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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출20:3-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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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한태완 목사 |
참고 : |
우상 숭배를 하지 말라
본문: 출20:3 - 6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찌니라"(출20:3)
우상이란 무엇일까요? 성경에 이르기를 “우상은 은과 금이요 사람의 수공물이라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며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며 코가 있어도 맡지 못하며 손이 있어도 만지지 못하며 발이 있어도 걷지 못하며 목구멍으로 소리도 못하느니라 우상을 만드는 자와 그것을 의지하는 자가 다 그와 같으리로다”(시115:4-8)하였습니다. 그러나 우상은 이와 같이 사람이 만든 것이나, 자연물과 짐승에게 절하고 섬기는 것만이 아니라, “...탐심은 우상숭배니라”(골3:5)하신 말씀 그대로 하나님 외에 탐욕으로 더 사랑하고 숭배하는 대상이 있다면 그것이 곧 우상입니다. 만일 하나님보다 자녀를 더 사랑한다면 자녀도 우상이 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의 가장 귀한 애정을 빼앗거나 하나님 대신으로 생각하는 것이 있으면 곧 그것이 우상숭배입니다.
우리 마음속에 최고의 지위를 차지할 분은 오직 하나님이십니다. 우상에서 멀리하라 하심은 우상숭배만을 금하신 것이 아니라 일보 나아가 하나님만을 섬기라는 절대적인 명령입니다. 우리는 하나님만 경배하고 그만을 섬겨야 합니다.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이 없고, 만약 다른 신을 두고 섬기면 이는 두 주인을 섬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에는 자기의 아내, 자녀 혹은 지식, 돈, 명예, 권력, 사업을 우상으로 삼는 사람이 많습니다. 이 말은 아내나 그들을 너무 사랑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리고 아내나 그들을 사랑하지 말라는 말도 아닙니다. 아내나 그들의 지위를 잘못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는 말입니다. 즉 자기 아내나 그들을 하나님 보다 더 중하게 여겨서 하나님을 기쁘게 하기보다 아내나 그들을 더 기쁘게 하려고 애쓴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아내나 자식이나 부모나 사업을 첫째로 생각하고, 하나님을 둘째로 생각하는 사람은 곧 재물이나 아내나 가족을 우상으로 삼는 사람들입니다. 우상숭배자는 하나님께서 미워하시고 정죄함을 받습니다.(겔14:3-8)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 있으면 그것은 우상숭배입니다. 때로는 물질이, 가족이, 명예가 우상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사랑의 대상에 대한 우선순위가 분명해야 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2장 37절 이하에는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는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십계명은 선지자나 사도를 통해 쓰게 하신 다른 말씀과는 달리 하나님이 직접 쓰셨습니다. 십계명 중에 가장 먼저 주신 계명, 모든 계명의 기초와 토대가 되는 계명은 이것입니다.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너에게 두지 말지니라(신5:7)"
하나님만을 주님으로 섬기기로 한 우리에게 굳이 이 계명을 우리에게 주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교묘한 우상의 교활함 때문입니다. 우상은 정말 교활합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이미 우상을 버리고 깨뜨렸다고 생각하지만. 우상은 여전히 죽지 않았습니다.
열왕기서와 역대기를 보면, 하나님 마음에 합한 왕들이 우상을 제거하고 하나님 뜻대로 살려고 애쓰던 시절에도 공통적으로 간과한 부분이 있었습니다. 바로 "산당"입니다. 그들은 주상을 깨뜨리고, 바알과 아세라 상을 찍었지만, 산당을 없애지 않았습니다. 그 작은 산당이 우상으로 보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것이 우상의 교활함입니다. 우상으로 보이지 않도록 자신의 모습을 감추고 변장한 것입니다.
사이비 종교 혹은 그 교주를 떠받드는 사람들이 참으로 어리석다고 비웃겠지만 우리에게도 그런 요소가 있습니다. 다만 드러나지 않을 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요 우리를 만드신 분이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나를 만드시도록 온전히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정한 기준으로 그분을 숭배하고 있다면 그것은 믿음이 아니고 우상입니다. “하나님, 언제까지 이 일을 해놓으셔야 합니다. 하나님, 내가 원하는 것을 꼭 응답해주십시오.” 이렇게 하나님을 내 마음대로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아니라 우상인 것입니다.
하나님뿐만 아니라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가치관에 의지해서 만든 신앙, 내 기준으로 만든 교회, 내가 만든 모든 것이 다 우상입니다. 이름만 바뀌었을 뿐입니다. 하나님을 부르기 때문에 우상이 아니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같은 이름이라 하더라도 그 개념이 하나님이 주체가 아니고 내가 주체가 된다면 그것은 우상입니다.(빌2:21)
왜 기복 신앙이 등장합니까? 내 유익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하나님을 이용하기 때문입니다. 이 얼마나 비참한 일입니까? 그런데 죄 의식을 갖기는커녕 오히려 당연하게 생각합니다. 외양이 좋으면 다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 교회, 선교, 복음은 우리에게 선한 이미지로 다가오기 때문에 내용이 어떻든지 다 좋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렇지 않는 것은 이름만으로도 나쁘다고 판단합니다. 그러나 이름보다 그 속에 숨어 있는, 함축되어 있는 개념이 더 중요합니다. 그 개념을 내가 만들었고, 내가 중심이 되고, 그래서 내가 주체가 되면 그것은 모두 우상입니다. 이기심은 자기를 우상화하는 것입니다.
‘네가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리니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딤후3: 1, 2)
오늘날에도 여전히 많은 우상이 문화에 형태로 자신의 모습을 갖춥니다. 교육, 전통, 삶의 방식, 심지어 법의 모양으로까지 위장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눈에 그것이 우상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상의 교활함을 아시기에 이 계명을 주신 것입니다.
"나 외에는 다른 신을 두지 말라. 우상과 상관없는 삶을 살라!"
모든 사람은 누군가를 섬기고 있습니다. 만약 하나님을 섬기고 있지 않다면, 다른 무엇인가를 섬기고 있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섬기는 그 다른 무엇이 바로 성경이 말하는 우상들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섹스라는 우상, 술이라는 우상, 스타라는 우상, 게임이라는 우상, 돈이라는 우상, 마약이라는 우상, 개인 숭배의 우상, 과학 기술이라는 우상 등에 빠른 속도로 빠져들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역사는 '우상', '조각한 신상', '산당'에 대한 언급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죄악은 언제나 하나님을 떠나서 우상에게로 가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우리는 우상 숭배를 단지 다른 죄악들과 동급으로 분류될 수 있는 또 하나의 죄가 아니라, 모든 죄를 일컫는 특별한 방식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 까닭은 모든 죄가 우상 숭배, 즉 하나님의 자리에 다른 것을 가져다 놓는 기본적인 죄악의 한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상 숭배를 함으로써, 피조물에 하나님의 지위를 부여합니다. 하나님이 아닌 다른 무엇을 우리 문제의 중심이나 해답으로 삼을 때, 우리는 그것을 우상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니코틴이나 코카인 같은 마약은 단순히 책상에 놓여 있을 때는 무해합니다. 그것들이 손을 뻗어서 우리의 목을 죌 수는 없습니다. 사실상 마약이 행사하는 힘은, 우리가 자신을 마약에게 내어 줄 때 우리에게서 나오는 힘일 따름입니다. 우리가 손을 뻗어서 마약에 손을 대면, 그 마약이 우리를 완전히 장악할 때까지 점차 그 힘이 마약으로 이전됩니다. 이것이 우상 숭배의 구조입니다. 그 자체로는 아무 힘없는 어떤 것에 인간이 집착에 가까울 만큼 헌신할 때, 그것은 우리에 대한 지배력을 행사하기 시작합니다. 그리하여 신이 아닌 것들이 신처럼 행세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시는 죄는 우상 숭배입니다. 이스라엘 역사를 봐도 그들이 하나님을 떠나 우상 숭배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그들에게 벌을 내리셨습니다. 우상 숭배의 죄에 대해서 한 번도 그냥 간과한 적이 없으십니다. 그런데 이러한 우상 숭배는 그때 뿐 아니라, 지금까지도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인도의 4억 불교도들은 5mm 가량의 퇴색하여 지저분해진 송곳니 하나를 세상에서 가장 거룩한 성물(聖物)이라고 섬기고 있습니다. 그것은 주전 543년 석가모니의 화장터에서 얻은 것으로 800년 후 실론 섬으로 옮겨졌습니다. 지금 그 송곳니는 실론 칸디에 있는 이빨 성전의 황금 연꽃 위에 놓여져 있습니다. 해마다 각 국의 수십만 불교도들이 그 송곳니를 보기 위해 모여들고 있습니다. 그리고 황금, 은 등의 보석과 많은 예물을 그 성전에 바치고 있습니다. 이 얼마나 웃지 못할 모습입니까?
아무런 위로나 기쁨을 주지 못하는 변색해 버린 그 이빨이 수많은 불교도들에게 신처럼 떠받들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우상숭배의 죄는 하나님의 능력이 역사하는 것을 방해합니다.
후진국의 특성은 목소리가 크고, 부패지수가 높고, 우상숭배와 미신이 성하다고 합니다. 고려의 멸망도 불교의 미신화와 관계가 깊습니다. 요승 신돈이 공민왕의 이성을 마비시키고 고려의 조야를 온통 무당사상으로 병들게 했기 때문입니다.
제정러시아도 같습니다. 1905년 시베리아 출신 수도승인 라스푸틴이 제정러시아의 수도 페테르부르크에 나타나 요사스런 예언으로 사회를 혼미케 하고 급기야는 황제 니콜라이 2세와 황후 알렉산드라의 총애를 받아 내정과 외교정책을 좌지우지했습니다. 그는 1916년까지 무려 10년간 무당정치를 했습니다. 순금으로 지반과 기초를 만들고 그 위에 세운 집이 이 세상에 꼭 하나 있습니다. 인도의 [푸나와] 가까운 곳에 있는 [프랜드할]의 성문이 그것입니다. 1920년 이곳에 성문을 세우려고 한 페라르의 왕은 기술자들로부터 그곳은 땅이 물러 어떤 건물만 지어도 곧 가라앉을 것이라는 보고를 받았습니다. 왕은 궁리하다가 황금으로 지반을 단단히 만들고 그 위에 문을 세우기로 결심하고 10.5평방미터 깊이 3.6미터의 큰 구덩이 둘을 파고 3만7천5백 파운드 지금의 천5백75만 불 어치의 금덩이를 묻고 성문을 세웠습니다. 몇 해 전에 인도 [보이스카웃]의 일단이 이 금덩이를 파내려고 정부의 허가를 얻었으나 그 부근의 [마하레바] 사원의 승려들이 신을 모독하는 짓이라고 엄중하게 항의하여 허가가 취소되고 말았습니다. 오늘날까지 세계에서 제일 가는 낭비의 상징으로 남아있습니다. 만약에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준다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우리들은 허탄한 이야기를 멀리하여야 합니다. 우상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저희 우상은 은과 금이요 사람의 수공물이라'(시11:5:4)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우상을 만들지 말지니 목상이나 주상을 세우지 말며 너희 땅에 조각한 석상을 세우고 그에게 경배하지 말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임이니라'(레26:1)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는 우상을 만드는 사람으로 집에는 신상을 모시는 사당이 있었습니다. 어린 아브라함은 우상들 앞에 음식을 놓고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보려고 기다렸습니다. 몇 시간이 지났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자 아브라함은 도끼로 신상들을 부수고, 도끼를 제일 큰 우상의 손에 쥐어 주었습니다. 아버지는 신상들이 산산조각 난 것을 보고 어찌된 일이냐고 물었습니다. '제가 신들에게 음식을 좀 갖다 드렸더니 신들이 서로 먹겠다고 싸움을 벌였습니다. 그래서 제일 큰 신이 작은 신들을 다 죽였습니다.' '바보 같은 소리 하지 마라. 이것들은 보지도 못하고, 말도 못하며, 움직이지도 못한다.' '그렇다면 이것들은 신이 아니죠.'
아브라함은 마지막 우상마저 부숴 버렸습니다. 그 후 아브라함은 '누가 이 세상을 만들었을까'에 대해 생각하며 여기저기 돌아다녔습니다. 그는 달을 보고 '그분임이 틀림없어' 하며 달을 찬양했습니다. 그러나 몇 시간이 지나자 달이 지고 해가 떠올랐습니다. '이게 그분일 거야'라고 생각했지만 해도 사라졌습니다. 길을 가다 어느 집 앞에 흰 옷감들이 널려 있는 것을 보았는데, 돌아올 때 보니 그것이 여러 가지 색으로 물들여져 있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여기서는 아무도 안 보이지만, 틀림없이 집안에는 옷감을 물들이는 사람이 있을 거야. 마찬가지로 하늘에 누가 계시는지 보이진 않지만, 하늘의 색깔이 매일 변하는 것을 보니 하늘에 누군가 계시는 것이 분명해.' 그래서 아브라함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사람이 되었다고 합니다.
"너희도 알거니와 너희가 이방인으로 있을 때에 말 못하는 우상에게로 끄는 그대로 끌려갔느니라" (고전12:2)
현재 우리 사회의 우상과 미신이 전통문화라는 이름으로 극성을 부리면서 한탕주의와 사행심리의 사회적 질병을 만연시키고 있습니다. 전통문화와 미신, 전통예술과 우상을 구별해야 합니다. 특히 기독교 성결 윤리가 사회적 율례가 될 때 선진국이 될 것입니다. 기독교는 결코 비 진리와 타협하지 않습니다. 그것을 녹여낼 뿐입니다.
하나님은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오로지 하나님만이 경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이십니다. 그분만이 섬김을 받으셔야 할 분이십니다. 예배라는 말은 절 배(拜) 자를 써서 하나님 앞에 예를 갖추어 절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섬긴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신명기 5장7절에 '나 외에는 위하는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하였고, 시편 29:2에 '여호와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리며 거룩한 옷을 입고 여호와께 경배할지어다'하였습니다. 또 레위기 19장 4절에 '너희는 헛것을 위하지 말며 너희를 위하여 신상들을 부어만들지 말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 하였습니다.
인간은 본래 하나님에게 지음 받았을 때 영원히 하나님과 사귈 수 있고, 하나님과 어떤 약속이라도 맺을 수 있는 영적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스스로 하나님같이 되려고 선악과를 먹고 마침내 타락했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하나님과 영원히 끊겨진 원수가 되었지만 그리스도께서 피 흘리셔서 인간이 다시 하나님께 나가 그를 뵙고 그와 교제하고, 또 그와 약속을 가질 수 있는 귀한 복을 우리 영혼에 예수가 와 계시고 그의 이름이 우리 안에 있고 또 성령이 계시고 진리가 우리 안에 있습니다. 신앙생활은 영혼을 거룩하게 보존하는 생활입니다. 우리 영혼을 잘되게 하는 것이 바로 신앙생활입니다. 육체는 어느 날 숨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갑니다. 육체는 아주 연약한 것이고 시한적 존재입니다. 그러나 영혼은 영원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영혼을 축복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하나님만 섬기고 하나님께만 나감으로써 영혼을 거룩하게 해야 합니다. 그런데 사람의 영혼을 더럽게 하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우상 숭배입니다. 우상 숭배는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시는 것입니다. 우상이 뭡니까? 우상이라는 것은 신으로 섬기기 위하여 만든 형상입니다. 요즘도 우상 숭배자들은 섬기기 위한 형상을 만듭니다. 돌을 깎고 나무를 깎아서 형상을 만듭니다. 하나님은 그런 것들을 제일 싫어하십니다. 그것을 용서하지 않습니다. 우상 숭배는 영혼을 더럽히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는 제사라는 풍습이 있어 우상을 섬기는 일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조상이 생사 화복을 주장하고, 조상이 노여워하면 일이 안 된다며 조상을 섬깁니다. 그것은 완전한 우상 숭배입니다.
그리스도인들도 명절이나 부모가 돌아가신 날에 형제들과 모일 수 있습니다. 그때 그리스도인들은 '우리는 훌륭한 조상에게서 피를 받은 한 형제들이다. 우리 조상들이 우리를 낳아 주셨으니 우리는 서로 위하고 사랑하자'하며 조상이 이루어 놓은 업적을 서로 이야기하면서 그 훌륭한 점을 배우려 하고 조상이 이루어 놓으신 뜻을 잘 보존하자' 하며 좋은 교훈을 서로 나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조상을 섬기는 우상으로 만들어 버리면 안 됩니다. 저도 조상과 단절하고 조상을 원수같이 여기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그를 신으로 모셔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오로지 우리가 신으로 모셔야 할 분은 하나님 한 분밖에 없습니다. 그분에게만 경배하고, 그분만 섬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상 숭배자를 용서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질투하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섬긴다는 것은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며느리가 시부모님께 진지를 해 올리고 옷을 세탁하여 드린다고 해도 그것으로 며느리가 할 일을 다한 것이 아닙니다. 부모는 자식에게 사랑 받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진지를 해 들이고, 빨래를 해 들이는 것만이 아니라 그 모든 것을 사랑으로 해야 합니다. 그것처럼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하나님을 참으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상 숭배자는 우상을 사랑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질투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질투하신 결과로 자손 삼사 대까지 저주가 임한다고 했습니다. 저주가 아들, 손자, 증손자까지 갑니다.
어떤 조상이, 어떤 부모가 , 자기 자손이 자기보다 못하기를 바라겠습니까? 모두 자기 자손은 자기보다 났고, 자기보다 편안하게 살고, 자기보다 성공하기를 바라고, 훌륭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누구나 자기 자손 삼사 대를 마음에 품고 있습니다. 이렇게 마음에 자손 삼사 대를 가지고 있는데, 정말 성공하기를 바라는 자손 삼사 대가 몽땅 저주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어떤 가정이든지 하나님이 질투하시는 가정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 영혼은 오로지 예수님만 모셔야 하고, 진리만 모셔야 하고, 성령만 모셔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 영혼이 잘되고 거룩해야 합니다. 오로지 하나님만 사랑한다면 하나님은 그의 자손 천대를 사랑하여 복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삼사 대 이상을 생각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미쁘셔서 천대에 이르기까지 약속을 지키십니다.
이스라엘의 조상 아브라함은 3500년전 인물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은 350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유효하며,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그 약속을 이루고 계십니다. 이스라엘인은 어디를 가든지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물론 그들이 학살도 당하고, 여러 가지 고난도 많이 받았지만 마가복음10장29절 이하에도 복과 함께 핍박을 겸하여 받는다고 했습니다. 이스라엘이 수천 년 동안 고난을 받고 있지만 그들은 또한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 자손을 축복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천대에 이르는 축복을 주신다고 하신 것은 절대로 거짓말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을 실망시키면 삼사 대까지 저주받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기 영혼이 잘되기를 바라고, 자손의 영혼이 잘되기를 바라야 합니다. 성경에'주 예수를 믿어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고 했습니다. 주 예수를 믿으면 자신만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자기 집과 자기 자손도 다 구원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 예수를 믿어 우리와 우리 자손이 하나님에게 사랑 받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진정으로 우리의 영혼이 잘되게 해야 합니다.
영혼이 잘되면 영혼에 참기쁨이 있습니다. 진정한 기쁨이 나옵니다. 목사도 인간인지라 저도 화를 낼 때가 있고 속상할 때가 있습니다. 주님이 저를 만나 주신 그때의 그 기쁨이 계속 유지됩니다. 겉으로는 속이 상하고 화가 나지만 속에는 참으로 아무도 빼앗을 수 없는 참기쁨이 있습니다. 주님은 그의 기쁨을 우리에게 주어 우리에게 그의 기쁨이 항상 충만하기를 원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의 안에 있어 너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니라"(요15:10-11)
우리 속에 정말 예수의 기쁨이 있습니까? 참기쁨은 겉으로 웃지 않아도 자기 속에 있는, 아무도 뺏을 수 없는 진실한 것입니다. 우리 영혼에 이 기쁨이 있기를 원하여 주님은 자기 이름을 주시고, 성령을 주시고, 진리를 우리 속에 담아 주셨습니다. 우리 속에 이러한 기쁨이 있어 우리 영혼이 잘되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영혼의 기쁨을 파괴하고 저주하는 것이 우상 숭배입니다. 우상의 제물을 먹어도 죄 짓는 것이라고 했습니다(고전10장) 우상의 제물을 예수의 잔과 겸하여 섬긴 자는 예수의 피를 범하는 죄가 있다고 했습니다. 어찌 우상의 제단과 주님의 상을 겸하여 받을 수 있느냐고 했습니다. 그래서 형제에게 죄를 지어 약한 양심을 상하게 하는 것도 곧 그리스도에게 범죄한 것이 된다고 했습니다. 우상의 제물을 먹음으로 남들에게 담력을 주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어디 가서 음식 먹을 때'이것이 무슨 음식입니까?' 하고 물어 보지도 말라는 것입니다. 우상의 제물이라고 알고 먹으면 저주받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양심을 위하여 차라리 묻지 말고 먹든가, 물어서 알았을 때는 먹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난 믿음 있는 사람이니 귀신도 내게는 안 들어와' 하며 우상의 제물을 먹게 되면 그가 그리스도에게 범죄 하게 되지 않겠느냐, 너로 인해서 실족하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바울 선생도 '나로 인해서 우상으로 실족하는 자가 있다면 내 평생 고기를 먹지 않겠다' 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상으로 인해서 자기 영혼을 더럽히지 말아야 합니다.
인간이 최초로 타락한 것은 간음해서 타락한 것도 아니고, 도둑질해서 타락한 것도 아닙니다. 바로 최초의 타락은 인간이 섬김을 받는 하나님이 되려고 선악과를 먹었을 때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인간이 섬김을 받으시는 하나님처럼 되려고 했을 때, 인간 스스로 우상이 되려고 했을 때 타락이 시작된 것입니다. 지금도 믿노라 하면서 자기가 하나님 자리에서 군림해 있는 자가 많이 있습니다. 십의 일조는 에덴 동산에 선악과와 같은 것입니다. 다른 것은 다 먹되 중앙에 있는 선악과는 먹지 말라 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너의 소득 모두는 너희 임의대로 쓰고 먹되 십분의 일은 내 것이라고 하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십의 일조를 떼어먹는 자가 얼마나 많으며, 6일은 일하고 제7일은 안식일이라 하였건만 성수주일을 지키지 않는 사람이 얼마나 많으며, 불순종 자체가 자기가 하나님이 되려고 하는 것인데도 불구하고 불순종하는 자가 얼마나 많습니까? 이 모든 것이 우상 숭배요 자기 영혼을 더럽히는 것입니다.
구약의 다니엘서1장에 보면 다니엘이란 사람이 나옵니다. 그는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이스라엘 소년입니다. 그가 영리하니까 왕이 잘 길러서 써먹으려고 했습니다. 우상의 제물을 먹여 놓고, 그에게 우상 섬기는 법을 가르치면 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설득하여 하나님 섬기는 마음을 깨뜨릴 것이라고 기대했습니다. 그래서 왕은 자기가 먹는 제물을 그와 그의 친구들에게 주었습니다. 그 음식은 우상 앞에 차려 놓았던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왕이 먹는 최고의 음식을 받았지만 그 음식은 일단 우상 앞에 놓여졌던 음식이기 때문에 그 음식을 먹어 영혼을 더럽게 해서는 안 된다고 결심했습니다. 성경에 보면 '왕의 진미로 더럽히지 않기로 뜻을 정했다' 고 했습니다.(단1:8).
이와 같이 우리는 우리의 영혼을 보존하기 위해, 예수의 피로 사신 영혼을 보존하기 위해 우상의 제물을 먹지 말아야 하고 우상 앞에 절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상에게 절하면 영원히 저주받고 하나님의 질투를 삽니다. 우리가 사랑하고, 잘되기를 바라는 자손 삼사 대가 저주받습니다.
주 예수를 믿는 것은 나뿐이 아니라 내 집을 구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도 거룩하고, 가정도 거룩하고, 형제도 다 거룩해져야 합니다. 지금 이 시간 우리와 우리의 집을 거룩하게 해 달라고 한 평생 기도하는 성도가 되어 우리 자손들에게는 저주는 떠나고 천대에 이르는 축복이 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기도: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제 안에 있는 우상을 과감히 찍어 버릴 수 있는 믿음을 주소서.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만이 제 여호와가 되심을 고백하는 삶을 살게 하소서. 하나님께로 향한 행보를 가로막는 모든 삶의 우상들을 멸하여 주소서. 오직 주님만을 사랑하고 섬기며 믿음의 여정에서 한 걸음 더 앞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인도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한태완 목사
* 갈릴리 공동체 http://cafe.daum.net/Galileecommunity
(http://blog.naver.com/jesuskorea, http://blog.naver.com/allco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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