영받지 못합니다. 악역을 주로 상사에게 떠맡기기 때문입니다. 그런 무책임한 착함은 자신도
만년과장으로 만들지만 남과 공동체를 어렵게 만들 때도 많습니다.
어떤 남편은 참 착합니다. 사람들은 그의 겉모습만 보고 착한
남편이라고 칭찬했습니다. 반면에 그의 아내는 착한 남편이 든든함도 없고 책임감도 없고 심지어는 무능하게 보여서 남편이 착하다는 말이 너무나 듣기
싫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말이 들리면 자기 속이 더 터지면서 남편이 더 얄밉게 보였습니다. 더 나아가 남편에게 살갑게 대하지 않는 자신에게
사람들이 “왜 착한 남편하고 살면서 감사하며 살지 그렇게 남편을 타박하느냐?”고 오히려 자기를 질책하듯이 말하는 속없는 사람들을 보면 더욱 속이
터졌습니다.
물론 아내 자신도 남편이 착한 줄은 압니다. 그러나 너무 물러서 공의를 세우지 못하고 가정을 책임감 있게 이끌지
못하니까 속상한 감정이 생긴 것입니다. 그래도 교양과 배움이 있는 아내는 남 앞에서 노골적으로 남편에 대해 비판하지 않습니다. 그런 비판적인
태도는 습관으로 발전할 수 있는 더 나쁜 태도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혼자만 마음과 감정의 병을 앓는 착한 남편의 아내들을 종종 보게
됩니다. 그런 사례를 반면교사로 삼아 자신의 착함이 무책임한 착함이 되지 않도록 지혜를 발휘해야 합니다.
착한 것은 좋은
것이지만 바르면서 착해야 합니다. 착하지만 너무 무른 것, 착하지만 게으른 것, 착하지만 무책임한 것은 좋은 것이 아닙니다. 필요하다면 손에
물과 피도 묻힐 줄도 알고 더 나아가 자기 피를 흘릴 줄도 알아야 합니다. 덕의 우선순위를 말할 때 ‘진선미’라고 표현합니다.
‘아름다움(미)’보다 ‘착함(선)’이 우선이고 ‘착함’보다 ‘바름(진)’이 우선이란 뜻입니다. ‘착함(선함)’조차 ‘공의와 진리와 바름’이
전제되지 않으면 좋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한 기독 청년이 있었습니다. 그는 성격상 자기 손에 남의 피를 묻히기 싫어했습니다.
그가 회사에 취직했습니다. 그런데 회사생활을 하다 보니까 일 관계 및 인간관계에서 피 튀기는 일이 많이 생겼습니다. 그래도 자기 손에 남의 피를
묻히기 싫었기에 남이 해야 할 일까지 대신 할 때가 많아서 죽도록 일해야 했습니다. 그런 모습은 바람직한 모습이 아닙니다. 자녀나 타인의 감정을
배려해준다고 해서 전혀 자기 손에 피를 묻히지 않으려고 하면 결국 그런 태도가 자녀나 타인의 정신을 오염시킬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 청년과 같은 부서에 자료 타이핑을 쳐주는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어린 여직원이 있었습니다. 그 여직원에게 무슨 일을
맡기면 업무 중에 업무에 집중하지 않고 전화하거나 노닥거리다가 퇴근 전에 충분히 할 수 있는 일도 결국 못하고 저녁 6시에 칼 같이 퇴근할 때가
많았습니다. 그러면 바른 말도 해주어야 하는데 손에 피를 묻히기 싫으니까 아무런 질책도 하지 않고 스스로 깨닫고 변화되기를 기다렸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일이 안 되게 할 수는 없기에 그 여직원이 해야 할 일을 맡아서 자신이 밤늦도록 타이핑까지 할 때도 많았습니다.
사랑이란
명목으로 자기 손에 피를 묻히기 싫어서 조용히 남이 해야 할 일까지 떠맡는 것은 숭고한 희생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런 상황을 방치하면
상대의 정신은 오염될 수 있기 때문에 엄밀하게 말하면 그런 희생은 좋은 희생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공의가 없어서 남의 정신을 오염시킬 수 있는
사랑은 참된 사랑이 아닙니다. 오래 참아도 잘못을 고치지 않으면 갈등과 아픔이 예상되어도 즉 손에 피를 묻히는 상황이 생겨도 공의를 나타내야
합니다. 사랑은 오래 참는 것이지만 끝까지 참는 것은 아닙니다.
남이 피를 흘리지 않게 하려고 자기가 그의 일까지 맡아 죽도록
힘써서 어떤 과제를 제 시간 내에 책임적으로 이뤄내면 그나마 낫습니다. 진짜 문제는 남의 피를 흘리지 않게 하고 착한 사람이란 소리는 도맡아
들으면서 일이 안 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지켜보는 사람은 속이 터지게 됩니다.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착한 호인 남편 때문에 속 터지는
아내가 생기는 것입니다. 착함이 무능함이나 무책임이 되면 안 됩니다. 손에 피를 너무 안 묻히려는 것도 문제지만 희생의 피를 흘리지 않는 모습은
더욱 큰 문제입니다.
저는 인터넷 말씀 사역을 꽤 오랫동안 했기에 인터넷 말씀 회원이 많은 편입니다. 그래서 외부 교인들의 상담
요청을 종종 받습니다. 그 중에 어떤 분은 자기가 섬기는 교회를 비판합니다. 진국 헌신의 증거를 사전에 보여주지 않은 사람의 교회 비판은 별로
효과도 없고 자기 얼굴에 침 뱉기가 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얼마나 속이 터지고 답답했으면 사정을 잘 모르는 남에게까지 자기 교회를
비판하겠습니까? 이해는 됩니다. 그런데 자세히 들어보면 어떤 문제는 정말로 교회 문제지만 어떤 문제는 자기 문제인 경우도 꽤
많습니다.
후자인 경우에는 저는 만남과 위로를 의도적으로 거절하기도 합니다. 그때의 만남과 위로는 내담자의 성숙을 방해하고 자기가
섬기는 교회 사랑을 흔들리게 해서 오히려 그의 정신을 오염시킬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거절이 상대에게는 상처가 될 수 있기에 그것도 일종의
손에 피를 묻히는 행위일 수 있습니다. 목회자로서 누구와의 만남을 거절하는 것은 마음 아픈 일이기에 대신 그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도우심이 있기를
짧게나마 간절히 기도합니다. 사랑과 위로를 줄 때 상대의 정신을 오염시키지 않도록 지혜롭게 주는 것은 매우 중요한
과제입니다.
공의가 사랑을 바탕으로 해야 하듯이 사랑도 공의를 바탕으로 해야 합니다. 은혜를 남용하면 안 됩니다. 착함이
무책임이나 무능함으로 보이면 안 됩니다. 예수 믿고 인물 되려면 ‘책임적인 착함’이 필요합니다. 남에게 호인이란 이미지만 얻고 자기가 해야 할
일에는 나 몰라라 하는 이미지 호인이 되면 안 됩니다. 성도는 이미지도 좋아야 하지만 의로운 삶도 힘써 추구해야 합니다. 그처럼 ‘공의를
바탕으로 한 사랑’과 ‘진리를 바탕으로 한 은혜’를 앞세워 더욱 큰 은혜와 축복을 예비하는 복된 심령들이 되십시오.
ⓒ 이한규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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