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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계1:4-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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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정용섭 목사 |
참고 : | http://dabia.net/xe/847625 |
알파와 오메가
계 1:4-8, 창조절 열두번째 주일, 2015년 11월22일
4 요한은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편지하노니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이와 그의 보좌 앞에 있는 일곱 영과 5 또 충성된 증인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에서 먼저 나시고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기를 원하노라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 6 그의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그에게 영광과 능력이 세세토록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 7 볼지어다 그가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 사람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것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로 말미암아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 8 주 하나님이 이르시되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하시더라.
오늘 제3독서인 요한계시록 1:4-8절에는 우리가 이해하기 어려운 단어와 문장이 많이 나옵니다. 평소 성경을 자주 대하는 기독교인들에게도 이런 본문은 거리가 멀게 느껴질 겁니다. 몇 개만 나열해보겠습니다.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이, 보좌, 일곱 영, 땅의 임금들의 머리, 죄에서 해방, 나라와 제사장, 구름타고, 애곡, 알파와 오메가 ... 등등입니다. 성경 자체가 낯선 텍스트인데, 요한계시록은 유별날 정도로 그런 성격이 강합니다. 그 이유는 문학과 예술에 초현실주의 작품이 있는 것처럼 요한계시록이 초현실적 방식의 글쓰기인 묵시문학에 근거한 작품이기 때문입니다. ‘묵시문학’은 하나님이 비밀스럽게 자신의 뜻을 알린다는 사실에 근거해서 인간의 운명과 우주의 미래를 해석하는 글쓰기입니다. 요한계시록 1:1절은 다음과 같이 시작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이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사 반드시 속히 일어날 일들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그의 천사를 그 종 요한에게 보내어 알게 하신 것이라.’
요한계시록을 단순히 미래에 일어날 일들에 대한 천기누설쯤으로 읽으면 곤란합니다. 그런 잘못이 이단들에게서 자주 일어납니다. 예를 들어 계 7:4절에 ‘인침을 받은 144,000’이라는 숫자가 나옵니다. 이 숫자를 문자적으로 절대화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숫자가 채워지면 세상의 종말이 온다는 겁니다. 이런 주장을 하는 집단들이 한국교회에 그동안 많았는데, 최근에는 신 천지가 대표적입니다. 이 숫자는 상징입니다. 유대인들에게 12는 완전 숫자입니다. 열두 지파도 여기에서 나왔습니다. 144,000은 12,000 곱하기 12입니다. 이 숫자는 당시 기독교인들이 로마 황제의 박해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안전이 보장된다는 사실을 가리키는 상징입니다. 계 13:18절에는 짐승을 추종하는 이들의 숫자인 666이 나옵니다. 666을 상품의 바코드와 비교하면서 종말이 가까이 이르렀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666은 알파벳을 숫자로 계산한 것으로서 기독교를 가장 극력하게 박해했던 ‘네로 황제’를 암시합니다. 요한계시록은 상징적인 단어와 숫자를 통해서 당시 박해받던 기독교인들을 위로하고 싶어 했던 한 기독교 지도자의 글이라고 보면 됩니다. 묵시문학 장르의 역사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만약 당시 로마 황제가 요한계시록의 내용을 알았다면 불로 태웠을 겁니다.
중고등학교 역사 교과서 국정화 문제로 지난 한달 여 동안 대한민국이 몸살을 앓았습니다. 찬성과 반대가 충돌했습니다. 앞으로도 계속될 것입니다. 정부 입장은 우리의 역사를, 특히 근현대사를 국가에서 발행하는 교과서 한 가지로 가르칠 테니 다른 주장은 하지 말라는 겁니다. 여러분이 잘 아는 대로 역사 교과서를 국가에서 발행하는 나라는 세계에서 북한을 비롯해서 손가락에 꼽을 정도로 소수에 불과합니다. 심지어 공산주의 국가인 베트남도 유엔의 권고를 받아들여서 내년부터 검인정 제도를 도입하겠다고 발표했습니다. 검인정에서 자유발행으로 나가지는 못할지언정 국정으로 퇴행하는 나라는 우리나라 말고 없을 겁니다. 정부가 주장하는 것처럼 현재 대부분의 역사교과서가 좌편향이라서 이를 배우는 학생들의 국가관에 문제가 생길지 모른다는 염려가 된다면 수정 명령을 내리고, 그래도 듣지 않으면 검인정을 내주지 않으면 됩니다. 더 좋은 방식으로는 현재의 교과서보다 질적으로 뛰어난 교과서를 만들어서 서로 경쟁하게하면 됩니다. 정부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서 찬성하는 국민들의 숫자보다 반대하는 숫자가 훨씬 많을 뿐만 아니라, 역사 전공 교수들과 교사들 대부분이 반대하는 국정화를 밀어붙이기 식으로 추진한다는 것은 21세기 문명국가에서 부끄러운 일입니다.
성서해석 문제가 이와 비슷합니다. 성서 문자주의에 떨어져 있는 분들은 대구샘터교회 정용섭 목사의 성서해석을 자유주의신학에 치우친 것이라고 비판합니다. ‘성서’라는 단어까지도 꼬투리를 잡습니다. 성경(聖經)이지 어떻게 성서(聖書)냐고 말입니다. 노아홍수 이야기가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 고대인들의 신화에 근거한 것이라는 저의 글을 읽고 어느 신학대학 교수는 ‘성경을 신화로 보는 정용섭 목사의 성경관은 자유주의적이어서 동의할 수 없다.’고 비판했습니다. 그들은 성서가 해석되어야 한다는 사실에 눈을 감습니다. 성서 해석이 한번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종말까지 계속되어야 한다는 엄중한 사실의 깊이를 모르거나 무시하는 겁니다. 성서문자주의는 신자들의 생각을 통제하는 억압 장치입니다. 그런 방식으로 목사들은 설교의 권위를 확보하려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이의나 질문을 제기하면 안 된다는 식입니다. 제가 보기에 역사 교과서 국정화는 성서문자주의와 다를 게 없습니다. 자기만의 해석을 절대화해서 권력으로 다른 해석을 발 못 붙이게 하면 역사는 결국 왜곡됩니다. 극단적인 상징을 통해서 당시의 역사를 비밀스럽게 말할 수밖에 없었던 요한계시록 기자의 심정이 어떤 것이었는지 상상이 갑니다.
하나님에 대한 질문
오늘 본문에 나오는 단어와 문장들은 일단 겉으로 보면 순전히 종교적인 내용입니다. 로마 황제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은 없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로마 황제에 대한 비판이 바탕에 깔려 있습니다. 위에서 666이라는 숫자가 바로 ‘네로 황제’를 가리킨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것만이 아니라 오늘 본문과 초기 기독교 문헌은 다 로마 제국을 역사적 배경으로 기록된 것입니다. 예수의 십자가 사건은 바로 로마 형법에 의한 것입니다. 예수를 ‘퀴리오스’(주)라 고백한 것은 당시 로마 황제를 퀴리오스라 주장한 로마의 정치이념을 거부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도 그 사실이 분명하게 들어 있습니다. 아주 장엄한 필치로 하나님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 문장을 읽을 때마다 저는 가슴이 뜁니다. 8절을 읽겠습니다.
주 하나님이 이르시되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하시더라.
여기서 알파는 헬라어 알파벳 첫 자이고, 오메가는 마지막 자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의 처음이고, 마지막이라는 뜻입니다. 이어서 현재도 계시고, 과거에도 계셨고, 앞으로 오실 분으로서 전능한 분이라고 했습니다. 초기 기독교는 바로 이런 존재를 하나님으로 믿었습니다. 이 하나님에게 자신들의 운명과 미래를 맡겼습니다. 이런 내용으로 기도하고, 찬송을 불렀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질문이 우리의 신앙에서 가장 중요합니다. 페터 아이혀(P. Eicher)는 『신학의 길잡이』 머리말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신학의 주제를 완전히 잘못 다룬 것이 아니라면, 그리고 초보자들이 신학연구에서 추구하는 내용을 내가 완전히 놓친 것이 아니라면 신학의 모든 것을 결정하는 단 하나의 물음은 바로 하나님에 대한 물음이다.’ 기독교인들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실제로 하나님에 관해서 관심이 있는지는 그렇게 확실한 게 아닙니다. 신자들이 모여서 무슨 말을 하는지 보십시오. 하나님에 대해서 대화하는 경우는 별로 많지 않을 겁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평소에 하나님에 대한 생각을 자주 합니까? 부부와 가족이 밥상 앞에 앉아서, 또는 차 한 잔 앞에 놓고 하나님에 대해서 진지하게 대화하는 기회가 있나요? 가정마다 차이가 있겠지만 그런 기회를 찾기가 쉽지 않을 겁니다. 하나님을 실감하지 못한 채 산다는 증거입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일상의 범람이 가장 큰 이유입니다. 손에 잡히는 것들, 또는 손에 넣고 싶은 것들에게 마음을 다 쏟고 삽니다. 하이데거 표현을 빌리면 일상에로의 퇴락입니다. 어떤 개인 집에 불이 났다고 합시다. 주인은 정신을 차리기 힘듭니다. 대다수 사람들은 중요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구분하지 않고 손에 잡히는 대로 들고 나온다고 합니다. 통계로 밝혀진 사실입니다. 우리의 일상적인 삶이 이와 비슷합니다. 모든 것이 필요해보입니다. 모든 것이 그럴듯해 보입니다. 뱀의 유혹을 받은 아담과 이브가 사과를 보니 먹음직스럽고 보기에도 예쁘고 영양가도 있어 보였다는 이야기와 비슷합니다. 백화점이나 대형매장에 사람들이 몰리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불 난 집의 주인과 같이 쫓기는 마음으로 세상을 살아갑니다. 시간이 지나면 그게 허무하다는 것을 누구나 의식적으로나 무의식적으로 느낍니다. 그래서 오히려 그런 것에 마음을 더 쏟습니다. 거기서 진도가 더 나가면 그런 일상을 우상처럼 섬깁니다. 사람들의 그런 심리를 이용해서 세상은 끊임없이 우상을 만듭니다. 스타들을 생산해냅니다. 그런 것들이 알파와 오메가의 자리에 올라섭니다. 대중들은 그들에게 대리만족을 경험하면서 삽니다. 이런 상태에서는 하나님에게 관심이 가지 않습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로마 시대 사람들은 로마 황제가 알파와 오메가라고, 세상을 초월하는 존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럴만합니다. 당시 로마는 지중해 연안의 많은 지역을 지배하고 있던 무소불위의 제국이었습니다. 로마의 군사와 정치와 경제와 예술과 철학이 절대적인 선이었습니다. 로마 콜로세움에서 벌어진 전차 경주와 격투사들의 싸움은 오늘의 축구 월드컵 못지않게 인기를 끌었습니다. 그런 제국에서 생사여탈권을 행사할 수 있는 황제는 신으로 추앙받았습니다. 기독교인들은 그런 시대정신을 거부했습니다. 로마 황제가 아니라 하나님만이 알파와 오메가이며, 하나님만이 현재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앞으로 오실 분이라고, 역사를 초월하여 권능을 행하시는 분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로마가 기독교를 박해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분명합니다. 팍스 로마나, 즉 로마의 평화라는 황제숭배에 기초한 제국 이데올로기에 저항하는 집단인 기독교가 그들에게 눈엣가시였습니다.
당시 기독교인은 로마의 박해에 대항해서 어떤 입장을 취했을까요? 현실적으로 생각하면 로마 권력과 타협하는 게 최선이었습니다. 누이 좋고 매부 좋은 길입니다. 정치와 종교를 완전히 분리해서 생각하는 겁니다. 황제 숭배는 정치적인 거니까 대충 따라가고, 기독교 신앙은 종교적인 거니까 이것대로 최선을 다 하면 됩니다. 초기 기독교는 이런 타협과 절충을 거부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듯이 로마 황제를 섬길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다른 하나는 무력 투쟁을 벌이는 겁니다. 예수님의 제자 중에서도 반로마 무력투쟁에 동조하는 사람들이 있을 정도로 당시에 이런 혁명가들이 많았습니다. 기독교는 그런 길을 선택하지도 않았습니다. 순교를 당할지언정 로마 권력과 타협하지 않았고, 무력으로 맞서지도 않았습니다. 기독교는 그런 방식으로 성장해서 결국 기원후 313년에 콘스탄티누스 황제에 의해서 선포된 밀라노 칙령을 통해 로마 제국으로부터 공인을 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게 기독교의 실제 역사입니다.
알파와 오메가
초기 기독교가 알파와 오메가로 자처하던 로마 황제의 무소불위적인 존엄 앞에서 비굴해하지 않고 버텨낼 수 있었던 데에는 하나님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자리합니다. 앞에서 짚은 대로 하나님은 지금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분이라고, 그 하나님만이 알파와 오메가라고 믿었고, 그 믿음대로 살았고, 그 내용을 선포했습니다. 우리는 그들의 후예입니다.
1) 먼저 하나님이 알파라는 말을 생각해보십시오. 창 1:1절 말씀에 따르면 하나님은 태초에 세상을 창조하신 분이십니다. 사도신경도 전능하신 하나님이 바로 세상의 창조주라고 고백합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단순히 우리가 볼 때 착한 사람에 복을 주고, 악한 사람에게 벌을 주는 분이 아닙니다. 우주 전체의 근원이십니다. 판넨베르크는 하나님을 가리켜 ‘만물을 규정하는 현실성’이라고 설명한 적이 있습니다. 이런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로마 황제의 박해에 굴복당하지 않을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하나님이 알파라는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막연하게 여긴다는 것입니다. 자기를 중심에 놓고 세상을 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세상에 태어난 지 얼마나 되었는지 생각해보십시오. 내가 태어나기 이전 시간을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아득한 과거의 그 빅뱅이 일어나던 순간에도 계셨고, 그 이전에도 계셨습니다. 그분이 우리의 모든 근거이십니다. 이러한 하나님 외에 다른 그 어떤 존재가 여러분에게 필요합니까?
2) 하나님이 오메가라는 말은 하나님이 세상을 완성하신다는 뜻입니다. 계 21:1절 이하에 따르면 그 완성된 세상을 가리켜 ‘새 하늘과 새 땅’이라고 했습니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늘에서 내려온다고 했습니다. 4절 말씀은 다음과 같습니다.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눈물, 죽음, 애통, 통곡, 아픔이 없는 세상이 실제로 어떤 것인지 상상이 잘 가지 않을 겁니다. 이런 것이 있어야 웃음과 삶과 즐거움을 느끼는 방식으로 작동되는 세상에 살기 때문입니다. 이런 표현들은 마지막 때에 모든 세상과 삶이 완성된다는 사실에 대한 비유이자 은유입니다. 로마 황제는 눈물과 죽음과 아픔을 씻어줄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만이 그게 가능합니다. 로마 황제의 존엄에 굴복하라고 강요받던 시대에 초기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이 알파와 오메가라는 사실을 줄기차게 주장했습니다. 그는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자라고 말입니다. 정말 혁명적인 삶의 태도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사실을 아는 사람에게는 영혼의 혁명이 일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전체가 22장에 이르는 요한계시록을 읽어보신 분들이 계십니까? 황당한 이야기도 제법 나옵니다. 하늘이 종이두루마리처럼 말린다거나 바다에서 용이 나오는 광경도 있습니다. 비현실적이고 초현실적인 표현들이 많습니다. 저는 요한계시록을 읽을 때마다 그 역동성에 감동을 받습니다. 전혀 새로운 언어로 전혀 새로운 세상을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의 일이나 사람들은 다 ‘거기서 거기’입니다. 잘난 사람이나 못난 사람이나 거기서 거기입니다. 대통령이나 필부나 다 거기서 거기입니다. 조 단위의 재산이 있는 사람이나 겨우 먹고 사는 정도의 사람이나 인간의 근본에서는 다를 게 없습니다. 모두 이 세상에서 한 순간 살다가 떠나야할 것들입니다. 우리가 그런 대상에 매달려 살 수는 없지 않습니까. 어떻게 이런 삶에서 해방될 수 있을까요? 밥벌이를 포기할 수 없는 이 세상에서 그 해방이 실제로 가능할까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는 여러분들에게 인생살이의 처세술을 말씀드릴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성서가 말하는 삶의 근본만 전할 수 있을 뿐입니다. 요한계시록이 말하는 하나님에게 눈을 돌리십시오. 하나님은 지금도 (만물 속에) 계시고, 전에도 (우주와 인류 역사에) 계셨고, 장차 (세상 마지막 때 생명을 완성하기 위해) 오실 분입니다. 그는 바로 모든 것의 알파이며, 모든 것의 오메가이십니다. 그러니 어떤 상황에서도 이 세상과 그 안에서의 삶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여러분의 궁극적인 미래라는 사실을 믿고, 안심하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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