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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 오실 때에

데살로전 정용섭 목사............... 조회 수 934 추천 수 0 2015.12.03 21:2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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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살전3:9-13 
설교자 : 정용섭 목사 
참고 : http://dabia.net/xe/848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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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 오실 때에

살전 3:9-13, 대림절 첫째 주일, 2015년 11월29일

 

9 우리가 우리 하나님 앞에서 너희로 말미암아 모든 기쁨으로 기뻐하니 너희를 위하여 능히 어떠한 감사로 하나님께 보답할까 10 주야로 심히 간구함은 너희 얼굴을 보고 너희 믿음이 부족한 것을 보충하게 하려 함이라 11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우리 주 예수는 우리 길을 너희에게로 갈 수 있게 하시오며 12 또 주께서 우리가 너희를 사랑함과 같이 너희도 피차간과 모든 사람에 대한 사랑이 더욱 많아 넘치게 하사 13 너희 마음을 굳건하게 하시고 우리 주 예수께서 그의 모든 성도와 함께 강림하실 때에 하나님 우리 아버지 앞에서 거룩함에 흠이 없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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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구샘터교회 대림절 초장식)

 

데살로니가 교회

성경 퀴즈를 하나 낼 테니 속으로 대답해보십시오. 신약성경 27권 중에서 가장 먼저 기록된 성경이 무엇일까요? 기원후 50년에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에 쓴 편지인 데살로니가전서입니다. 데살로니가는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그리스에서 아테네 다음으로 큰 도시로서 로마 황제들이 전략적으로 중요하게 여긴 도시였습니다. 바울은 주로 이런 요충지로 판단되는 도시에 교회를 세웠습니다. 빌립보, 아덴, 고린도, 데살로니가 등이 다 그렇습니다. 바울은 교회를 세우고 그 자리에 계속 머물러 있지 않았습니다. 다른 곳에도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생각도 있었고, 또 박해를 받아서 어쩔 수 없이 떠나기도 했습니다. 행 17장에 따르면 데살로니가에서도 바울 일행은 박해를 받았습니다. 유대인들이 데살로니가 시장에게 바울 일행을 고발했습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천하를 어지럽게 하던 이 사람들이 이곳에 와서 로마 황제의 명령을 거역하고, 예수를 왕이라고 주장한다.’(행 17:6,7)는 것이었습니다. 바울 일행은 야반도주하듯이 데살로니가를 빠져나와 베뢰아로 갔다가 다시 아덴, 그리고 고린도로 내려왔습니다. 이때가 기원후 50년 어간입니다.

 

고린도에 머물던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가 염려되어 직접 방문하려고 했습니다. 살전 2:18절에 따르면 바울은 두 번이나 데살로니가 교회에 가고 싶었지만 ‘사탄’이 이를 막았다고 했습니다. 사탄이 막았다는 것은 경제적인 어려움이나 몸이 아프거나 다른 지역을 급하게 가야 할 상황이었을지 모릅니다. 가장 결정적인 것은 글라우디오 황제의 칙령으로 보입니다. 글라우디오 황제는 모든 유대인들을 로마에서 추방하는 칙령을 49년에 발표했습니다. 이것은 당시 기독교에도 위기 상황입니다. 당시 교회에는 이방인만이 아니라 유대인들도 상당수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직접 움직이기 힘들었던 바울은 대신 디모데를 보냈습니다(살전 3:1,2). 대타로 데살로니가 교회에 갔던 디모데가 좋은 소식을 갖고 돌아왔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가 어려움 가운데서도 흔들리지 않고 바울이 가르쳐준 복음 가운데서 신앙생활을 건전하게 잘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이런 기쁜 마음으로 지금 바울은 편지를 씁니다. 그 마음을 살전 3:9절에서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우리가 우리 하나님 앞에서 너희로 말미암아 모든 기쁨으로 기뻐하니 너희를 위하여 능히 어떠한 감사로 하나님께 보답할까.’ 그러나 마냥 기뻐만 할 수는 없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의 믿음이 더 깊어져야 합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세워진지 채 몇 년이 되지 않은 어린 교회였기 때문에 작은 어려움으로 넘어질 수도 있었습니다. 당시에 교회에 들어와서 믿음을 흔드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습니다(살전 3:5). 바울은 이제 편지로마나 데살로니가 신자들을 격려하고 싶었습니다. 살전 3:13절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공동번역으로 읽겠습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의 마음이 굳건해져서, 우리 주 예수께서 당신의 모든 성도들과 함께 다시 오시는 날 우리 아버지 하느님 앞에 거룩하고 흠 없는 사람으로 나설 수 있게 되기를 빕니다.

 

어린 자식에게 젖을 떼고 노심초사하는 어머니의 심정으로(살전 2:9) 읽혀지는 대목입니다. 거룩하고 흠 없는 사람이 된다는 것은 간단한 게 아닙니다. 신앙적으로 오랫동안 단련이 된 사람들에게도 어려운 일인데, 신생교회에 불과한 데살로니가교회 신자들에게는 거리가 먼 이야기처럼 들립니다. 거룩하고 흠이 없다는 것은 일단 높은 수준의 도덕성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도덕성은 유대교에서도 강조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기독교만의 가르침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바울은 갈라디아 지역의 교회에 보낸 편지에도 이와 비슷한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소위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가 그것입니다(갈 5:22,23). 사랑, 희락, 화평, 오래 참음, 자비 등등입니다. 여기에 언급된 것들은 당시 세네카 같은 로마 선생들의 가르침과 대부분이 중복됩니다. 바울이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를 언급한 이유는 그것 자체가 아니라 ‘율법이냐, 복음이냐’ 하는 투쟁 가운데서 복음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의 ‘거룩하고 흠이 없는 사람’이라는 표현도 이와 같은 상황을 전제하고 읽어야합니다.

 

그 본문을 잘 살펴보십시오. 바울은 본문에서 ‘거룩하고 흠 없는 사람’이라는 표현을 전후맥락 없이 한 게 아닙니다. ‘우리 주 예수께서 강림하실 때’라는 말이 여기서 중요합니다. ‘예수 재림‘을 가리킵니다. 바울 신학의 중심이 여기에 있습니다. 살전 2:19절에서도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의 소망이나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이 무엇이냐 그가 강림하실 때 우리 주 예수 앞에 너희가 아니냐.’ 살전 4:13-18절에서는 예수 재림을 좀더 자세하게 언급했습니다. 5장도 재림의 ‘때와 시기’에 대해서 많은 말을 합니다. 이렇게 놓고 본다면 데살로니가전서는 전체적으로 예수의 재림에 대한 호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재림 신앙이 기독교의 중심이며, 이런 신앙이 있어야만 글라우디오 칙령과 유대교의 박해 앞에서, 그리고 유형무형의 여러 가지 어려움 가운데서 이제 새싹처럼 막 시작하는 어린 교회에 속한 기독교인들이 버텨낼 수 있다고 바울은 생각한 것입니다.

 

대림절 영성

오늘은 대림절 첫째 주일입니다. 세계 모든 기독교는 성탄절 전 네 주간의 주일을 대림절로 지킵니다. 대림절이 교회력의 시작입니다. 그 뒤로 성탄절, 주현절, 사순절, 부활절, 성령강림절, 그리고 창조절로 이어집니다. 세계 교회가 대림절을 교회 절기의 시작이라고 생각한 이유는 바울의 생각과 마찬가지로 예수의 재림이 기독교 신앙의 초석이라고 여겼다는 데에 있습니다. 그런데 많은 기독교인들이 이런 기독교 전통을 실감하지 못하면서 신앙생활을 합니다. 예수님의 초림과 재림을 단순히 기억하는 절기, 또는 성탄절을 준비하는 절기 정도로만 생각합니다. 어떤 교회에서는 대림절이라는 말도 꺼내지 않습니다. 신앙적으로 건강하지 못하다는 증거입니다.

 

좀더 솔직하게, 노골적으로 질문해봅시다. 여러분은 예수님이 실제로 재림하신다고, 즉 다시 오신다고 믿으시나요, 아닌가요?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가요? 진지하게 생각해보지 않은 분들이 더 많을 겁니다. 예수 재림이라는 말을 들으면 하늘, 구름, 휴거, 흰옷 입은 예수 모습이 생각날 겁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연상하고 있는 재림 때의 모습은 행 1:6-11절에 나옵니다. 부활의 예수님은 제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서 구름에 싸여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그 순간에 천사들이 나타나서 예수님이 이런 모습 그대로 다시 오신다고 말했습니다. 살전 4:13절 이하의 설명은 다음과 같습니다. 마지막 때 하늘에서 큰 소리가 울리고 나팔소리도 납니다. 하늘에서 주께서 강림하시고, 죽은 자들도 살아나고, 그 순간 살아있던 자는 구름에 싸여 공중으로 올라갑니다. 이를 휴거라고 합니다. 만화 같은 설명입니다. 예수 재림 때에 실제로 이런 일들이 일어날까요? 아닐까요?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런 묘사는 묵시문학의 전형입니다. 극단적인 상징을 통해서 진리를 전하는 글쓰기 방식이라서 오해의 소지가 많습니다.

 

오해를 피하기 위해서는 신학적으로 정리된 텍스트를 읽는 게 좋습니다. 그런 텍스트가 사도신경입니다. 사도신경은 그 대목을 이렇게 진술했습니다. ‘거기로부터 살아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려 오십니다.’ 사도신경에는 구름이나 나팔소리나 공중부양 같은 말이 나오지 않습니다. 예수 재림 자체라기보다는 재림의 목표가 더 중요하게 다루어졌습니다. 세상 심판이 그 목표입니다. 정확하게는 ‘살아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신다고 했는데, 이는 심판 대상이 역사 전체라는 뜻입니다. 심판이라는 단어에도 오해의 소지가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염라대왕이나 그와 비슷한 존재를 상상합니다. 구더기, 유황불, 타는 목마름 등이 연상됩니다. 이런 상상을 이용해서 신자에게 겁을 주는 목사들도 없지 않습니다. 믿음 생활 똑바로 하지 않으면 지옥에 들어간다는 식입니다. 협박하는 겁니다. 생각이 어린 사람들이나 심리적으로 병든 사람들만 이런 협박에 넘어갑니다. 정신이 온전하거나 정상적으로 세상과 삶을 생각할 줄 사람들은 이런 협박, 또는 공갈에 넘어가지 않습니다.

 

심판은 생명의 완성을 가리킵니다. 인간 존재, 인간 실존, 인간다움을 완성한다는 뜻입니다. 지금 우리의 인간 존재, 또는 인간 실존은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마음 하나 제대로 다스리지 못합니다. 원하는 것은 행하지 않고 원하지 않는 것을 반복적으로 행합니다. 바울도 자기 안에 다른 자기가 있어서 실존을 버텨내기 힘들다고 고백한 적이 있을 정도니 보통 사람들인 우리야 오죽하겠습니까. 사람관계도 바람직하게 이끌어가지 못합니다. 작은 일에 섭섭해 하고, 교만해합니다. 인격적으로 괜찮게 훈련이 된 사람들도 정도의 차이만 있지 실제로는 거기서 거기입니다. 아무리 많은 것을 소유하고, 아무리 높은 사회적 지위에 올라서도 영혼이 평화로운 게 아닙니다. 예수님이 비유로 말씀하셨듯이(마 13:24-30) 우리는 알곡과 가라지가 함께 자라는 밭과 같습니다. 심판은 인간의 존엄과 품위와 인간다움이 완성된다는 뜻입니다. 그 순간이 기다려지지 않습니까? 그것 말고 여러분이 원하고 기다리는 것이 무엇인가요? 그런 간절한 기다림이 바로 대림절 신앙입니다.

 

오늘의 세상은 이런 대림절 신앙과 반대로 갑니다. 인간성의 완성과는 반대의 길입니다. 모두 인정하듯이 돈이 절대적인 자리에 올라섰습니다. 이런 문제는 제가 여러 번 말씀드렸기 때문에, 그리고 여러분이 다 알고 있기 때문에 길게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돈으로 인간다움이 완성되지 않는데도 모두 거기에 매달리고 있습니다. 세상이 다 구조적으로 그렇게 돌아가고 있어서 개인이 이런 흐름을 거스르기가 어렵습니다. 상황이 녹록치 않습니다. 그래도 우리 삶에서 궁극적으로 무엇이 옳은지는 분명하게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선택의 기회가 주어졌을 때 바른 것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시대정신에 대항하면서 하나님께서 이루실 인간다움의 완성을, 즉 예수 재림을 꿈꾸었던 초기 기독교인들의 후예들입니다. 그런 꿈이 없으면 굳이 기독교인으로 살 필요는 없습니다.

 

생명 완성과 예수 재림

인간다움의 완성이 왜 예수 재림과 연결되는 걸까요? 이 세상을 개혁하고 이웃을 위해 박애주의 정신으로 살아가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냐, 하는 반론입니다. 교회 밖의 휴머니스트들은 대다수가 그렇게 생각할 겁니다. 이 대목이 바로 세상의 휴머니스트들이나 타종교인들과 기독교인이 갈라지는 지점입니다. 두 가지 대답이 있습니다. 첫째, 우리 기독교인들은 생명 완성, 인간다움의 완성, 인간 실존의 완성이 스스로의 노력으로 가능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기껏해야 무늬를 바꾸는 것입니다. 겉으로 볼 때 그럴듯한 모양이지 중심의 변화는 가능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노력하면 존경받을 수 있는 사람이 되기는 하지만 그것으로 인간다움이 완성되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여러분은 다 아실 겁니다. 우리의 내면이 철저하게 분열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독교인들은 예수 재림을 통해서만 인간과 세상이 완성된다고 믿습니다. 둘째, 우리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이 인간다움의 완성을 이룬 분이라고 믿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를 신-인, 즉 참된 신이면 참된 인간이라고 고백합니다. 예수님은 인류 역사에서 유일하게 특별한 존재입니다. 이것을 아주 실질적으로 이해하셔야 합니다. 예수님에게 하나님이 자기를 나타내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이 창조한 세상을 심판할 권한을 손에 든 유일한 인간입니다. 더 정확하게는 인간이 되신 하나님이십니다. 기독교 신앙은 초기부터 지금까지 인간다움이 완성될 그 예수 재림의 때를 학수고대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언제 예수 재림이 일어날까요?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강림하실 때’라고만 말하지 구체적인 시점은 말하지 않습니다. 신약성경 다른 대목에서도 예수 재림의 시점을 명시적으로 밝힌 구절은 없습니다. 사이비 이단 교주들이 가끔 구체적인 시점을 말하긴 했지만 정통 기독교에서는 그걸 말하지 않습니다. 말할 수도 없습니다. 예수님도 그건 하나님의 권한에 속한 것이기 때문에 자기도 모른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초기 공동체는 예수 재림이 당대에 일어날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긴 했습니다. 그래서 사유재산도 포기하고, 노동도 하지 않고, 열광적인 행태의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재림이 지체되면서 신앙을 포기하는 사람도 나왔습니다. 이제는 아무도 재림의 때를 못 박아 말하지 않습니다. 아직까지 예수 재림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예수 재림은 영원히 없는 거 아닐까요? 예수 재림에 대한 신약성경의 주장은 예수님과 그의 말씀을 뭔가 착각해서 나온 게 아닐까요?

 

앞에서 인용한 사도신경의 그 구절을 다시 기억해보십시오. 예수님은 살아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신다는 게 재림 신앙의 핵심입니다. ‘온다.’는 말을 우리는 공간 이동으로 여깁니다. 오늘 우리가 집이라는 공간에서 교회라는 공간으로 이동한다는 뜻입니다. 아버지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심판하러 오신다고 하니 예수님도 공간 이동을 하는 것으로 오해할 수 있습니다. 그건 아닙니다. 하나님의 우편을 우주의 한 공간으로 볼 수 없듯이 ‘온다.’는 것도 공간 이동으로 볼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외계인처럼 우주선을 타고 지구로 오신다고 생각할 수는 없는 거 아니겠습니까. 공간 이동이 아니라면 도대체 무엇일까요?

 

잘 생각하십시오. 예수 재림은 심판이며, 그것은 곧 생명 완성이라고, 즉 인간다움과 인간실존의 완성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곧 하나님 나라의 실현입니다. 그 하나님 나라는 이미 우리의 현재 삶에 비밀한 방식으로 시작되었다고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예수 재림 역시 우리의 삶에서 이미 일어난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비유적으로 말씀드리면, 죽음이 살아있는 우리의 삶에 이미 들어와 있다는 사실과 같습니다. 삶과 죽음은 하나의 사건입니다. 삶이 시작되면서 동시에 죽음도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인생이 허무하다는 게 아닙니다. 이 사실을 뚫어보는 사람은 오히려 죽음과 결합되어 있는 현재의 삶을 매 순간(Augenblick) 신비롭게 경험합니다. 이럴 때야말로 사람은 실제로 인간답게 실존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 재림이 비밀한 방식으로, 더 구체적으로는 예수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믿음을 통해서 이미 우리의 삶 안에서 일어났다는 사실을 아는 기독교인들은 현재의 삶을 매 순간 새롭게 경험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통한 해방과 자유와 평화가 바로 그것입니다. 2015년 대림절 첫 주일을 맞는 여러분은 지금 여기서의 삶을 어떻게 경험하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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