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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막6:45-5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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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경형 목사 |
참고 : | 궁극교회 주일예배 |
6장 45절-56절: 예수께서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사 자기가 무리를 보내는 동안에 배 타고 앞서 건너편 벳새다로 가게 하시고 무리를 작별하신 후에 기도하러 산으로 가시다 저물매 배는 바다 가운데 있고 예수는 홀로 뭍에 계시다가 바람이 거스리므로 제자들의 괴로이 노 젓는 것을 보시고 밤 사경 즈음에 바다 위로 걸어서 저희에게 오사 지나가려고 하시매 제자들이 그의 바다 위로 걸어오심을 보고 유령인가 하여 소리지르니 저희가 다 예수를 보고 놀람이라 이에 예수께서 곧 더불어 말씀하여 가라사대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 하시고 배에 올라 저희에게 가시니 바람이 그치는지라 제자들이 마음에 심히 놀라니 이는 저희가 그 떡 떼시던 일을 깨닫지 못하고 도리어 그 마음이 둔하여졌음이러라 건너가 게네사렛 땅에 이르러 대고 배에서 내리니 사람들이 곧 예수신 줄을 알고 그 온 지방으로 달려 돌아다니며 예수께서 어디 계시단 말을 듣는 대로 병든 자를 침상채로 메고 나아오니 아무 데나 예수께서 들어가시는 마을이나 도시나 촌에서 병자를 시장에 두고 예수의 옷 가에라도 손을 대게 하시기를 간구하니 손을 대는 자는 다 성함을 얻으니라.
제자들이 믿음은 약하지만 예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여 바다를 건너가고 있다. 그러나 순종은 됐지만 아직 영능의 실력은 없다. 그런데 순종하여 바다를 건너가는 그들에게 풍랑 파도가 일어난다.
그러면 예수님 당신이 건너가라고 명령을 해놓고 제자들이 죽을지 살지도 모른 채 그냥 내버려 두느냐? 그건 절대로 그렇지 않다.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바다를 건너가는 그들을 즉, 말씀에 순종해서 세상 나그네 생활로 가면서 환난과 고통과 핍박을 받는 그들을 예수님은 그냥 두시지 않았다. 환난 풍파가 일어나도 순종하여 가는 그들을 옆에서 지켜보시는구나.
그런데 우리들은 우리의 믿음실력을 키워주려고 환난 핍박을 주시는 주님의 그 의사성을 의식을 못하고 자기 인간계산 법으로 세상풍랑에게 자기의 마음을 주고 있더라. 다시 말하면 세상 환난 핍박이 올 때 그게 자기에게 오는 풍랑인데 그게 대부분 사람으로 통해서 오니까 그 밑으로 들어가면 자기 보호가 되는 줄을 알고 있다.
예수님께서 오병이어로의 기적을 베푸신 다음에 제자들을 풍랑이 치는 바다로 건너가게 하시고서 주님께서 바다 위로 걸어오심은 당신께서는 세상에서 가난한 사람에게 육신의 떡 먹을거리를 주러 온 것이 아니고 하늘의 떡을 만족하게 먹여서 죽음의 선을 넘어 그 나라에 들어갈 때까지 모든 크고 작은 사건 환경에서 넉넉히 이기라는 교훈을 하신 것이다.
그러니까 오병이어의 기적을 영의 눈으로 보면 예수님께서 무리에게 신령한 떡을 먹인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바다 위로 걸으심은 ‘나는 물속에 빠지는 땅의 운동을 하러 온 것이 아니고, 세상 운동 땅의 운동, 세상의 부자로 만들어 주는 그 운동을 하러 온 것이 아니라 세상 위로 걸어가는 자가 되라는 교훈이다.
자기에게 물질이 없어서 가난하다고 세상을 염려하고 있는 그 정신도 물질적인 개념이라. 그런데 주님은 그 정신 사상 그 소원 목적 위로 걸어간다 그 말이다. 그러니까 바다 위로 걸으심은 하늘의 운동을, 천국복음 운동을 하러 왔다는 뜻이다. ‘그러니 너희들도 신앙정신이 물질 아래 세상 아래로 빠지지 말고 세상 위로 물질 위로 하늘의 소원 목적의 정신을 가지고 살라’ 하는 뜻이 들어있다. 그런 이적의 떡을 알고 먹은 자는 세상이라는 정신 사상 소원 목적 속에 빠지지 않는다. 그 사람은 물 위로 걸어가는 성도라.
성경에 보면 베드로가 바다 위로 걸어가다가 빠졌다. 그러니까 예수님만 걸으심이 아니고 예수님을 믿고 순종하고 따르는 성도들도 물질 위의 사상으로 걸어갈 수 있다는 것이다.
타락의 정의는 인간은 ‘하나님--> 인간--> 물질’의 순서로 살아야 하는 건데, 그러니까 물질은 인간 발아래 밟고 물질 위로 걸어가는 것이 옳은 사람이다. 쉽게 말해서 땅 위로 걸어가야 만이 사람이다. 그런데 그게 아니라 땅 속으로 빠져들어서 소원 목적이 물질적 개념으로 들어가서 살면 이는 곧 지렁이가 된 거다. 사람은 땅 위에서 살아야 하는데 물질 속에 빠져 살고 있는 이게 바로 인간의 타락이다.
사람은 땅속에서 살면 병든다. 사람은 햇빛을 받고 살게 돼 있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지렁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땅 속에 사는 지렁이는 사람의 발에 밟히고 닭에게 쪼아 먹히고 두더지에게 잡아먹히게 된다. 영적 면으로 보면 인간이 세상 땅의 소원 목적을 가지고 살면 여러 가지 상황 속에서 네가 거기에 다 잡아먹힌다.
신앙이라고 할 때는 영적 정신적인 세계를 말하는 거다. 빠지고 밑으로 들어가는 것은 바로 사는 게 아니다. 그러면 네가 졸이 되고 노예가 되고 자유 없이 살다가 죽는 거다. 실력이 있으면 서게 되고, 없으면 아래로 깔린다. 이게 이치다.
우리는 하늘의 것을 가진 자인데 왜 땅 속으로 들어가겠느냐? 하늘을 뜻을 가지고 왜 땅에 맞추겠느냐? 그건 죽는 거다. 신앙정신 사상이 소원 목적이 이방 불신세상이 소원 목적하는 것처럼 빠지지 말고 세상 위 물질 위 하늘의 소원 목적의 정신을 가지고 살라는 게 본문의 교훈이다.
자기가 물질을 가졌으면 얼마나 갖고 살겠느냐? 죽을 때까지 가지고 있겠느냐? 젊은이가 ‘돈 돈’ 하면 그 사람의 정신은 썩은 거다. 그런 사람은 결혼을 해도 돈 가지고 따지게 되고, 사람을 봐도 돈으로 따지게 되고. 이건 못쓴다. 그 사람의 앞길은 불을 보듯 빤한 거다.
아가씨들은 남자가 물질에 등을 기대놓고 ‘내가 당신을 행복하게 해 줄께’ 하면 그만 빠진다. 이건 물귀신이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은 그런 데 빠져들면 안 된다. 그러나 그런 데 빠져 있으면서도 빠진 줄도 모르고 있는 교회들이 많다. 소원 목적이, 설교가 ‘세상부자’ 운운 하는 건 전부가 빠진 거다.
사람은 물질을 좌우지할 줄 알아야 한다. 그게 사람이다. 그게 인간의 권이다. 그런데 그러지 못하고 그 속으로 들어가서 그들의 명령을 받는다는 것은 벌써 목적관이 틀린 것이다.
‘남자만 오천 명’이라고 하는 것은 남자는 힘이 있으니까 이 땅에서 역사를 일으킬 수 있는 힘과 능력을 그만큼 가졌다는 뜻이다. 그만큼 파워가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창조의 주시요 바람과 파도를 다스리는 분이시다. 그 분이 세상 만물을 만드셨다. 성도의 믿음실력을 위해서 세상풍랑을 일으키시기도 하고 잔잔케도 하는 분이시다.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그런 분이시다.
우리는 사건 속에 살면서 그 사건 속에서 우리를 훈련 연단을 시키는 그 분과 인격적 의사적으로 결합이 돼야 한다. 사건을 앞세우고 오시는 그 분과 인격적 결합을 해야 한다. 즉 예수님이 그 배에 올랐으니 그 분이 배에 오르면 훈련을 시키는 그 분과 인격적 결합이 돼야 한다.
배를 다른 말로 하면 교회라 할 수 있으니 그 안의 제자들은 성도를 의미한다. 그런데 교회는 여러 가지 환난 역경과 크고 작은 사건 환경의 고통이 뒤따른다. 그럴 때 이 제자들처럼 ‘나 죽는다. 물귀신이 나 잡아먹으러 왔다’ 하고 놀라지 말고 그 배후에 있는 그 분을 빨리 알아볼 줄 알아야 한다. 그게 중요한다. 그런데 대부분 보면 눈에 보이는 그 면에 다 빠지고 무서워한다.
아닌 말로 진리이치의 사람이 되려고 말씀에 순종하며 말씀을 붙잡고 나갈 때는 주님이 자기를 붙잡고 어떻게 역사하시는가를 자기의 대적자와 자기를 호응하는 자를 비교해서 봐라. 그러면 그 속에서 주님의 역사하심을 볼 수 있다.
예수 믿으면서 자기의 물질적 세상살이의 소원 목적을 도와달라는 것은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과 같다. ‘먼저 그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 하는 약속이 되어 있는데 그걸 안 믿는다. 사건 환경 속에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구원의 주님과 인격적 결합이 안 되면 그 모든 사건이 자기를 잡아먹으러 오는 유령처럼 보이는 것이다.
53절-56절: ‘건너가서.’ 제자들이 바다로 건너갈 때에 우리는 사건을 봤다. 그리고 주님이 어떻게 하는 것도 봤다. 그런 것처럼 오늘날 자기도 이 세상이라는 고해스러운 바다를 지나가는 건데, 이 세상을 가는 동안에 자기에게 향하신 주님의 마음이 거기에 들어있는 거다. 하지만 믿음이 없고 주님의 그 마음을 모르면 세상에 절여서 세상 식으로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러다가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그 다음 장면이 어떤 장면이 나올까? 그 자기를 두고 생각을 해봐라. 성경은 현재다. 자기가 지금 고해를 지나가는 바다에 살고 있는 거다. 바다를 건너가는 나그네다. 생명의 말씀, 진리이치의 말씀, 신적 도덕성의 말씀을 안 들으면 어떨 참이냐? 말씀을 자기 자체화 실상화로 안 시키면 어쩌겠다는 거냐? 불을 보듯 빤한 거다.
바다를 건너가서 어떤 장면을 보여주느냐? 각종 병자를 고치시는데, 여기서 생각할 것은 예수님께서 그 때 하신 그것을 보고 농촌 벽지나 섬에 들어가서 돈 없고 문화혜택을 못 받는 자들에게 무료로 의료사업을 하라고 한 것으로 보기가 쉽다. 성경을 그렇게 보는 자들이 많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을 그렇게 안 봐도 인간이라면 응당 그렇게 해야 하는 것이다. 이웃집에 어려운 사람이 있다면 인간으로서 그냥 두면 안 되는 일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께서 인간을 왜 만들어 놨느냐? 당신의 온전의 구원을 위해 만들어 놓은 것이다. 그 점을 생각하며 그런 일들을 해야 한다.
그런데 그런 위주로 믿는 사람들이 쉬운 예를 들면 늙은 노인들에게 매 끼니를 해 줄 때는 끼니를 받아먹는 사람이나 그것을 보는 사람들이 ‘좋은 일 한다. 착한 일 한다’고 하지만 그 일을 안 해 주면 변질됐다고 하며 싫은 소리를 하게 돼 있다. 물질적 개념으로 들어가 있으면 그 소리는 필연적으로 나오게 돼 있는 거다.
예수님께서 그런 일을 하는 분이냐? 세상에는 무료로 치료해 주는 병원이 없어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그런 의료사업을 하신 것이냐?
예수님과 제자들이 게네사렛 땅에 닿아 육지에 내렸다. 게네사렛이란 ‘풍요로운 동산’이라는 뜻이다. 땅에 닿아 육지에 내리니 사람들이 금방 예수님을 알아봤다.
그러면 어떻게 무리들이 알고 왔을까? 1. ‘육신의 병을 고쳐주고 육신을 배부르게 먹이시는 분이시다’ 하고 알고 왔을까? 즉 ‘세상 소원 목적을 들어주는 분이시다’ 하고 알고 왔을까? 2. 아니면 ‘하나님의 성품으로 사람을 온전케 하는 분이시다’ 하고 알고 왔을까?
오늘날 각 교회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왜 믿으려고 교회로 찾아왔을까? 그 의미와 뜻이 있다. 그런 면에서 자기 마음도 이 성경에 비춰봐라. 그리고 자기 마음을 고쳐야 한다.
예수님께서 육지에 내리자마자 예수님의 소문이 온 지방으로 퍼져나갔다. 예수님께서 어디 계시다는 말을 듣는 대로 병든 자를 침상에 누인 채로 그대로 메고 예수님께로 나온다. 씻고 닦고 그려 붙이고 매달고 할 사이가 없다. 예수님은 그런 거 안 보신다. 솔직한 그대로를 보신다.
혹시 병원에 갈 때 찍어 붙이고 그려 붙이고 잔뜩 칠하고 가지 말라. 의사는, 특히 한의사는 사람 얼굴을 보고 병을 알기도 한다. 그러니 그렇게 하고 가는 건 의사로 자기 병을 못 알아보게 하는 것이다.
병자가 누워있는 채로 그대로 메고 나온다. 솔직한 그대로 보신다. 언제 꾸물거릴 새가 없다. 이게 무슨 말이냐? ‘예수님이 오셨다. 진리이치가 왔다. 구원이 왔다’ 했을 때는 자기가 구원을 얻을 일에 있어서 분초찰나 시간을 다투는 것이 천국복음의 역사다. 그럼에도 ‘오늘 못 갔으니 다음 주에 가면 되지’ 한다면 천국복음의 역사가 순간순간 너에게 되는 걸 네가 모르는구나. 자기 구원의 일에 시간을 연장시키는 것은(게으름을 피우면) 마귀의 시험에 빠진 사람이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들어가시는 아무 마을이나 도시나 촌에서나 병든 자를 사람이 많이 다니는 시장에 두고 예수님께서 오시리라고 믿고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을 생각을 해봐라. 사람이 있든 없던 부끄러울 게 뭐가 있느냐 그 말이다. 예수님께서 가시는 길에 구원을 얻어야 할 판인데, 고쳐져야 할 판인데 뭘 사람의 얼굴을 보고 이런 저런 거 따지면 네가 언제 고쳐지겠느냐? 육신의 병을 고치러 병원에 가면 의사의 지시대로 해야 한다. 약도 먹으라는 시간이 있다. 잠자는 것도 음식 먹는 것도 자기의 육신의 구원이 들어있다. 하물며 영의 구원의 일이랴.
도시병자 시골병자 지역을 따질 것 없고, 학벌 따지고 신분 따지고 남녀 따지고, 키가 크고 작고 그거 따질 것 없고, 예쁘게 생겼고 미웁게 생겼고 그거 따질 것 없고 누구든지 예수님의 옷 가라도 만지면 낫겠다는 간절성의 마음을 가진 자는 다 나음을 받더라.
그러면 네가 이 성경을 보면서 ‘나도 구원을 얻을 수 있겠다’ 하는 간절성이 있었느냐? ‘이 면은 내가 고쳐야 하겠는데, 그 분과 연결되고 접촉되고 결합이 되면 내가 고쳐지겠다’ 한다면 성령님의 역사는 그 사람에게 들어간다.
병자의 간절한 마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님의 소원과 단일이 되니 다 나음을 얻더라. 주님 앞에 나가면서 회칠한 것처럼 병든 자기를 회칠해서 숨기지 말라. 자기 마음을 하나님 앞에 숨기지 말라. 솔직히 털어 놓아라.
자기에게는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날 때부터 하나님의 것을 가지고 나온 것도 없고, 속성도 지혜지식성도 하나님의 것을 가진 것이 없다. 예수를 믿는 사람도 살아오면서 이룰구원 면에서 예수님의 것이 하나도 없는 사람도 있다. 이건 신적 인격적인 면에서 믿음이 없는 것이다. 다른 교회에서는 몰라도 되겠지만 우리교회에서는 이걸 모르면 안 된다. 성장하고 자라고 주님처럼 돼가는 것이 얼마나 좋으냐? 세상이 만물이 그런 사람을 기다리고 있다.
자기에게 병이 없다고 자만하는 사람은 예수님과 상관이 없다. 정신적 마음적 소원 목적적 취미적 추구적으로 하나님 앞에 왜 병이 없겠느냐? 자기가 다 옳으냐?
육신의 건강을 자랑해 봐라. 하나님께서 한 번 건드리면 이제 그는 힘든 거다. 육신의 건강을 자만하지 말라. ‘하나님께서 보호해 주시고 건강을 지켜주시니’ 하는 그런 마음을 가져야 한다.
세상 모든 사람은 아무리 공부를 많이 했어도 다 선악과 따먹고 영은 죽어있고 저주받고 타락된 사람들이다. 그래서 우리교회에서는 ‘신앙’ 하면 ‘무엇이 생명과 먹고 나온 것이냐? 무엇이 선악과를 먹고 나온 것이냐?’ 하는 그것을 보는 거다. 그러니 먼저 지식전환을 시켜라. 지식전환이 안 되면 이 말을 못 알아듣는다.
지금 예수 믿는 사람은 영은 중생으로 살았으나 이성과 몸은 예수 믿기 전에 가졌던 악성과 풍습이나 습관이 그대로 많이 들어있다. 이제 예수 믿으면서 그걸 다 고쳐나가야 하는 건데, 예수 믿는 것은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 즉, 생명과를 먹어야 사는 거다. 생명이치 도덕이치 영적이치를 먹어야 하나님 앞에 잘못된 것, 정신사상적으로 소원 목적적으로 이해타산 평가적으로 잘못된 것이 하나하나 고쳐지는 거다.
예수를 믿는다고 해도 모든 사람은 영적 면에서도 미성장된 것이 많고, 성격 성질 면에서도 모가 나 있고 비뚤어져 있고 꺾어져 있고 휘어져 있고 부러져 있고, 영적 면에서나 육적 면에서 모두 이질적이고 병들어 있고 모자라져 있지 완벽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그런고로 우리는 우리를 구원하실 주님과 의사단일성으로 밀착할 마음을 가져야 한다. ‘옷 가에라도 닿으면’ 즉, 그 분과의 밀착성을 가져야 한다. 그래야 자기 속에서 성령님의 역사가 일어나는 거다.
모두 다 예수 믿는 효력을 보는데 왜 나는 못 보느냐? 왜 그럴까? 주님과의 의사단일성으로 밀착이 안 됐다는 것이다.
성경에 보면 각종 병자들이 ‘주님의 옷 가에라도 닿으면 낳겠다’ 하는 소원성이 있는데 오늘날 예수 믿는 자기는 어디에 닿으면 구원을 얻겠다고 하느냐? 젊은이들은 어디냐? 삼성? 어디, 현대? 그러면 평생 구원이 되느냐? 그게 타락이다. (계속)
김경형목사님이 교역자 신학생을 대상으로 20여년 동안 매 주 정례적으로 진행하는 신학 및 성경연구 모임을 통해 영원 전에 하나님의 의지세계에서 인간구원을 설정하게 된 원인과 동기와 목적을 깨닫고 하나님의 본질의 신앙으로 나가는 주의 종들이 누룩처럼 퍼져나가고 있습니다.
참석하실 분은 031-207-5159, 또는 010-8886-5159로 문의해 주세요.(평신도도 참석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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