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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이시여! - ‘실종된 하느님’

요한복음 오강남 형제............... 조회 수 313 추천 수 0 2015.11.28 23:1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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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요14:10-11 
설교자 : 오강남 형제 
참고 : http://www.saegilchurch.or.kr/404056 

신이시여! - ‘실종된 하느님’

(요한복음 14:10-11)

 

2014년 5월 11일 주일예배

오강남 형제 (캐나다 리자이나대 종교학 명예교수, 경계너머 아하 이사장)

 

 

들어가며

 

새길교회 자매 형제 여러분을 이렇게 다시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언제나 새길교회를 생각하고 있지만 마음처럼 자주 참석을 못했습니다. 특히 정경일 형제가 미국에서 학업을 성공적으로 끝내고 돌아와 교회와 사회를 위해 일하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이렇게 여러분을 다시 뵙게 되어 반갑고 기쁜 날이기는 하지만, 오늘은 슬픈 날이기도 합니다. 세월호 참사에 희생된 이들, 특히 꽃다운 어린 학생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픕니다. 지난주 새길교회에서도 희생자를 위한 특별 행사가 있었던 것으로 압니다. 저도 그저께 안산에 가서 분향을 하고 왔습니다만, 요즘은 글을 써도 다른 것을 주제로 하는 글이 나오지 않는 형편입니다.

 

신을 원망할까?

 

제가 지난주 <한겨레>에 쓴 칼럼에서도 세월호 참사를 주제로 한 글을 쓸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글 마지막 결론으로 저는 <이런 엄청난 재난 앞에서 우리 믿는 사람들은 자연히 이 때 신은 어디에 있었던가 하는 한탄과 원망의 말을 하게 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우리는 신을 원망하고 있을 수만 없고, 더욱 중요한 것은 이런 비극을 자초한 우리 인간의 잘못을 통절하게 뉘우치고 이 같은 참사가 재발하지 않도록 면밀하게 조처하는 일, 그리고 무엇보다 유가족의 아픔을 보듬고 살아남은 이들의 상처를 감싸주는 일일 것이다.> 라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런 참사를 보면서 우리는 자연히 신을 찾게 됩니다. 신은 왜 이런 일이 일어나도록 하시는가? 왜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고 침묵하시는가? 신이 정말 계시는가? 하는 등의 물음을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유대인의 경우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신의 문제를 가지고 잠깐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이 문제와 관련해서 우선 유대인들의 경우를 살펴보기로 합니다. 오래 전 유대인들은 신이 자기 민족만을 사랑하고 지켜주는 신이라고 믿었습니다. 아시는 바와 같이 출애굽 당시 유대인들은 야훼 신이 이집트 가정의 처음 난 아이들은 다 죽였지만 문설주에 피를 묻힌 유대인 가정은 ‘건너 뛰어(逾越)’ 그들 집은 무사했다고 믿었습니다. 그 후 가나안을 정복할 때도 야훼 신은 자기들을 직접 진두지휘하며 모든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 주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처럼 자기 민족, 자기 편, 자기 사람들만 보호하고 인도한다고 믿었는데, 이들이 가지고 있던 이런 신은 이른바 ‘부족신관(部族神觀)’에 의한 신이었습니다. <출애굽기> 혹은 <탈출기>에 나오는 신은 이런 신이었습니다.


그러다가 기원전 6세기 유대인들은 이웃 나라 바벨론의 침략을 받아 포로로 잡혀 가게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무슨 일이 있어도 자기들을 지켜주는 신이라 철석같이 믿었는데, 이렇게 어처구니없이 외국의 침입에 쓰러지도록 하다니, 우리가 받들던 신이 도대체 어떤 신이란 말인가, 묻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우리가 받드는 신이 이방 신들보다 못하다는 말인가, 이런 참담한 현실 앞에서 이들이 그때까지 가지고 있던 부족신관이 도전을 받아 크게 바뀌었습니다. 자기들이 받들고 있던 신은 이제 자기 민족만을 위한 신이 아니라 온 세상을 다 함께 다스리는 우주적 신이라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른바 보편신관(普遍神觀)의 등장이었습니다. <제2이사야서> 등에 나타나는 신입니다.


그리고 또 오랜 세월이 흘렀습니다. 부족신관에 입각한 신이 아니라 우주적인 신, 보편적인 신, 이 세상을 공평하게 다스리는 신, 그러면서 자기들을 선민으로 특별히 지켜주시는 신이라 믿어 믿어왔는데, 나치 치하에 유대인 6백만 명이 생명을 잃게 되었습니다. 이런 엄청난 비극 앞에서 그들은 다시 묻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신이 도대체 뭘 하고 있단 말인가? 그들이 가지고 있던 신관은 다시 도전을 받게 되었습니다.


1986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루마니아 태생의 엘리 위젤이라는 유대인 소설가가 쓴 <밤(The Night)>이라는 자전적 소설에 보면, 나치 수용소에서 유대인들을 불태우는 연기가 하늘로 치솟아 오르는 것을 보며, “나는 나의 믿음을 영원히 소멸해버린 그 불길을 결코 잊을 수 없다.”고 절규했습니다. 또 교수대에서 죽어가는 어린 아이를 보며, 신도 “그 교수대에 매달려 처형되고 있다.”고 속으로 부르짖었습니다. 나치의 유대인 대학살 이후, 많은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가지고 있던 전통적 신관을 버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지금 서양에서 불교를 비롯하여 동양 사상을 선호하는 사람들 중 상당수가 유대교 배경을 가지고 있던 이들이라는 사실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류영모와 현대 그리스도인들의 하느님

 

우리가 잘 아는 류영모 선생님도 15세에 기독교를 받아들이고, 20세에 오산학교에서 가르칠 때 수업 전에 기도도 하고 학과목 시간에도 그리스도교 정신을 가르치는 등, 오산학교를 기독교 학교로 바꾸는데 크게 공헌한 분입니다. 그러던 그가 2년 후 쌍둥이처럼 붙어 다니던 동생이 19세의 젊은 나이로 죽는 것을 보고, 기복적인 기독교와 기독교가 종래까지 무비판적으로 받들던 그런 신을 버렸습니다. 그의 신관이 바뀐 것입니다. 그의 신은 이른바 “없이 계신 이”가 된 것입니다.


사실 유대인들이나 류영모 선생님뿐만이 아닙니다. 현대 많은 그리스도인들도 ‘저 위에 계시는’ 하느님, 그러면서 역사나 인간의 생사화복을 하나하나 관장하시는 하느님, 특히 선한 사람에게는 상을 주고 악한 사람에게는 벌을 준다고 여겨지는 이른바 “interventionist God”이라는 생각을 버렸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뉴턴, 제퍼슨, 프랭클린 등이 주장하는 이신론(理神論, Deism)자들은 말할 것도 없고, 많은 신학자들, 심지어 상당수의 목회자 사이에서도 이런 초월적이고 간섭주의적인 신이라는 신관을 버린 지 오래입니다. 이런 신을 상정한다면 인간사에서 이해하지 못할 일들이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마치 뉴턴의 역학을 가지고 상대성이론이나 양자역학에서 다루는 현상을 설명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저 위에 계시는 초월적 신관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는 생각을 일반인들에게 널리 퍼트린 사람은 1963년에 <신에게 솔직히(Honest to God)>이라는 책을 쓴 영국 성공회 신부 John A. T. Robinson이었습니다. 최근에는 미국 성공회 주교 John Shelby Spong 신부가 쓴 <기독교 변하지 않으면 죽는다(Why Christianity Must Change or Die)>(김준우 옮김)라는 베스트셀러 책에서 ‘유신론의 종말(Demise of Theism)’을 공공연하게 주장하고 있습니다. <기독교의 심장(The Heart of Christianity)>(김준우 옮김)를 쓴 Marcus J. Borg도 기독교를 둘로 나누어 지금까지의 기독교를 ‘conventional Christianity(재래 기독교)’ 혹은 ‘Heaven/Hell Christianity(천당-지옥 기독교)’라 하고 오늘 새롭게 등장하는 기독교를 ‘newly emerging Christianity’라고 하였습니다. 저 위에 계시는 하느님을 찾는 기독교에서 인간의 내적 변화(transformation)를 강조하는 기독교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제가 전에 쓴 <예수는 없다>하는 책도 같은 맥락에서 쓰여진 것입니다.

 

전지전능의 신?

 

한 가지만 더 말씀 드리겠습니다. 몇 주 전 <한겨레> 신문 칼럼에서 <노아>라는 영화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 중에는 그 영화가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와 다르게 황당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하는데, 저는 성경에 나오는 노아 이야기는 황당하지 않은가 하는 질문을 던져보았습니다.


성경 <창세기>에 의하면 신이 인간을 만들고 나서 얼마를 지나자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하고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이었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되자, 신은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고, 사람들을 물로 지면에서 쓸어버리기로 했습니다. 오로지 “의인이오 당대에 완전한 자” 노아와 그 가족만을 살리겠다고 그에게 ‘방주’를 만들라고 지시했습니다.


1980년대 말 시작된 기업 경영 전략으로 ‘식스 시그마(six σ)’라는 것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 전략에 의하면, 제품을 만들 때 불량품수, 혹은 결함 발생수를 제품 백만 개당 3.4개 이하로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불량품이 0.0034% 이하로 한다는 이야기이지요. 지금은 어느 정도 완화되었다고 하지만 아무리 후하게 잡아도 어느 제품 회사든 불량품이 1%이상 나오는 것은 허용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에 나오는 홍수 이야기를 문자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어떻게 됩니까? 의인 노아의 식구 여덟 명만 살리고 그 당시 전 인류를 다 불량품으로 폐기처분한 셈입니다. 말하자면 전지전능(全知全能)한 신이 만든 인간들 중에 거의 다가 불량품이었다는 뜻입니다. 어찌하여 전지전능하다는 신이 인간을 만들었는데 불량품이 0.01%가 아니라 거꾸로 99.99%일까요. 어찌하여 전지전능하다는 신이 사람을 만들었을 때 사람들이 이렇게 악하게 될 줄도 모르고 만들었을까요? 이런 경우 ‘전지’도 아니고 ‘전능’도 아닌 것 아니겠습니까?


또 성경에 의하면, 세상이 끝날 때 신은 사람들을 심판해서 착한 사람은 하늘나라에 보내고 악한 사람은 지옥으로 보낸다고 합니다. 역사적으로나 지금 세상 형편 돌아가는 것을 볼 때 틀림없이 지옥에 들어갈 사람들이 하늘나라에 들어갈 사람보다 압도적으로 많을 것이 분명합니다. 말하자면 최후심판이란 최종 품질 검사 단계인 셈인데, 이때도 합격품보다 불합격품이 절대적으로 많다는 뜻입니다. 더욱이 신이 자기 실수 때문에 생긴 불량품들을 지옥에 던지고 영영세세토록 그 속에서 지글지글 타고 있으라고 한다니, 그런 신은 도대체 어떤 신인가요?


물론 기독교 신학에서는 인격적 신을 변호하는 ‘신정론(神正論, Theodicy)라는 것이 있습니다. 신의 올바름을 변증하려는 노력입니다. 가장 많이 말하는 것 중 하나는 신은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셨는데, 인간이 그것을 잘 못 써서 결국 이런 좋지 못한 결과가 나왔기 때문에 신에게는 책임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도 완전한 해답은 못된다고 하는 것이 신학적 결론입니다.


아무튼 이렇게 인간의 변호를 받아야 그런 신을 참된 신으로 받들 수 있을까요? 인지가 발달하지 못했던 시대에 인간이 만들어낸 이런 ‘불량품 신관’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은 고역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우리가 지금껏 가볍게 생각하고 받들어 오던 신은 이제 ‘실종된 신’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이런 신의 실종은 어느 면에서 다행인지도 모릅니다.

 

초자연적 신이냐 내 속에 계신 신이냐?


미국의 종교사회학자 Phil Zuckerman이 쓴 <신 없는 사회(Society without God)>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덴마크, 스웨덴, 노르웨이 등 북유럽 국가들은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그런 신을 믿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의 연구 결과에 의하면 신을 그래도 많이 믿는다고 하는 미국보다 사회복지, 범죄율, 행복지수 등 모든 면에서 더 잘 산다는 것이 그의 결론입니다. 한 가지 덧붙이면, 미국의 경우 교회 출석률이 다른 어느 주보다 높은 루이지애나 주가 미국 전국 살인범죄 사건 평균수의 2배가 된다고 합니다. 교회 출석률이 비교적 낮은 동북부 버몬트 주나 서부 오리건 주는 전국 평균치보다 낮다고 합니다. 왜 그런가 하는 것은 시간이 없어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만 책을 한 번 직접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저는 여기서 여러분들에게 무신론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씀드리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이제 교회 다니기를 그만해야 한다고 말씀드리는 것도 물론 아닙니다. 교회에 다닌다는 것, 그리스도인이 된다고 하는 것은 어느 특정한 신관이나 교리나 설명체계를 받아들이는 것 이상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오늘 지적하고 싶은 것은 우리가 마음을 다해 받들 수 있는 신은 어떤 신이어야 할까 진지하게 검토하고, 우리가 지금 가지고 있는 인습적인 신관, 초자연적 신으로서의 신관을 심화시켜야 하지 않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제 초자연적, 초월적 신, 저 위에 계셔서 낮고 천한 저희 인생들을 굽어 살피시는 하느님 대신, 우리 인간들 속에 계시는 하느님,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내가 아버지 안에 계시고, 아버지가 내 안에 계신다는 그런 하느님, 그런 신관으로 업그레이드된 신관을 받아들일 필요가 있지 않은가 하는 것입니다. 20세기 최고의 신학자 폴 틸리히가 말한 것처럼 이제 우리의 눈은 ‘높이’가 아니라 ‘깊이’에 초점이 맞추어져야 하지 않겠는가 합니다. 틸리히에 의하면, 우리가 신과 인격적 관계를 가질 수는 있지만, 신을 하나의 인격체로 볼 수 없습니다. 신은 ‘personal’ 하지만 ‘a person’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제가 관찰한 바에 의하면 세계 거의 모든 종교의 가장 깊숙한 심층에는 이처럼 내 속에 계신 신을 상정하고 내 속에 계신 그 신이 바로 나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기에, 그 신과 나는 하나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힌두교에서는 그것을 “Tat tvan asi.(梵我一如)”라고 하고 우리나라 동학(東學)에서는 ‘시천주(侍天主)’, ‘인내천(人乃天)’이라고 합니다.

이런 신을 모실 때, 우리는 바울 사도처럼 “하나님은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떨어져 계시지 않습니다. …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살고, 움직이고, 존재하고 있습니다.”(행17:27, 28)고 하는 고백을 하게 될 것입니다.

 

나가며

 

이런 신을 모실 때 우리는 세월호 사건 같은 비극 앞에서 신을 들먹이거나 원망할 필요가 없어집니다. 단 인간의 탐욕과 어리석음과 불의 부정을 통회하고 다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다짐하며 서로 부등켜안고 위로하는 일입니다. 이번 이런 비극적인 일을 통해 저 위에 계시는 하느님 보다 우리 속에 계신 하느님을 다시 발견하는 계기가 되기 빕니다.

 

평신도 열린공동체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사단법인 새길기독사회문화원, 도서출판 새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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